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근무지 동료와
“이제 집으로 돌아올 수험생을 기다리며 오늘 중요한 일은 자녀에 대한 믿음으로 무조건 수고했다고 안아 주는 일이다. 준비를 많이 했지만 컨디션 난조로 실력 발휘를 못했다고 느껴지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누구나 갖는 같은 마음일 것이다. 12년의 먼 길을 쉼 없이 걸어온 너희는 무조건 장하고 대단하다.” 오늘 자 지방지에 실린 지역 문학관 상주 작가가 쓴 칼럼 한 대목이다.
해마다 십일월 중순 목요일은 국가적 대사인 대학 수능일이다. 작년까지 나는 교직에 몸담고 있었는지라 수능일이면 감독관 직무 수행 여부를 떠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올해 이월 정년을 맞은 이후는 학교 교육 현장과 관련된 소식은 거리를 두고 외면하기 일쑤인데 수능 소식은 예외였다. 아직 현직인 젊은 날 근무지 동료들과 수능일에 낮부터 얼굴을 보자고 약속되어서다.
내 교직의 출발은 밀양에서 시작했다. 초등에서 중등으로 전직하면서 고성 바닷가로 잠시 옮겼다가 다시 밀양으로 복귀했었다. 당시 청년기 만났던 일곱 동료 가운데 다섯이 정년이나 명예퇴직하고 둘만 남았는데 한 명은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한 명은 고3 부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현직이라도 수능일에는 고사실 감독관에서 제외되기에 낮부터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볼 수가 있다.
예전 밀양 근무지 동료들과 점심나절에 상남동 상가 횟집에서 만나기로 해서 그때까지 시간이 느긋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와 이웃한 중학교는 임시 휴업으로 교정이 조용했다. 아마 일부 교사들이 감독관으로 지원 나가 정상 일과 운영이 어렵지 싶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니 거리는 메타스퀘어 가로수가 갈색으로 물들어 샛노란 은행잎과 함께 겨울이 오는 길목임을 알 수 있었다.
우람하게 높이 자란 메타스퀘어가 도열한 외동반림로 거리를 걸어 퇴촌삼거리로 나갔다. 단풍이 물들어 낙엽이 지는 창원천 상류 냇가와 천변 가로수와 조경수에서 만추의 서정을 느낄 수 있었다. 창원대학 앞에서 도청 뒤를 돌아가는 자동찻길의 보도를 걸으니 시야에 드는 정병산은 갈색으로 물든 단풍이 절정이었다. 창원중앙역과 가까운 역세권 상가를 지나 물향기공원으로 가 봤다.
예전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신리못은 생태 공원으로 바뀐 현장에서 부들과 갈대와 같은 습지 식물을 살펴봤다. 호숫가에 심어둔 구절초는 아직 하얀 꽃잎이 시들지 않고 달려 있기도 했다. 물향기공원에서 재치고개로 올라가니 터널 근처에는 자동차를 몰아온 나이가 지긋한 사내가 보면대의 악보를 보면서 색소폰 연주에 몰입하고 있었다. 내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인 신중년이었다.
고갯마루에서 토월공원이나 진례산성 남문 터로 향하지 않고 토월동으로 내려섰다. 산기슭에는 지역의 토박이 창원 황씨 재실이 나왔다. 25호 국도와 연결되는 접속도로를 건너 주택가를 걸었다. 주택지가 끝난 곳의 한 고교 교문에는 수능 고사장이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창원 축구센터 체육관 곁 텃밭으로 올라 푸성귀를 살폈더니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은 주지 않아도 되었다.
텃밭에서 내려와 사파동 주택지를 지나니 그곳의 한 고등학교 역시 수능 고사장으로 교정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아파트단지를 지난 상남공원에 이르니 일제 강점기 의열단 단원으로 활약하다 대구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다가 순국한 배종세 열사를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배 열사 태생지였을 상남공원 솔숲에는 계획도시로 사라진 ‘동산마을 옛터’라는 유허비도 같이 있었다.
우리가 가끔 만났던 식당에는 밀양에서 온 이가 둘이고 진주로 옮겨가 사는 이도 한 명이다. 이들은 나처럼 퇴직해 자유로운 영혼으로 열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현직은 한 명 뿐이었고 장유의 한 동료는 모친 간병으로 시간을 내지 못했단다. 옻닭에 이어 생선회가 나와 안주로 삼았다. 예전 근무지 동료들과 밤이 이슥하도록 여러 순배 술잔이 오가면서 얘기꽃을 피우다 헤어졌다. 22.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