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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망은 순종의 한 발자국에서 시작된다
고난은 바벨론에서의 삶을 위해 다니엘을 준비시켰다. 하지만 그가 바벨론에서 번영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과 겸손, 지혜 덕분이었다. 이 세 가지 강력한 품성을 빼면 다니엘은 그저 희생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있었기에 그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놀라운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소망과 겸손과 지혜를 자세히 살펴보자. 소망, 겸손, 지혜는 과연 무엇인가? 이 세가지가 주변 사람들과 악에 대한 다니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어떻게 해야 이 세 가지를 기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탐구해 보자. 먼저 '소망'부터 살펴보자. 소망은 다니엘이 놀라운 확신과 용기를 품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 성경적 소망은 절대적인 확신이다
다니엘은 소망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니엘이 품었던 소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를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나같이 다니엘이 품었던 것과 전혀 다른 소망을 떠올린다. 그것은 사람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다. 내가 말을 잘못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다. 같은 단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예컨대, 강도가 '죽인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죽인다는 뜻이지만 좋은 물건을 보고 '죽인다'라고 말하는건 아주 멋지다는 뜻이다. 고등학생 자녀가 부모에게 친구들은 '모두' 파티에 간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친구가 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가 '모든' 친구가 파티에 가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말 그대로 모두를 의미한다. 또 언어는 시간에 따라서도 변한다. 지금까지도 변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마다 성경을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 물론 성경의 원문은 변하지 않지만, 원문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시간에 따라 변하는 미묘한 차이를 감안해서 새롭게 번역하지 않으면 성경을 본래 의도와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예를들어,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의 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13장을 옛 킹제임스 역본으로 읽으면 본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의미로 해석하게 된다. 이 장은 희생적인 사랑(charity)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언어의 역사를 모르는 독자가 킹제임스 성경을 읽으면 이 장을 남들을 사랑하라는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이 처음 출판된 1600년대의 세익스피어 영어에서는 'charity'가 남들을 먼저 챙기는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독자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하지만 수세기가 지난 지금 'charity'의 의미는 훨씬 더 좁아졌다. 지금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옷, 돈을 주는 자선만을 의미한다. '소망'이란 단어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 오늘날 소망은 다니엘이 품었던 성경적인 소망과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해 버렸다. 이제 소망은 주로 바람('멋진 휴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이나 긍정적인 사고('희망의 끈을 놓지마. 이겨 낼 수 있어')를 의미한다.
하지만 다니엘의 소망은 바람이나 긍정적인 사고와 상관없었다. 다니엘은 만사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바라지(wish) 않았다. 만사가 잘 풀릴것이라고 마음에 그리지(visualize) 않았다. 그는 (수학적 사실을 아는 것처럼) 만사가 잘 풀릴 것임을 '알았다(knew). 다니엘은 세상만사를 하나님이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성경적인 소망을 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인격과 주권을 신뢰하고 거기에 인생을 걸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의 눈으로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말한 "복스러운 소망"이 바로 이런 소망을 뜻한다. 이 소망은 복권 당첨을 기대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이 돌아오실 것임을 완전히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삶의 방식과 우선 순위, 도덕 기준을 바꾸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강하게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딛2:12-13 참조). 사도 베드로도 매우 비슷한 의미로 "소망"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사람들이 우리가 품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을 때 언제나 대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라고 말했는데, 그가 말한 소망은 예수님이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소망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의미한다(벧전3:15 참조).
: 그리스도와 동행할수록 점점 솟아나는 것
이런 소망은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행할수록 점점 자라난다. 이것은 성경을 공부하거나 신학을 배우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차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 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깊이 동행하면서 그분의 인격과 능력과 신실하심을 직접 경험할 때 솟아난다. 소망은 믿음의 한 발자국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그분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과감히 행동할 때, 그분의 역사가 나타난다(히11:6 참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면, 그분이 반드시 일을 이루어 주신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분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점점 커진다. 얼핏 하나님에 대한 다니엘의 확신은 처음부터 굳건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책이 첫 구절부터 세상만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선포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바벨론 군대에 포위된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공포와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절망의 분위기도 없다. 하나님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는 간단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단1:1-2). 하지만 다니엘서는 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니엘서는 인생 말년에 쓴 책이다. 다니엘서의 서두는 사건 당시에 기록한 일기의 발췌문이 아니다. 그것은 몇십 년 뒤에 다니엘이 완숙한 시각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쓴 글이다. 거대한 바벨론 군대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다니엘도 아마 두려움과 절망에 휩싸였을 것이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약탈할 때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해 보라. 다니엘도 사람이니 필시 그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청년 다니엘이 노인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순종의 행위가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다니엘의 확신은 점점 자라났다. 그래서 훗날 사자굴에 던져질 때(대부분의 주일학교에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이 당시의 다니엘은 건장한 청년이 아니었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굳게 믿을 만큼 영적으로 성숙해져 있었다. 자신이 죽을지 살을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악이 패하리라 확신했다.
