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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7월 11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7)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생명과 번영을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이를 실현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제나 주님께 호소하는 사람들과 가나안 신들에게 미혹당하는 자들로 갈라져 있다. 이같이 주님과 우상을 같이 섬기는 이중성 때문에 이스라엘은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신다. 사도들은 주님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을 주님에게서 갈라놓은 온갖 악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주시고, 파견받은 이들의 활동 무대와 지녀야 할 기본 정신을 분명하게 제시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수많은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들을 뽑아 세웠다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매우 강한 선민 의식,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들의 삶의 여정,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상 숭배와 재물욕 등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의 길에서 얼마나 자주 멀어져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당신 사랑으로 그들을 달래어 당신의 길로 다시 들어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맙니다.
이제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다시금 이스라엘 사람 열둘을 사도로 뽑아 세우시고, 당신의 능력과 똑같은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사도들은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본보기입니다. 사도들의 사명은 새로운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도록 백성을 다시 예수님께로 불러 모으는 일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사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공동체의 일꾼이며 사도입니다.
☆☆☆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명단이 나옵니다. 이들은 훗날의 사도들이며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악한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고쳐 주는 권한을 주십니다. 기적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긴장했을 것입니다. 스승님의 말씀에 악한 영이 물러가고 병자들이 낫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능력을 자신들에게도 주신다니, 제자들은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뛰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명문가의 출신도 아닙니다. 어부였고 세리였고 독립군을 따라다니던 열혈당원이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토마스와 훗날 스승님께 등을 돌리는 유다까지도 그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세례 받은 이는 모두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허물이 있건 없건, 죄의 경험이 있건 없건 주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돌이켜 보면 우리 안에도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위를 선하게 바꾸려 애쓰면 그 능력이 드러납니다. 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약한 부분을 고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선한 눈빛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끄심을 만납니다.
☆☆☆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그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여기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이 사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죄악을 추방하고, 병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한걸음씩 다가올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께서 12사도를 뽑아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묵상을 해도 무방하겠지만 관상을 하는 편이 더 유익함이 클 것 같습니다.
먼저 12사도를 선택하시는 장면을 좀 보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 주위에는 12사도 외에도 따르는 제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 그런 제자들을 어떻게 살피시는지, 어떤 이들을 더 가까이 두고 싶어하시는지, 제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시고 말씀을 건네곤 하시는지 등에 대해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런 연후에 선택된 12명의 사도들 모습을 한 명 한 명 봤으면 합니다. 어떤 특색들을 지닌 사람들인지 각자의 고유한 모습을 보십시오. 그러곤 12사도들 서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보십시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12사도 공동체의 활기나 분위기, 모습 등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곤 12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을 유심히 봅니다. 어떻게 준비시키시는지, 무슨 당부를 하시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과 장면들을 살피고, 그에 반응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살펴보십시오.
이런 복음 관상을 할 때엔 주변 상황에 눈길을 주는 가운데 낚아 올릴 수 있는 커다란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투나 표정, 모여 있는 이들의 분위기, 동작, 주변의 집 내지 거리 표정 혹은 날씨 등을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뭔가 여러분의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명
-이준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권한을 부여하시며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권한을 받아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일’을 똑같이
행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게 될 내용을 똑같이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즉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고쳐 주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이 모든 일을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할 것입니다. 열두 제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야곱의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세워졌듯 ‘교회’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를 옛 이스라엘을 대체할 새로운 이스라엘로 선언하십니다(마태 19,28
참조).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는 세상에 파견된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을 물신주의와 이기주의로 홀리는 악령을 몰아내야 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하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하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들이 사회에서 발견된다면
과감하게 그 폐단을 지적하며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받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맡기시면
-김찬선신부-
복음(말씀)을 선포하시고,
악령을 퇴치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시는 주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고
어제 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일꾼들을 뽑으십니다.
베드로에서 유다 이스카리옷에 이르는 열 두 사도입니다.
열 두 사도를 뽑으시고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관한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그리고 열 두 사람을 보내시면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당신과 정확히 똑 같은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과 똑 같은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입니까, 짐입니까?
물론 대단한 영광이지요.
우리가 감히 하느님과 같은 역할과 사명을 수행한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 남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앓느니 죽지 하면서 숫제 자기가 다 해 버립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당신의 중요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신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대단한 믿음의 표시이고 우리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영광으로 생각하기 보단 짐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형제들도 그렇고,
어떤 중요한 일을 부탁하면 아주 부담스러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첫 째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니라 인간 누군가가 부탁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명을 주십니까?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사명을 주십니까?
사람을 통하지 않고 꿈에 나타나 사명을 주십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사명을 받으면 잘 받아들입니다.
제가 부탁하면 잘 안 받아들일 것을 신기한 꿈을 꾸고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 같으면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통해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을 하느님의 사명이냐, 사람의 부탁이냐 잘 식별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르고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인간을 통한 하느님의 사명을 잘 식별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식별도 잘 못하고 실천도 잘 못합니다.
둘째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주시고 능력은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야박한 분이십니까?
돈도 주지 않고 물건을 사 오라는 식입니까?
