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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할렐루야
요한계시록 19:1-6
1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계 19:1-6 /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신약성경에서 할렐루야가 나오는 곳은 요한계시록 19장이 유일합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 중 그 유명한 합창 ‘할렐루야’도 본문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가슴 벅찬 장면입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심판(1-2) 할렐루야의 첫 번째 의미는 구원받은 백성의 특권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고, 죽임당하신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만이 외칠 수 있습니다. 환난을 통과한 자들만이 구원하시는 주님께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세상 나라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같습니다. 할렐루야는 구원과 심판의 소리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할렐루야는 기쁨의 소리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심판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와 그 연기(3-4) 두 번째 할렐루야는 연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연기는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계 5:8; 8:3-4). 즉, 할렐루야는 찬양이고, 연기는 기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거문고로 올려지는 찬양과 금 대접에 담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심판이 시작된다고 기록합니다(계 15:2-3, 7). 성도의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께는 영광이지만, 세상에는 심판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찬양과 기도는 구원의 나팔 소리인 동시에 심판을 담은 대접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즉, 찬양과 기도로 선포되는 할렐루야는 종말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됩니다.
할렐루야와 통치(5-6) 할렐루야를 외치는 궁극적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법으로 통치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할렐루야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육체의 소리, 세상의 소리가 그치고 할렐루야의 소리로 가득한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소리가 가득하길 기도합시다.
당신에게 할렐루야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할렐루야의 세 가지 의미를 가슴에 새기고 오늘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성도에게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영적 생명을 지키는 호흡과도 같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방향을 비추는 빛입니다. 매일의 묵상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게 하고,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세워 줍니다. 또한 유혹과 시험 앞에서 말씀으로 분별하고 승리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변화된 삶을 통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게 됩니다.
호크마 주석
=====19:1
본절에서 8절까지는 18:20의 응답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 '허다한 무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2) 혹자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본장에 나타난 찬양은 18:20의 응담이며 18:20에서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라고 부르고 있고 본서에서 순교자를 비롯한 하나님의 성도들과 천사들이 함께 찬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7:9). 이러한 허다한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 성취된 구속 사역과 그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다(7:10;12:10).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할렐루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할렐루이아'(* )는 히브리어 '할렐루야'(* )를 음역한 것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이다(시 111:1;112:1;113:1). 이것은 전형적인 히브리어 어구로 초대 교회의 예배가 유대교의 회당과 성전 예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Johnson). 한편 '구원과 영과의 능력'은 허다한 무리들이 찬양하는 주재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비롯한 악의 무리를 공의로 심판하시고 자신들을 그 세력에서 온전히 구원하여 주신 것과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거룩하심과 영광을 찬양한다.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갚으셨도다 - 본절은 앞절에서 행한 찬양의 근거를 제시한다. '참되고 의로운지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본서의 앞부분에 언급된 찬양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참되고 의로우심'은 계속적으로 나타난다(15:3;16:7).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모든 행위와 마음까지 아시는 분이시기에 그가 행하신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 것이다(겔 11:5;요 2:25;요일 3:20).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음녀의 죄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음녀의 행위'는 온 세상을 미혹하여 부정한 죄를 짓게 한 바벨론의 행위를 가리킨다(14:8;17:2;18:3).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변질 시키고 창조주께서 행하신 사역을 파괴하려는 행위이다.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 본문은 다섯째 인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 들이 하나님께 신원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잠깐 동안 지다리라고 말씀하였으나(6:9-11) 이제는 순교자들의 신원의 기도에 응답하신다(Ladd).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원수를 갚으시는 분이다(신 32:43).
=====19:3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 본절의 '할렐루야'는 1절과 같은 의미로 하늘에서 행해진 찬양의 재연(heavenly encore)이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사 34:10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바벨론이 온전히 멸망당할 것을 상징한다. 한편 '하더니'속에 내포되어 있는 '카이'(* , '그리고')가 혹자의 주장대로 히브리 어법상 상황을 이끄는 절(circumstantial clause)이라면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상반절에 나타난 '할렐루야'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된다(Charles, Mounce).
=====19:4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은 5:9, 10에서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양의 구속하심에 대해 찬양하였으며 '이십 사 장로'는 11:17, 18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심판하심에 대해 찬양하고 있다. 반면에 이들은 14:3의 구속받은 자들의 찬양에는 침묵을 지키다가 본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찬양에 화답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심을 강조하고 있다(Beasley-Murray). 한편 '아멘 할렐루야'는 시편 4권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시 106:48, Mounce, Johnson, Beasley-Murray).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 '보좌 에서 난 음성'은 '보좌'로 인해서 하나님의 음성이나 어린양의 음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그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나 어린양의 음성을 의미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본다면 '우리 하나님께'라는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어린양의 음성으로 볼경우 역시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요 3:12;요 20:17). 그러기에 학자들에 따라 이 음성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보좌 가까이에 있는 장로들이나 네 생물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혹자는 천사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Mounce).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 본문은 시 113편과 115편을 반영한다. 즉 '하나님의 종들...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시 113:1을 인용한 것이며,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는 시 115:13을 인용한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들'은 순교자와 같은 특별한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문구인 '경외하는'과 '무론 대소하고'가 믿는 자들의 상황이나 지위 고하, 신앙의 성숙도와 관계없이 보편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 요한은 자신이 들은 음성에 대해서 헬라어 '호스'(* , '같고')를 세 번 사용하여 어느한 가지로 비유할 수 없을 만큼 그 소리가 장대하며 웅장함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찬양하는 자들에 대해 혹자는 천사의 무리라고 주장하고(Ladd) 혹자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한다(Johnson). 본절의 찬양자들은 1절과 연관된 것으로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 '전능하신 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서 외에서는 단 한번 밖에 나타나지 않으나(고후 6:18) 본서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하나님의 칭호이다(1:8;4:8;11:17;15:3;16:7;21:22). 이 칭호는 요한 당시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우리 주 하나님'(out Lord and God)이라고 부른 것과 상관성을 갖고 있다. 요한은 '전능하신 이'라는 칭호를 신약성경의 다른 성경보다 현저하게 많이 사용하여 오직 여호와 만이 유일하고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통치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 )은 행위의 시작을 강조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시작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렇듯 요한은 부정 과거 시상을 사용하여 앞으로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성취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다(Ladd).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한 모든 적을을 정복하실 주줬을 소유하고 계심을 강조한다(Johnson).
나는 종이니이다
계 19장 5절 / 장경준목사
오늘 읽으신 요한계시록 19:5은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올라갔을 때에 하나님 보좌로부터 들은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우리에게 해당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서적으로 보면 세가지 경우에 종이 됩니다. 첫째는 부채를 지고 갚을 수 없을 때에 종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 장사꾼들에게 팔렸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힘으로 빚을 갚을 수 없기에 군대 장관의 종 살이를 했습니다. 둘째 경우는 전쟁에 질 경우 종이 되었습니다.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백성은 종이 되어 70년 동안 살았습니다. 셋째는 부모가 종인 경우 종의 신분이 자녀에게까지 세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때에 위의 세 의미가 적용 됩니다.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종이로소이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전적으로 종이란 의미를 조사해 보면 다섯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노예는 ① 인격이 부인되고, ② 타인에게 소유되었으며, ③ 권리와 자유의 태반 또는 전부가 박탈된 자이며, ④ 소유자는 어떤 종류의 노동도 시킬 수 있었고, ⑤ 법적으로는 개인재산을 뜻하며 양도 ·매매가 가능한 물건으로 생각되었다. ‘생명 있는 도구, 말할 줄 아는 도구’라 하여 가축과 같이 생각되었으며, ⑥ 원칙적으로는 그 생명도 빼앗을 수 있었다.