: 순종을 시작하라
다니엘의 경우, 큰 소망으로 가는 여정은 단순한 순종 하나로 시작됐다. 그것은 어떤 결과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음식법을 지키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 결단으로 다니엘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처음 경험했다. 솔직히 다니엘이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많이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니엘은 영적으로 지독히 어두운 환경에서 자랐다. 제사장과 선지자와 백성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대로 멀어져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신 것도 이런 이유였다. 따라서 다니엘은 성경과 모세의 법을 많이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자신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성경을 백성에게 제대로 가르쳤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널리 알려진 구약의 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음식법이었다. 다니엘은 그법을 알았기에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 법에 순종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도착하자마자 왕을 섬기기 위한 3년간의 특별 훈련 대상으로 뽑혔다. 이것은 좋은 대접을 받고, 왕의 식탁에서 나온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음식이 모세의 음식법에서 완전히 금하는 음식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금단의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단, 기분 나쁘게 거절하는 대신 환관장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환관장이 곤란하다고 말하자 그들은 채소와 물만으로 이루어진 식단으로 열흘만 시험해 보라고 제안했다. 열흘 정도는 충분히 봐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이신 덕분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열흘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다시 역사하셨다. 열흘이 지난 뒤 다니엘과 세 친구의 건강 상태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좋아졌다. 덕분에 그들은 훈련받는 3년 내내 왕명과 상관없이 채소와 물만 먹고 살 수 있었다.(단1:8-16 참조).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육체의 건강만 주신 것이 아니라 지혜와 통찰력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3년의 교육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들의 수준에 근접한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 일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한 다니엘의 확신이 얼마나 강해졌을지 상상해 보라. 이 일을 겪으면서 다니엘의 소망은 전에없이 커졌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그 후로도 이와 비슷한 일을 수없이 경험했다. 덕분에 말년에 다니엘의 소망과 확신은 그 어떤 인생의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해서 알고 있었다. 우리의 소망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자란다.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우리의 소망이 자라난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성경적인 소망과 확신이 깊이 자리 잡는다. 좋은 소식은, 성경적인 소망이 천성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망은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모든 이의 권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믿음의 발걸음을 떼어 그 권리를 주장하는 것뿐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며 작은 믿음의 발걸음을 하나씩 떼기만 하면 된다. 모르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진 빛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실 뿐 아니라 더 많은 빛을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빛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빛을 더 주시고, 우리가 가진 빛을 무시하면 하나님이 빛을 덜 주신다(잠4:18 ; 롬1:18-32 참조). 우리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소망과 확신이 점점 자란다. 하나님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시거나, 우리의 손을 잡고 골짜기를 통과해 주시거나, 골짜기 한복판에서 우리와 함께해 주실 때마다, 우리는 점점 다니엘을 닮아 간다.
2. 오늘의 점수가 최종 점수가 아니다.
선거나 법 집행, 문화, 도덕 측면에서 세상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안타깝지 않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역활 모델로 칭송받는 반면, 정통 기독교 교리들은 조롱받고 성경의 가치들이 오히려 위법이 되는 현실은 분명 슬프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원수가 궁극적인 패배로 가는 길에서 잠시 승리를 거둔 것일 뿐이다. 오늘의 점수는 최종 점수가 아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영생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롬8:31-39 참조). 그리고 이 사실을 안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심지어 참을 수 없는 악한 일 앞에서도 좌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 승리가 보장된 자에게 두려움과
염세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
: 순종이 무용지물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고향 땅이 유린되는 광경에 다니엘이라고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다. 바벨론 군대가 승리하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상황 앞에서 그 역시 비통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 덕분에 그는 중요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믿음의 렌즈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기로 선택했다. 그는 느부갓네살의 승리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점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외국 열강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는 경고 메세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자신과 친구들을 머나먼 바벨론으로 데려갔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니엘이라고 해서 그 상황이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필시 그도 조국과 자신의 슬픈 현실에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과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일시적인 슬픔이나 혼란보다 훨씬 더 강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한복판에서도 그는 이 세상을 통제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신28-30; 단1:1-2; 롬13:1 참조). 다니엘은 징계의 때가 끝나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압제자들을 심판하신다는 약속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의 일시적인 승리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니엘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큰 복의 자리로 다시 불러 주실 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세상이 득세할 때 우리가 품어야 할 시각은 바로 믿음의 시각이다. 오직 믿음의 시각을 통해서만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볼 수 있다. 순종이 무용지물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믿음의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이런 관점으로 자신의 삶과 눈앞의 고난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터벅터벅 산을 올라갈 때 그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정말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명령은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었다. 뭔가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명렁은 지극히 간단했다. 아들을 산으로 끌고 가서 죽이라!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언젠가 그의 혈통에서 위대한 나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솔직히 아브라함으로서는 이 약속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도무지 합일점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은 서로 모순이었다. 죽은 아들에게서 위대한 나라가 탄생하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각으로 자신의 상황을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했다. 순종의 길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는 끗끗이 그 길로 갔다. 명령과 약속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혹시 그는 하나님이 이삭을 죽였다가 살리실 거라고 예상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 보라. 그때는 나사로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전례가 없었다(히11:17-19 참조).