역시 믿음의 문제입니다.
사명과 더불어 능력을 주시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맡기면서 반드시 그 일에 대한 능력을 주십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땅 속에 달란트를 묻어 둔 사람처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수도원 큰 책임을 맡을 때입니다.
어린 나이에
청원장과 공동체 원장이라는 두 책임을 동시에 맡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라면 당연히 순종을 해야 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 책임을 제가 다 그리고 잘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끙끙 앓다가
지혜로운 선배 형제를 찾아가 의논을 했습니다.
그 때 형제님의 얘기는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는 딱 한 마디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일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하느님께서 능력도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너무도 각인되어 그 때 이후
저는 능력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인 한
하느님은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힘도 주시니 말입니다.
고생한 만큼
-전삼용신부-
작년에 건강상 이유로 몇 달 동안 한국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교구청 가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마침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도 휴가를 얻어 함께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몸이 좋지 않아 치료차 한국에 들어온 것인데, 선교하는 신부님이 고생하시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먼저 외모에서부터 큰 차이가 났습니다. 그 신부님은 머리도 많이 빠졌고 또 피부도 검게 그을려 아프리카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몸이 안 좋다고 해서 들어왔지만 겉모습은 살도 올랐고 얼굴도 하얘서 선교하시는 신부님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저는 깨작깨작 먹었지만 그 신부님은 정말 몇 년 만에 한국음식을 먹는 것처럼 그릇까지 먹을 기세였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주교님과 교구청 신부님들의 질문 공세는 당연히 그 신부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들 다 하는 공부 외에는 특별히 이야기를 할 것이 없는데, 그 신부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숨을 건 모험담을 가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저도 아예 그 신부님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었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기르고 새끼를 치고 또 몸보신 위해 직접 잡아먹기도 한 일들, 또 한국에서 보내 온 가방을 나누어주기 위해 은총표 다섯 장을 모으면 그 가방을 주었는데 그것을 안 학생들은 그 가방을 받기 위해서 학교도 가지 않고 산속에 가서 나무를 잔뜩 해 가지고 와서 집에 장작이 산더미같이 쌓였던 일, 또 은총표를 받기 위해 전갈을 수 없이 잡아왔다는 아이들, 워낙 작고 숨이 막히는 비행기를 탄 덕분에 비행기 공포증이 생겨서 잠자다가도 좁은 곳에 갇혀있는 느낌에 자꾸 잠을 설친다는 이야기, 또 40도가 넘는 곳에서 있다가 에어컨 나오는 한국 오는 비행기를 타서 바로 감기가 들려 돼지 인플루엔자 환자로 추정되어 승객 중 첫 번째로 끌려 가 몇 시간 동안 검사를 받아야 했던 이야기 등 정말 본인은 고생스러웠겠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재밌기도 하면서 그런 고생으로 선교를 하는 분들이 존경스러워졌습니다.
가끔 신부님들이 제가 말을 하지 못하자 한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저는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고, 그 신부님에 비하면 어쩌면 너무 편하게 지내다 놀러온 것 같아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자신을 소진해가며 주님을 전하는 선교를 위한 순교자들처럼 보였습니다.
각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누가 보더라도 더 고생하는 쪽이 더 위대해 보이고 또 그 고생 덕분으로 할 이야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주교님 뵙고 할 이야기도 없었는데 다행히 그 신부님이 있어서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멀쩡해 보여서 몸이 안 좋아 들어와야 하는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그 신부님은 워낙 고생을 많이 했고 겉보기에도 쉬어야 할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그 당위성을 입증할 필요도 없이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 마지막 순간에 주님 앞에 갔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위해 많은 고생을 하여 당당하게 그 분 앞에 가서 고생한 이야기들을 실감나게 들려드릴 수 있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주님께 불림은 받았지만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와야 할 당위성만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십니다. 열두 사도들에게 각자 더러운 영들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도들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노력했지만 그 안에는 가리옷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도 있었습니다.
똑 같이 뽑아주셨고 똑 같은 권능을 주셨지만 나중에 주님 앞에 나설 때는 천차만별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그 분을 위해 더 고생을 하며 살았느냐에 좌우될 것입니다.
