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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국오난(得國五難)
나라를 얻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得 : 얻을 득(彳/8)
國 : 나라 국(囗/8)
五 : 다섯 오(二/2)
難 : 어려울 난(隹/11)
출전 : 사기(史記) 卷40 초세가(楚世家)
이 성어는 선대의 왕이 죽고 자손이 왕 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현명한 신하가 말한 내용이다.
춘추시대 남방 초(楚)나라의 공왕(共王)은 총애하는 아들 다섯을 두고 있었는데, 적자(嫡子)에게 임금의 자리를 세우지 않고,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올린 뒤 귀신이 결정하면 그에게 사직을 맡기려 하였다.
初, 共王有寵子五人, 無適立, 乃望祭群神, 請神決之, 使主社稷.
그래서 몰래 실내에다 벽옥을 묻어두고는 다섯 공자를 불러 목욕 재계시켜서는 안으로 들여보냈다.
而陰與巴姬埋璧於室內, 召五公子齋而入.
훗날 강왕이 되는 맏아들은 벽옥을 뛰어 넘었고, 영왕이 되는 둘째 위는 팔로 벽옥을 눌렀으며, 자비(子比)와 자석(子晳)은 벽옥에서 멀리 했다.
康王跨之, 靈王肘加之, 子比子晳皆遠之.
당시 가장 어렸던 평왕 기질(棄疾)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긴 채 절을 했는데 벽옥의 한가운데를 눌렀다.
平王幼, 抱其上而拜, 壓紐.
결과적으로 강왕은 장자로 왕위에 즉위하였으나 그 아들에 이르러 자리를 빼앗겼고, 위(圍)는 영왕이 되었으나 시해를 당했다.
故康王以長立, 至其子失之, 圍為靈王, 及身而弒.
자비는 열흘 남짓 왕 노릇을 하는 데 그치고 자석은 그나마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모두 죽임을 당했다. 네 아들 모두 후손이 끊어졌다.
子比為王十餘日, 子晳不得立, 又俱誅. 四子皆絕無後.
유독 막내인 기질만이 훗날 자리에 올라 평왕이 되어 초의 제사를 이어갔으니 마치 귀신의 뜻에 부합한 것 같다.
唯獨棄疾後立, 為平王, 竟續楚祀, 如其神符.
강왕을 이은 영왕(靈王)의 정치는 포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 자비(子比)가 망명지인 진(晉)나라에서 돌아와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 한선자(韓宣子; 집정대신)가 숙향(叔向; 대부)에게 물었다. "자비는 아마도 성공하겠지요?"
初, 子比自晉歸, 韓宣子問叔向曰: 子比其濟乎.
숙향이 대답했다.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對曰: 不就.
선자가 말했다. "초나라 백성들이 한결같이 초영왕을 싫어하여, 새 임금을 세우려 하는 것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과 같은데 어찌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宣子曰: 同惡相求, 如市賈焉, 何為不就.
숙향이 대답했다. "함께 어울려 잘 지내는 사람도 없는데 누구와 함께 미워합니까? 나라를 얻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對曰: 無與同好, 誰與同惡. 取國有五難.
총애하는 자는 있는데 어진 사람이 없는 것이 그 하나요,
有寵無人, 一也.
인재는 있는데 주도하는 자가 없는 것이 그 둘이요,
有人無主, 二也.
주도하는 자는 있는데 계책이 없는 것이 그 셋이요,
有主無謀, 三也.
계책은 있지만 백성이 따르지 않는 것이 그 넷이요,
有謀而無民, 四也.
백성은 있으나 덕이 없는 것이 그 다섯입니다.
有民而無德, 五也.
자비는 진(晉)나라에 13년을 있었는데, 진나라와 초나라에 그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 두루 통달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어진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
子比在晉十三年矣, 晉楚之從不聞通者, 可謂無人矣.
가족이 없어지고 친족도 배반 했으니 주도하는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族盡親叛, 可謂無主矣.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정변을 일으키고자 하니 계책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無釁而動, 可謂無謀矣.
평생을 나라 밖에서 살았으니 백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
為羈終世, 可謂無民矣.
나라 밖에 망명하였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의 자취를 안타까워하지 않으니 덕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亡無愛徵, 可謂無德矣.
초나라 왕이 포학하여 거리낄 바가 없지만, 자비가 다섯 가지 어려움을 뛰어 넘어 군주를 시해하려는데 누가 그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초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은 아마도 기질이겠지요."
王虐而不忌, 子比涉五難以弒君, 誰能濟之. 有楚國者, 其棄疾乎.
(史記/卷40 楚世家)
숙향의 말대로 자비는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불과 약 열흘 만에 권력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나라를 얻는 데 따르는 다섯 가지 어려움을 거론한 숙향의 지적이 오늘에도 새롭다. 지금 우리 대권주자들을 평가하는 의미있는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 천하를 독점하려는 자 천하를 잃는다
수서(隋書) 권66 이악전(李諤傳)에 보면 공자(孔子)의 제자 언언(言偃)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疎矣.
자신이 모시는 군주(리더)와 공을 다투면 틀림없이 군주의 단점을 떠들게 돼 결국은 욕을 당하게 된다. 친구와 공을 다투면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오늘날로 보자면 이 말은 적절치 않다. 누가 세웠건 모든 공을 군주에게 돌리라는 봉건적, 수동적 사유 방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세우지 않은 공을 가로채거나 남이 세운 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조는 여전하다.
하지만 백성과 다투는 정치가 가장 못난 정치라 했듯이, 부하들과 공을 다투는 리더가 가장 못난 리더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명구는 부하가 아닌 리더의 처지에서 되새겨봐야 한다.
지금 우리네 정치권의 상황이 영락없이 이 꼴이다. 양보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권력을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권력투쟁의 계절이 돌아온 모양이다.