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은 바로 하나님의 종들 입니다. ‘종’이라는 의미를 충분히 깨달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하나님의 종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진심에서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0:7을 보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천사들은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향해 ‘종’이라 불렀습니다. 이 천사들의 말을 붙잡고 성경을 다시 조사해 보니 정말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께 종이라 불리었던지 또는 자신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일컬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소유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박탈되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죽음의 자리에 까지 순조을 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선지자들이 자신을 종이라 일컬었던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종 됨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출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2. 출애굽의 주인공인 모세도 종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
3. 여호수아와 갈렙은 종같이 모세를 따랐습니다.
(민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4. 가장 훌륭한 사사 사무엘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 앞에 종된 자세로 살았습니다. (삼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5.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은 하나님에게는 종에 불과했습니다.
(삼하 7: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6. 구약의 가장 위대한 개혁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 일했습니다.
(대하 32:16) 산헤립의 신복들도 더욱 여호와 하나님과 그 종 히스기야를 비방 받게 하였으며
(스 5:11) 저희가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스가랴와 그 추종자)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오랜 옛적에 건축되었던 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완전히 건축한 것이더니
7. 예수님도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빌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행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8. 신약의 모든 사도들도 하나님의 종으로 뽑힌 사람들입니다.
(행 16:16-17)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유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에게 종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종이랄 일컬으시고, 하나님의 천사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종이라 부릅니다. 성경의 모든 전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앞에 “나는 종이로소이다”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한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님들도 하나님께 “나는 종이로소이다”는 고백을 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잠자는 예배를 깨워라
김진홍목사 / 계 19:1-7
오늘날 한국 개신교 예배는 예전을 중요시한 나머지 예배가 의식화, 형식화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예전은 예배의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전이 의식화, 형식화로 고착되면 예배에서 생동감, 하나님의 임재체험,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참여하고 싶지 않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를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1.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란 사귐입니다.
요일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고전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배는 연애하는 사람들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연애하는 사람은 편하게 만나고, 말이 많고, 때때로 눈으로 말하고, 손을 잡고, 뛰고, 춤을 추기도 합니다.
2. 요한 계시록 예배의 두 가지 특징은?
계19:1-7절에 나와 있는 천상의 예배를 살펴봅시다.
1) 깊은 경배가 있습니다.
4절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엎드려’는 희랍어로 ‘pipto’인데 ‘죽다’ ‘없어지다’ ‘떨어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직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만 나타나고 모든 예배자들은 엎드려 있습니다.
2) 잔치입니다.
5절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아무도 구경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예배하는 장면입니다.
7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모신 잔치자리입니다.
레23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축제였습니다.
시68: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계19:1-7절까지에 4번 나옵니다.(1,3,4,6,)
이 말은 Hallal( 찬송하다, 자랑하다)+Yah(여호와)의 합성어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시끄럽게 하다.’ ‘미친 듯이 소리 지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예배는 예배의 원형이고 모델입니다.
이런 예배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천상의 예배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따라서 예배를 통하여 치유, 회복, 소성, 번영을 체험하게 됩니다.
3. 시편의 예배 방법
1) 음성으로
① 입으로
시109:30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음치여서 찬송을 못할지 모르지만 찬양은 할 수 있습니다.
② 노래로
시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노래는 노래하는 공동체의 상태를 나타냅니다.(예, 반달 1924)
노래는 노래하는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합니다.(예, 우이교회 선교의 노래)
③ 큰 소리로
시32: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예, 축구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를 상상해보라)
2) 손으로
① 손뼉으로
시47: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적용, 월드컵 4강 때 스페인과 승부차기에서 승리했을 때를 회상하면서 힘찬 갈채와 함께 큰 소리로 외쳐보자.)
② 손들고
시134: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손을 든다는 것은 헌신(선서할 때), 환영(어린아이가 손을 들고 달려올 때), 항복의 뜻이 있습니다.
③ 악기로
시150:3-6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여기에 나타난 악기들은 그 당시의 모든 악기입니다.
3) 몸으로
① 몸을 굽혀
시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겸손, 열정(열정은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한다), 집중(노름하는 사람도 집중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을 뜻합니다.
② 서서
시134: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선다.’라는 것은 경외와 존경을 나타냅니다.
③ 춤추며
시149:3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 150:4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 아무 때나 춤추지 마십시오.
. 춤을 경시하지 마십시오. 미갈을 기억하십시오.(삼하6:16-23)
. 지나치게 세속 된 춤을 피하십시오.
나가는 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도들의 관심을 끄는 찬양예배, 성도들이 기대하는 찬양예배를 위하여 기도해주십시오.
그래서 참 예배를 드리길 원하는 교우들이 구름떼처럼 밀려오는 예배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는 어린 양 혼인 잔치의 신부이다
계 19장 1~21절, 19:6-10 / 유기성목사
오늘 저는 마지막 날 열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이 땅과 하늘에서는 완전히 다른 장면이 펼쳐지게 됩니다.
땅에서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집니다.
계 19:11 이하를 보면 이 땅에서 마귀의 추종자들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계 18장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너무 당연합니다. 주님께서 “흰 말”을 타고 등장하셔서 “짐승과 세상의 왕들과 그 군대들”을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으로 다 죽입니다. 그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새들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바벨론이 멸망할 때, 하늘에서는 엄청난 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4번 거듭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과 통치를 찬양하는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6에서는 “큰 무리의 음성과 같기도 하고, 큰 물소리와 같기도 하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기도 한 소리”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하늘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립니다.
:7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 양은 예수님이시고 신부는 그의 교회, 즉 성도들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처럼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엡 5:24~32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를 분명히 남편과 아내의 결혼 관계로 설명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을 때, 겨우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상상할 수 없이 복되고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지금 형편이 어떠하든지 행복합니다.
할렐루야를 4번 아니라 100번, 1,000번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9에서 천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복도 복도 이런 복이 없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상 최고의 복, 천상 최고의 복입니다.
요한은 자신과 성도들이 신부로 참여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보고는 너무 놀라 그 말을 전해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다급히 요한을 저지하며 말했습니다.
:10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네 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예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
요한이 정신이 혼미해져서 경배할 대상을 혼돈했을 정도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신부의 기쁨을 가지지 못한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의 신부이십니까?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성도가 대부분입니다.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하는 성도도 많습니다. 이런 신부가 신부이겠습니까?
약혼한 여인에게 “당신이 그 사람의 신부이세요?”라고 물었을 때, “그런 말 들은 것 같아요” 하거나 “아마 그렇겠지요.” 한다면 그가 신부가 맞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실제로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분명히 믿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됩니다.