노력은 씁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답니다. 아주 단순한 진리이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도 어느 새 안주하려는 자신을 발견하는 우리로서 항상 끝이 어떻게 될지를 잘 생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희망, 사랑, 믿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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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
-장경선 수사-
하늘 나라는 딱 이것이다라고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장소적 개념뿐 아니라 어떤 영성적인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그와 반대로 하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하늘 나라는
‘끝 날이 다가왔음’을 의미하기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하느님 나라와 같은 상태를 의미하기에,
언제든 우리 삶을 통하여 하늘 나라가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다가 오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안에 있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죽은 후에나 가는 곳,
저 하늘 저편에 있을 것같이 멀리만 느껴지기보다, 그분과의 삶을
지금 나도 함께할 수 있다는 선언으로 여겨집니다. 비록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가능성의 겨자씨일지라도 말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물질적 개념이 아닌 정신적
영성적인 상태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만일 내 안에 조그마한 사랑이나,
평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요인이 있고 또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은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겨자씨와 같은 생명의 씨앗이 되어
실재적이고 아름다운 하늘 나라가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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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송동림 신부-
제가 사제성소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설 요한 신부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던 저는 어느 해 배낭을 메고 혼자 부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하루는 시내를 지나게 되었는데, 식물을 좋아하는 제게 어떤 분이 나무 한 그루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진 속 나무를 보여주면서 아주 귀한 나무며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다는 설명을 덧붙었습니다. 그 나무에 호기심이 생긴 저는 나무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그분한테서 받은 주소만 갖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농장 주인에게 인사를 건네며 나무 한 그루만 구하고 싶다고 했는데, 주인은 저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실망하고 돌아서는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고향 선배님 댁에 갔다가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놀라운 표정으로 그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여쭤보았더니, 신부님한테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혼자 성당에 갔고, 그때 제 생애 처음으로 만난 신부님이 바로 설 요한 신부님이셨습니다. 신부님은 처음 보는 제게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현재 그 나무를 갖고 있지 않지만 아일랜드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제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시는 신부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향 선배님의 권유로 교리를 받게 되었고 예비자로 성당을 다니면서 신부님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머나먼 타국에서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신자들에 대한 섬김의 자세, 미사 전에 성당 마당을 거닐며 기도하시는 모습 등은 당시 제 삶의 진로에 동요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신부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이후 세례를 받고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가끔 당시를 떠올리며 주님의 이끄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제의 길을 걷는 지금 고귀하게 다가온 제 성소의 시작이 훗날 주님 보시기에 좋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간구하는 마음이 큽니다. 여러 길 중에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사제 생활 12년째를 보내는 지금, 부르심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부르심 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사제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제답게 사는 것이고, 은총을 받는 것 못지않게 받은 은총을 잘 간직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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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세요?>
-양승국신부-
한 평생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라고 크게 외치며 사시다가 작년에 선종하신 부랑인들의 대부 아베 피에르 신부님, 그분은 참으로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피에르 신부님은 인기투표에서 축구선수 지단과 1,2위를 다투곤 하실 정도로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엠마우스 공동체’를 설립하셨는데, 그 공동체 역시 참으로 특별한 생활공동체입니다. 다음과 같은 증언을 통해 엠마우스 공동체의 특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 엠마우스 공동체에서 일하는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가톨릭 신자세요?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우파세요? 아니면 좌파세요? 투쟁가이십니까? 아니면 협력자이십니까?”라고도 묻지 않습니다.
처음 이곳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그저 이렇게 질문할 뿐입니다.
“배고프세요?”
“졸리십니까?”
“샤워 하시겠어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구원은 ‘구원론’ 책에 요약된 이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론이 삶 안에서 실천되어야 비로소 구원은 완결됩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란 구원론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못견뎌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이 모두 지나가고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게 될 텐데, 그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분이 사제였는지 평신도였는지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얼마나 가방끈이 긴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던지실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이하였느냐?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 주었느냐?”(마태오 23, 35-36)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억압받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또 위로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지는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부르시면서 제자 공동체를 건설하십니다.
제자공동체는 다른 무엇에 앞서 극심한 고통 속에 울며 앉아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공동체였습니다. 고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치유하기 위한 공동체였습니다. 오랜 악습과 죄로 죽어가고 있던 백성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기 위한 공동체였습니다.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던 백성들에게 힘 있는 손 내밀어주기 위한 구원의 공동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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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시고 파견하시는 주님
-김찬선신부-
어제 복음, 마태오 9장 말미에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10장에서 드디어 12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란 파견되기 위해 뽑힌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가까이 감과 파견되어 감입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도권(Initiative)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제자들이지만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Being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먼저 제자들은 주님과 가까이 있는 존재들,
주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까이 있음, 친밀함도 주님께 달려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부르셔서 가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주님과 가까움을
내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그리 된 것으로 착각하고,
설사 주님이 부르셔서 가깝게 되었음을 인정해도
내가 훌륭해서,
나의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내가 업적을 세웠거나 세울 존재라서
주님이 가까이 부른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주님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고
제자들이란 감히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Doing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은 분부를 받아 파견되는 존재들입니다.
다시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분부를 받음과 파견되어 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디로 가는 것은
제자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는 얘깁니다.
분부를 받아 주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해야 할 일을 자기가 결정하지 않고
소명으로 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명확하게 목적지를 제시하시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제시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그러면 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야 합니까?
무엇 하러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야 합니까?
