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은 거실. 하얀 하숙집의 거실은 나까지 포함해서 일곱명이나 드러누워도 텅텅 빌만큼,
무척이나 넓었다. 거의 운동장 수준이다.
넓은 거실에 걸맞게 길고 푹신한 소파. 디귿자형 소파를 일자로 쫙 펴서 설민이 빌려온 비디오를
시청하자니- 이거이거 얼굴이 화끈거려 더이상은 못봐주겠다.
"내가 형 이럴 줄 알았어."
회색 머리에 흰 피부, 다크가 인상적인 이하는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2층계단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재밌기만 한데, 왜."
"아니, 저 자식을 그냥!!"
소보로빵을 쩝쩝 뜯어먹으며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설민.
설리나씨는 그런 그의 모습에 분이 터졌는지 한대 패줄 기세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리나야, 니가 참어! 민이도 남자잖냐. 하하하! 좋아, 청춘이란!"
"어유, 씨. 너 한번만 더 그딴 거 빌려오면 우별이한테 니 비밀 낱낱이 까발려 줄꺼니까, 알아서 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듯한 설리나씨를 뜯어말리는 빙그레씨.
그러자 그녀는 우별이라는 이름을 들추기며 경고 비슷한 말을 하며 집밖으로 휑 하니 나가버렸다.
연이어 빙그레씨도 헬스장에 다시 가봐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왜 또 그 새끼 이름 들먹이는 거야. 기분 나쁘게."
혼자 열혈이 TV를 보던 설민은 먹던 소보로를 탁자 위에 툭 던져 놓고 정색을 하며,
아까 이하가 올라갔던 그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녀석이 올라가자마자 비디오를 꺼내는 아저씨.
"샐리야, 언니랑 저 방에서 놀자."
오드아이는 손에서 놓을 줄 모르는 여자인형을 샐리라고 부르며 1층 2번째 방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덕분에 거실엔 나와 착한 아저씨밖에 남지 않았다.
아까는 되게 시끌벅적하니 정신이 없더만, 지금 거실 공기는 휑하니 무겁기만 하다.
"미안해, 영지양. 우리 민이가 장난이 좀 심해서."
"아니예요, 괜찮아요."
"아참, 그러고보니 영지양 방을 안가르쳐줬네. 짐은 이것 뿐이지? 2층으로 올라가자."
아직 내 방을 구경못한 내 짐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2층으로 안내하는 아저씨.
갑자기 지금 생각난 건데, 아들딸이라면서 왜 각자 성이 다른 거지?
게다가 오드아이 말고는 다 아저씨라고 부르던데..
"친자식이 아니니깐."
"헉. 넌 언제 또 따라온거니."
2층으로 아저씨가 먼저 올라가고, 내가 아직 계단 중간에 올라서고 있을 때.
내 뒤에서 들리는 오드아이 목소리에 또 한번 놀랐다.
이 녀석. 내 생각을 정말 읽는 거야, 뭐야?
"...내가 읽고 싶어서 읽는 거 아냐. 그냥 들리는 거야. 그리고 보이는 거지."
"보여? 뭐가 보이는데?"
"니가 살아온 과거. 니가 살아갈 미래."
과거... 미래..? 그걸 어떻게 본다는 거야, 이 꼬마.
"나 꼬마아니고, 한순진이야. 그리고 너. 이 집에 오래 있지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만 괴로워져."
"그게 무슨 말-"
"영지야, 뭐하니? 어서 올라오렴."
"아, 네!....얼레?"
2층에서 어서 올라오라는 아저씨의 말과 함께 또다시 갑자기 사라진 오드아이.
별 이상한 애야. 이 집에 오래 있지 말라니. 뭐, 어차피 명문고등학교 졸업하면 볼 일도 없겠지만.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애써 숨긴 채 아저씨가 부르는 2층으로 총총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2층에서 맨먼저 보이는 방. 하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안을 보지 못했다.
그 맞은편에 있는 방은 문이 조금 열려있었는데, 맨 머저 보이는 심플한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노란머리를 보니 피어싱 놈, 설민이란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하나가 있었고,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착한 아저씨는 맨 끝방에 서 있었다.
아, 저기가 내 방인가보구나.
"우리 집엔 순진이 말고는 여자가 없어서 어떻게 꾸며야 할 지 몰라 온통 핑크로 꾸며봤는데-
마음에 안들면 지금이라도 당장 바꿔줄께."
"아, 아니예요! 너무 마음에 드는걸요."
아저씨 말대로 온통 핑크로 물들여진 맨 끝방.
폭신한 침대도, 창문가에 붙여진 책상도, 그 옆에 위치한 큰 옷장도, 아기자기한 화장대도-
하얀 벽지 말고는 전부 핑크였다.
평소 핑크색을 좋아하는 데다가, 이런 공주풍의 방을 갖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에
당연지사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었다.
"짐가방은 여기다 놔두마. 새볔부터 오느라 피곤할 텐데, 푹 쉬렴."
핑크침대 맡에 짐가방을 살며시 내려놓고 방에서 유유히 나가시는 착한 아저씨.
아저씨 말마따나 새볔같이 일어나 울산으로 오느라 지친 심신이 침대를 보자 아우성을 지른다.
나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굉장히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이불이었다.
"...............아침밥."
스르르 잠이 들려던 참에 별안간 꼬르륵 거리는 내 배를 움켜쥐었다.