눅 14:18~20을 보면 임금이 혼인 잔치에 초대했는데, 한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또 한 사람은 소를 샀기 때문에, 또 한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임금님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어떻게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가고 시집간다고 주님의 초청을 거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이 그 어린 양 혼인 잔치의 신부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밭 사고 소 사고 시집 장가가야 하는데, 남의 잔치에 왜 가야하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님께서 왜 그렇게 기도시키시고, 마음이 시원해지는 말씀을 붙잡지 못해 진통을 하게 하셨는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의 신부이면서 자신이 예수님의 신부임을 분명히 모르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신부인지 모르기에 세상을 막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에겐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기쁨입니다.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결혼할 사람이 정해진 자매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부의 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부가 슬프거나 화가 나있거나 짜증을 부리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것입니다. 무표정하게 있어도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린 양의 신부에게 있는 기쁨이 있습니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아버님과 사이는 좋으세요?”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대체로 잘 지낸다.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난 그 때마다 속상한 걸 잊으려고 노래를 부르며 지내고 있지. 너도 속상할 때가 생기면 노래를 부르렴.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며느리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시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와는 잘 지내세요?” 시아버지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너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몰라! 늘 노래를 부르며 지낸단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이 힘들어도 억지로 노래해서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신부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히틀러에게 담대하게 저항하였던 본 회퍼는 [Life Together]에서‘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무슨 기쁠 일이 있다고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결국 순교했던 본 회퍼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어린 양의 신부였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기쁨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신부의 기쁨이 없을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제가 사람 바라보고 환경 바라보고 저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바라보기를 더욱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보면 슬프지만 주님을 보면 기쁩니다. 환경을 보면 낙망하게 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기쁩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부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주님의 신부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이 넘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분위기입니다.
주님은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계 19: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어느 목사님은 이 옷을 ‘천국의 웨딩드레스’라고 표현하였는데, 천국 혼인 잔치에 참석할 신부가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예복입니다. 마 22:1-14에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혼인 잔치자리에서 쫓겨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라고 했습니다.
:8 ...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이점에 대하여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만으로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의로워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어느 분이 신부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에 대하여 쓴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증오와 악의를 마음에 품은 사람과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해 자비와 긍휼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과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 등 세상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과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색욕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거나 질투하는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최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신부들이여! 나는 정결한 신부를 위해 올 것이다.”
어떻게 주님의 신부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주님의 신부임을 모르면 이렇게 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출 34:1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음행한 여인에 비유하였습니다.
왜 이처럼 부담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를 여전히 당신의 신부로 여기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아니라면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스런 말씀조차 우리에겐 은혜인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신부임을 믿어야 주님의 신부답게 사는 것입니다.
약혼한 사람은 다른 남자를 만나 교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혼하지 않은 여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 교제하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신부인 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삶을 전혀 다르게 만듭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한국 교회는 일본 천황에게 경배하라는 무서운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 때, 일본 천황에게 절하지 않았던 주기철 목사님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주기철 목사, 당신만 생각하지 마. 당신 때문에 교회 다 죽어. 사람이 지혜롭게 해야지. 마음만 안 그러면 될 거 아냐. 그냥 고개 숙여. 잘난 척하지 말고 고개 숙이라고. 당신만 믿음 있어? 나도 믿음 있다고. 주기철, 당신! 교만한 사람이야. 고개 숙인다고 마음도 숙이나? 어쩔 수 없으니 그러는 것이지.”
여러분, “마음만 아니면 되잖아, 그냥 고개만 숙이자.”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주님의 신부와 신부 아닌 자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여기까지만 말씀을 들으면 ‘나는 너무 더러워’, ‘나는 신부가 될 자격이 없어’라고 낙심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탕한 고멜에게 장가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신부이면서도 주님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여인을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은혜입니다. 낙심한 이들은 이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부답지 않게 살아도 된다고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신랑 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신부로 세워 가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도저히 빛나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 그렇게 사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는 예수님의 신부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이 고백이 우리로 신부답게 살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옷 입는 것입니다.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러분, 이제 설교를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자신이 예수님의 신부인 것을 아셨습니까? 말할 수 없는 은혜요, 복임을 아셨습니까? 신랑이신 주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임하셨음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모든 상황, 힘들고 어려운 순간조차 우리를 예수님의 신부로 준비시키시는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기쁨의 사람, 의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예행연습입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예수 동행일기를 쓰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목사인 제가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랑이신 주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주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받도록 도와드리기 위하여 예수 동행일기를 써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어린 양의 신부임을 명심하며 신랑 되신 주를 바라보는 중에 기쁨이 충만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4번의 할렐루야
계 19장 1~10절 / 김철한목사(오목천교회)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사라진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고 사라질 것 같지 않던 나라가 바다에 던져진 큰 맷돌 같이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 요한계시록 17, 18장은 바벨론이 사라지는 것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사실 역사 속에 나타난 제국들은 사라졌다.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 등 그들은 사라졌다. 마지막 때, 모든 세계를 통합하고 종교적 바벨론을 이용해 먹던 정치적 바벨론! 다른 말로 하나의 정부를 이룬 바벨론 제국,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소멸된다.
현재의 최강 대국은 미국이다.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한다. 유럽 연합이 경제 블록을 앞세워 패권을 잡아보려고 한다. 누가 패권 국가가 되어지든지, 가령 중국이 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미국이 사라진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성경은 말한다. 열국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사치를 행하고 돈벌이 하는 상인들이 그와 더불어 매매하고 부를 쌓았지만 미국, 중국을 능가한 정치적 바벨론 정부는 기필코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를 믿어야 한다. 지상의 도성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그 바벨론 심판이 완료되었을 때 요한계시록 19장은 그 바벨론 심판에 대한 찬양이다. 이 환희의 찬양은 다섯 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다.
① 계19:1~2 하늘의 구원 받은 성도들이 찬양함
② 계19:3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심판을 찬양함
③ 계19:4 이십 사 장로들과 네 생물이 찬양함
④ 계19;5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음성이 찬양을 요구함
⑤ 계19:6~8 ‘우리들’로 표현된 교회가 찬양함
그러나 네 번째 단락인 계19:5은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찬양의 요구함이기에 환희의 찬양은 4개로 되어 있다. 즉 “할렐루야”가 나오는 그대로 계19:1, 2~3, 4, 6절이다.
1. 첫 번째 할렐루야 (계19:1)
계19:1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여기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의 이 단어는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Hallelu-jah를 헬라어로 음역하여 알렐루야로 사용했다. 시편에 가서 보면 시편 146, 147, 148, 149, 150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할렐루야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으면, 설마하던 구원이 이루어졌으면 연속 할렐루야가 여기 기록되었겠는가?
첫 번째 할렐루야의 이유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외쳐진 것이다. 여기 구원이란 의미는 바벨론의 정치적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불의한 권세에서 놓여졌다는 구원이다. 성도는 오랫동안 사단의 소굴인 바벨론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그 사단의 소굴인 바벨론이 무너졌으니 성도의 탄원이 끝난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언제까지 내 가족, 내 이웃, 내 형제가 옥에 갇히고 목 베임을 당하고 죽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는가?’ 이것이 종결되어 더 이상 눌려 있지 않게 된 구원이다. 할렐루야 노래함이 마땅하다.
보라 계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바벨론의 정치적 권세는 고통의 피, 눈물의 피, 순교의 피를 흘리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벨론이 무너지므로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할렐루야인 것이다. 오늘날 21세기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10대 국가가 있다. 그 나라들이 신앙의 자유를 준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만 가지고 할렐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를 제패하는 적그리스도의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할렐루야다.
2. 두 번째 할렐루야 (계19:2~3)
계19:2을 보면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불의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셔서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서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참된 이유는 피값을 갚으시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 피값을 갚아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하늘로 그 핏소리가 올라간다.