◼ 권력은 균형추
총선을 둘러싼 공천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상은 권력투쟁으로 흘러간다. 한쪽은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다른 쪽은 이것이 현직에게만 유리한 애매모호한 방식이라며 태클을 걸었다.
개입해서는 안 되는 청와대까지 나섰으니 시작부터 모양이 볼썽사납다. 같은 편끼리도 사정없이 물고 뜯는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권력의 본질조차 모르는 행태인지라 더 정신 사납다.
권력(權力)이란 단어에서 '권(權)'은 저울추를 말한다. 달고자 하는 물건의 무게를 알기 위해 저울의 균형을 잡는 추다. 따라서 권력은 힘을 나눈다는 뜻이 된다.
말 그대로 Balance of Power다. 힘을 나눌 줄 알아야 무게를 정확하게 달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고자 하는 무게가 바로 민심이다.
따라서 민심을 제대로 달려면 권력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정치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정치가들은 권력을 그저 움켜쥐는 것으로만 아는 단세포적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어쨌거나 관건은 민심의 향방이다. 저들이 민심을 깔보든 말든 칼자루는 민심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누가 민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느냐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포함한 권력을 얼마나 저울에 내려 놓느냐에 달렸다는 말이다.
명나라 때 충신 방효유(方孝孺)는 이런 말을 남겼다. "흥하는 군주는 남이 말을 해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망하는 군주는 남이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한다."
將興之主, 惟恐人之無言.
將亡之主, 惟恐人之有言.
위정자와 정치가의 흥망을 바른 말의 수용 여부와 연계한 명언이다. 바른 말이 무엇인가. 바로 민심이다. 바른 말, 민심에 귀를 기울여라. 민심은 항상 말할 준비가 돼 있다.
◼ 권세가 다하면 멀어진다
기원전 697년 중원의 정(鄭)나라에 내분이 일어나 여공 돌(突)은 채(蔡) 나라로 도망갔다가 역을 거점으로 재기를 노렸다.
기원전 680년, 여공 돌은 정나라를 공격해 대부 보하(甫瑕; 부하傅瑕)를 사로잡고는 자리와 이권 따위로 유혹해 자신의 복위를 맹서하게 했다.
보하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돌을 맞아들이겠다고 맹서했다. 보하는 약속대로 정자영과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 돌을 맞아들여 복위시켰다.
약 20년 만에 자리를 되찾은 여공 돌. 하지만 그는 당초 약속과는 달리 보하가 군주를 모시는 데 두 마음을 품었다며 그를 죽이려 했다. 보하는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진(晉)나라의 대부 이극(里克)은 헌공(獻公)이 총애하던 여희(驪姬)가 낳은 두 아들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잇따라 죽이고 진(秦)나라에 망명해 있던 공자 이오(夷吾)를 맞아들여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혜공(惠公)이다.
혜공은 즉위 후 이극에게, "그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군주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두 명의 진나라 군주를 죽였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대의 군주가 될 수 있겠나"며 이극에게 죽음을 강요했다.
그때가 기원전 650년으로 보하가 여공 돌에게 죽음을 강요받은 지 30년 후다.
그런데 또 한 사람, 진(晉)나라 대부 순식(荀息)은 헌공이 죽기에 앞서 어린 해제와 탁자를 잘 보살펴 이들을 진나라 군주로 옹립해 달라며 뒷일을 부탁하자 목숨을 걸고 이들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해제와 탁자에 이어 이극에게 피살됐다. 순식은 목숨으로 절개를 지켰지만 해제와 탁자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진 못했다.
사마천은 이 두 사건을 함께 다뤘다. 사건의 성격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정세가' 논평에서 두 사건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권세와 이익으로 뭉친 자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멀어지기 마련이다."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보하가 그랬다. 보하는 정나라 군주를 겁박하여 여공을 맞아들였지만 여공은 끝내 그를 배신하고 죽게 했다. 이것이 진나라의 이극과 뭐가 다른가.
절개를 지킨 순식은 자신의 몸을 버리고도 해제를 지키지 못했다. 형세의 변화에는 다양한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 천하를 얻는 길
어떤 일의 상황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데는 많은 원인이 작용하게 마련이라는 사마천의 지적은 참으로 핵심을 찌른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인간사 변화와 변질의 가장 강력하고도 추악한 요인은 사마천이 첫머리에 지적한 권세와 이익일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어록이자 대화록이라 할 수 있는 '맹자(孟子)' 이루(離婁) 상(上) 편에서, "걸 임금과 주 임금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들의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백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失其民者, 失其心也)"고 썼다.
그러면서, "천하를 얻는 길이 있으니 그 백성을 얻는 것이고, 백성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그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 마음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하고자 하는 것을 모아주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천하의 책임을 위정자 한 사람의 덕으로 돌리면서도 위정자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격하했다. 그래서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나라)이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고 말한다.
맹자는 백성의 권익을 맨 위에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를 얻으려면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의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회남자(淮南子)' 병략훈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여러 사람을 위해 일하면 많은 사람이 돕지만, 자신을 위해 일하면 사람들이 떠나간다."
擧事以爲人者, 衆助之.
擧事以自爲者, 衆去之.
또한 "여러 사람이 도우면 약해도 강해질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떠나면 강해도 망할 수밖에 없다."
衆之所助, 雖弱必强.
衆之所去, 雖大必亡.
맹자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사심없이 백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야말로 민심을 얻는 길이란 의미다. 민심이야말로 통치의 좋고 나쁨은 물론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절대 기준이다. 그래서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춘추시대 남방의 초나라 평왕(平王)은 속임수로 두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이다. 즉위 후 그는 백성과 제후들이 반발할까 겁이 나서 은혜를 베풀었다.
