나는 수도권 사립 M대학을 졸업한 후 L사 홍보부에 입사했다.
주업무라면 홍보용 기사를 작성해 각종 언론사에 돌리고, 회사 사보를 감수하는 일이었지만,
그 밖에도 커피 심부름이라든지, 사무용품 구매라든지 자잘한 일도 도맡았다.
출근시간은 일정했지만, 퇴근 시간은 불규칙해서 아직 대학생인 남자친구와는
주로 주말에 만나고 주중에는 집에 일찍 들어와 드라마를 보거나 쉬는 편이다.
남자친구와는 대학교 1학년때 소개팅에서 만나 사귄지 횟수로 6년째다.
큰 키에 쾌남형으로 한눈에 반해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즐거웠어요...다시 만날수 있을까요?>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내 남자, 정말 대단한 미남이다.
두 번째로 만나 본 영화가 차태원 주연의 코미디였다.
극장 불이 켜진 후, 옆에 있는 여자들이 수근거렸다.
<어머...차태원 아니야?.>
그 정도다.
단지 불만이라면, 내 남자, 지독하게 말이 없다는 점이다.
<뭐 먹을래?>라고 물으면 <아무거나> 한마디로 끝나고, <어제 뭐했어?>라고 물으면
늘 <기억안나>단답형이다. 같이 있어도 도무지 말이 없다. 커피샵에 가면 둘이
우두커니 앉아 커피만 마신다. 가끔 미안한지 <아침 뭐 먹었어?> 라고 묻는다. 내가
신나게 이야기하면 고개만 끄덕끄덕 거리다 한마디 툭 던지는게 다다.
<배불러?>
대단한 유머라고 생각한다. 실소가 나온다.
그래도 100일, 1000일 생일, 화이트데이, 뺴뺴로데이등 기념일은 기계처럼 지킨다.
문제라면 선물은 언제나 식품류다. 화이트데이 사탕, 빼빼로데이 뺴뺴로는 당연하다고치더라도
100일 기념으로 한우갈비세트, 1000일 기념 김수미 간장게장은 심했다.
하루종일 토라져 있으면 한마디 한다.
<기념도 되고 먹을 수도 있고 좋쟈나.>
헤어지겠다는 생각은 절대 없지만, 가끔 엄마의 잔소리에 흔들린다.
특히 엄마 친구딸인 수영이 이야기가 나오면 빈정이 상한다.
<수영이 남친은 이번에 행정고시 패스했다더라...운동선수도 아니고 남자가 체대 나와서
뭐해 먹고 살껀데?>
엄마는 남자라면 자고로 SKY중 하나를 나와야만 밥벌이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SKY 출신이나 의사 판사 검사가 아니면 남자가 아니라고 믿는게 엄마다.
그녀의 가장 최측근인 명문이라 할 수 없는 M대 나온 여자도 잘 먹고 사는데, 그런 논리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알고 싶다.
몇 일 전 출근 준비를 하는데 엄마가 방에 들어와 나를 붙잡아 앉히더니
<이번 토요일날 약속잡지마라>한다. <왜~~또~~>하며 화를 내자 엄마가 내 등짝을 때린다.
<야....일산 아줌마가 너 중매한데...S대 출신 비뇨기과 의사란다..키도 크데>
쓸데 없는 짓 좀 하지 말라며 엄마에게 눈을 흘기자 엄마가 문을 나서는 내 뒷통수에 대고
한마디한다.
<미친년...다 지 잘되라고 그런건지....에이구 내 팔자야>
그 주 주중에 남자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은근슬쩍 약을 올렸다.
<이번 주 토요일 만나기로 한거 취소해야겠어>
역시 남자친구는 말이 없다. 잘됐다. 오랬만에 야구장에나 가겠다는 심사다.
<나 선봐...종합병원 의사래 ㅋㅋ>라고 툭 뱉은 뒤 남자친구의 표정을 살핀다.