길 잃은 양들이라는 표현에 이미 그것이 들어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길 잃고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좋은 목자이신 주님께 모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모이라고 해서는 안 되고 찾아가서 모아 와야 하고
찾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으니 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권한과 능력을 주십니다.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로
길 잃은 양들을 데려 올 권한과 데려 올 능력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우리를
파견하시고
소명을 주시고
소명을 수행할 힘을 주시는 분,
우리 모든 Being과 Doing의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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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하느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경규봉 신부-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가나안 신들을 섬기기 위하여 제단과 석상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왕정이 끝나게 될 것이며, 베다웬(악의 집이란 뜻으로 베델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었기에 베델을 베다웬이라고 불렀다) 산당(비교적 높은 곳으로 제사를 봉헌하는 장소)은 무너지고 제단과 석상들이 부서질 것이다. 사람들은 산과 언덕이 무너져 덮어달라고 외칠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심지 말고 정의를 심어라. 그러면 사랑의 열매를 수확할 것이다. 주님께 매달려라. 그러면 주님께서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조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조각가였다. 그래서 집안에는 여러 가지 목상과 석상 등이 있었고, 우상도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데라가 외출한 틈을 타서 아브라함은 집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다 때려 부수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데라가 화가 잔뜩 나서 누가 이 상들을 다 때려 부수었냐고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방에서 잠을 자다가 들으니 대장 우상이 다른 우상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 때려 부수더라고 대답했다. 데라가 기가 차서 어떻게 우상이 말을 하며 손과 발을 쓰면서 움직일 수 있냐고 아브라함을 다그치자, 아브라함은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상이 무슨 힘과 능력이 있다고 우상을 만들어 파냐고 말했다고 한다.
우상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우상을 만들어 모시고, 그 앞에 꿇어 절하며 소원을 빈다. 이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이다. 보고 만지고 느끼기를 원하는 인간의 감각적 욕구를 채우고, 자신의 필요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은 우상을 만든다. 사람이 우상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사람 안에 있고, 사람 자신이 곧 우상이다. 자신이 우상이라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도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과 우상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우상을 버려야 하고, 자기라는 우상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고, 그렇게 기도하셨다(마태 26,39).
제자들에게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7,21) 하고 말씀하셨으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다(마태 12,50).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은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태 6,33).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겼다. 그 결과 그들은 산과 언덕더러 무너져 덮어달라고 외칠 정도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우상숭배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처참함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자. 하느님은 우리를 좋게 창조하신 아버지이시며, 우리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는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자. 하느님을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자.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카 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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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우종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여러 권능을 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파견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과 사마리아 도시에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라."
이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또 우리의 사명인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이번 예비자 교리반에 몇 명이 들어왔는지, 총 몇 명을 선교했는지가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으면 '참으로 교우들이 열심히 했구나!' 그렇지 않으면 '뭐했느냐!' 하는 식입니다.
사실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사명입니다만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입교를 많이 시켜야하는 양적인 면에 치우치는 것은 문제가 많이 있다고 봅니다. 양적인 성장에는 내면적인 문제가 따르는 것입니다. 교우들 숫자는 늘어 나는 반면 교회의 질적인 면은 떨어지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악과 대항하며 존재하는 교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인데 양적인 성장에서 비롯되는 무질서, 혼란, 세속화 등의 모습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에 들어오면서 세상의 것을 포기하기는커녕, 좋지 않는 세상의 것을 계속 유지, 추구하면서 이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밀어내려 하는 경우, 하느님? 교회?신앙은 안중에 없고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겠지만 속으로 교회에 오는 이유가 많은 사람들을 알아서, 세속의 힘있는 자를 알아서 생활에 보탬이 될까해서, 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 좋아서라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사목자이고 교우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가르치려 한다면, 교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추세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서는 사목자나 교우 모두가 더욱더 노력해야 합니다. 말로써 꼬시다시피 전교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고 복음적인 삶을 먼저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전에 주신 권능을 우리들도 받아들여서, 나쁜 마음을 몰아내고 힘없는 자, 병약자에게 복음적인 삶으로써 다가가 전교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복음을 비추어 봤을 때, 교회 밖의 선교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방인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중의 길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길 잃어 하느님을 잊고 교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더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혹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 이웃, 애인이 있다면 이들을 포기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나아가 배척한다거나 스스로 양우리를 뛰쳐나간 사람이라면 힘이 들겠지만, 조그마한 이유나 상처로, 실수나, 몰라서 길 잃은 사람들을 우리는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 31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과 루가복음 16장 19절에 나오는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를 봤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끔찍한 곳에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을 하면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당연히 쉽지 않겠죠. 그러나 우리 자신이 더욱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세속의 유혹에 빠져 허덕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그 불쌍한 영혼들을 다시 주님께 모아 들이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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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지난 5월 초에 손을 다쳐서 깁스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불편했는지 몰라요.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은 깁스를 했던 팔의 가려움이었습니다. 깁스를 했으니 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긁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한 달 뒤 깁스를 풀었을 때 제가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저는 깁스를 풀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손을 닦았지요. 손목에 닿는 물의 느낌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 느낌에 감사하면서 손목에 비누칠을 신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물론 한 달 동안 씻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렇게 때가 많을지는 몰랐습니다. 씻는데 5분도 걸리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5분이면 충분히 모든 때를 벗고 깨끗한 몸의 상태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5분은 불가능했습니다. 몸 전체에 비해서 적은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양 팔일 뿐이었지만, 10분... 15분... 20분. 20분이 조금 넘어서야 양 팔을 모두 깨끗이 씻을 수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나오는 때가 더럽다고 차라리 씻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 그대로 놔둔다면 어떨까요? 아마 계속해서 더러운 손의 모습을 간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나오는 때가 더럽더라도 꾹 참고서 때를 밀어야 깨끗해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우리들이 짓고 있는 죄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죄가 너무나 크다고 하면서 그래서 성당에 가기가 힘들다고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성당을 나가요…….”