계6:9~10을 보라.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한다. 순교자의 피는 반드시 갚아주신다. 그 신원의 날까지 순교자의 호소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 앞에서 순교한 믿음의 예배가 아벨을 보라. 가인이 아벨을 죽여 놓고도 “나는 알지 못하나이다” 할 때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바벨론이 무너진 것은 참되고 의로운 피 값에 대한 심판이기에, 그리고 아무도 그 피 값을 요구한 심판을 가로막을 수 없기에 할렐루야인 것이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이는 바벨론에 내린 심판의 연기가 사람들에 의해 꺼지지 않고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피값을 갚는 심판을 막을 자가 없다. 피 흘리게 하는 박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의 피 흘리게 하는 나라, 조직, 그룹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를 피 흘리게 하는 개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할렐루야 (계19:4)
계19:4을 보면 여기서는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 외친다. 이들의 할렐루야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의 찬양 앞에 화답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십 사 장로들, 네 생물들, 하늘의 허다한 무리들,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되어 찬양하는 할렐루야인 것이다. 이십 사 장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이고 네 생물은 천천 만만에 이르는 천사들의 대표이고 허다한 무리는 할렐루야로 기뻐하는 성도들이다. 구원과 심판이 얼마나 정의롭고 올바른 것인지 하늘의 모든 무리가 아멘 할렐루야로 찬양이 절절을 이루며 모두 하나되는 것이다.
4. 네 번째 할렐루야 (계19:6)
계19:6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 할렐루야를 부르는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수 천 년간 하나님의 백성이 염원해 온 것은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단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 계19:6에 와서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제는 어린 양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다.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을 통해 사단의 소굴이 된 세상 나라를 심판하므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젠 완성되는 것이다.
이미 계11:15에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요한계시록 19장에 와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어찌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만히 할렐루야 우렛소리 같은 소리로 환희의 찬양을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까닭은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 양은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아내는 그의 교회, 즉 성도들이다. 성도는 예수의 신부로서 무엇을 준비했는가? 혼인 예식에 참가하기 위해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다. 즉 “입도록 허락하셨으니”라는 동사는 세마포 옷을 입도록 옷을 입는 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세마포 옷,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나타내는 거룩의 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돕는 은혜로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 기쁨, 그 즐거움, 할렐루야를 연호해도 4번의 할렐루야가 아니라 할렐루야를 100번, 1000번 해도 모자란 기쁨인 것이다.
요한은 이 할렐루야 소리를 들었다. 계19:1~8에서 들었다. 그런데 계19:9에서 천사는 말한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된 자들이다.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에 혼인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혼인 기약의 날이 이르렀으니 그의 신부로 서게 되는 성도는 정말 복이 있는 것이다. 세상 최고의 복,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상 최고의 복, 천상 최고의 복이다.
신부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고로 가깝고 친밀한 신분의 뜻이다. 신부는 아름답지만 주님의 신부라는 말만큼 가까운 표현의 말이 있는가? 그러기에 어디에도 없는 복을 성도는 받은 것이다. 음녀 바벨론은 망하지만 거룩한 신부인 성도는 주님 곁에 서 있다. “혼인 청함을 받은 자 복이 있도다.”고 전해주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그 발 앞에 경배하려는 요한, 요한은 그 복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그때 계19:10을 보면 천사는 말한다.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신부의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경배 대상을 잊을 뻔 하였다.
우리는 혼인 잔치에 대해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다음 시간에 볼 것이다. 다만 바벨론이 무너지고 구원이 완성되는 이 할렐루야의 노래가 천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노래임을 기억하자. 성도는 바벨론이 무너질 때 예수의 거룩한 신부로 세워지고 주님 곁에 있게 된다는 두 절묘한 대조를 기억하라. 결국 음녀는 이길 것 같으나 무너지고 패하고 성도는 환난과 고통을 당해 망할 것 같으나 승리자인 것이다. 지금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는데 거룩한 신부의 길을 포기하지 말라. 아무리 바벨론 음녀가 미혹해도 세상의 가치 앞에 흔들리고 배반해서는 안된다. 할렐루야 찬송하면서 그 영광스러운 주님과의 혼인 잔치를 지키지 못하면 안된다. 주님의 신부로 서는 날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
계 19장 1~10절 / 서명성목사
2007년에 샌디에고에 있는 해군 기지에서 당시 교우였던 임인식 소령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도 그때 참석하셨던 분들이 계십니다. 그날 많은 교우들이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남녀를 무론하고 교우들이 그렇게 잘 차려입은 것이 본적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남자들은 양복을, 여자들은 블라우스를 입고 고급스런 장신구를 착용하고 참여했습니다.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뿐만 아니라 하객들도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습니다. 축하와 존중의 마음을 의복으로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예배드리러 올 때에 어떤 복장을 하고 옵니까? 장로님들이나 순서 맡은 분들 외에 정장을 하고 오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청교도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할 때 입는 옷을 Sunday Best라고 했습니다. 그 뜻을 찾아보니 ‘Not super dressy, but still enough to look formal’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포멀하게 보이기에는 충분한 옷이라는 뜻입니다. 옷차림이 그 사람의 진면모를 다 보여주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한 번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바벨론이 심판을 받은 이후, 감사와 찬송이 온 하늘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바벨론의 압제로 고통당하던 성도들은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쁨의 찬송을 드립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언급되는데, 그 잔치에 참여하는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어린 양의 신부인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영적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계시록은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요한이 환상 가운데 목격한 말세의 비밀을 성도들만 알 수 있고 박해자는 알기 어려운 상징을 사용해 전달하기에 해석에 많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숫자나 색깔, 동물, 혹은 자연 현상 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보다는 히브리 문학의 전통과 문맥에 맞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라는 구절은 계시록 전체 구조를 설명해 줍니다. 1장은 ‘네가 본 것’을 다룹니다. 성자 예수님에 대해 묘사합니다. 2~3장은 ‘지금 있는 일’을 다룹니다. 좁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상태를, 넓게는 신약 모든 교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4~22장은 ‘장차 될 일’에 대해 묘사합니다. 17장과 18장에서는 음녀, 즉 바벨론의 멸망으로 말세의 대환난이 종식되는 장면이 언급됩니다. 18장이 계시록 가운데 가장 슬픈 애가로 가득 채워졌다면, 이와는 반대로 19장은 가장 기쁜 할렐루야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왜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할렐루야 소리가 연이어 나옵니까? 그 이유는 주님의 다스림이 드디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이 계시록의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동안 하나님 백성들에게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백성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성 바벨론 때문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지 않았던 바벨론의 무너짐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쁨과 감격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하늘 가득히 울려 퍼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신랑이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아름다운 혼인 예식을 치를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심판에 대한 하늘의 찬송(1-5절)
1~5절은 18:20에서 바벨론의 심판을 기뻐하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슬퍼하는 땅의 왕과 상인 및 뱃사람들의 애가에 이어, 19장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무리가 등장합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내는 큰 음성 같은 것을 듣습니다. 첫 번째 할렐루야가 언급됩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할렐루야’는 구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의미입니다(시 104:35; 113:1). ‘할렐루야’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본문에서는 4번이나 나옵니다. ‘할렐루야!’얼마나 듣고 싶던 승리의 선언입니까? 악의 세력과의 긴 싸움이 마침내 끝났음을 온 천하에 알리는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하늘로부터 울려 퍼집니다. 이전에 천사들이 찬송할 때(5:12; 7:12)는 ‘구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찬양을 드리는 자들은 땅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므로 특별히 ‘구원’의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반적인 구속 계획의 완성을 가리키며, ‘영광과 능력’은 구원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위엄과 힘’입니다. 2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음녀 바벨론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찬양받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참되고 의로우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되다’는 ‘신실하다’라는 의미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6:9-11).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이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고 정확한 판단에 근거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라는 표현에서 ‘더럽게 하다’는 ‘망하게 하다, 타락시키다’는 뜻을 가진 동사의 미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의 활동이 지속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습니다(17:6). 더구나 그 음녀는 성도들을 박해하면서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8:7)라고 했으니 그 오만과 자만의 죄악은 하늘에 사무칠 정도(18:5)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성도들의 피를 흘린 바벨론의 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18:24).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했을 때, 하나님은 잠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6:10-11). 바벨론이 받는 심판은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두 번째 할렐루야는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광경을 보고 무리가 외칠 때 나옵니다. ‘그 연기’는 문법적으로 보면 ‘그 여자의 연기’로서 바벨론이 받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간다는 말은 바벨론이 받는 심판이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연기는 짐승과 사탄(용)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던져지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서 발생하는 연기를 암시합니다(19:20; 20:10,14-15).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24장로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합니다. ‘진실로 그렇다. 하나님을 찬양하라’의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하는 이들은 세 부류입니다. 첫째는 천상의 허다한 무리이고, 둘째는 24장로와 네 생물이며, 세 번째는 5절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종들의 피’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종들은 순교자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모든 믿는 자들로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고(20:13),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22:12).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으면 박해하는 짐승을 향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구속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115:13).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충만히 받아 누려야 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을 세마포(6-8절)