주변국인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는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예전처럼 그 후손을 국군으로 세웠으며, 빼앗은 정나라 땅도 되돌려줬다. 나라 안을 잘 다독거리고, 정치와 교화를 정돈했다.
당초 평왕의 아버지 공왕(共王)에게는 총애하는 아들 다섯이 있었지만 적자를 세우지 않았다. 귀신들에게 제사를 올려 귀신이 결정하면 그에게 사직을 맡기려 했다. 그래서 몰래 실내에다 벽옥을 묻어두고는 다섯 공자를 불러 목욕재계시킨 뒤 안으로 들여보냈다.
훗날 강왕(康王)이 되는 맏아들은 벽옥을 뛰어넘었고, 영왕(靈王)이 되는 둘째 위는 팔로 벽옥을 눌렀으며, 셋째와 넷째인 자비와 자석은 벽옥에서 멀리 떨어졌다. 가장 어린 평왕 기질(棄疾)은 다른 사람 품에 안긴 채 절을 했는데 벽옥의 한가운데를 눌렀다.
(得國五難)
결과적으로 강왕은 장자로 즉위했으나 그 아들에 이르러 자리를 빼앗겼고, 위는 영왕이 됐으나 시해당했고, 자비는 열흘 남짓 왕 노릇을 했고, 자석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네 아들이 모두 후손이 끊겼다. 유독 기질만이 훗날 자리에 올라 평왕이 돼 초의 제사를 이어갔으니 마치 신의 뜻에 부합한 것 같다.
영왕이 시해당한 뒤 자비가 진(晉) 나라에서 돌아오자 한선자(韓宣子)가 숙향(叔向)에게, "자비가 성공 하겠습니까?"고 물었다. 숙향은 "못할 것입니다"고 했다.
선자가 "저들이 같은 증오심을 가지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 같은데 어째서 안 된다는 것입니까?"고 묻자,
숙향은 이렇게 답했다. "함께 어울려 잘 지내는 사람도 없는데 누구와 함께 미워합니까. 나라를 얻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得國五難)이 있습니다. 총애하는 자는 있는데 인재가 없는 것이 그 하나요, 인재는 있는데 지지세력이 없는 것이 그 둘이요, 지지세력은 있는데 책략이 없는 것이 그 셋이요, 책략은 있으나 백성이 없는 것이 그 넷이요, 백성은 있으나 덕이 없는 것이 그 다섯입니다."
그러면서 숙향은 자비가 진(晉)에서 13년을 있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 학식이 넓고 깊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인재가 없다는 것이고, 가족은 없고 친척은 배반했으니 지지세력이 없다는 것이며, 기회가 아닌데도 움직이려 하니 책략이 없다는 것이고, 종신토록 (국외에) 매여 있었으니 백성이 없다는 말이며, 명하고 있는 데도 아무도 그를 생각하지 않으니 덕이 없다는 뜻이라면서 절대 권력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숙향의 '득국오난(得國五難)'은 비단 자비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은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물론 모든 정치가와 통치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지적이다.
국정을 끌어갈 인재, 정책과 권력 기반을 지지하는 세력, 국정에 대한 원대한 책략, 백성, 그리고 덕을 갖춰야만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정치적 상황과 통치자의 모습을 숙향의 '득국오난(得國五難)'에 대입해 찬찬히 곱씹어 보자.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 가장 못난 정치
수천 년 동안 많은 현자와 선각자들은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찰해 '민심이 천심'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백성과 민심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위정자와 정치가들의 폐부를 찌르기에 충분한 경구들을 남겼다.
특히 최초의 병법서이자 통치 방략서인 '육도(六韜)'를 남긴 강태공(姜太公)은 단호한 어조로 천하 흥망의 관건이 백성에게 달렸다고 일갈했다.
同天下之利者則得天下.
擅天下之利者則失天下.
천하(백성)와 천하의 이익을 함께 누리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독점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강태공은 이 구절 앞에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성과 더불어 같이 아파하고, 같은 마음으로 일을 이루고, 좋지 않은 일은 서로 돕고, 좋아하는 일에 서로 모이면 군대가 없어도 이기고, 무기가 없어도 공격하며, 참호가 없어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강태공은 백성을 위한 정치의 요점을 '백성을 사랑하는 것 뿐이라'는 뜻의 '애민이이(愛民而已)' 라는 말로 간결하게 정리했다. 통치자는 늘 어떻게 하면 백성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할 수 있을까만 고민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태공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통치자는 누가 됐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 못난 정치와 그것이 초래하는 수많은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특히 정치 중에서 '가장 못난 정치란 백성과 다투는 정치'라는 천하의 명언을 남겼다.
사마천이나 강태공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백성을 힘들게 하는 리더는 백성들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든 리더가 명심해야 한다. 민심과 세태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 어떤 정치인이나 지도자도 살아남을 수 없다.
바야흐로 이합집산(離合集散), 동당벌이(同黨伐異; 패거리를 지어 자신들과 다른 자들을 공격함)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두 사자성어 모두 올해의 고사성어로 선정될 만큼 정치판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됐다.
여야 모두 민심과 여론을 앞세우지만, 정작 민심과 여론은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 천하 흥망은 백성의 책임
수많은 선각자가 민심을 얻는 자가 성공하고 권력을 얻는다고 진단했건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민심을 무시하고 민심마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을 뽑아준 왜곡된 민심이 더 문제일 수도 있다. 이제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제대로 보여줄 때가 됐다.
강태공의 말대로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覆水不返盆), 한비자의 말대로 백성이 원망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며(民怨則國危), 고염무의 말대로 천하의 흥망은 백성들 책임이기 때문이다.
민심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바로 선량한 국민이라면 결코 피해서는 안 되는 신성하고 절대적인 의무다.