하지만 죄인일수록 하루빨리 성당에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마치 때를 하루 빨리 밀어야 손이 깨끗해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죄 역시 하루 빨리 씻어야 깨끗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시지요.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제어하는 권한을 주심으로써,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양을 물가로 데려가기는 쉬어도 억지로 물을 먹이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물가까지는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제 그 물을 마시는 몫은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님의 의도대로 그 물을 열심히 마시고 있나요?
우리 몸에 나오는 때는 빨리 밀면 밀수록 하루 빨리 몸이 깨끗해집니다. 우리의 죄 역시 빨리 밀면 밀수록 하루 빨리 깨끗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목욕하세요. 육체의 몸이든, 마음의 몸이든... 깨끗하게 말이지요.
빠다킹신부
열두 사도
-여성국 신부-
어떤 존재든지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에야 비로소 참된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불립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불러주는가, 내가 누구에게 불리는가에 따라 나는 그에게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불렀을 때 나는 어떤 존재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에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든든한 보호를 받게
되는 가장 소중한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지만, 그 부르심 앞에서 늘 스스로의 모습에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부족한 모습에 두려워하거나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오늘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열두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우리처럼 부족한 죄인의 모습이었고,
그 모습은 예수님과 함께했던 공생활 내내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약한
믿음, 경솔한 모습, 이기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열두 사도는 그 부르심을
점점 더 올바로 살아서, 마침내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많은 어려움과 희생들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불러주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에 옮긴다면, 열두 사도들처럼 완성되어 가는 삶,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 안에서 변해야 합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양승국신부-
<공동체를 떠나고 싶을 때>
형제들과 함께 하는 수도공동체 생활, 생각할수록 정말 묘한 생활입니다. 얼마 전,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양념을 조금 치기 위해 형제들과 가까운 공원으로 소풍을 갔었지요.
가는 곳 마다 다들 의아한 눈초리들이었습니다. 이 평일 대낮에 왠 건장한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닐까, 별로 재미있을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왠일로 얼굴들은 좋아주겠다는 표정일까? 왜 저리도 낄낄댈까, 하는 얼굴들이었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한울타리 안에서 동고동락한다는 것, 때로 하나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가만히 살펴보면 때로 성장의 장소이며, 은총의 장소, 형제적 친교가 이루어지는 사랑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때로 진한 상처를 주고받는 고통의 장소이며, 끔찍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즘에 와서야 이런 ‘기특한’ 생각이 조금 하고 있습니다.
나를 죽여야 형제가 살고, 공동체가 살고, 교회가 살고, 결국 예수님께서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반대로 나를 고집하고, 나를 내세우려하고, 나를 우선시할 때, 형제가 괴롭고, 공동체가 힘들어지고, 예수님께서 머무실 자리가 없어지는구나 하는 생각.
사실 이런 깨달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시절, 형제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너무나 고달프고 팍팍한 나머지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제들을 한명 한 명 바라보면 저만 빼고 다 나쁜 ○이었습니다. 다들 왠지 이상해보였습니다. 역시 저만 빼고.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기보다는 늘 형제의 결점만 집중적으로 바라봤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 도우심을 기대하기보다는 부족한 형제만 탓했습니다.
요즘에야 깨닫는 바이지만, 많은 겨우 저는 형제들안에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도 혐오했던 형제들의 결함이 사실 제 결함이더군요.
오늘도 저는 부족한 형제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부족함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크게 부족한 저를 바라봅니다. 부족함도 어느 정도라야 하는데, 너무도 부족하군요.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손길은 찬미 받으소서.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채우시기 위해 형제를 불러주신 하느님, 영광 받으소서.
제발 좀 인간 되라고, 제발 좀 더 갈고 닦으라고, 당신 사랑의 도구로 형제를 보내주신 하느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뽑아놓고 보니 너무도 부족하고 부족했던 제자 공동체였습니다. 나약하고 결함 많은 제자들, 어쩌면 그렇게 우리와 똑같은 제자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결핍이 많은 곳에, 병약한 사람이 많은 곳에, 죄인이 많이 모인 곳에 비례해서 하느님 자비가 풍성히 내립니다.
상처가 심한 곳에, 눈물이 많은 곳에, 고통의 강도가 큰 곳에,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운 곳일수록 주님의 사랑은 흘러넘칩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부족한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때로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떠나고도 싶습니다. 같은 배 타는 것을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런 순간 늘 기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하기에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불완전하기에 그 결핍을 채우러 오십니다. 형제란 도구를 지니고 말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크기에, 죄인이기에, 그래서 안타깝기에 우리를 해방시켜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백남국 신부-
◆어릴 때 ‘예수께서 유다를 제자로 뽑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당신을 배신할 것도 모르고 유다를 뽑으시다니, 하느님도 실수할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당신 구원사업을 위해 악역을 맡을 인물이 필요해서였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궁금증도 사라져 갔습니다. 내 삶에 그런 질문이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사는 것이 엉망이고 내 삶이 유다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의문은 다시 나를 찾아왔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유다를 뽑으셨을까? 성체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같은 이 시대의 유다들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당신의 공동체는 좋고 훌륭한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를 품어주고 기다려 주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유다처럼 자기의 길을 간다 하더라도 당신처럼 내치지 않고 품어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시면서.
