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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4월 3일 주일 오후 예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제 5주일
성경낭독 : 시 126; 빌 3:4-14
본문 : 롬 1:16-17
제목 :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81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44편 1,7,8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62편 1-4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77편 5,6,8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제 5주일
12문 :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죗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
13문 :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14문 :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 참 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시나
동시에 참 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1989년에 개봉했던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세 번째 시리즈인 “최후의 성전”에 보면 마지막 장면에 예수님께서 성찬식 때 사용하셨던 성배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존스를 이용하여 함정을 모두 통과한 악당 도노반은 최후의 순간에 수많은 잔들 중 금으로 된 가장 화려한 잔을 골라 성수를 마셨고, 순식간에 노화되어 먼지가 되어 사라집니다. 반면 주인공 존스는 예수님께서 목수셨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거기 있던 모든 잔들 중 가장 허름하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투박한 잔을 골랐고, 그 잔으로 성수를 떠서 죽어가던 아버지를 살립니다.
성경에는 “안목의 정욕”(요일 2:16)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눈의 욕망’입니다. 우리 눈은 타락 이후에 ‘눈의 욕망’ 속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곧 진리를 관통하여 보지 못하고 욕망으로 일그러진 것만 보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하되, ‘그릇 선택’하는 때가 많습니다. 성배는 화려하고 찬란한 금으로 되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수많은 외식으로 치장되어야 하고, 성도가 모이는 공간인 예배당은 가장 크고 웅장한 규모로, 가장 비싸고 귀한 재료로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복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우리 육체의 ‘건너편에’ 있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에 지배당한 사람의 눈에 ‘좋은 것’으로 보인다면, 오히려 신자는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 저 너머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같다”(마 19:24)고 하셨는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쉽고 간명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부자 됨을 벗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천국에 들어간 부자”와 같은 책을 쓰고 읽어대며, ‘낙타’라는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바늘’이라는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어떻게든 예수님께서 하신 저 말씀이 “부자는 천국에 못 간다”가 안 되도록 할 방도를 연구합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육체, 우리 안목의 정욕의 ‘건너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5주일 말씀을 통해서 살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또 거기에 가서 닿으려면, 가장 먼저 이것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 우리의 정욕이 추구하는 것! 이 건너편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로마서 1장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교리문답 다섯 번째 주일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또 “그래서 복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에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이 내용들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복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의 1 :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교리문답 5주일을 만나면 필히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4주일까지가 교리문답의 1부 ‘비참’이었고, 5주일부터 2부인 ‘구속’ 파트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첫 질문이 두 가지 질문, 곧
1)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2)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인데, 이에 대한 첫 대답이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2문답 대답 부분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가 만족되기를원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 또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은, 저 대답 곧 “하나님은 자신의 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신다”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12문답의 답에서는 이 말 바로 다음에 “죗값을 치른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문맥에서만 읽으면 “하나님의 의가 만족된다”는 것은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읽힙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 5주일 전체 내용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지를 좀 더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오늘 로마서 1장 말씀을 살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이 보여주고 있는 양편
먼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위하여 로마서 1장 말씀에서 문맥, 또 전후의 내용을 한 번 살펴봅시다.
우리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유명한 말씀을 발견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1)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접할 때, 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만 마음이 팔려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생각도 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고 있으니, 이것을 잘 생각해 봅시다.
일단 17절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하나님의 의는 ‘복음’과 관련되었습니다. 복음이 어쨌거나 좋은 소식이니, 이 지점에서는 적어도 하나님의 의가 좋은 것과 관련된 것이라는 정도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16절과 함께 보면 더욱 그러한데, 16절에서는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의는 17절에 의하면 ‘복음’에 나타나는데, 16절에 의하면 이 복음은 ‘유대인도 헬라인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2)
하지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17절에만 마음을 뺏기지 말고 이어지는 말씀에까지 이 관점을 쭉 이어 가보도록 합시다.
17절에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라고 말했던 이 말씀은 18절에서 이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 18절 말씀을 필두로 하여 이 장의 끝까지는 한 맥락 안에서 쭉 이어집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처해 있는 형편, 그래서 어떤 종류의 악을 저지르는가? 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버려두셨고, 그 때문에 다시 인간들은 더 많은 악들을 저지르면서 살아간다......이것이 18절부터 시작되는 이후의 내용입니다. 사실 이 주제는 2장과 3장까지 쭉 닿아 있어서, 2장에서도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 있다”고 말하고 있고, 3장은 그 유명한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1)
에 가서 닿게 됩니다. 그러니까 16절과 17절에서 ‘복음’을 이야기한 로마서 본문은 곧바로 내달아서 ‘그렇지만 반대편에 있어서 하나님과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쭉 진전됩니다.