⏹ 백성을 힘들게 하는 통치자는 누가 되었건 벌을 받아야 한다
강태공은 전설에 나오는 늙은 낚시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11세기 주(周)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고, 이 공으로 지금의 산동성 동쪽 지역을 받아 제(齊)나라를 개국한 건국 군주였다.
이 제나라에서 저 유명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두 주인공인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태어났다.
중국인들이 이런 그에게 붙여준 별칭은 '백가종사(百家宗師)'다. 한 시대의 으뜸가는 스승이란 뜻을 가진 '일대종사(一代宗師)'란 표현은 영화 제목도 있고 해서 비교적 익숙하지만 '백가종사'는 생소하다.
뜻을 풀이하자면, '백가의 으뜸가는 스승' 정도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백가'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그 '백가'로 일가를 이룬 많은 사상이나 학파 또는 문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백가종사'는 나름 일가를 이룬 많은 사상(가)들을 모두 아우르는 최초 최고의 스승인 셈이다.
강태공은 뛰어난 책략과 풍부한 경험으로 주문왕(周文王)과 그 아들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은(殷)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건국하는데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만년에는 이런 자신의 경험을 종합한 '육도(六韜)'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병법서이자 치국방략의 큰 이치를 담은 경륜서를 저술했다. 이 때문에 '백가종사'라는 명예로운 별칭이 뒤따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강태공이란 이름조차 그의 본명이 아니다. 태공은 '태공망(太公望)'에서 따온 별칭인데, 주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뒤 주나라의 선조 태공 고공단보가 언젠가는 주나라를 일으킬 훌륭한 인물을 만날 것이라고 예언 했다면서, '태공께서 갈망하던', 즉 '태공망' 하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강태공의 이름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는데 여상(呂尙), 여아(呂牙), 강상(姜尙), 강자아(姜子牙) 등과 같은 다른 이름과 사상보(師尙父)라는 존칭으로도 불렸다. 후대에 '강태공'으로 많이 불렸기 때문에 흔히들 강태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강태공은 그가 남긴 '육도'라는 통치 방략서 때문에 모략가의 원조로도 꼽힌다. 그래서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모성(謀聖)'이란 별칭을 더 선사받았다. 강태공, 귀곡자, 장량, 사마의는 중국의 4대 '모성'이라 할 수 있다.
출중한 지략과 모략으로 제왕을 보좌하는 모사로서 대업을 이루게 만들었기 때문에 '모성'이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강태공은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동해 바닷가 동이족 출신인 강태공의 집안은 전설시대인 요, 순 때 임금을 보좌한 대신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 왕조 때는 여(呂)와 신(申) 지역을 봉지로 받았고, 그 후 강이란 성을 얻었다. 상 왕조 때 집안이 몰락하여 평민으로 전락했다.
강태공에 이르러 집안은 거의 천민과 다를 바 없었다. 강태공은 하는 수 없이 마(馬)씨 집안의 데릴사위로 팔려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처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이후 강태공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민간에서 밥장사, 도살업에 종사했고, 그마저 여의치 않자 고향을 떠나 상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 부근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강태공은 장사와 종업원 생활을 전전하면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긴 끝에 상나라의 수도 조가에 주점을 열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러다 점쟁이 여상(呂尙)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고, 상나라 조정의 대신인 비간을 만나 주 임금을 잠깐 섬기기도 했다.
주 임금을 섬긴 짧은 시간 강태공은 상나라의 상황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는 이내 그곳을 떠나 자신과 배짱이 맞는 다른 인재들과 교류를 확대했다.
이때 만난 인재들이 산의생(散宜生), 굉요(閎夭), 남궁괄(南宮括) 등으로 모두 훗날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주 임금의 폭정은 도를 더해 갔고, 천하 정세의 큰 변화에 강태공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이 무렵 희창(주 문왕)이 유리성에 유폐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희창의 측근들은 강태공을 찾아 희창을 구할 방법을 상의했다.
강태공은 주왕의 취향에 맞추어 재물과 미녀를 바치는 이른바 '투기소호(投其所好;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맞추다)'의 모략으로 희창을 빼내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강태공은 상나라 내부의 부패상을 더욱 부추기는 이간책과 갖가지 유인책으로 상나라를 완전히 기울게 만드는 '경상책(傾商策)'을 제안했다.
이를 '문벌(文伐)'이라 하는데, 무력을 쓰지 않고 적의 내부를 흔들고 이간시키는 책략을 말한다. 강태공의 저술로 전하는 '육도'의 한 편이다.
대세는 희창에게로 기울었다. 하지만 강태공은 여전히 희창을 기다렸다. 그는 이번 기다림이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기다림이 될 것임을 확신했고, 위수(渭水)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희창을 기다렸다. 희창은 강태공을 찾아 그에게 군대를 통솔하는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사(師)라는 자리를 주어 극진히 모셨다.
이에 강태공은 희창에게 이제 무력으로 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멸상책(滅商策)', 즉 '무벌(武伐)'을 건의했다. 강태공의 '멸상책'은 희창의 아들 희발, 즉 무왕 때 가서 실현되었다.
강태공의 활동 범위는 그의 경력에서 보다시피 당대 누구보다 폭 넓었다. 오늘날 산동, 하남, 하북, 섬서성에 걸치는 지역으로 그 당시로는 천하에 해당했다.
이런 폭 넓은 활동에서 체득한 풍부한 경험이 천하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력을 만남으로써 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계책이 마련될 수 있었다.
◼ 군사가 강태공
준비된 기다림 강태공이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가 무엇을 가지고 공을 세웠느냐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마천은 앞서 말한 '경상책'과 '멸상책' 등이 모두 강태공의 넓고 깊은 모략(謀略)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강태공은 정치투쟁에 군사투쟁을 접목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정치투쟁 역시 전쟁에서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고 인식하여 승부의 관건은 투쟁에 있어서 누가 자각적 능동성을 발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정치투쟁이든 군사투쟁이든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이다.