그런데 참 희한합니다. 가만히 성체 앞에 앉아 있으면 온갖 나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저 같은 유다도 없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의 조그마한 허물에는 또 왜 그리 쉽게 판단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지요.
오늘 하루, 이 세상의 모든 유다들을 위해 그를 제자로 뽑으신 당신을 기억하며 조금 더 너그러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기죽지 맙시다
- 이 찬홍 신부-
여러분의 자녀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다닌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자녀를 때리는 사람에 대한 분노보다, 맞고 다니는 자녀에게 더 화가 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기고, 똑똑하게 태어났습니다. 실제, 자녀들 역시 똑똑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녀가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의기소침하고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생활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냐?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생활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오늘 12사도를 부르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우리가 자녀들에게 격려하고 용기를 주듯이, 하느님 역시 우리에게 그러하시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는”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불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사도로 불림 받은 것보다 더 큰 특권을 부여 받은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느니, 더 이상 의기소침하거나 기죽은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적, 심리적인 요인으로 근심, 걱정,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지 말고, 그러한 것들을 당당히 물리치며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실제, 주위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고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인 악마를 쫒아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너무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그렇게 숨을 죽인채로 고개 숙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인이 아니라,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너 죄인이야, 나에게 잘 보여, 그래야 구원받아!’ 라고 말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사도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것에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기쁘게 살아가거라. 너 스스로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단다. 너 스스로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단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아멘.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
-이기양 신부-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성당이 앞으로도 백 년, 이백 년… 계속해서 시대를 살아갈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은 성당으로써 전통 있는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까??‘
누구나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런 교회의 기초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목자로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기도 하지요.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어떠한 성당이 가장 좋은 성당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올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을 자랑하고 예술의 극치를 모아 놓은 그런 성당일까요? 아니면 좋은 나무들로 꽉 차있어서 들어가면 편안하고 나름대로 기품이 넘치는 그런 성당이 좋은 곳일까요? 저는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성당은 복음을 담고 실천하는 신자들이 많이 모인 성당일 것입니다. 그런 성당이 좋은 성당이고 그러한 모습을 담고 있는 성당이 사람이 보기에도, 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은 성당이지요.
결론은 역시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좋은 성당을 이루는 관건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요즈음 많은 기업인들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합니다.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상의하고 연구하고 있지요. 지금까지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등의 분야가 나라의 발전을 이끌어왔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을 차세대 원동력으로 삼아야 되느냐를 오랜 시간 진지하게 논의했고 그 결론은 ??사람?‘으로 귀착이 되었습니다. 결론이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이치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그렇게 힘들여 얻는 모습이 어리숙해 보일 정도이지요.
한 나라가 크게 발전하려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 덕망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회사가 발전하려면 그 회사의 사장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요즈음 더러 뜻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재평가하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독재자였다는 설과 함께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으로 이룩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요. 물론 그 말도 맞지만 무엇보다도 숨은 공은 국민들의 ??교육열?‘일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고자 했던 교육열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고 특별한 자원과 축적된 기술이 없는 우리나라가 지금의 모습과 미래를 만들어갈 바탕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역시 결론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또 공감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삼십 년을 준비하셨고 이제 삼 년의 공생활을 하시는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당신이 떠나간 이후에도 하느님의 일을 지속할 사람들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일을 물려줄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열두 명의 제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면 우리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 안에 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해야 하는지를 견주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면모를 보면서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10,2-4)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이 우리의 마음에는 전혀 차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개인과 기업은 대부분 똑똑한 사람을 뽑습니다. 가장 유능해 보이는 사람을 뽑아 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똑똑한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부분 그 시대 사람들이 그랬지만 학식이 깊지도 않았고, 집안이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재산이 많거나 인격이 출중하거나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도 없었지요. 대체적으로 무식한 어부들이 제일 많았고, 항간에 소문이 안 좋았던 세리 마태오도 있었으며 혁명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인물이 없었지요.