요한은 다시 허다한 무리의 음성 같기도 하고, 많은 물소리 같기도 하고, 큰 우렛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듣습니다. 심판의 연기가 피어나는 중에 온 세상을 꽉 채운 소리로 하나님의 통치와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선포됩니다.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구원하시는 분도 어린 양 예수님이요, 심판하시는 분도 어린 양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할렐루야가 언급됩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에서 ‘전능하신 이’라는 칭호는 요한 당시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우리 주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에 기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계시록 외에는 단 한 번 밖에 나타나지 않으나(고후 6:18) 계시록에서는 7번이나 나옵니다(1:8; 4:8; 11:17; 15:3; 16:7; 21:22). 로마 황제가 아니라 여호와만이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치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행위의 시작을 강조하는 부정과거시제이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시작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앞으로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성취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6절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했다면, 7-8절에서는 찬양해야 할 새로운 이유가 소개됩니다. 신랑 예수님과 신부 성도들이 결합하는 기쁨과 영광이 혼인 잔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번역하는 것이 좋으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완전하게 연합하는 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에 대한 많은 이미지 가운데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의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기쁘고 복된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부 된 주님의 교회가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놀라운 복이기는 하지만 신부 자체가 가지는 공로나 조건에 기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신랑의 일방적인 사랑과 자기희생이 이 혼인 잔치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백성을 남편과 아내로 자주 표현합니다(호 2:19; 사 54:5-7; 렘 31:32; 겔 16:7-8; 마 22:1-2).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나 시온이 하나님의 아내로서 나타납니다(호 2:14-22).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내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함을 지적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로 사용해 천국을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로 설명하셨습니다(마 22:2-14; 눅 14:16-2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행하신 이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는데(요 2:1-11), 이는 예수님이 바로 종말론적 메시아 잔치의 성취자이심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의 들러리라고 하며 예수님이 메시아 시대를 여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요 3:29).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즉 혼인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고후 11:2, 엡 5:25-27). 7절의 ‘아내’로 번역된 ‘구나이’는 일반적으로 ‘성인 여자’혹은 ‘부인’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라고 하실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정혼 상태이므로 ‘아내’보다 ‘신부’라 하는 편이 좋습니다. 신부는 하늘의 도성,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며(21:2,9),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고후 11:2). 결혼식이 신랑과 신부의 결합을 의미하듯, 어린양의 결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신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자만이 자격이 있습니다. 어린양을 끝까지 따른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만, 짐승에게 미혹되거나 박해에 굴복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준비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그 아내들을 예비하지 아니하시고는 이 땅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제 완전하며 종말론적인 어린 양과의 혼인이 성취될 때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 따르면 남녀가 약혼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신랑이 신부를 찾아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립니다. 주님은 우상을 멀리하고 끝까지 순결함을 지키는 선한 행실로 ‘자신을 준비’한 교회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십니다. ‘허락하셨다’는 ‘그에게 수여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도가 옳은 행동을 해서 자력으로 세마포 옷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옷을 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만한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셔서 세마포 옷으로 수치를 가려 주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은 복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흰 옷’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이기는 자는 흰 옷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으며(3:5),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는 ‘흰옷을 사라’고 촉구했으며(3:18), 천상의 무리가 흰옷을 입고 있으며(7:9), 그 옷은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되었습니다(7:14), 더 나아가 19:14에서는 하늘에 있는 군대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마포 옷은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우상 숭배자들이 입던 옷과 대조됩니다(18:16).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로서 진리를 따르는 옳은 행실로 거룩한 옷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그들은 신랑 되신 어린 양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을 수 있는 대상은 승리한 교회임이 분명해집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복된 자(9-10절)
천사는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합니다. 계시록에서 기록명령은 자주 발견됩니다 (1:11,19; 21:5). 요한이 기록해야 하는 것은 7-8절에서 언급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는 아주 짧은 주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잔치’는 ‘만찬’의 의미를 가진 매우 친밀한 이들끼리 하는 식탁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에서 ‘이것’은 복수 주격대명사이니 ‘이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큰 음녀의 멸망(18:1-24)과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선언(19:1-8) 전체를 가리킵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때 요한이 그 천사에게 경배하려 했지만, 천사는 자기도 요한과 그의 형제들과 같은 증인 중 하나일 뿐이라며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천사의 영광이 아니라,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해야 합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증언이 예언의 영이라는 표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 모든 예언의 핵심입니다. 2) 예수님이 주신 증거가 예언의 핵심입니다. 3) 예수님께서 주신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언입니다. 4)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언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들은 오직 예언의 말씀을 통해 곧 오실 신랑을 기다릴 소망을 얻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1:3). 성령을 받은 성도는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 시대의 흐름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기에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18).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성도는 악의 세력이 멸망할 때가 머지않은 것을 알고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시대의 표적을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셨습니다(마 16:2-3). 인류 역사의 종말이 가까이 옴을 알려 주는 징조는 지진, 기근, 전염병, 테러, 전쟁의 발생,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대규모 배도(마 24장), 자기중심주의와 물질주의의 만연, 가정의 붕괴(딤후 3:1-5)등입니다. 사도 바울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의 등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4:14), 이스라엘 가운데 충만한 수가 주님께 돌아오면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온 땅의 악을 멸하시고 최후 심판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종말의 표징이 나타남을 목격할 때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옴을 알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악을 허용하시기는 했지만 결코 끝까지 그 악에 대해서 방관하시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기간 동안에 당하게 되는 고난으로 불의한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거나 우리가 그들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기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할렐루야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 어린 양의 신부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아내인 교회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여기에 계시록의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양의 신부로서 신앙의 순결을 지킨 자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습니다(고후 11:2). 신부에게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 주어집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세속적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고, 영적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행위로도 순결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거룩한 행실은 소극적으로 바벨론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18:4), 적극적으로 어린양을 증언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세상 가치를 좇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을 지킨 경건한 성도가 훗날 하나님이 베푸신 천상 잔치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모든 핍박을 견뎌 낸 성도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미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의 계명에 순종하며 믿음의 선한 행실로 단장한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창세부터 종말까지 역사 속에 일어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사탄의 세력은 공의의 심판으로 순식간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믿음을 지킨 성도는 공의로운 심판을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의 최종 모습은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자 왕 되시는 예수님이 마련하신 혼인 잔치는 풍성하고 놀라운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모자람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잔치가 벌어졌다면, 이 혼인 잔치는 처음부터 진품으로 시작하여 극상품 포도주로 마치는 잔치가 될 것입니다. 본문은 왕이신 주님이 혼인 잔치의 신랑인 어린 양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신부를 사랑한 신랑은 신부를 맞이할 모든 자격을 갖춘 존재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화려한 옷이나 온갖 장신구로 치장하지 않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세마포 옷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거룩함과 성결함을 가리킵니다. 언젠가 바벨론은 무너질 것이며 교회는 신랑 되시는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도다운 옳은 행실을 통해 거룩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천상에 울려 퍼지는 승리의 찬양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서게 될 그날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고난을 참아야 합니다. 그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천상에서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함께 서시기를 바랍니다.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
계 19장 1~10절 / 성홍모목사
오늘의 교회력은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음악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성령강림에 대한 말씀을 드리지 않고 교회와 찬송의 문제를 가지고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 영주교회는 1953. 8. 2에 창립되었습니다. 창립 50주년이 되었는데, 5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신앙 생활하시는 성도들이 아직까지도 많은 분들이 남아 있는 교회는 우리 교회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 몇몇 교회에서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우리 교회의 50주년이 지나가는 이 때에 함께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50주년이라고 하면 반세기가 지나갔다는 말인데, 오십이라고 하면 완전히 성숙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결혼 50주년이란 금혼식이라고 하여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인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희년이라고 하여 노예를 해방하고 사들인 토지를 돌려주고, 땅을 쉬게 하는 은혜의 해였습니다.