'육도'는 이러한 강태공 실천적 경험과 사상을 이론화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병가(兵家)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군사 전문가 강태공의 기다림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때를 확신했다. 상나라가 버림을 받을 것으로 확신했고, 상나라를 무너뜨릴 책략을 치밀하게 구상했다.
문제는 자신의 책략을 받아들여 천하대세를 변화시키고 주도권을 쥘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희창(주 문왕)의 인재들이 강태공을 알아보고 그를 먼저 찾았다. 이어 강태공의 계책 덕분에 유리성에서 풀려난 희창도 강태공을 찾아 그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으로 강태공의 기다림에 응수했다.
강태공의 기다림은 상, 주 교체라는 커다란 변혁을 끌어냈다. 이 변혁의 과정에서 강태공은 통치 철학의 근본적인 변화를 읽어냈다.
미신(迷信)과 귀신(鬼神)을 숭배했던 풍조가 막을 내리고 인간의 의지가 모든 변화의 원동력이란 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나아가 강태공은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천하라는 보다 진전된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봉국인 제나라가 춘추시대 최초의 패주가 될 수 있는 든든한 기반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강태공의 통치 방식에 대해 듣고는 "어허! 훗날 주 왕실과 같은 동성인 노魯나라가 성이 다른 강태공의 제나라를 섬기게 되겠구나. 정치가 쉽고 친근하면 백성들이 절로 모여드는 법이다"고 예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다림은 엎질러진 물과 같다.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려야 한다. 강태공은 분명 때를 알았다. 동시에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때를 아무리 잘 만나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렵다.
강태공의 낚싯대에 걸친 세월의 무게는 곧 강태공의 이런 성숙된 경륜을 의미했다. 세월을 낚는다는 것은 지난 시간, 즉 기다림에 대한 반추이자 현재에 대한 반성이며 나아가 미래의 반응을 종합하는 입체적인 행위였다.
강태공의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이기도 했다. 준비된 기다림 앞에는 어떤 조짐도 어떤 징조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제대로 된 기다림의 마지막 수순은 확고부동한 결단이기 때문이다.
은나라를 정벌하는 날 날씨도 점복도 다 불길하게 나왔다. 모두들 조짐이 좋지 않다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강태공은 모든 준비가 끝난 상황에서 이런 미신은 대업에 결코 방해가 될 수 없다며 정벌을 단행했다.
강태공과 문왕의 만남은 누가 주동적이건 상호 이해의 기초 위에서 쌍방이 서로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란 점을 잘 보여준다. 그것을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기다림은 최선, 나아가 최상의 만남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강태공과 문왕의 만남은 역사의 선택이었다. 제대로 된 기다림은 중대한 순간과 상황에서 시간을 벌게 해주는 밑천이 된다.
두 사람이 서로를 견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오래 기다렸고, 그 기다림의 질이 기다린 시간을 뛰어넘게 했다. 또 기다려 보았기에 허망한 미신과 징크스를 과감하게 부정할 수 있었다.
주나라가 미신을 숭배한 상나라와는 달리 건강한 통치방식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강태공의 이 같은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통치 방략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통치와 경제, 둘이 아닌 '정경합일(政經合一)'의 경지 사마천은 춘추전국에서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약 400년 동안 크게 치부한 부자들의 기록인 '사기' 권129 화식열전에서 강태공의 경제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사기 화식열전에서 이르기를, "옛날 태공망(太公望)이 영구(營丘)에 봉해졌는데 땅은 소금기가 많고 인민은 적었다. 이에 태공은 여자들에게 베짜기를 권하여 그 기술을 최고로 만들고, 물고기와 소금을 유통시키니 물산과 사람이 모여드는데 마치 꾸러미로 동전을 꿰듯, 수레바퀴살이 안으로 모여들 듯했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모자, 허리띠, 옷, 신발이 천하에 퍼졌고, 동해東海와 태산泰山 사이의 (나라들이) 옷깃을 여미고 가서 조회했다."
또 '제태공세가'에서는, "봉국(제나라)에 이른 태공은 정치를 고쳐 그곳의 습속에 따라 예를 간소하게 하였다.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어업과 소금의 이점을 잘 살렸다. 그러자 인민들이 제로 많이 돌아와 제는 큰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경제와 관련한 강태공의 기록은 이상이 거의 전부라서 구체적인 경제정책이나 사상을 얻어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강태공 이후 제나라의 발전상황과 춘추시대 관중의 경제정책에 투영된 강태공의 그림자를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은 날부터 다양한 상업활동 종사했고, 천하 각지를 떠돌며 지역의 특성과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제나라에 맞는 정책, 즉 상공업을 장려함으로써 제나라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는 논평은 비록 몇 글자 되지 않지만 중국 경제사와 상업사에서 강태공이 차지하는 비중을 아주 함축적이고 묵직하게 전하고 있다.
강태공은 병가의 원조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육도'는 그의 젊은 날 경력을 바탕으로 주나라 건국, 제나라 통치로 이어지는 천하경영의 이치를 피력한 통치 방략서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제나라를 경영하면서 상공업을 장려하여 제나라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는 '사기'의 기록을 합쳐 보면, 강태공은 경제와 정치의 함수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했던 최초의 경제 전문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천하이고, 천하의 이익을 함께 나누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정치와 경제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이 관계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정경유착'과는 엄연히 그 경지와 질을 달리한다. 강태공이 보기에 정치가 되었건 경제가 되었건 실질적인 혜택을 누려야 할 대상은 통치자도, 소수 지배층도 아닌 천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육도 수사(守士)에서, "부유하지 않으면 인의를 베풀 수 없고(不富無以爲仁), 베풀지 않으면 친한 사람을 모을 수 없다(不施無以合親)고 했다.
