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만보(漫步)
주말 밤사이 가을비가 내려 메마른 대지를 적셔준 십일월 중순이다. 우리 지역은 가뭄이 몹시 심해 비가 넉넉하게 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으나 이만큼이나마 와 준 비가 고마웠다. 텃밭의 가을 푸성귀는 이번에 내린 비 덕분으로 한층 싱그럽게 자라지 싶다. 나뿐만 아니라 텃밭 지기들이 그동안 둠벙의 물을 파 날라 주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당분간 물을 주는 수고는 들게 되었다.
십일월 둘째 월요일은 벗과 함께 근교 산자락으로 트레킹 일정이 잡힌 날이다. 창원대학 앞으로 나가 김해 삼계로 오가는 59번 버스를 탔다. 도청 앞을 지나 법원 근처에서 동행하기로 한 벗이 함께 타 창원터널로 향했다. 대방동과 남산터미널을 지날 무렵 차창 밖 거리는 단풍으로 물든 낙엽이 뒹굴었다. 불모산과 대암산 단풍은 절정이라 남녘 산자락에서도 만추의 서정이 물씬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창원터널을 통과해 장유 윗상점을 지난 대청계곡 들머리에서 내렸다. 장유사로 오르는 자동찻길과 별도로 개울 건너편으로 데크가 개설된 대청계곡 누리길로 들어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걸었다. 누리길은 엊그제 내린 비로 습기를 알맞게 머금어 먼지가 재워져 일지 않아 걷기 좋았다. 길바닥에 쌓인 낙엽은 카펫처럼 등산화에 폭신한 촉감으로 와 닿았다.
계곡의 낙엽 활엽수들은 단풍이 물들어 거의 떨어져 나목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위 틈새 세워진 정자에서 벗이 가져온 담금주를 비우면서 내가 챙겨간 따뜻한 약차까지 함께 들었다. 약차는 영지버섯과 헛개나무를 포함해 산행에서 마련한 건재들인데 올가을 딴 산수유 열매도 넣었다. 정자 쉼터에서 일어나 장유사로 향해 비탈진 길을 따라 오르다 단풍마를 발견했으나 캐지 않았다.
장유사로 가는 갈림길에서 용제봉이 흘러내린 넓은 산자락 산등선을 따라 뚫린 임도를 걸었다. 산림 당국에서는 숲의 유전자 보호종을 연구할 목적으로 군데군데 참나무 둥치에 검은 비닐을 감싸 놓아 눈길을 끌었다. 능동 약수터로 가는 갈림길 쉼터에서 아까 남긴 담금주와 약차를 마저 비우고 산마루를 넘어 북사면 내리막 비탈로 내려서니 맞은편에서 오는 중년 부부를 만났다.
한 달 전 나는 혼자서 용제봉 누리길을 걸은 바 있었는데 이번엔 동행한 벗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내 뒤를 따르면서 도토리를 줍던 아낙이 둘 있었더랬다. 길바닥에는 아직 남은 마른 도토리가 몇 개 보이기도 했다. 용제봉 누리길은 진례 산본마을에서 시작되어 산허리에서 장유사 코스와 평지마을로 가는 코스로 나뉘는데 후자가 훨씬 길어 간혹 산악자전거 동호인들도 볼 수 있었다.
광활한 용제봉 북사면 산기슭은 미끈하게 자란 낙엽송이 빽빽하게 우거져 경제림으로 가치가 있을 듯했다. 수십 년 전 심었을 묘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자라 전신주보다 더 높아 보였다. 낙엽송은 갈색으로 단풍이 물드는 침엽수라 겨울은 나목이 되었다가 이듬해 봄 바늘 같은 잎이 돋아 여름에는 무성해져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가 가을에 다시 단풍이 물들어 낙엽이 지길 반복했다.
누리길이 거의 끝나가는 산기슭에는 아주 넓은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그곳의 단감과 대봉감은 일손이 달려서인지 못다 수확한 감이 상당하게 남아 있었다. 올해는 감이 어디나 풍년이라 예년보다 가격이 많이 싸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다른 과일들도 작황이 좋은 듯했다. 보름 전 하루 일손을 거들어주러 간 고향의 큰형님 대봉감은 수확을 모두 마쳐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었지 싶다.
산본마을 앞은 남해고속도로와 철길이 신항만으로 가는 지선으로 나뉘어 교통망이 복잡했다. 우리는 신월마을로 가서 중화요리로 점심을 들려고 했는데 마침 휴무라 한식 뷔페로 찾아갔다. 맑은 술은 비치되지 않아 편의점에서 마련해 잔을 채워 반주로 삼았다. 안주로 삼은 가자미구이를 다른 손님보다 더 집어 와 주인이 눈치를 주는데도 맑은 술을 마저 비우려니 어쩔 도리 없었다. 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