오늘 우리도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물론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비통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 선택해야 한다는 점만큼은 똑같다. 하나님의 명령이 불합리해 보일 때, 순종의 길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만 같을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믿음의 시각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이것은 누구를 믿을 것인가의 문제다.
: 누구를 믿을 것인가
사탄과 그 졸개들은 거짓말쟁이다. 그들은 현재의 승리가 최종 승리의 증거라고 허풍을 떤다(요8:44). 하지만 예수님은 다 허튼소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지옥문은 절대 이길 수 없으며 언젠가 다시 돌아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사탄과 그 졸개들을 영원한 지옥 불로 쫓아낼 거라고 약속하셨다. 당신은 둘 중 누구를 믿으려는가?
- 지옥문-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울 것이며 지옥문(개역개정 성경에는 "음부의 권세"로 번역되어 있다- 옮긴이)이 그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16:18 참조). 이 약속을 모르는 교인은 별로 없다. 이 구절을 외우는 교인도 꽤 많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약속의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 나도 예전에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약속인지를 잘 몰랐다. 나는 원수가 어떤식으로 공격해도 우리를 무너뜨릴수 없다는 식으로만 생각했다. 적이 맹공을 퍼붓는 동안 우리가 납작 엎드린 채 예수님께 보호받는 상황을 상상했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뒤 지하실에서 기어 나오는 생존자처럼 사탄 군대가 휩쓸고 간 뒤 겨우 살아남는 상황을 떠올렸다. 살아남은 것은 좋지만 원수의 공격 중에 입은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에 성문이 쓰인 목적을 잘 몰라서 생긴 오해다. 고대의 성문은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방어용이었다. 성문은 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용도였다.
성문을 들고 공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사탄이 지옥문을 들고 우리를 때린다는 식으로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성문의 용도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옥문이 우리를 공격해 와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옥문이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두 해석의 차이점은 엄청나다. 첫 번째 해석은 소심하고 방어적이며 생존에 급급한 삶과 신앙생활로 이어진다. 하지만 두 번째 해석은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하고 도전적인 삶과 신앙생활로 이어진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첫 번째 해석은 두려움과 절망을 낳는다. 하지만 두 번째 해석은 현재의 점수에 상관없이 담대함과 소망으로 살아가게 한다.
- 요한계시록 -
우리에게는 요한계시록이라는 책도 있다. 물론 그 책에는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이 꽤 많다. 하지만 한 가지 만큼은 더없이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 이긴다는 것이다. 그냥 이기는게 아니라 대승을 거둔다. 우리 교회에는 요한계시록을 설교해 달라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면 요한계시록 전체를 강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일곱 나팔이 무슨 의미이며 달이 정말로 핏빛으로 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근처에는 해변이 있기 때문에 서퍼들은 새 땅에도 바다가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서핑을 할 수 없는 천국이라면 갈지 말지 좀 더 고민해 볼 심산이리라. 다시 말해, 사람들은 예언의 내용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인지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가 요한계시록의 주목적은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 주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 다들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미래의 상황을 일일이 알려 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마지막 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가사의한 상징의 의미를 해독하는 능력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요한계시록 못지않게 불가사의했던) 구약의 메시아 예언들을 이루심으로써 그 의미가 확실히 드러났던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예언도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다(벧전1:10-12 참조).
그 전까지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한 가지 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그때 제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사탄과 의의 적들을 진멸시키실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현실을 해석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고 혼란스러워도 우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경기가 어덯게 끝날지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현재의 점수에 상관없이 항상 낙관론자로 살아가는 이유다.