3)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의 이 구도를 두고 한 주석가가 정리한 내용이 여러분께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을 수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두 가지의 이유를 추가한다. 하나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의와 진노가 공존한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1장이 드러내고 있는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에는 한편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16절 말씀에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인데, 이것을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의”라고 했고, 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저 반대편에는 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인하여 심판과 저주에 빠진 무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란
하지만 여러분! 이 말씀은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의’라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의’라는 것은 ‘공평 정대함’이며,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것입니다. 곧 ‘받을 이에게 받을 것을 주는 것, 그러니까 상을 받을 행동을 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벌을 받을 행동을 한 이에게는 벌을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세상에서의 ‘의’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서가 “하나님의 의”를 사용하는 방식은 전혀 달라 보입니다.
18절 이하에 나타나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 대하여 진노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라는 관점에서 쉽게 이해되는데, 로마서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니까,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의라는 것이 ‘공평 정대하게 행하는 것’, 곧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것이라면, 언약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무시해버린 사람들에게 응당! 당연히! 주어져야만 할 것은 오직 ‘심판과 파멸’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말 의롭게 행동하시려면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응당한 형벌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옵션도 없으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2 : 하나님의 의의 세 가지 특성
자, 그러면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우리가 로마서 1장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떤 일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요?
문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원인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의’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의’를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 정대함’, ‘행한 대로 보응하는 것’, 그것을 단순하게 ‘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잠시 접어두도록 합시다.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해 보도록 합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 법정에서나, ‘정의 사회 구현’과 같은 구호들에서 배운 의의 개념을 옆에 잠깐 밀어 놓고, “하나님의 의란 언약적 관점이다”라고 두고 시작하는 것부터를 하자는 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 : 언약에의 신실
가장 근본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우리가 별반 생각 없이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여기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의’를 상고하고 있으니, 그 관점에서 한 번 이 말씀을 바라보십시오. 제가 조금 전에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통상 세상에서 사용하는 관점이 아닌 ‘성경의 관점’에서 보려면,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방식인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개념은 잠깐 옆에 밀어놓으라고 했는데, 세상의 의의 관점에서 말고, 성경이 “의롭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이 말씀을 통해 한 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렇죠......그것 뿐입니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옳게 행함’과 ‘그르게 행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은 하나님의 법에 옳게 행동했다, 그래서 그는 의로웠다”라고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의로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단지 규칙을 지킨다거나, 규정을 준수한다거나 하는 것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런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비슷한 다른 말씀도 한 번 보겠습니다. 말라기 3장 18절 말씀입니다.
말 3:18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이 말씀은 성경이 자주 사용하는 대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읽기에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앞부분에는 “의인과 악인”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때 “의인과 악인”이란 누굴까요? 말라기가 말하는 의인과 악인은 ‘선한 행실, 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는 기준에 따라 설명되고 있습니까? 대구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시면 “의인과 악인이며”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와 상응하고 있습니다. 즉 이 본문에서 “의인”이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해 중요하게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성경이 단순히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롭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씀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시간상 여기쯤에서 정리를 합시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어떤 특징을 간파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이 매우 만족스런 용어로 정리해 놓은 것을 인용하겠습니다.