특히 그 중에 수제자로 뽑아 놓은 인물이 베드로 사도인데 그는 제자단의 대표가 될 만큼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꺼번에 망치기 십상인 다혈질의 사람에게는 리더십을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사람에게 지도자의 자질이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하셨습니다. 학식과 지식과 재산도 없는 다혈질의 베드로 사도를 뽑으셨지요. 그에게 무슨 장점이 있어서 인정하신 것일까요? 우직하게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충동적이었지만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는 베드로의 충성심 하나는 남들과 달랐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눈여겨 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왜 똑똑한 사람을 제자로 뽑지 않으셨을까요? 신앙의 눈으로 돌아다보면 재산과 학식, 건강과 지혜 이 모든 원천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걷어 가시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하느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제일 필요하지 않으셨을까요? 지식과 부가 아무리 많아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스승의 뒤를 이은 이 무식한 제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열매를 맺고, 인류 역사 속에서 이천 년이 넘는 지속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장본인들은 이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만든 기업도 100년, 200년을 넘기기가 어렵지요. 세월이 흐르면 망하고 망하지 않으면 주인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고 지속되는 공동체가 있으니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만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만약에 우리 기준대로 제자들을 뽑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권력과 재산을 쌓아놓은 사람들을 뽑아 놓았다면 아마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모두 도망가거나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빈털터리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 다녀봐야 노숙자처럼 변두리 인생이 될 것이 뻔하다는 것을 똑똑한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지요. 또 학식과 지혜가 출중했다면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자기의 지식과 지혜로 모면하기 위한 변론을 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초도 놓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물론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은 다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을 때 그 길이 지속된다는 것을 이천 년 그리스도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본당 공동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똑똑하다거나,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하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반장, 구역장, 단체장, 사목위원 등 교회 봉사자를 새로 임명하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저는 신심도 부족하고, 지식도 없고, 리더십도 없어서…?“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그렇게 쉽게 대답하는 것은 신자로서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미사에는 특히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또 본받으려고 하는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가장 복된 여인이 되게 만든 바탕은 단 하나였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느님의 뜻이라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접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거룩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초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르고 받아들이겠다는 성모님의 그 정신을 배우겠다고 지금 우리가 레지오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서 정작 어떤 일이 맡겨질 때는 ?’바빠서요, 능력이 부족해서요, 하기가 싫은데요…?“ 이런저런 핑계가 다 나오지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예?“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자가 많은 공동체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이고 그것이 가장 복음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바탕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천 년 그리스도 교회의 초석을 만드셨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어가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제자들은 지식도 지혜도 재산도 권력도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고 이 믿음이 바로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바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적인 공동체에 요구되는 기본 요소이지요. 우리 성당이 백 년, 오백 년, 천 년의 전통을 지니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힘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성모 마리아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면서 받아들이고 항구하게 믿는 그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본당 신부에 대한 순명도, 수도자에 대한 순명도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을 도구로 맡겼을 때 거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역사를 이루시고 결실을 맺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열두 제자의 부르심을 통해서, 또 그들의 일생을 통해서, 그리고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과 욕망을 접는 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뽑힌 열두 제자들이 이천 년 그리스도교 초석을 다졌듯이 바로 여러분들이 우리 성당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 주인공이 되시리라고 믿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그대에게
뽑힌 사람들에 비해서 맡겨진 소명(召命)이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어부들과 세리, 열혈당원과 배반자까지 열두 제자들의 면면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악마를 쫓아내는 일이나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일, 즉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돈이나 권력, 지식이나 지위 따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비지심(慈悲之心)으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뽑아주신 스승 예수님께 온전히 귀의(歸依)하고
믿음으로 그분의 권능에 참여하는 사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보잘것없는 무리 열둘을 제자로 뽑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기를 원합니다.
작고 볼품없지만 아름다운 향기를 강하게 내뿜는 꽃이 있는가하면,
모양은 크고 화려하지만 전혀 향기가 없는 꽃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뽑아 보내신 열두 제자들은 예수의 꽃입니다. 그들에게서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불러주셨습니다. 부르심은 보냄입니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환한 밝음이,
악취가 사라지고 맑은 향기로움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장재봉 신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신화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해서 내려주신 마지막 처방이십니다.
우리는 이 처방으로 죽음을 택할 수 있고, 영생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는 반면
전혀 그를 믿지 않고 핍박하는 부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일에는 ‘중간쯤’, ‘적당 히’ 또는 ‘그저 그렇게’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말 그 대로 구세주이시고 구속자이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강한 힘을 믿고 의탁하는 쪽에 서지 않는다면 그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박해하는 쪽에 설 수밖에 없는, 단호하고 아주 무서운 일입니 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전해 듣고 예수를 향해 “몰려 들며” 앞 다투어
예수님을 만지려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모한다할지라도 그 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하느님을 귀찮게 하고 피곤하게 할 뿐 입니다.
내 욕심을 위한 도구로 그분을 사용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빵을 받고 말씀을 듣고 탄복하며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걸려 넘어진 사람도 많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 명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오심은 큰 축복이기도 하지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를 버리고 따라 나서는” 단호함이 필요 할 것입니다.
다른 필요나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리운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은 바로 “나를 따라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 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홀로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이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는 우리들을 불러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열 두 사도를 이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구원사업을 이어가도록 명령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 다.
이 세상을 위해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과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는 일은
하늘의 천사에게 맡겨지지 않고 바로 ‘나’, ‘우 리’에게 맡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의 임무는 이렇게 막중합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에게 가 장 도덕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이 세계를 정복하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내려져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아니라 나 하나의 완전함이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하느님은 믿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이렇게 넓고 큰 안목을 지니는 일입니다.