"창립50주년을 희년의 감격으로" 보내야 합니다. 감격이란 감사한 마음이 격할 정도로 일어나야 감격입니다. 나는 영원히 죽을 줄 알았는데 그 힘든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다는 그런 감격인 것입니다.
우리 영주교회가 창립하여 5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영주교회는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이 이끌고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전통이나 인물, 재정, 건물, 프로그램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 제자훈련(양육), 교제, 전도, 봉사의 본래적인 목적이 교회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합니다.
영주는 이러한 목적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주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신 목적을 따라 구원받은 자녀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을 목표로 양육하며,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교제하며,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지역 사회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딩시 헬라 사회는 원형의 역사관, 윤회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 역사란 돌고 돌아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해 가는 직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기독교의 역사는 한 목표를 향하여 전전해 가는 직선적인 역사관을 선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앞으로 전진해 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어거스틴도 역사에는 "역사는 시작과 종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로부터 배워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배우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면 내일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역사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먼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미래를 알려고 하면 과거를 고찰하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배운다는 말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배운다는 말입니다. 지난 50년을 교훈 삼아서 우리는 새로운 50년의 역사를 써나가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는 구원의 감격을 가진 교회로 모일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고 새 은혜가 충만한 교회여야 합니다. 예배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는 구원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찬송은 세 가지의 힘이 있다고 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힘(Up going power), 안으로 파고드는 힘(In going power), 마지막 세 번째는 밖으로 뻗어나가는 힘(Out going power)이라고 합니다. 찬송은 저 천성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위로 올라가게 합니다. 찬송 생활은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평화와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찬송은 우리의 가슴에 감격을 주면서 파고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생활은 밖으로 뻗어나가게 하는 힘이 있는데,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여 헌신할 수 있는 힘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습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고 우울한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주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하여 종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농토를 사들였던 사람들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빚을 면제해주고, 땅을 쉬게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희년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희년의 기쁨과 감격이 우리만의 기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기쁨과 감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을 힘있게 부를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하고 예배에 몰입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찬송생활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이란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는데 있어 영과 혼과 육을 합한 전인적으로 관계를 가지게 만나게 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투에 임하려고 합니까? 우리의 영혼으로 부르는 찬송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판에서 가장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지파는 유다지파였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4번째 아들이었는데,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으로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받는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문을 열어주셔서 첫째로 르우벤을 낳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아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보라 아들이로다 하면서 르우벤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사랑하는 라헬만 돌아보고 있습니다. 레아는 두 번째로 시므온을 낳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하여 시므온이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도 레위를 낳았습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고 하여 "연합"이라는 뜻의 레위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남폄 야곱은 라헬만 사랑합니다. 레아는 네 번째 유다를 낳고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만 바라보겠다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찬송이란 뜻의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았습니다. 12 형제 중에 6명을 낳았고 딸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레아에게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6명의 아들들 중에서 찬송이라는 뜻의 유다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하는데, 언제나 유다가 선두에 섰습니다. 수평선 너머로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유다 지파와 같이 찬송생활에 힘쓰는 이들입니다.
사사기 1:1-2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는 유다, 즉 찬송이 먼저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언제나 12지파의 선봉장이 되었고 유다에서 다윗왕이 나왔고,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사밧이라는 신실한 왕은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을 맞아 싸우는데 먼저 기도하였는데, 레위인 야하시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증거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이미 승리하였으니 노래하는 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게 하는데, "여호와께서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노래하게 하였습니다. 찬양대원들이 소리높여 찬송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이 에돔족속과 더불어 싸우게 하셔서 자기들끼리 서로 쳐죽이게 하셨습니다. 무슨 전쟁을 하는데 찬양대원을 앞세운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찬송을 기쁘게 받으시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실천에 옮기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전쟁이 어디 노래 불러서 이기는 것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의 예배 실황을 보았습니다.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에는 찬송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부르는 찬송은 많은 물소리와 같이 웅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이 맑은 소리도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24장로들의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머리에 씌워주신 금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돌려드리면서 아멘과 할렐루야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모두다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었는데, 이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을 입은 것으로 의의 겉옷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감격 속에 예배를 드리는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신부들은 신랑 예수님을 만나는데 준비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는데,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덧입혀주셨습니다.
사64:6에는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옷은 더럽혀졌기에 그 옷을 입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3:2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의를 힘입는 것이 의의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7:13에 "장로 중에 한 분이 사도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장로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예수님의 보혈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허락 받았는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50주년의 생일을 맞아 호산나 찬양대가 준비한 찬양으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천군 천사의 찬양처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음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생활은 찬미의 제사가 된다는 것을 알고 능력있는 찬송생활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계 19장 1~10절 / 오정호목사
'할렐루야(hallelujah)'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들에게도 가장 익숙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할렐루야’란 말은 가장 값지고 고상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영화제목으로도 쓰이기도 하고 무의미하게 생각 없이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할렐루야를 외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지상(地上)의 소리가 아니라 천상(天上)의 영광스런 소리가운데 할렐루야 란 말이 요한계시록 19장에 반복적으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1,3,4,6절).
