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많이 지난 이야기지만 '음'자로 이으려다 보니 불현듯 음성의 동락리 전투가 생각나네요. (지금은 충주로 바뀌었음)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런 인민군의 기습남침으로 우리는 사흘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만 하고 있었지요.
그렇게 밀리던 국군의 6사단 7연대가 음성의 동락리 뒷산에서 적의 남침을 저지하고자 했을 때.......
당시 인민군 48연대가 도로를 통하여 동락리 초등학교까지 와서, 우연히 만난 그 학교 김재옥 교사에게 국군의 행방을 물었으나
김교사는 국군은 이미 후퇴하고 없다 하고는, 슬그머니 산길을 올라 뒷산에 있는 국군 7연대 2대대에 이 내용을 알렸습니다.
이 정보를 받은 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은밀히 인민군을 포위하고 박격포와 기관총 등으로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6.25가 터지면서 국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로 적 사살 1,000여명과 132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또 이 전투에서 포로로부터 얻은 첩보로 보은과 상주 사이의 계곡에서 매복학고 있다가 적의 대부대를 일망타진 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전투를 화령장 전투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계속 후퇴하면서도 적을 기습하여 적을 제압하니 적의 전진 속도도 지연되었고 아군의 사기는 충천하였습니다.
이 공로는 오로지 충주 사범학교를 졸업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앳된 김재옥 여교사의 몫이였습니다.
이 전투로 국군 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과 더불어 전원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그러던 중 김재옥 여교사도 알게 모르게 이 부대의 장교였던 이득주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전쟁은 끝나고, 국토 재건사업이 큰일로 대두되자, 육군은 건설에 필요한 공병장교를 대폭 양성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과에 있던 장교들을 지원받아 필요한 교육을 시켜 각지로 나아가 국토재건사업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김재옥 여교사의 남편 이득주도 공병으로 전과하여 전후방을 오가며 군 생활을 하던중, 인제에 있는 모사단에서
육군 중령으로 공병대대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득주 대대장이 부임하기전, 전임인 박병희 중령은 부하였던 고재봉을 육군교도소로 보냈는데 너무 비인간적 행동을
한 일이 있어 고재봉은 출옥하면 그 장본인인 박병희와 그 가족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 출옥을 하자....
원한의 대상이던 박병희는 이미 다른 부대로 갔지만, 이런 내용을 모르는 고재봉은 새로 와서 살고 있는 이득주와 김재옥 교사
및 아이들까지 도끼로 때려 죽여, 전쟁의 영웅이였던 김교사는 영문도 모르고 날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후에 고재봉은 엉뚱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더구나 김재옥 교사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뉘우쳤다고 했지만
이미 모두 억울하게 고인들이 되었습니다. 또 정부에서는 군인이 아닌 김재옥 교사에게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육군대학 한국전사시간에 이 이야기가 나오지요.
나도 1982년에 육군대학을 나왔고 멀지 않은 곳에 살아서 가끔 그곳을 찿아보기도 했습니다.
또 33사단(현17사단) 에 있을 때는 고재봉이가 그곳 사격장에서 총살당했다고 하여 둘러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일 내용이 많은데 너무 양이 많아서 간단하게 했습니다. 첫 댓글 감사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네요,
김재옥교사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는것인데,
애띤 처녀교사의. 영웅적 애국심을 다시한번 우러러봅니다,
좋은내용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김재옥 교사의 공로가 얼마나 큰 것인데.....
한낱 원한만 가진 살인마의 손에 전 가족이 몰살을 당하다니....
그저 그분의 이야기만 이렇게 전해내려오며 그분의명복만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전쟁도 이겨낸 불굴의 투사가 한낱 살인마에게 목숨을 버렸다니 애달픈 사연 입니다
우리나라는 6.25전쟁 영웅을 더 잘 해줘야하는데 정치적으로 민주화운동 한사람만 부각되고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게요. 살인마에게 엉뚱한 인물이 희생되었으니....
정작 살인을 한 고재봉이도 그 대상이 아니라는 말에 더구나 김재옥 교사라는 말에
김재옥 어머니에게 사죄편지를 쓰며 많이 뉘우쳤다고 하지만, 정작 아까운 인물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이곳은 집에서 멀지 않아 가끔 찿아가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6.25의 어떤 영웅도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현충원에 안장도 못하게 하는 강경성을 띄우고는
나라를 구한 인물들을 구박하다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화령은 상주~보은간 (상주시 화령면) 경계지역이네요.
그 엣날엔 무지막지한 살인 사건도 많지 않아서 고재봉 사건은 세상을 ....