좁고 근시안적인 내 시야를 넓혀서 하느님의 왕국에 든든한 반석이 되는 것이
우리의 할 바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
† 12사도 선발의 기준은 무엇인가?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사도로 명하고, 이들에게 권능을 주어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갈릴래아를 무대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시던 예수께서는 곧바로 사람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예수님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구원의 대상이 인류, 즉 사람이라는 점이 그리스도 강생(降生)의 핵심이다. 인간의 구원협조는 하느님의 소명(召命)아래 천지창조 때부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수행되어왔다. 하느님 소명의 절정(絶頂)은 두말할 것 없이 성모 마리아의 소명이다.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교회(敎會)의 소명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배를 손질하던 어부출신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마태 4,18-22)으로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는 예수님의 복음과 수많은 병자치유의 기적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람들이 갈릴래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몰려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마태 4,25)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그 많은 무리의 제자들 중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하셨다. 제자(弟子)들은 많았지만 사도(使徒)로 뽑힌 사람은 열둘이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많은 제자들 중에 오늘 복음에 거명(擧名)된 사람들만 사도로 선발되었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지만 마태오복음사가의 의도 또한 수긍해 볼만하다.
사도선발의 기준은 어떤 특별한 조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복음에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 집성문(8-9장)에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또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놀라움 이상의 믿음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 적어도 이 믿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과 행적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전파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使徒)로 선발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배반자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왜 사도로 선발하셨을까? 이렇게 따지자면 베드로도 멀리 못 간다. 베드로도 유다에 못지않게 스승을 배반하였다.(26,69-75)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만(27,3-5),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 후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치러는 이상의 가치를 지닌 순교(殉敎)로 스승을 따라갔다. 결국 선발은 예수께서 하시지만 사도로서의 실존(實存)은 스스로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며, 사도로서의 진가(眞價)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이 밝혀 줄 것임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바탕으로 제각기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사도로서의 진정한 태도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항거하여 이를 물리치고, 병자와 노약자,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등 세상의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베풀며, 길 잃은 양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소홀히 하는 사도는 그에게서 이름만 있을 뿐 아무 의미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꾼은 적다(마태 9,35-1`0,1.6-8)
-유 광수신부 -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00000006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신다. 수확할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이미 모든 곡식은 영글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찾으시는 일꾼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다 해 놓으셨고 다만 수확할 것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수확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일꾼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일꾼은 처음부터 자기가 무엇을 시작해서 어떤 결실을 맺게 하고 그 결실을 거둬서 주인님께 갖다 바치는 일꾼이 아니다. 씨를 뿌려서 수확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일은 이미 예수님이 다 해놓으셨다. 일꾼이 해야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해놓으신 것을 거두어 들이는 일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항상 예수님이 시작하신다. 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아버지는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그 일을 할 일꾼으로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명하시면서 인류 구원의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두고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하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이라는 구원사업을 완수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누군가가 예수님이 완성해 놓은 구원 사업을 계승해서 일 할 일꾼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완성해 놓으신 인류 구원의 일을 계속할 열 두 사도들을 뽑으셨고, 교육시교육시키셨고, 파견하셨다. 제자들은 인류 구원을 위해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의해 완성시켜 놓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워 들이는 일만 하면 된다. 열두 제자들에 의해 이 일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이어져야 하고 또 열 두 사도들에 이어서 계속해서 그 일을 할 일꾼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는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방법에 의해 수확을 거두워 드려야 한다.
그 일에 불리움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예수님이 하신 방법대로 수확을 거두워 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꾼은 많지만 각자 자기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워 드리려고만 하지 예수님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워 드리는 일꾼은 많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예수님의 일꾼들이지만 정말 믿을만할 일꾼은 많지 않다. 수확할 것을 거두워 드리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것만 챙기기 위해 일을 하려는 경향이 많다.
수확할 일꾼이란 어떤 일꾼인가?
첫째, 무엇보다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가엾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모성애를 느끼는 마음이다. 마치 자식이 병들어 아파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마음에 더 큰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다. 목자 없이 헤메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목자를 찾아 주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다.
둘째,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고을과 마을들을 두루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수확을 거둘 일꾼은 자기 말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려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을 먼저 읽고 묵상한 사람만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셋째, 모든 아픔과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늘 나라의 복음만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 내어라."고 하셨다. 어떻게 하면 모든 질병을 고쳐 줄 수 있는가? 목자 없는 양들이기 때문에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서 병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고쳐 주려면 무엇보다 양들이 먹고 마실 것을 주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단지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사랑으로 보살펴 주면서 먹고 마실 것을 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제 수도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해야할 사람들이고 그 일을 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꾼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으로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은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 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3, 14-15) 즉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게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엾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수확할 힘을 길러내고, 수확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는 것이요,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성무 일도서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서 이 내 눈은 밤새도록 떠 있나이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이시며, 나의 구원이 되셨나이다. 그분은 나의 하느님이시니 어찌 찬양하지 않겠으며, 나의 선조의 하느님이시니 어찌 우러러 영광 드리지 않으랴."(시편 118 과 출애굽 15,2)고 찬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