미동없이 남자친구가 한마디 한다.
<마음대로해라>
잡아주길 바랬는데 정말 화가 난다. 이 남자 나를 사랑하기나 하는건가 라는 의심도 든다.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그 선 볼래...근데 옷 뭐 입고 나가~! 옷 사줘., >
남자친구 말이 없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은행에서 명퇴를 당하신 후, 남자친구 아버지가 위로금과 퇴직금을
합쳐 시작한 사업이 성인 오락실이였는데, 집이 담보로 잡혀 가족 모두 오락실 한켠에서 3년간 생활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초등학교때는 말을 많이 하면 귓가에서 오락실의 전자음이 들렸다고 하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청력이 온전히 회복된 지금도 그떄의 관성 때문에 말수가 없다고 하는게 남자친구의 주장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별 수 없다.
뚜들은 빠지고 당사자들만 토요일 오후 2시에 모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촌 현대백화점에서 엄마 카드로 긁은 투피스를 차려 입고,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는데 내 쪽
으로 복덕방 아저씨가 나타났다. 키는 168 정도로 힐 신은 나보다 작았고 머리는 살짝 벗겨졌다.
배는 나오고, 나온 배위로 배바지가 얹어 있다.
<하하하 안녕하세요...김애란씨 맞으시죠?>
<네....>
갑자기 죽고 싶어졌다.
호텔 커피샵에 들어가 각자 주문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배나온 남자 의사가
떠들었다. 자기 연봉이 얼마고, 자기 수능 성적이 입학 당시 전국구 몇 등이고, 강남 토박이라는
둥 하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말 없는 남자와 사귀던 여자에게 말 많은 남자, 그것도 머리숱 없고
배나온 말 많은 남자는 고문이었다.
살짝 살짝 웃으며 다고곳이 앉아 있기가 고역이다. 재미있게 들어 주는 척 하며 가끔씩 미소도
지어 보이는데 남자가 질문아닌 질문한다.
<애란씨 여자도 요즘 벌어야 하는데 동의하시죠?> 질문인지 알고 입을 열라 하는데, 답도 자기가
한다. <전 여자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집에서 노는 여자들 한심해요...하하하하...애란씨는
그래도 대기업 다니시니까 안심이네요..>
뭐가 안심인지 마치 원한다면 죽는 셈치고 결혼이라도 해주겠다는 태도다.
그와 헤어진 후, 명동에 가서 핸드폰을 수리하고, 나시티를 하나 사입었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야구장이란다. 잘 안들린다고 나중에 통화하잔다.
부애가 나서 신발도 사고 화장품도 샀다.
대머리 남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즐거웠어요...>
답문을 쳤다.
<저도요>라고 칠려다가 그래도 착한 척 하고 싶은 마음이 끌어올라 <저도요 ^^>라고 찍어 보냈다.
그 날 밤, 일산 아줌마에게 전화가 왔다.
<애란아, 너 되게 마음에 들었나봐.....얘 좋겠다 이제 니네 집도 의사 사모 나오는구나...>
뭔가 내 인생이 오묘하게 돌아가는 느낌이다. 정육점으로 팔려가는 돼지같은 기분이랄까?
엄마가 좋아하길래 뭐라 한마디했더니 바로 날라온다.
<너도 정신차려 이 기지배야....남자 보는 눈더 없어서 쯧쯧...너 느의 아버지가 그 체대애랑
사귀고 있는거 알면 다리 몽둥이 뿔어진다.>
야구경기가 끝났는지 남자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은 삼성이 이겼어>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듯 싶다.
첫댓글 아무래도 헤어져야 겠다...윗글을 쓰는 사람은 틀림없이 역시 여자다.
^^ 참.. 씁쓸하다.
엘지 팬인데...
부애가 나서,,라는 부분에서 막 반갑고 친근해지는. 저희 엄마가 자주 애용하시는 말인데.
차승원도 아니고.. 차태현도 아니여..
ㅋㅋ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