“5주일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에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법적인 것으로만 좁혀서 생각하기보다는 ‘언약의 관계’ 안에서 이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의는 ‘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좀 더 넓혀서 말하면 의는 ‘언약에 충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아마 성도들께서는 쉽게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언약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충실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게 행동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과응보’, 곧 ‘얼마나 법에 맞게 행동하느냐’, ‘얼마나 전후 관계에 따라 합당하게 처우하느냐’가 제일 첫머리에 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만 이해하게 되면 반드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규준’이라기보다는 ‘관계’에서 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의’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개념보다 더 앞에 ‘언약 관계’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핵심 사안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세 가지 특성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 ‘언약 관계 안에서의 신실성’이라고 볼 때만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의의 속성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성경이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요점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정리는 제가 한 것은 아니고, 김헌수 목사님의 정리를 빌어왔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를 세 가지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첫째,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언약의 내용을 신실하게 잘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근간이요 기초입니다. ‘의’라는 것은 ‘언약 관계 안에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의롭다는 것은 이 언약 관계 안에 잘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명령들을 신실하게 지키고, 그것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의롭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파생되는 것은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두 번째 국면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첫째요 기본은 ‘언약을 잘 지키는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이것을 제대로 잘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형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의에 대한 합당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내용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의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 곧 우리가 세상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의를 이해하려고 하면 결코 이해할 수가 없고 벽에 부딪히게 되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바로 이 세 번째의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하셨을 때,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단지 그에 대하여 형벌만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다시 그 백성을 구원하시며, 그리하여 파괴되고 깨뜨려진 언약을 다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것까지를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아마도......세상 사람들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의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언약 관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언약 관계 안에서 신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언약 관계 안에 있을 때에는 복이 주어지고, 이 언약 관계 바깥으로 뛰쳐나가면 벌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은, 세상적 의, 곧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세상의 의의 관념에서 보아도 이것은 별반 세상의 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배울 때, 세상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바로 여기 셋째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은 언약이 비록 파괴되었어도! 그 ‘파괴된 언약을 다시 수복하시는데’ 이것까지를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성구
성경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원’과 연결시키는 말씀을 두 군데만 봅시다.
첫째는 시편 98편 2절 말씀입니다.
시 98:2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아마 성도들께서는 쉽게 이 말씀이 대구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채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과 “그 의”는 동의어입니다. “구원을 알게 하신다”와 “의를 나타내신다”는 대구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를 ‘구원’과 연결시켜 종종 이야기합니다. ‘의’라는 것을 단지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지’라고만 생각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이사야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 46: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시편 98편과 동일한 방식입니다. “나의 의를 가깝게 하다”와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않는다”는 대구입니다. 같은 말이죠.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같은 말일 때가 상당히 있습니다. 즉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라고 하는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하여 벌주시는 대신에 ‘구원’해 주시는 것!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의 3 :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잘 배우게 되셨습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가 세상이 말하는 통상의 의와는 매우 다른 지점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다시 로마서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제 다시 로마서 말씀을 보시면 전보다는 훨씬 더 이해가 잘 되실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그 앞의 16절은 이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앞서 배운 대로 이해하게 되면, 왜 유대인도, 헬라인도 구원하는 복음을 “하나님의 의”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단지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잘 하지 못해서 깨어져버렸다 할지라도, 그런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후속의 조처들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서는 ‘복음’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
그러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이 내용들에서, 그 하나님의 의는 단지 악을 행하면 악에 대한 심판으로만 보응하지 아니하고, 언약을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다시 언약을 수복하시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할 때, 거기에 이 모든 것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 또 이 모든 것의 주체가 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대답은 간명합니다.
이 의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교리문답이 5주일을 통해서 묻고 있는 주제는 그것입니다.
첫째, 12문답에서 교리문답은 묻습니다.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둘째, 13문답에서 교리문답은 묻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잘 아시는 대로 “불가능하다”입니다. 심지어 교리문답은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죄책을 증가시킨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한 죄책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죄책을 증가시킵니다.
그리고 셋째, 14문답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피조물로서는 가능합니까?” 역시 대답은 “불가능하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다른 피조물에게 전가시키기지 않으실 뿐 아니라, 혹 전가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죄책을 받을 수 있는 종류의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의가 자기 백성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게재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배운 전체 내용! 곧 ‘하나님의 의’를 ‘세상의 의’와 차별화시키는 것, 곧 실패한 인류를 향하여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그 핵심이라는 것이 바로 ‘거기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의 서론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정욕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해도 그 복음이 무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의’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에도 육체의 정욕을 따라 ‘내가 무언가 하나님 앞에 그럴듯한 것을 하는 것’을 ‘의’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어떤 신학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부활의 이편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자기의 피조물을 구속하지 않는 하나님, 불의가 멋대로 판을 치게 내버려두는 하나님, 인간에게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는 하나님, 이 세상과 인간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그러한 하나님은 견딜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가장 크게 감동되어 최고의 수식어를 동원하여 그것을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이라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자비, 곧 헤세드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메말라 보이는 ‘의’가 따스해 보이는 ‘자비’와 같은 말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는 의가 사랑이고, 자비가 의이며,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끝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꺼번에 있습니다.
신자는 누구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 13절은 신자의 바라볼 곳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개정: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신자는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인가요? 의가 진실로 언약 안에서 읽힌다면 그것은 ‘하나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의가 거한다”고 해서 딱딱한 규범과 준칙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속에 살고 있는 것’이야말로 ‘의가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세상 너머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고 소화하며, 소유하고 씹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