그렇다. 난 아직 아침밥을 한 숟갈도 못먹었던 것이다.
배가 심히 더 고파진 나는 잠도 왔지만 일단 먹고 보자는 심산으로 부리나케 방에서 뛰쳐나왔다.
"야!"
"악!!"
너무 급히 뛰어오는 바람에 맞은편 방에서 나오던 피어싱과 쾅 부딫혀 버렸다.
그 바람에 나는 탄성의 힘을 입어 그대로 뒤로 퉁 튀어올라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이고, 머리야.. 아, 뭐야!"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고릴라. 니가 뛰니까 지진 일어난 줄 알았잖아."
"뭐, 뭐? 고릴라?!"
누구 때문에 이 꼬라지로 넘어졌는데 고작 하는 말이 고릴라? 지진? 이 자식이 정말!
나는 분에 겨워 쌕쌕 거렸지만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풋하고 비웃음을 날리며 1층으로 총총총
내려가는 얄미운 피어싱놈. 아, 설리나씨랑은 친형제랬지. 역시 피는 못속여, 저 밉상 브라더스!
"여기서 뭐해요?"
굳게 닫혀진 첫번째 방문이 열리더니 거기서 다크써클, 이하가 나왔다.
아, 저 방이 저 녀석 방이었구나.
"보면 모르니. 자빠져 있잖아."
"일으켜 드려요?"
"아니, 됐어. 괜찮아."
굉장히 고분고분한 말투의 차분한 음성으로 묻는 다크.
저녀석도 회색 머리랑 눈 밑 다크써클이 좀 나이 들어보이지, 꽤 곱상하게 생겼단 말야.
나는 일으켜 준다는 다크의 친절을 거부하고, 엉덩이를 탈탈 털며 발딱 일어섰다.
그러자 다크는 특유의 눈 웃음을 쳤다.
"누나 생각보다 귀엽네요."
-하고 1층으로 스르르 내려가 버리는 다크. 눈 웃음이 꽤 매혹적이었지만..
주체할 수 없는 저 눈 밑 검은 그림자는 어쩔 수가 없구나, 이하야.
두 남자가 1층으로 사라져 버린 뒤, 또다시 조용해진 2층을 울리는 꼬르륵 소리.
알았다, 알았어. 밥 먹으러 어여어여 내려가자구.
나는 점점 더 오그라드는 배를 부여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라. 다들 어디 간거야?"
1층으로 먼저 내려갔던 설민도, 이하도, 오드아이도, 착한 아저씨도. 아무도 없었다.
텅빈 하얀집. 이 넓디 넓은 집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에라이, 밥부터 먹자."
고개를 홱홱 가로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부엌도 굉장히 넓었다.
집안이 이렇게 넓어서야 다리 아파서 제대로 살 수나 있나- 라고 생각 될 정도였다.
일단 밥솥을 열어보았다. 6식구 답게 큰 밥솥. 하지만, 허무하게도 밥은 내가 먹기엔 모자란 양이었다.
뭐, 그만큼이 어딘가. 이 정도로 감지덕지 해야지.
나는 한숨을 푹 쉬곤 하얀 밥그릇에 흰 쌀밥을 싹싹 긁어 모조리 퍼담았다.
그리곤 냉장고를 열었는데.. 아니나 달라. 김치 한통밖에 없는 빈곤한 냉장고.
도대체 이 사람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반찬 없이 김치 하나로 모자란 밥 한공기를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이 집 김치.. 생각보다 맛있다.
"누나."
"왓, 깜짝이야. 너 어디갔다 온거야?"
"마당에요."
그러면서 슬쩍 내 앞에 의자를 빼 앉아버리는 다크.
그리곤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곤 날 뚫어져라 쳐다본다.
야야, 부담스러워 임마.
"마당엔 왜?"
"우리 샤샤 밥 주러요."
얜 또 뭐래. 샤샤라니.
"샤샤?"
"보통 '파리지옥' 이라고 불리는 식물인데, 되게 귀여워요."
헉.. 그거 혹시 파리가 앉으면 입을 앙 다물어버린다는 그 징그러운 풀 말하는 거니?
그런 식물에 이름까지 붙여주고 밥까지 먹여주는 너도 취향 한번 참 특이하구나.
"있잖아요, 누나."
"응, 왜?"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좋아하지 마세요."
뭐래 이 자식. 왠 김칫국 들이키는 소리야?
"나 좋아하면 누나만 괴로워요."
"..........저기. 있잖아 나는-"
"누나만 괴로울 뿐이니까 제발 날 사랑하지 말아요! 크흑."
"야, 야!"
저 아이. 분명하다. 자뻑증 환자가 분명해.
어제 밤에 도대체 어떤 멜로 영화를 봤길래, 저러는 건가.. 하고 나는 식탁을 박차고 2층으로 탁탁
뛰쳐가는 다크를 보며 끌끌 혀를 찼다.
제일 멀쩡하다고 생각한 저 아이마저 자뻑증 환자였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집안이다.
※
엄마의 잔소리를 와쟉와쟉 씹어먹으며, <- ;
2시간동안 꿋꿋이 썼습니다! 아, 뿌듯해요.
P.S. 목요일날 돌아오겠습니다. <-수요일날 연합고사 쳐요.
첫댓글 시험 잘보세용 꺄아 재미있어요
잼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