3. 생각의 입력이 감정의 출력을 정한다
: 오늘도 미디어에 묻혀 하루를 보냈는가
내 친구는 세상에서 문제가 완전히 없어질 날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매일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시청률 전쟁은 작은 문제를 큰 문제로 확대한다. 기독교 방송이든 일반 방송이든 시청률은 미디어의 젖줄이다. 시청자와 독자가 없으면 광고 매출과 제품 판매, 기부도 없다. 따라서 미디어가 매사에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말 잘 안다. 내 책을 사는 사람이 없으면 출판사들이 내 책을 계속해서 출간할 이유가 없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잡지사, 사역 단체도 마찬가지다. 시청자와 독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오래 버틸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시청률을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세상의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공포 마케팅만큼 잘 먹히는 마케팅 방식도 없다. 두려움을 자극하면 시청자와 독자가 끊이지 않는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모두 귀를 쫑긋한다. 미디어와 수많은 사역 단체의 모금 담당자들은 시청자와 독자, 기부자를 획보하려면 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위기가 발생하지 않으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작은 위기는 큰 위기로 부풀려서 보도한다. 그러니 내 친구가 두려움에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상 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걱정거리는 늘어난다. 그럴수록 잠 못 이루는 밤도 늘어만 간다. 이것이 바로 GIGO 법칙이다. 우리 사회와 문화, 정치권에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걱정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지는 축복이 아니라 어리석음일 뿐이다. 또 무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일같이 뉴스의 분석이나 토크쇼를 보는 사람들은 짜증과 분노 속에 살기 쉽다. 입력이 출력을 결정한다. 위기에 관한 미디어의 분석을 듣다 보면 그 위기 때문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그래서 미디어에 묻혀 살면 소망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문제의 크기에 시선을 고정하면 우리 하나님의 크기를 잊어버리게 된다.
: 계속해서 입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보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름받은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약속하셨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선한 목적을 위해 구속하거나 극복하시기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뜻이다(롬8:28-29 참조). 하나님은 저주받은 금요일을 성금요일로 바꾸셨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일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악한 행위였고 악의 승리였다. 하지만 3일만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주일마다 그 사건을 축하한다. 하나님은 한 명만 빼고 모든 사도가 순교를 당하게 허락하셨다. 그래서 당시에는 기독교 운동이 완전히 망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으로 변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사단의 승리처럼 보이는 상황은 사실 사탄이 최종적인 패배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에 불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만사를 다스리신다. 완전한 패배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하신다. 하나님께 뜻밖의 상황이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패하지 않으신다.
중국이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복되었을 때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는가. 악인들이 이긴 것처럼 보였다. 선교사들은 추방됐고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하게 핍박받았다. 복음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바깥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서구인들은 공산주의의 붉은 파도가 지구 전체를 뒤덮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마오쩌둥 세력이 악하게 벌인 일을 하나님은 오히려 선하게 사용하셨다. 결국 무신론 공산주의의 영적 허점이 만처하에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만 같던 복음이 실상은 활기찬 지하 교회 운동으로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중국이 서양 선교사들에게 문을 열었던 복음의 황금기보다도 복음의 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도덕적, 문화적으로 부패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혀 예측하시지 못한 현상이 아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능력 밖에 있는 현상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은 그 어떤 경우에도 무산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을때도 있고, 그분의 타이밍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언제나 하나님이 옳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약속을 가장 중요한 정보로 내 머릿속에 입력하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의 판단으로만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 맘대로 계산하면 어리석은 답만 나오기 때문이다(요일5:3-4.19; 시23:4-5 참조).
사도 바울도 비슷한 시각을 가졌던 게 분명하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로마의 한 감옥(요즘 처럼 음식이 제대로 나오고 운동 시설까지 갖춘 교도소를 생각하면 안 된다!)에서 쓴 그 편지에, 어떤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비결을 공개했다. 무엇이든 두렵거나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바울은 기도했다. 단. 상황을 바꿔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고 반드시 감사할 거리를 찾아 감사했다. 그러면서 그의 편지를 읽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할 것을 권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8-9).
다시 말해, 바울은GIGO 법칙을 알고 삶에 적용했다. 그는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입력하느냐에 따라 출력되는 감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다가올 복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고난을 잠시의 불편으로 여길 수 있었던 비결이다(고후 4:16-18 참조). 다니엘과 같은 용기와 바울과 같은 평안을 얻으려면 그들의 본을 따라야 한다. 친구의 말이나 미디어,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그분의 수많은 약속을 통해 삶을 바라봐야 한다. 두려움을 부추기고 소망을 갉아먹는 공포의 목소리를 잠재우려면 계속해서 '무음' 버튼을 눌러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시각을 결정하는 것은 인생의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GIGO의 법칙이자 믿음의 법칙이다.
