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보문학카페> '세상사는 이야기방'에는 '아차산 트레킹' 제목의 글이 올랐다.
문학회원들이 함께 한 서울 광진구 아차산 산행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사와 평강공주의 애끓는 이별 장면이 눈에 선연히 그려진다.
아차산 산행기를 읽으면서 덕분에 나도 국사공부를 조금 더 한다.
산행기를 칭찬한다.
내가 아랫처럼 댓글 달았고, 여기에도 올려서 역사공부를 더 한다.
국보문학 산행이 부럽습니다.
서울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
예전에는 자주 올랐는데... 퇴직한 뒤로는 오르지 않았군요.
'아차산은 온달장군과 평강 공주의 전설이 전해지는 야트막한 산으로, 등산하기에 좋은 곳으로 쉬엄쉬엄 걸으며'
라는 문구에 고개를 갸우뚱 합니다.
고구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끓는 사랑 이야기의 전설 장소인가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곳은 다른 곳에 있다는 설이 있지요.
1)
'...고구려 온달(溫達)장군에 관련된 이야기.
고구려가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이 지역을 차지한 후 고구려 영양왕 때, 평강공주의 남편이며 돌아간 평강왕(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이 지역을 비롯한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곳 아차산의 산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戰死)하였다는 것이다....'하고 하나...
충북 단양 영춘면 온달산성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지요.
2)
'.. 삼국사기에서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하였다”고 한 내용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아단성을 서울특별시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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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최대 영토
위 적선은 장수왕(서기413 ~ 490년)의 진출 방향이다.
지금의 충북 경계선까지 진출했다.
온달장군의 전사지와 평강공주의 애끓는 이별의 장소는 어디일까?
* 온달장군 전사(서기590년 영양왕 1년)
1) 현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일까?
2) 현 충북 단양시 영춘면의 온달산성일까?
나는 충북 단양 온달산성으로 보고 싶다.
지정학 측면에서...
* 서울 광진구 아차산은 해발 높이도 얼마 안 되고, 산지 면적도 아주 비좁다. 뒷동산 수준인 조그만한 산지에서 고구려군사와 신라군사가 충돌해서 전투했다는 가설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특히나 한강을 낀 야산이다. 당시의 배 운항 수준을 생각하면... 전투지역과 방어지역은 기마병이 달리는 내륙이다.
차라리 내륙인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지역이 훨씬 높고, 크고, 넓다. 군사지리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
위 지도에서 위례성은 현 경기도 광주지역을 뜻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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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는 서기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멸망
고구려는 서기668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멸망
이 많은 영토는 어찌 되었을까?
나당연합군의 고구려멸망으로 현재의 서울까지는 통일신라의 행정력이 미쳤고, 서울에서 이북 평양까지는 군사력이나 미쳤을 뿐이다. 평양성 이북은 깡그리 잃어버렸다. 당나라가 차지했겠지.
이런 게 삼국통일일까?
외세에 빌붙어서 삼국통일했다고 하나 우리나라 강역 북쪽 대부분을 잃어버린 통일신라.
내가 보기에는 만고의 역적행위이다.
훗날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서기918년에 개국한 고려조에서는 평양 이북의 압록강역까지 구토를 조금이나마 회복했다.
고려말 상장인 최영장군, 부장인 이성계장군은 압록강 너머로 군사를 진격해서 옛고구려 땅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부장인 이성계의 군사반란으로 총대장인 최영장군을 결박하고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되돌아왔고(서기 1388년), 4년 뒤인 1392년 고려를 아예 멸망시키고는 이씨조선을 개국했다.
* 최영장군은 1년 뒤에 처형당했다(충생지는 충남 홍성). 홍성 홍북읍 산에 그의 혼을 기리는 최영장군사당이 있음.
* 조선조 초기(세종, 세조)에는 압록강, 두만강까지 영토를 조금이나마 회복했다.
이처럼.. 외세에 빌붙어서 또 군사반란(구테타)로 배달민족의 웅지를 쫌샘이처럼 찌그러뜨린 아국의 역사...
나는 젊은날 지정학(정치지리학) 측면을 공부하다가는 책을 내던지곤 했다.
지난 20세기 중반에는 그나마 남한/북한으로 38선으로 분단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사(야사)가 아쉽기만 하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도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는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
조선 시대 <일성록>과 <승정원일기>는 당대에 편찬된 자료도 있지만, 대부분 역사서는 후대의 기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 후에 편찬된 자료이며 <조선왕조실록도>도 임금 사후에 편찬됐다.
* 고려시대의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나온 시기가 언제쯤인가?
이거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서기668년에 멸망한 고구려에 대한 역사기록을 통일신라가 제대로 기술했을까?
또한 몇백년이 흐른 뒤인 후대(서기 1145년대)에서야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제대로 기술되었을까?
상당부분은 가짜일 게다. 어쩌면 하나의 전설,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나중에 보탠다.
2021. 11. 21. 일요일.
첫댓글 온달장군과 평강 공주 이야기는 어쩌면
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멋지게 구연 동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일지도 모르지요
통일신라가 역사를 제대로 기술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려 중기(1145년대)에 작성한 삼국사기가 고작이지요.
이것도 100% 신뢰하기는 어렵고...
'역사는 강자가 늘 새롭게 고쳐 쓴다'라는 생각을 지닌 제가 잘못이겠지요.
조 선생님 덕분에 국사 공부 더 합니다.
덧글 고맙습니다.
본기에 의하면 삼국의 시조가 즉위한 연도는 신라는 BC 57년, 고구려는 BC 37년, 백제는 BC 18년으로 신라의 건국이 가장 빠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나 고고학적 성과로 보아 실제 국가형성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서를 밟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저자가 신라 중심적인 입장에서 참위설(讖緯說)의 갑자년혁명설을 택하여, 고구려의 건국연도인 BC 37년보다 빠른 첫 갑자년인 BC 57년에 신라의 건국시기를 설정했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