◼ 강태공의 통치방략
백성이 알파요 오메가이다 젊은 날부터 천하 민간을 떠돌며 쌓은 다양하고 풍부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강태공은 자기만의 통치방략을 수립했는데 그의 통치방략은 간소하고 쉬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주나라 초기 강태공이 제 지역을 봉지로 받아 부임할 당시 강태공과 함께 주나라 건국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주공(周公, 무왕의 동생)은 노(魯) 땅을 봉지로 받아 노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그러나 주공은 중앙 왕실의 중요한 업무를 맡다보니 자신이 직접 봉지로 가지 못하고 아들 백금(伯禽)을 대신 보냈다.
백금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야 주공에게 그간에 노나라를 다스린 상황을 보고하러 중앙으로 올라왔다. 주공이 이렇게 늦은 이유를 묻자 백금은 "그곳의 풍속과 예의를 바꾸고, 3년 상을 치르느라 늦었습니다"고 답했다.
그런데 제나라로 간 강태공은 이보다 앞서 불과 다섯 달 만에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주공은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물었다. 이에 강태공은 "소신은 그저 군신의 예의를 간소화하고 그곳의 풍속과 일처리 방식을 따랐을 뿐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주공은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어허! 훗날 노나라가 제나라를 섬기게 되겠구나! 무릇 정치란 간소하고 쉽지 않으면 백성들이 가까이하지 않는다. 정치가 쉽고 백성에게 친근하면 백성들이 절로 모여드는 법이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공은 강태공과 아들 백금의 통치 방식의 차이로부터 두 나라의 미래를 예견한 것이다. 이같은 강태공의 통치방략은 '육도'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핵심이 되는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육도에 이르기를, "천하를 얻으려는 것은 마치 들짐승을 쫓는 것과 같아 천하가 모두 고기를 나눌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또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것과 같아 물을 건너고 나면 모두 그 이익을 고루 나누고, 패하면 모두 피해를 입는 것이다."
누구나 이익을 위해 천하를 얻으려 하지만 그 이익을 고루 나눌 수 있는 자만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육도에 이르기를,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아파하고, 같은 마음으로 일을 이루고, 좋지 않은 일은 서로 돕고, 좋아하는 일에 서로 모이면 군대가 없어도 이기고, 무기가 없어도 공격하고, 참호가 없어도 지킬 수 있다."
강태공은 통치자가 백성들과 동고동락 하면, 즉 위 아래가 한 마음이면 천하무적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백성은 사랑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애민이이愛民而已)"고 했다.
육도에 이르기를,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 천하의 이익을 함께 나누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혼자 차지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강태공의 통치 방략의 핵심은 천하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야 천하를 얻고 제대로 통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상나라 마지막 임금 주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예견했다.
육도에 이르기를, "지금 상나라 왕은 자신이 살아남을 것만 알았지 망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쾌락만 알았지 재앙은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백성을 힘들게 하는 통치자는 누가 되었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춘추시대 현자 숙향은 진(晉)나라 공자 자비(子比)가 정쟁의 와중에서 나라(백성)를 얻기 힘들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숙향이 이르기를, "함께 어울려 잘 지내는 사람도 없는데 누구와 함께 미워합니까? 나라를 얻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 즉 득국오난(得國五難)이 있습니다. 총애하는 자는 있는데 인재가 없는 것이 그 하나요, 인재는 있는데 지지 세력이 없는 것이 그 둘이요, 지지 세력은 있는데 책략이 없는 것이 그 셋이요, 책략은 있으나 백성이 없는 것이 그 넷이요, 백성은 있으나 덕이 없는 것이 그 다섯입니다."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 못난 정치와 그것이 초래하는 수많은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데, 그는 정치 중에서 '가장 못난 정치란 백성과 다투는 정치'라는 천하의 명언을 남겼다.
숙향도 그렇고 강태공의 일갈 역시 사마천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강태공과 같은 큰 정치가가 어느 때보다 절박한 우리 현실이다.