할렐루야는 “할렐루야”란 단어는 히브리말로 그 어원이 할랄(Halal)입니다. 할랄의 의미는 ‘칭찬하다 축하하다 찬미하다 자랑하다 찬양하다’입니다. 할렐루야는 ‘야(Yah)를 찬양하다’입니다. 곧 ‘야웨(Yahweh)하나님을 찬양하다’는 뜻으로 귀결됩니다. ‘야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Let's praise the Lord)’, ‘야훼하나님을 찬양하라(Praise the Lord)’는 말입니다. 우리의 입술과 삶을 가지고 주님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성도가 마땅히 지향하고 실천해야 할 복된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왜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기에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리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 죄인을 새롭게 변화시켜 의인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는 능력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기에 그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체험한 성도들은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다니엘은 사자 굴의 위협 속에서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였습니다(다니엘 6:10).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이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그는 확실히 알았기에 어떤 위험과 도전 속에서도 찬송과 감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니엘을 할렐루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신약의 표현대로 말하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우리는 삶이 좋을 때나 어려울 때에도 주님 앞에 감사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다니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영광을 위하여 한 몸을 온전히 드리기로 작정했듯이 더 큰 은혜를 체험한 우리는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기에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2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淫女)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2절).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유린하는 악한 세력들을 ‘큰 음녀’라 표현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상에 살다보면 오해받을 때도 있고 남모르는 고통을 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있고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어렵고 연약한 상황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는 확신이 있기에 육체적인 핍박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하다가 피를 흘린 것이 사실입니다. 어려움들이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세대에도 신앙의 자유와 축복을 마땅히 물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주님의 심판과 공의를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Mayflower號)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청교도들(Puritan)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메이플라워호 선상에서 손에 손을 잡고 생활규범을 약속하였습니다. 이것을 ‘메이플라워호 언약’이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여 주님만 드러내겠다(in the name of God). 둘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정과 사업과 자녀들의 교육을 이루겠다(by the Grace of God).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for the glory of God). 넷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살겠다(in the presence of God). 이 네 가지가 오늘의 미국을 만든 영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사실을 확신했기에 그들은 이 계약대로 살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개인의 신앙의 언약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가정의 주님을 섬기는 언약은 무엇입니까?
셋째,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큰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셨기에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7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7절). 요한계시록을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자주 나옵니다(요한계시록 5:6, 13:8). 죽임 당한 어린양은 우리 구주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임 당한 어린양에게 우리의 감사와 찬양과 모든 것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32). 이미 우리는 아들을 기쁨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확신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毋論大小)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5절).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말은 ‘할렐루야’와 같은 의미입니다(10절).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늘 바라보면서 입술로 기도하고 할렐루야로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할렐루야 속에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가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앙하며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할렐루야 성도로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로새서 2:6-7).
감사와 축복의 계절에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성경에서 보여준 천상의 삶을 앞당겨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광을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 찬양합시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때로는 핍박과 불이익,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과 공의를 늘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기쁨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할렐루야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복된 할렐루야 성도들이 다 됩시다. 우리 모두 할렐루야 성도로 인정받고 살아갑시다.
건강한 성도가 건강한 교회를 만든다
계 19장 1~10절 / 오정호목사
1986년 8월 3일, 변동에서 출발한 우리 교회가 가장동, 탄방동을 거쳐 이제 만년동에서 설립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걸어온 길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운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에게 새 힘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건강한 성도가 건강한 교회를 만든다.” 이 원리를 따라 주님 앞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향후 주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려면 목회자와 직분자들과 순장들과 교사들, 봉사자들 어느 한 직분도 소홀 하지 않게 주님 앞에 영적인 리모델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리모델링(Spiritual Remodeling), 영적인 핵심(Spiritual Innovation) 즉, 잘못된 것은 버리고 은혜 받은 것은 계속 발전시켜야 우리의 미래는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대안이 되고 있는가? 우리 시대에 새로남교회가 대안이 되기 위해서 의식에 어떤 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인가?” 저는 이 부분을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을 펼쳤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교회 모습이 나타납니다. 천상의 교회 모습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이며 간증거리가 많은 교회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를 받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가 어떻게 미래 지향적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로드맵을 얻기 위해서는 천상의 교회를 늘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로남교회가 대전 이웃에게, 우리 고장에게, 나아가서 민족에게 영적인 로드맵(Road Map)을 제시하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이 사회에 희망이 되기 위해서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세 가지 원리가 무엇인가 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
첫째, 성도가 자신의 사명, 즉 구원의 하나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의 허다한 무리가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 2절)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고백 없이는 교회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지난주 통계청의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가 나왔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교회 성도수가 지난 10년간 1.6%나 줄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진리를 상대화를 시키는 시대입니다. 국민소득은 증가되었습니다. 문화라고 하는 채널을 통해서 세속화가 교회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대 사회적인 전략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문화를 중시하는 우리의 다음세대를 만나면 문화코드를 알고, 우리가 그쪽으로 뛰어 가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끌려가는 교회가 될 것인가 이 사회를 이끌고 갈 것인가 기로에 서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끌려갑니다. 그러면 교회가 가지는 힘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은 예수는 구원자시요,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원천적인 고백에 기준한 것입니다. 새로남교회를 주님이 이 자리에 세워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주님을 이 땅에 소개하라고 세우신 것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교회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구원의 주 하나님에 대해서 침묵하는 교회는 교회 아닙니다.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 구원의 주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2절) 음녀란 하나님의 교회를 유린하는 세력을 말하기도 하고, 정치 제도와 조직과 문화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오염시키기 위해서 세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우리 대적 사탄은 믿는 자라도 실족시키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5:8). 그러나 그들의 모든 궤계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기 때문입니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여러 순교자들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우연히 이 땅에 설립 된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구원의 주님을 사랑으로 전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의 종말과 세상에 종말이 분명하게 심판주 하나님을 과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타협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주님 주신 명령을 따라 주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소망되시고, 예수님은 천국이시고, 예수님은 영생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제도나 조직도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지상교회는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사도행전 4:12). 이것이 새로남교회의 고백입니다.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사도행전 3:6).
둘째, 성도의 사명은 예배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시니 하나님께 경배하여”(4절) 예배의 정의는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지식과 내 경험과 내 환경을 주님 앞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찬송 드리는 것입니다.(5절) 형편 좋을 때만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이던지 주님은 찬송을 받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고 다스리로다”(6절) 예배는 내 인생과 내 삶이 주 앞에 다스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그 다스림을 사모하십니까? 목사들이 다스리는 것보다, 장로들이 다스리는 것보다, 집사들이 다스리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새로남교회를 다스리시면 훨씬 더 좋은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엎드리고 장로님들도 엎드리고 권사님들도 엎드리고, 늘 주님의 다스림을 열망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자녀들과 여러분 가정을 하나님이 정말 다스려주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눈빛이 달라야 합니다. 태도가 다르고, 사모하는 열정이 달라야 합니다. 주님이 날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 때문에 삶의 중심이 주님 예배, 주님 경배, 주님 찬양, 주님께 순종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들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요한복음 4:23). 그들을 높이십니다(사무엘상 2:30). 능력을 주십니다(역대하 16:9). 회복시키시고, 치유해주십니다(역대하 7:14). 여러분의 예배는 분산입니까 집중입니까?
셋째, 성도의 사명은 선한 행실을 세상에 펼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향기가 있습니다. 삶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8절)
옳은 행실에는 올바른 고백과 올바른 생활이 포함됩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별로 존중하지 않을까? 그들은 예배를 마치고 나서 우리의 일터로 우리의 가정으로 우리의 사회로 돌아가는 우리 모습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고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이런 상황을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삶의 메시지로 나타나야 합니다. 왜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에 놀라운 복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교육과 의료봉사를 통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이웃에게 조건 없이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만 많이 하고, 직장에서 부정적으로 하고, 자기 할 일 안하고 남 간섭하는 것이 그 이미지(Image)가 될 때 그들이 교회 나오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은 직장일수록 그 직장이 잘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직장에서, 가정에서 과연 예수님의 향기를 날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세마포를 입혀주셨습니다. 이 세마포는 빛나고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남들에게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마포는 성결과 순종과 충성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외 없이 복음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말로전하는 것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만 말고, 너희들이 말하는 복음을 삶으로, 행실로 보여 달라” 이것이 지금 우리 이웃의 우리를 향한 강력한 요구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웃에게 복음을 많이 보여주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모습의 성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교회다운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우리가 사랑하고 충성하는 우리 교회 새로남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에서 우리가 부를 찬송
계 19장 1~10절 / 이상호목사
기독교 신앙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찬송’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찬송하는 존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성도의 삶은 온통 찬양으로 가득차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 성도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찬양 드립니다. 구약에서는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 드렸고, 신약에서는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신 ‘예수로 말미암아’ 찬양 드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찬양 드려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찬송은 ‘항상’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3요소인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송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항상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입니다. 물과 공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듯이,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게 아닙니다.