4. 소망의 적, 영적 근시안과 건망증을 치료하라
: 복음의 증언이 힘을 잃게 된다
요즘에는 양치기 소년 같은 자들이 거짓말이 들통 나면 잠시 숨을 죽였다가 때가 되면 새로운 음모론을 들고 슬그머니 다시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음모론과 파국론을 꺼낼수록 비신자들에게 신뢰를 잃고, 그 때문에 우리가 증언하는 복음까지 힘을 잃는다. 우리가 경고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양치기 소년이라 부르는 것은 정말로 당연하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말에 귀를 닫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빈 무덤의 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다(고전 1:18-31 참조). 하지만 만왕의 왕이 보낸 사자를 자처하면서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경고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일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 두려움 증폭기
음모론과 파국론은 우리의 복음 증언만 약화하는 게 아니다. 음모론과 파국론은 우리의 소망을 갉아먹고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산다면 신앙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음모론과 파국론에 빠져 살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편23편을 잘 안다. 암송할 수 있는 사람도 많운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골짜기 아래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모르는 교인은 별로 없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널리 알려져 있다(시23편; 마23:20; 고전10:13 참조). 그러나 음모론과 파국론의 늪에 빠지면 이 모든 약속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지 잊어버리고 두려워하는 일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 나아가, 지금 우리에게 있는 영적 힘으로 두려움의 대상에 맞서야 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가 걱정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있는 영적 힘으로 맞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하나님이 그날그날 공급하시는 힘으로 맞서면 되는 것을.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한 배송 시스템을 자랑하신다. 단 하루도 늦는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해도 생각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하나님의 필요한 때에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는 평안하게 죽는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창고에 보관할 수는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 지혜와 은혜와 능력을 상자에 잘 포장해서 쌓아 두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필요한 그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알았다면 다니엘과 친구들의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았을까? 구름떼처럼 많은 바벨론의 대군이 예루살렘으로 달려오는 광경만으로도 무릎이 덜덜 떨릴 일이다. 거기다가 그 뒤에 이어질 일까지 알고 나면 그야말로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다. 온 도시와 성전이 유린당하고, 사악한 사교를 억지로 공부하고, 사악한 신들을 경배하는 의미의 새 이름을 받고, 맹렬한 풀무불과 굶주린 사자굴에 던져지고, 내용도 모르는 꿈을 해석하라는 황당한 명령을 받게 될 일을 미리 알았다면, 오히려 그 모든 시련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더 크게 걱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셨다. 그 결과, 다니엘과 친구들은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될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신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공포에 질릴 까닭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엉망인 상태와 상황을 좋아하신다. 그런 무대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시작된다.
: 영적 근시안을 앓았던 아삽
이 외에도 대표적인 소망의 적으로 영적 근시안과 영적 건망증을 들 수 있다. 아삽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부모가 이름을 이상하게 지어 줬기 때문이 아니다.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말할 수 없는 환멸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사방 어디를 보나 악인들은 잘나가는 반면, 자신은 손을 대는 일마다 실패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늘 패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의의 길이 실패의 길이라면 그 길로 갈 이유가 무엇인가. 상황이 너무 나빠서 아삽은 포기하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삽이 보지 못한 것을 일깨워 주셨다. 아삽은 그것을 보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삽의 번민은 갑자기 찬양으로 바뀌었다. 몇 년 뒤 아삽은 그 일에 관한 시를 썼고, 하나님은 그 시편을 매우 흡족하게 여겨 성경에 넣으셨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시를 시편73편으로 부른다. 아삽은 영적 근시안을 앓았다. 그래서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똑똑히 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멀리서 행하시는 일은 보지 못했다. 다윗과 솔로몬의 치리 당시 레위지파 사람으로 성가대를 지휘했던 아삽은 이스라엘 역사의 흥망성쇠를 생생히 경험했다(대상15:17 참조, 아삽은 시편50편과 73-83편 총12편을 지었다). 시편73편을 쓸 때 아삽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히 어두웠던 한 시절을 회상했다. 의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절이었다. 아삽은 악인들이 죄를 짓고도 무사한 것에 정말로 분통이 터졌다. 그들에게는 양심의 찔림도, 악행의 대가도 없었다. 반대로 아삽의 삶은 한동안 암울하기만 했다. 아무리 마음과 행동을 청결하게 해도 계속 고난만 찾아왔다. 지칠 대로 지친 아삽은 원망에 사로잡혔다. 오만한 자들의 성공과 번영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계속해서 따라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그에게 먼 미래를 보여 주셨다. 아삽은 성소로 들어가 난생처음 악인들의 운명을 명확히 봤다. 악인들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나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파멸되었다.