▶️ 得(얻을 득)은 ❶회의문자로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貝(패; 화폐)와 寸(촌; 손)의 합자이다. 돈이나 물품을 손에 넣어 갖고 있는 일의 의미로, 옛 모양은 貝(패)와 又(우), 手(수)를 합(合)한 자형(字形)이다. ❷회의문자로 得자는 '얻다'나 '손에 넣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得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貝(조개 패)자, 寸(마디 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得자를 보면 마노 조개를 쥐고 있는 모습만이 그려져 있었다. 마노 조개는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 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한때 중국에서는 화폐로 쓰였었다. 그래서 갑골문에서의 得자는 화폐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재물을 획득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금문에서는 여기에 彳자가 더해지면서 지금의 得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得(득)은 (1)소득(所得)이나 이득(利得) (2)정토에 왕생(往生)하여, 열반(涅槃)의 증과(證果)를 얻음 (3)풍수지리의 혈(穴), 또는 내명당(內明堂) 안에서 흐르는 물 등의 뜻으로 ①얻다 ②손에 넣다 ③만족하다 ④고맙게 여기다 ⑤깨닫다 ⑥알다 ⑦분명해지다 ⑧적합하다 ⑨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⑩이루어지다 ⑪만나다 ⑫탐하다, 탐내다 ⑬사로잡다 ⑭덕(德), 덕행(德行) ⑮이득(利得), 이익(利益)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얻을 획(獲),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잃을 상(喪), 잃을 실(失), 덜 손(損), 떨어질 락(落)이 있다. 용례로는 쓸 만한 사람을 얻음을 득인(得人),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꼭 알맞음을 득중(得中), 아들을 낳음을 득남(得男), 딸을 낳음을 득녀(得女), 얻음과 잃음을 득실(得失), 뜻을 이루어 자랑함을 득의(得意), 투표에서 표를 얻음을 득표(得票), 이익을 얻음을 득리(得利), 풍악이나 노래 등의 곡조가 썩 아름다운 지경에 이름을 득음(得音), 어떠한 시험이나 경기 등에서 점수를 얻음 또는 그 점수를 득점(得點), 목적을 달성함을 득달(得達), 참여할 수 있게 됨을 득참(得參), 아들을 낳음을 득남(得男), 도를 깨달음을 득도(得道), 바라던 것이 뜻대로 됨 또는 뜻을 이룸을 득지(得志), 수입이 되는 이익을 소득(所得), 남의 말이나 행동을 잘 알아차려 이해함을 납득(納得), 얻어 내거나 얻어 가짐을 획득(獲得), 여러 모로 설명하여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도록 잘 알아듣게 함을 설득(說得), 어떤 자격을 취하여 얻음을 취득(取得), 이익을 얻음을 이득(利得), 깊이 생각하여 이치를 깨달아 알아내는 것을 터득(攄得), 물건을 주워서 얻음을 습득(拾得), 사람으로써 알아야 할 것을 배운 후에는 잊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득능막망(得能莫忘), 뜻한 것을 이루어 뽐내는 기색이 가득함을 일컫는 말을 득의만만(得意滿滿), 농나라를 얻고 나니 촉나라를 갖고 싶다는 뜻으로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득롱망촉(得隴望蜀), 얻은 도끼나 잃은 도끼나 매일반이라는 뜻으로 얻고 잃음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득부실부(得斧失斧), 얻은 것으로는 그 잃은 것을 메워 채우지 못한다는 뜻으로 손해가 됨을 일컫는 말을 득불보실(得不補失), 한 가지 일을 알면 다른 열 가지 일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기억력이 좋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득일망십(得一忘十),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는다는 뜻으로 바라던 바를 이루고 나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썼던 사물을 잊어버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득어망전(得魚忘筌), 득실이 상반한다는 뜻으로 이로움과 해로움이 서로 마찬가지임을 일컫는 말을 득실상반(得失相半), 바라던 일이 이루어져서 우쭐거리며 뽐냄을 일컫는 말을 득의양양(得意揚揚), 뜻한 바를 이루어서 기쁜 표정이 얼굴에 가득 참을 일컫는 말을 득의만면(得意滿面), 좋은 때를 얻으면 태만함이 없이 근면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득시무태(得時無怠), 바라던 일이 뜻대로 이루어질 좋은 기회를 일컫는 말을 득의지추(得意之秋), 부모의 뜻에 들고 부모의 뜻에 순종함을 일컫는 말을 득친순친(得親順親), 그 뜻을 펼 수가 있음 또는 그 뜻을 펴게 됨을 이르는 말을 득신기정(得伸其情), 사람으로써 알아야 할 것을 배운 후에는 잊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득능막망(得能莫忘) 등에 쓰인다.
▶️ 國(나라 국)은 ❶회의문자로 国(국)은 간자(簡字), 囗(국), 囶(국), 圀(국)은 고자(古字), 囲(국), 围(국)은 동자(同字)이다. 國(국)은 백성들(口)과 땅(一)을 지키기 위해 국경(口)을 에워싸고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는 데서 나라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國자는 '나라'나 '국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國자는 囗(에운담 위)자와 或(혹 혹)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或자는 창을 들고 성벽을 경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或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누가 쳐들어올까 걱정한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혹시'나 '만일'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囗자를 더한 國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國자는 성벽이 두 개나 그려진 형태가 되었다. 참고로 國자는 약자로는 国(나라 국)자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國(국)은 (1)어떤 명사(名詞) 다음에 쓰이어 국가(國家), 나라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나라, 국가(國家) ②서울, 도읍(都邑) ③고향(故鄕) ④고장, 지방(地方) ⑤세상(世上), 세계(世界) ⑥나라를 세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 백성을 국민(國民), 나라의 법적인 호칭을 국가(國家), 나라의 정사를 국정(國政), 나라의 안을 국내(國內), 나라의 군대를 국군(國軍), 나라의 이익을 국익(國益), 나라에서 나라의 보배로 지정한 물체를 국보(國寶), 국민 전체가 쓰는 그 나라의 고유한 말을 국어(國語), 한 나라의 전체를 전국(全國), 자기 나라 밖의 딴 나라를 외국(外國), 양쪽의 두 나라를 양국(兩國), 외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국(歸國), 국가의 수를 세는 단위를 개국(個國), 조상 적부터 살던 나라를 조국(祖國), 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을 순국(殉國),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국(愛國),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을 이르는 말을 국치민욕(國恥民辱), 나라의 급료를 받는 신하를 국록지신(國祿之臣), 나라의 풍속을 순수하고 온화하게 힘을 이르는 말을 국풍순화(國風醇化),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흩어졌으나 오직 산과 강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을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구하는 방패와 성이란 뜻으로 나라를 구하여 지키는 믿음직한 군인이나 인물을 이르는 말을 구국간성(救國干城),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란 뜻으로 저속하고 난잡한 음악을 일컫는 말을 망국지음(亡國之音), 국권피탈을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을 경술국치(庚戌國恥),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이해 관계가 밀접한 나라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순치지국(脣齒之國),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노자가 그린 이상 사회, 이상 국가를 이르는 말을 소국과민(小國寡民), 한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운다는 뜻으로 뛰어난 미인을 이르는 말을 일고경국(一顧傾國), 사이가 썩 친밀하여 가깝게 지내는 나라 또는 서로 혼인 관계를 맺은 나라를 이르는 말을 형제지국(兄弟之國) 등에 쓰인다.