찬양의 삶! 성도는 이 삶을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사 43:21). 성도의 존재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찬송했고(눅 2:13), 목자들도 찬송했으며(눅 2:20),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눅 2:28)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찬송이 천국에서도 계속될 것을 보여줍니다. 본장은 가만히 앉아서 읽을 수 없는 놀라운 장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 하늘의 모든 무리들이 찬송하는 모습, 어린양의 혼인잔치 모습,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주로 백마 타고 오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본 후’ 라는 의미입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집니다. 음녀의 멸망이 얼마나 기뻤으면 “허다한 큰 무리”의 찬송이 들려졌겠습니까?
이것은 그만큼 참된 교회를 향한 ‘음녀’의 박해가 극심했음을 암시합니다. 종말 시대 대환란 기간동안 참 교회들이 받을 어려움이 어떠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교회의 핍박자들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 증인의 피에 취할 정도”(계17:6) 였으니 그 피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환란을 견디고 나온 성도들이 천국에서 부를 찬송이므로 “허다한 큰 무리의 찬송”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큰 무리가 되어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장차 천국에서 저와 여러분이 부르게 될 찬송의 내용’을 함께 생각하며, 남은 평생 찬양의 삶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께 있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송함(1절)
1절=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는 일차적으로 셀 수 없는 천사들의 수를 가리킵니다. 이들이 계속하여 노래하기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라고 합창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찬송 내용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Who God is) 하는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찬송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는 본래 죄 가운데 빠져 죽었던 자들이고, 지옥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잃어버린 자들’(the lost ones)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팔을 펴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가능케 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주님 주시는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송은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감사 찬송이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그들의 부끄러운 자리에서 들어올려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같이 죄로 인해 명예롭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주십니다. 주님은 전혀 영광스럽지 못한 죄인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은 타락한 죄인들을 영광스런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세워주십니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할렐루야! 영광의 주님을 찬송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은 주로 어떤 내용의 찬송입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노래하는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장차 천국에서 우리 모두 부를 그 노래를 지금부터 열심히 부르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음녀 심판을 노래함(2-5절)
2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천사들의 찬송은 이제 음녀를 심판하신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주요 사역 중 하나인 음녀 심판을 노래할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피를 갚아주시는 분’ 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 지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참되고 의롭습니다. 주님의 성품 자체가 옳고 공평하고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옳고 공평하고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찬송 내용이 ‘주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여러분,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들은 모두 참되고 의로운 것들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할 뿐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도 찬송해야 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동산을 화염검으로 지키시게 한 것은 의로운 일입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에 범람한 악을 홍수로 멸절시켜서 세상을 정화시키신 일은 공평한 일이었다고 성도는 인정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의 포악과 음란과 동성연애의 더러움들을 유황불로 멸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었다고 우리는 노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던 애굽 위에 열가지 재앙으로 응징하시던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을 뒤쫓아 오던 애굽의 철병거를 홍해에 수장하신 사건은 의로운 일이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모세에게 대들던 고라 무리들을 땅 속에 파묻으신 하나님의 행동은 정당하고 공평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가던 북왕국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팔아버린 일과, 부패하고 타락한 남왕국 유다를 바벨론에 붙이신 일들은 모두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우리는 찬송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무기력해진 종말 교회에 침투해 들어올 음녀, 곧 종교다원주의의 세력을 일거에 멸하시고 순교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의로운 일입니다. 우리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음녀는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할 혼합주의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음행으로 땅을 더럽히는 큰 음녀의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최대 대적인 배도하는 음녀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음녀와 타협하는 것은 신앙의 배교를 의미합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2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에 대하여는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이를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장차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보좌를 향하여 엎드려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4절=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여기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성도의 대표를 의미하고, 네 생물은 하늘의 천사들의 대표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자들이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과 찬양을 하는 엄청난 광경을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받을 심판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이미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감사의 찬송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사역을 인하여 더욱 찬송생활에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찬양함(6절)
6절=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 표현은 피조물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주의 교향악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주 만물 전체, 나무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산과 산위의 돌들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숨막히는 광경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노래합니까?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즉, 장차 천국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찬양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조를 위한 표현이라고 일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서문에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작품에 자신을 나타내셨다. 노래하는 작은 새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짐승은 하나님께 소리 지른다. 세상 만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산들은 그의 이름을 메아리친다. 파도와 샘들은 그분에게 반짝거리며 풀과 꽃들은 그분에게 웃음 짓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공해로 찌든 낙동강물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까? 황폐해진 산, 사나운 짐승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사자는 약한 동물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쫓아다니지 않습니까? 땅과 바다도 인간들의 욕심으로 공해 바다, 쓰레기 더미로 되어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한단 말입니까?
⟹ 답은 이사야 65장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예수께서 오시므로 만물이 새롭게 되고 우주가 잃어버렸던 찬양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까? 찬양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통하여 만물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보여야 정상적인 성도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지금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환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것이 곧 천국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세 교황권은 찬송을 포함한 세 가지를 박탈했습니다. 기도를 박탈하고 말씀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하여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신부와 성도의 벽을 벌려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찬송 부르는 길을 막았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을 악용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16세기 초반 개혁자 마틴 루터의 시대까지 찬송이 죽어 있었습니다. 루터가 1529년에 작사 작곡한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 우리 기독교 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함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찬송 금지 때문에 생긴 것이 저 유명한 ‘파리 나무 십자가’, ‘빈 소년 어린이 합창단’ 같은 것입니다. 남자 아이들로만 구성하고 여자 아이들은 아예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니까 남자들의 성(性)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카스트라토 제도입니다. 변성기 전에 남자의 성을 제거하여 여성소리가 나게 했고, 사람들은 남자가 내는 여성스런 목소리에 쉽게 매료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잘못하므로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했는지! 이태리에서는 일년에 4,000명씩 거세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교회가 범죄했습니까? 교회가 타락하면 이런 무시무시한 범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배후에서 마귀가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하려고 교묘하게 책략을 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마음껏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영원한 통치의 약속을 믿음으로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4. 어린 양의 혼인잔치(:7-10절)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를 당했던 어느 주일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천상의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영적 세계를 보게 된 것인데, 그 내용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였습니다. 결혼예식은 예수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하게 되는 것의 영적모형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육신의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와의 혼인예식은 더욱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혼인예식은 곧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태어나 가장 기쁜 일은 결혼이며, 혼인예식은 신성하고 경건한 가운데 치루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결혼예식의 절차를 통해 그 의식이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특히 결혼 초야, 즉 첫날 밤 순결이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나아가 부정한 신부가 신랑의 희생으로 순결의 표를 얻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혼인잔치에 주님의 신부로서 예비함이 있기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과 기도와 찬송 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찬송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종말에 이를수록 찬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십시오. 마태복음에서 유다서에 이르기까지 찬송이 그다지 비중 있게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이르러 찬송은 대폭발이라 할 만큼 엄청나게 증폭되고 있습니다. 본서 4,5,7장, 그리고 19장, 재림하시기 직전에 우주적인 찬송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찬송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주실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주님의 구속 사역과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노래하고 또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찬송의 깊은 세계에 사로잡히게 하십시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오직 찬송하는 자들로 보좌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매일 매시간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