그때부터 갑자기 아삽의 어조가 변했다. 이제 더는 상황이 전처럼 암울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악인들이 큰소리 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도 잘만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아삽은 그들의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삽은 흔한 영적 병을 앓았다. 그의 실제 믿음은 그의 신학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를 신학적으로는 이해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편73편을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라는 글로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삽이 스스로 인정했듯이 이 사실을 더 이상 마음으로 믿지는 않게 되었다. 영적 근시안이 눈앞의 상황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그의 눈을 어둡게 했다. 그래서 아삽은 이렇게 푸념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절). 영적 근시안에 빠지면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 전체를 보는 눈을 잃어버린다. 눈앞의 현실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판단한다. 일이 잘 풀릴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그분을 의심한다. 영적 근시안은 위험한 영적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의심한다. 소망과 확신과 용기가 줄어들고, 두려움과 의심과 절망만 가득해진다.
: 날마다 십자가 렌즈를 끼고 있으라
육체적 근시안의 치료법은 교정 렌즈다. 반면, 영적 근시안의 치료제는 십자가와 빈 무덤이다. 십자가의 렌즈를 쓰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똑똑히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간역에 빠져 그분의 원수였을 때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분은 우리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우리의 잠재력을 본 후 '이만하면 내 목숨을 줘도 되겠어'라고 판단하신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순수한 은혜였다. 전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시는 사랑이었다. 이 은혜와 사랑에 시선을 고정하면 이제 더는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분의 타이밍이나 방식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만큼은 의심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렌즈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보게 한다면 빈 무덤의 렌즈는 그분의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최악의 상황에서 선을 끌어내고 최악의 불의를 통해서도 의를 이루시는 그분의 능력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갈보리와 빈 무덤의 렌즈를 통해 인생의 상황을 보면 새로운 확신과 용기로 살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엡1:15-23; 3:14-21 참조). 솔직히, 영적 근시안을 극복하는 일에서는 우리가 아삽이나 다니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두 사람에게는 기억할 십자가나 빈 무덤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증언해 줄 성령이 거하신다.
: 영적 건망증, 감사하는 습관이 예방책이다
영적 근시안의 뒷면에는 영적 건망증이 있다. 영적 근시안은 현재에 시선을 고정한 것인 반면 영적 건망증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심각한 영적 건망증을 앓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세기에 걸친 애굽의 종살이에서 기적적으로 해방된 지 몇 주 만에 아주 유명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앞에 장막을 치라고 지시하셨다. 그런데 이 지역은 삼면이 막힌 곳이었다. 앞은 바다였고 좌우는 산이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바로는 방금 풀어 준 노예들을 다시 붙잡아 오려고 군대를 보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은 사면초가에 놓인다. 공포에 질린 그들은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자신들을 괜히 사막으로 데려와 죽게 만들었다며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 냈다(출14:1-31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바로와 그의 군대를 완전히 심판하기 위해 또 다른 기적을 준비하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이 조금 전까지 베풀어 주신 모든 기적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들의 하드 드라이브가 완전히 지워졌다고나 할까.
혹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너무 약하고 건망증이 심하다고 욕하고 있는가? 방금 전에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통해 구원받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가?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우리도 허구한 날 그러지
않는가. 다행히, 영적 건망증을 줄일 방법이 있다. 그 비결은 바로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에 수시로 감사하면 잊어버릴 일이 없다. 감사는 효과 만점의 예방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히 매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다(살전 5:18 참조). 하나님께 우리의 찬양이 필요해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게 아니다. 우리에게 기억을 되새기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사에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면 우리가 빛 가운데서 봤던 것을 어둠 속에서도 기억해 낼 수 있다. 감사하는 습관을 기른다고 해서 감사하지 않은 일에도 억지로 감사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나쁜일, 나아가 악한 일도 일어난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에겐 감사할 과거와 미래가 있다. 그리고 이런 복을 기억할 때 현재의 고난과 악을 이겨 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영적 근시안이나 건망증에 걸렸다는 것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다.
문득,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진 뒤에야 자신이 지독한 근시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다들 멀리 있는 물체를 잘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 또, 다른 친구의 어머니는 자신의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주변에서는 그분이 자주 깜박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문제가 하나님보다 커 보이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탓이다(딤후1:7 참조).
그럴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힘든 상황에 시선을 고정할 수도 있고, 예수님이 나 대신 지신 십자가와 그분의 다시 사심과 감사해야 할 수많은 복에 생각을 집중할 수도 있다. 고통과 혼란의 한복판에서도 감사할 때, 아삽과 다니엘처럼 만사를 다스리는 분이 누구시며 만사가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아는 데서 비롯하는 소망과 확신이 가득해질 것이다. 반면, 개인적 혹은 사회적 문제에만 집중하면 삶이 피폐해진다. 이스라엘 자손처럼, 하나님이 곧 놀라운 구원의 손길을 베푸실 참인줄도 모르고 좌절과 분노와 두려움의 절규를 쏟아 내고 만다.