▶️ 五(다섯 오)는 ❶지사문자로 乄(오)와 동자(同字)이다.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 선을 하나씩 늘려 썼으나 다섯으로 한 단위가 되고 너무 선이 많게 되므로 모양을 바꿔 꼴로 썼다. 五(오)는 나중에 모양을 갖춘 자형(字形)이다. ❷상형문자로 五자는 '다섯'이나 '다섯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五자는 나무막대기를 엇갈려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나무막대기나 대나무를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보통 1~3까지는 막대기를 눕히는 방식으로 숫자를 구분했지만 4를 넘어가면 혼동이 생겼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막대기를 엇갈리게 놓는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五자이다. 갑골문에서의 五자는 二사이에 X자를 넣은 방식으로 표기했었지만, 해서에서는 모양이 바뀌었다. 그래서 五(오)는 다섯이나 오(伍)의 뜻으로 ①다섯, 다섯 번 ②다섯 곱절 ③오행(五行: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④제위(帝位: 제왕의 자리) ⑤별의 이름 ⑥다섯 번 하다, 여러 번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를 오륜(五倫), 한 해 가운데 다섯째 달을 오월(五月), 그 달의 다섯째 날 또는 다섯 날을 오일(五日), 음률의 다섯 가지 음을 오음(五音), 다섯 가지 곡식(쌀 보리 조 콩 기장)을 오곡(五穀), 다섯 가지의 감각(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오감(五感), 다섯 가지 빛깔 곧 푸른빛 누른빛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다섯 가지 색을 오색(五色), 다섯 가지 계율이나 계명을 오계(五戒), 퍽 많은 수량을 나타내는 말을 오만(五萬), 다섯 가지 욕심이라는 오욕(五慾), 사람이 타고 난 다섯 가지 바탕을 오사(五事),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상황을 알 길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오리무중(五里霧中), 오십 보 도망한 자가 백 보 도망한 자를 비웃는다는 뜻으로 조금 낫고 못한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안다는 뜻으로 쉰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을 오십천명(五十天命), 다섯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많은 장서를 일컫는 말을 오거지서(五車之書), 좀 못하고 좀 나은 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오십소백(五十笑百), 닷새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열흘만에 한번씩 비가 온다는 뜻으로 기후가 순조로움을 이르는 말을 오풍십우(五風十雨) 등에 쓰인다.
▶️ 難(어려울 난, 우거질 나)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새 추(隹; 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근; 난)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진흙 속에 빠진 새가 진흙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뜻이 합(合)하여 '어렵다'를 뜻한다. 본래 菫(근)과 鳥(조)를 결합한 글자 형태였으나 획수를 줄이기 위하여 難(난)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새의 이름을 가리켰다. ❷형성문자로 難자는 '어렵다'나 '꺼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難자는 堇(진흙 근)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堇자는 진흙 위에 사람이 올라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근, 난'으로의 발음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難자는 본래 새의 일종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일찌감치 '어렵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새를 뜻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새의 일종을 뜻했던 글자가 왜 '어렵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일까? 혹시 너무도 잡기 어려웠던 새는 아니었을까? 가벼운 추측이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래서 難(난, 나)은 (1)어떤 명사(名詞) 아래에 붙어서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렵다 ②꺼리다 ③싫어하다 ④괴롭히다 ⑤물리치다 ⑥막다 ⑦힐난하다 ⑧나무라다 ⑨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⑩공경하다, 황공해하다 ⑪근심, 재앙(災殃) ⑫병란(兵亂), 난리(亂離) ⑬적, 원수(怨讐) 그리고 ⓐ우거지다(나) ⓑ굿하다(나) ⓒ어찌(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쓸 고(苦), 어려울 간(艱)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쉬울 이(易)이다. 용례에는 어려운 고비를 난국(難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난문(難問), 어려운 문제를 난제(難題), 전쟁이나 사고나 천재지변 따위를 당하여 살아 가기 어려운 처지에 빠진 백성을 난민(難民), 풀기가 어려움을 난해(難解), 일을 해 나가기가 어려움을 난관(難關), 무슨 일이 여러 가지 장애로 말미암아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음을 난항(難航), 꺼리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을 난색(難色), 어려움과 쉬움을 난이(難易), 견디어 내기 어려움을 난감(難堪), 바라기 어려움을 난망(難望), 처리하기 어려움을 난처(難處), 잊기 어렵거나 또는 잊지 못함을 난망(難忘), 어떤 사물의 해명하기 어려운 점을 난점(難點), 뭐라고 말하기 어려움을 난언(難言), 병을 고치기 어려움을 난치(難治), 이러니 저러니 옳으니 그르니 하며 시비를 따져 논하는 것을 논란(論難),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비난(非難),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궁핍함을 곤란(困難), 뜻밖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을 재난(災難), 힐문하여 비난함을 힐난(詰難), 괴로움과 어려움을 고난(苦難), 위험하고 어려움을 험난(險難), 공격하기 어려워 좀처럼 함락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난공불락(難攻不落),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일컫는 말을 난망지은(難忘之恩),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비슷함 또는 사물의 우열이 없다는 말로 곧 비슷하다는 말을 난형난제(難兄難弟), 마음과 몸이 고된 것을 참고 해나가는 수행을 일컫는 말을 난행고행(難行苦行), 어려운 가운데 더욱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난중지난(難中之難),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생겨난다는 말을 난사필작이(難事必作易),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서로 묻고 대답함을 일컫는 말을 난의문답(難疑問答), 매우 얻기 어려운 물건을 일컫는 말을 난득지물(難得之物), 변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일컫는 말을 난명지안(難明之案), 교화하기 어려운 어리석은 백성을 이르는 말을 난화지맹(難化之氓)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