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남침은 '개자식들의 마적단 습격 사건" 위대한 인간 트루먼 趙甲濟
위대한 인간 이승만 트루먼은 위대한 지도자이기 전에 위대한 인간이었다. 20세기 인류에 대한 최대 도전이었던 국제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손 잡았던 동지였으며, 기독교와 반공(反共)자유민주주의 신념을 공유한 불굴의 투사였지만 그 바탕은 소박하고 겸손한 인격체였다. 1875년에 출생한 이승만은 1884년에 태어난 해리 S. 트루먼보다 아홉 살이 많았지만 1950년 한국전으로 연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트루먼은 고졸이고 이승만은 박사 출신). 이승만은 ‘최초’와 인연이 많다. 대한민국과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최초의 박사, 최초의 일간신문(매일신문) 대표, 최초의 공산주의 비판자,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을 만난 최초의 한국인, 미 의회 최초 연설, 최초의 본격적 정치평론서("독립정신") 저자, 최초의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Japan Inside Out’) 등등. 그는 개화 운동가, 독립 운동가, 교육자, 건국 지도자, 전쟁 지도자, 근대화 혁명가, 시인(漢詩), 최고의 명필(名筆), 그리고 십자가를 진 한 어린 양이었다. 개화, 독립, 건국, 호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그가 거대한 90년의 생애(生涯)를 마감한 곳은 조국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6월25일 북한군 남침 보고를 받은 직후 존 J. 무초 미국대사를 불러 한 말 “남녀노소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다”는 국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총력전 선포였다. 李 대통령이 그해 7월19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전쟁은 남과 북의 싸움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당 對 한민족(韓民族) 전체의 대결’이라고 한 것이나, 김일성 세력을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이라 조롱하고, 유엔이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시민 정신으로 세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정의(定義)한 것은 남침을 세계사적 차원의 사상전쟁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The buck stops here” 트루먼 대통령 또한 한국전에 대한 관점이 이승만과 일치하였다. 미국 미주리 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으나 시력이 나빠 포기한 뒤론 대학을 다니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포병 대위로 싸웠다. 지방 판사로 뽑히는 등 지역정치의 바닥에서 출발, 상원의원이 된 뒤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군수(軍需) 사업의 효율성을 점검한 ‘트루먼 위원회’를 이끌어 명성을 얻었다. 194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4월 루스벨트 급서(急逝)로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트루먼은 솔직 담백한 성격 그대로 결정적 시기에 신속한 결단으로 전후(戰後) 세계질서를 만들어갔다. 그가 결정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타이밍은 한반도의 운명을 갈랐다. 일찍 투하했더라면 소련의 참전을 막아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고 늦게 떨어뜨렸다면 소련군은 부산까지 내려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1945년 12월 이승만은 전후(戰後) 세계 정치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공산당을 문명 파괴세력으로 규정, 결별을 선언하는데 트루먼 또한 공산주의를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본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 숭배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947년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 전략에 정면 대응을 선포한(트루먼 독트린) 그는 소련의 위협에 대비한 서유럽 부흥계획인 마셜 플랜, 베를린 봉쇄에 대한 대규모 공수작전, NATO 출범 등을 밀어붙이는데 이는 대소(對蘇) 봉쇄작전과 냉전(冷戰)의 시작이었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이 한국과 이스라엘 건국에 산파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트루먼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승(逆轉勝)으로 재선(再選)되었다(그의 부인조차 낙선을 예상했고 시카고 트리뷴은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트루먼이 낙선'했다는 기사를 찍어 희대의 오보를 했다). 이 선거는 한국인의 운명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명패 대신 놓아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남침에 대한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대응을 예고했다. 결단의 사나이 트루먼이 북한군 남침 그날 백악관의 주인으로 있도록 한 미국인들의 선택이 한국과 자유세계를 살렸다. "개자식들의 마적단 습격 사건" 트루먼 대통령은 6월25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전황(戰況) 보고를 받자 “딘,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합니다(Dean, we've got to stop thos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고 말하고 미군 파병을 결단한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연인원 약 180만 명의 군인들을 보내 약15만 명이 죽고 다쳤다. 이는 세계 최대 강국이 아무런 영토적 이해관계가 없는 작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자국(自國)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투입한,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나중에 국방장관 역임)는 회고록에서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이상(理想)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트루먼은 나중에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1950년 6월29일 기자회견에서 유엔군 기치하의 파병이 갖는 합법성과 정당성을 정확하게 규정했다. “한국은 유엔의 도움으로 세워졌습니다. 유엔 회원국들이 공인(公認)한 정부인데 마적단으로부터 불법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에 대한 마적단 습격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한국을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김일성 남침을 "개자식들의 마적단 습격사건"으로 부른 셈이다. 자존심이 강한 이승만 트루먼은 김일성을 스탈린의 꼭두각시로 생각하였으므로 '김일성'이란 말을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일성을 규탄해야 할 대목에선 스탈린을 비판했다. "나는 스탈린을 상대하지 너 같은 인간은 무시한다"는 경멸감이 느껴진다. 링컨도 남북전쟁 때 '전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고 '반란'이라고 했다. 이승만, 트루먼, 링컨, 레이건, 닉슨, 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념적이고 용어선택이 정확하다. 북한노동당 정권을 '마적단'이라고 부른 이로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납치되었다가 살아온 신상옥(申相玉) 감독이 있다. 1989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김정일이 주최한 파티에서 간부들이 남한 유행가도 부른다는데 어떤 분위기였습니까"라고 물었다. 신 감독은 "딱 마적단이에요.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 분탕질하는 마적단"이라 했었고 이게 가장 정확한 규정임을 뒤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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