5. '대체 소망'은 환멸만 남긴다
예전에 새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경 공부를 진행한 적이 있다. 새 신자들은 모두 꽤 성공한 듯 보였지만 하나같이 잘못된 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갔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교회를 찾아온 것이었다. 성경 공부가 끝난 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영접했다. 새 신자들이 잘못된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토록 찾던 참된 만족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사다리를 오르는 모습은 정말로 감동적이었다.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아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떠오른다. 단, 그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벽에 놓인 성공의 사다리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희망의 마차를 타고 있다. 그런 마차 중에 특히 그럴듯한 두 가지가 있다. 둘 다 충분히 많은 사람이 승선하기만 하면 악의 질주를 멈추고 광범위한 부흥의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는 약속을 던진다.
그중 하나는 정치다. 정치는 입법을 통해 악의 질주를 멈추게 하고 영적 부흥의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고 약속한다. 다른 하나는 내가 '스테로이드성 사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최신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사역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구축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미안하지만 둘 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다. 이 둘을 추구하는 의도는 좋다. 이 둘에 승선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좋게 바꾸겠다는 열정에 불다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정치와 대규모 사역 프로그램은 부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이 둘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은 결국 환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탄은 우리의 소망을 꺽으려고 한다. 우리가 다니엘 같은 확신과 용기를 얻으면 두려움 없이 지옥문(음부의 권세)을 향해 돌진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꺽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 이도 저도 통하지 않으면 차선책을 쓴다.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두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탄의 궤계에 넘어가 말과 전차, 할례, 종교 의식,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육체적 계보에 소망을 두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제멋대로 만들어 낸 엄격한 종교 규칙에 소망을 걸었다. 1세기 에베소 교회는 선행과 확실한 교리, 결단력에 소망을 둔 나머지 그것들만 있으면 사랑이 부족해도 된다고 믿었다(계2:1-7 참조).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현혹한다. 오늘날 많은 교인이 사탄의 설득에 넘어가 예수님 보다도 정치나 최신 사역 프로그램을 더 믿고 있다.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고 헛된 것에 희망을 걸고 있다.
: 정치적 해법에 소망을 두다
얼마 되지 않은 과거에 미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선거관을 뒤흔들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 많은 목사와 교계 지도자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정치야말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국가를 구할 최선책이라고 믿었다. 일각에서는 시장의 사무실이나 주지사의 관저, 백악관에 초청 받는 것을 영적 권위와 영향력의 궁극적인 증거라고 여기기도 했다. 선거 일정에 따라 설교 일정이 결정되었다. 선거 유세에 뛰어들지 않는 설교자들은 "겁쟁이"라거나 미국을 병들게 하는 죄를 방치하고 있다며 온 국민에게 비난받았다. 목회와 제자도에 집중하는 목회자들은 구식이요 비효율적이라고 조롱받았다. 사람들은 그런 목회자들을 로마가 불타는 급박한 상황에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처럼 취급했다. 선거만 이기면 온 도시와 국가가 회복될수 있는데 비신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성숙할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치에서 잠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선거에서 승리하고 추진하던 법이 통과되었다. 심지어 조지 갤럽 주니어는 1976년을 "복음주의의 해"(Year of the Evangelical)로 선포했다. <타임>지도 같은 표현을 썼다.
하지만 빛나는 정치적 승리와 상관없이 미국의 도덕적 몰락은 계속됐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정치 판도는 변했다. 그렇게 되자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들이 악을 뿌리 뽑고 부흥의 불길을 일으킬 거라 믿었던 사람들은 좌절과 환멸에 빠졌다. 요즘은 정치와 입법을 영적 부흥의 열쇠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치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방어적인 자세로 돌아선 지 오래다. 그저 성경적 가치에 반하는 입법과 판결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최대한 막고자 할 뿐이다. 더 이상 우리는 비신자들에게 우리의 뜻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비신자들이 그들의 뜻을 교회에 강요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을 뿐이다. 이제 문화 전쟁은 끝났다. 우리는 졌다. 그러나 이것이 실망의 이유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망의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 그분의 재림에 소망을 둔 사람에게는 괴로워할 이유보다 기뻐해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다.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약속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먼저 우리 방식을 바꿔야 한다. 기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육신과 이세상의 방식을 내려놓고 성령의 방식과 무기를 들어야 한다. 성령의 방식이란 무언인가? 그것은 바로 기도와 순종하는 삶,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 충성스러운 복음 선포다. 이것이 다니엘이 사용한 무기다. 다니엘은 믿음이 없고 사악한 왕의 통치 아래서 끊임없이 군사적, 정치적, 사법적 좌절을 경험했지만, 이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며 살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기 바란다. 정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정치에 영향을 끼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나는 단지 정치적 해법에 소망을 두는 것이 지독한 계산 착오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선거에서 이기고 우리가 원하는 법이 통과되더라도 정치적 힘은 덧없다. 판도는 늘 변하기 마련이다.