그 고재봉이
그런 실수를....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지만
지하고 전혀 상관 없는 무고한 생명을 해쳤다니 ...ㅉㅉㅉ
확인도 안 했나...ㅉㅉㅉ
고재봉은 죽고도 욕 얻어 먹어도 정말 싸다.
오인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심한 오인... 그것도 영웅이 희생되다니....
고재봉이는 사실 너무 배가 고파 무조건 나가서 먹을 것을 찿다가 어떤집에 들어가 밥을 훔쳐먹었는데
밥만 먹고는 잘 닦여진 군화가 있어서 자기 신발은 벗어놓고 그 군화를 신고 나왔지요.
그런데 그 집은 자기 대대장네 집이였습니다.
대대장이 늦게 퇴근하여 밥을 먹으려고 보니, 어? 밥이 없어졌네요. 그리고 군화도 없어지고...
다음날 대대장은 전병력에게 군화를 신고 연병장에 집합토록 하여 검사결과 고재봉을 찿아냈습니다.
그럼 빳따나 몇대 때리고 타이르면 될 것을 교도소로 보냈습니다.
교도소에 간 고재봉은 감방장이 무슨죄로 들어왔냐? 고 물어 대답을 하자...
빳따나 맞고 그만 둘일 때문에 교도소에 왔느냐? 는 말에, 생각해 보니 호적에 빨간줄이 쳐지는 억울함에
나가면 전부 죽이겠다고 뒤늦은 결심을 하게 됐다고.... 참 우여곡절이 많은 일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재옥 교사 ! 참 요즘 보기 드문
애국자 이시네요 . 그런 훌룽한
분이 계셨기에 지금의 대한 민국이
존재한다고 보여지네요. 지금도
젊은이들 중 찾으면 있으리라 보이네요.
단지 희망 사항일까요 ?
지난 번 대한민국의 장교 한 명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한 사람 보면 참으로 정의에 불타는
청년으로 보여지네요.
물론 국가에 매인 몸이 허락도 없이
국외로 나간 것은 잘못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죽을 수도 있는 전쟁터에
그 한 몸 바친다고 나갔을 땐 그 정
의감에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김재옥 여교사도 인민군을 다른 곳
으로 따돌릴 땐 얼마나 가슴이 콩닥
콩닥 했을까 가히 짐작이 가죠.
대단한 용기였죠. 지금이라도
그 분에게 박수를 보내며 명복을
빌어 봅니다.
김재옥 교사는 1931년 음성군 감곡면에서 출생 1950년 5월 20일 충주 사범학교 졸업.
그리고 6월 20일에 동락초등학교로 발령받아 근무. 1950년 7월 7일에 학교 교정으로 무작정 들어온
인민군을 피해 뒷산에서 북쪽을 향해 지키는 국군에게 4km의 산길을 걸어가 신고하였습니다.
처음엔 이 정보를 믿지 않자, 김교사는 눈물을 흘리며 '적을 보고도 잡지 못하는 비겁한 국군' 이라고 하며 울분을 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수의 척후병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니 신고내용은 사실이였고, 그들은 경계고 뭐고 없이 무질서한 모습이였습니다.
이를 보고 포위하여 기습공격을 하였는데, 당시 국군 300여명으로 2,000여명의 인민군을 공격한 것입니다.
적 사상자가 천여명이었고 포로가 132명이니 나머지는 전부 다친 것입니다. 이로써 적 1개연대를 없앤것이지요.
김재옥 교사의 용기로 적의 예봉을 꺽으면서 포로중에 장교가 있어 적의 침략경로를 알아내고 2차로 또 큰 전승을 올렸지요.
그래서 김재옥 교사는 민간인이지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전쟁중 10월 20일에 결혼을 하였고,
33세로 세상을 따나셨습니다. 아쉬운 그의 인생을 애통해 하며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의 진실은 잘알지 못하지만 황당하게 목숨을 잃은게 마음이 아프네요.
아직도 덥습니다~~^^
너무 황당하지요?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이루신 분인데.....
33세의 젊은 나이에 너무 억울하고 안타깝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아침입니다
전사시간에 많이 등장했던??
이야기를 오랜만에 봅니다
도끼사건?
고재봉에게 희생된 후임 대대장가족
이야기???
한창 젊은 나이에 이유없이 간
부부가 마음이 짠합니다
기록에 남을 이야기?
읽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
군생활을 한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비명에 간 김교사와 그 가족들의 어이 없는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부하관리에 교훈이 되는 점을 강조하였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