: 대대적인 사역 프로그램에 소망을 두다
정치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게 아니다. 스테로이드성 사역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많은 예산을 들여 대대적으로 벌인 프로그램과 사역들은 하나님이 복음 전도와 제자도를 위해 정하신 유일한 수단에 쏟아야 할 자원과 노력, 자금을 마구 빨아먹고 있다. 진정한 하나님의 운동은 언제나 유기적이다. 그것은 성령이 탄생시키고 성령이 추진하시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은 정교한 마켓팅 기법이나 분석, 모금 활동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런 방식을 전혀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한때 하나님은 나귀를 통해 말씀하셨다. 나팔 소리로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하셨다. 점심 도시락 하나로 5천 명을 먹이신 적도 있다 이렇듯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 어떤 방법도 사용하실 수 있다. 하지만 영적 부흥을 위해 요란한 계획과 지지 세력을 구축하는 방법을 사용하신 적은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없다. 또, 진정한 하나님의 운동은 대개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경을 살짝 훝어만 봐도 하나님이 똑같은 방식을 두 번 사용하신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약의 놀라운 기적과 전투, 예수님의 치유 사역, 초대 교회의 기적적인 부흥까지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두 번 사용하신 방식은 거의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식을 찾아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목적으로 과거의 부흥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나님이 과거에 역사하신 방식에서 배우거나 정교한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이나 시간표를 따르시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말이다. 특정한 사역 프로그램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믿음을 두지 않는다. 결과는 언제나 선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패는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우 전쟁을 위해 말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최종 걸과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잠21:31 참조). 하지만 현대의 스테로이드성 사역 프로그램들은 단지 실망감만 안겨 주는게 아니다. 교회에서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 집중력, 자금을 앗아 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일례로 예수님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그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개봉될 당시 미국 기독교계가 한바탕 들썩였던 상황을 생각해 보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영화가 영적 쓰나미를 일으키리라 확신했다. 영화 관계자들은 이 영화를 통해 미국이 영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것이라 자신했다. 그리하여 미국 전역의 교회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때 우리 교회도 적잖은 표를 샀다. 전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극장을 꽉 메워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영적 쓰나미는 일어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눈에 띌 만한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이 영화가 하나님 나라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멜 깁슨이 부자가 되는 것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그텋다고 해서 이 영화가 나쁜 영화인 건 아니다. 이 영화를 통해 적잖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떠난 탕자들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는 잠깐 반짝했다가 이내 사그라지는 수많은 사역 프로그램 중 하나에 불과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역 프로그램이 생겨났다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진다(약4:14; 전1;11 참조). 대규모 사역 프로그램의 문제점은 헛된 희망을 던질 뿐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복음 전도자와 제자도를 위한 하나님의 주된 수단인 교회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 교회, 비록 흠 투성이일지라도
솔직히 말해, 대규모 사역 프로그램은 '대부분' 교회와 상관없이 운영된다. 이런 프로그램이 겉으로는 연장선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지지 세력 구축과 자금 모금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 사실이다. 정직하게 살펴보면 지금 교회의 모습이 그리 사랑스럽지 않기는 하다. 사랑스럽기는커녕 문제투성이다. 교회는 걸핏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보다 전통을 더 소중히 여겼다. 툭하면 삼천포로 빠졌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을 수없이 저질렀다.
하지만 이 모든 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닌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기초이며 사단이 두려워하는 대상이고 제자도를 위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수단이다. 교회를 방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설령 모르고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보통 큰 죄가 아니다. 장기적으로 다니엘과 같은 소망과 용기를 지닌 세대를 일으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난 2천년 동안 검증된 방법밖에 없다. 그 방법은 바로 교회다. 제2의 다니엘을 일으키는 일은 신학교와 교단, 출판사, 미디어의 몫이 아니다. 선교단체나 그 사역 프로그램의 몫도 아니다. 오직 교회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흠을 갖고 있음에도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고 가르치고 서로 격려하고 채찍질할 때 임하겠다고 약속하셨다(마18:20 참조).그리고 예수님이 임하시면 소망과 용기가 나타나는 건 시간문제다.
-래리 오스본 저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요약,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