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닉세그는 스웨덴 공군 기지 안에 둥지를 틀고 있다. 원래 본사가 다른 곳에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잠시 몸을 피했던 곳이 아예 집이 돼버렸다.
이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기지 활주로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활주로가 비어있을 때면 1,500마력 하이퍼카를 끌고 나와 전투기급 질주가 가능하다. 많은 자동차들이 비행기 이미지를 갖다 쓰곤 하는데 아예 활주로 옆에서 태어나는 차는 쾨닉세그가 유일하다.
실제 활주로에서 촬영한 레게라 공식 이미지 (이미지:쾨닉세그)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처럼
이번 제네바 모터쇼 쾨닉세그 부스에는 그들의 최신모델 '레게라'가 올라왔다. 스파이더와 쿠페형 각 1대씩 총 2대가 전시됐다. 겉모습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가 밀려왔다.
2017 제네바 모터쇼 현장의 쾨닉세그 레게라
보통 기자증을 제시하면 부스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차를 타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울타리 밖에서 넋놓고 바라보고만 있던 내 자신을 발견했다. 아내를 처음 봤을 때 느낌과 비슷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후 마주한 레게라는 카본의 대향연 그 자체였다. 실제로 돈 버는 것은 카본회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카본으로 둘렀다.
카본패널은 탄소섬유 배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패턴을 만들 수 있다. 레게라의 경우, 명암대비가 확실하게 보이는 가로무늬를 만들어 디자인요소로 활용했다.
스파이더 버전은 카본 위에 도색을 해 일부 패널에서는 카본 패턴을 감췄지만, 쿠페는 제작 단계부터 카본에 색을 입힌 패널을 사용했다. 개인적으로는 스파이더에 쿠페 패널을 사용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살 순 없어도 상상은 자유니까.
뒷모습에서 눈에 띈 것은 세로형 머플러다. 슬로베니아 회사 아크라포빅이 맡았다. 모든 부품을 티타늄으로 만들기 때문에 내구성이 뛰어나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아크라포빅 제품은 국내에도 튜닝용으로 많이 들어와 있지만, 양산차에 적용된 것은 레게라가 처음이다. 특히, 레게라에서는 배기가스 배출구를 세로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디퓨저 기능도 기대할 수 있다.
그저 빨리 달리기 위한 차?
보통 중소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슈퍼카들은 빨리 달리는데 촛점을 맞춘 나머지, 각종 편의장비가 부족하거나, 실내 공간의 디테일이 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레게라는 그저 빨리 달리기 위해 만든 차가 아니었다.
그들은 헤드램프에서부터 디테일을 챙겼다. 헤드램프 곳곳에 박힌 LED 주간 주행등은 마치 별자리를 보는 것 같다. 실제로 '별자리 주간주행등(Constellation Day Running Light)'으로 부른다.
실내는 카본 프레임과 패널 위에 질좋은 가죽으로 감싸 럭셔리한 분위기까지 느낄 수 있다. 다리 공간, 페달 주위 등,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정성스레 감쌌다. 내장재 패널 사이 단차와 각종 버튼들의 디테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게 보였다.
부가티 시론 만큼 예술작품으로 느껴지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소량 생산되는 모델 치고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일상적 용도를 고려했다는 점이다. 센터페시아에 자리 잡은 9인치 스크린은 에어컨, 오디오는 물론 LTE와 와이파이, 애플 카플레이를 지원하며, 계기반 역시 사용하기 쉬운 디지털 스크린으로 채워졌다.
차체 앞뒤에는 초음파 센서가 있어 주차 시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차를 사람이 붐비는 대형 마트 같은 곳에 타고 가거나, 비좁은 곳에 주차할 일이 얼마나 많겠나마는, 일상적인 용도로 쓰기에 손색이 없게 해둔 것은 의미있다.
오토스킨
이 뿐만이 아니다. 옆으로 튀어나온 후, 수직으로 열리는 좌-우 문짝은 유압식으로 자동 개폐된다. 앞-뒤에 있는 트렁크 후드와 보닛, 자동으로 솟아 오르는 리어 스포일러도 모두 가스리프트 대신 유압식이다. 이걸 오토스킨(Autoskin)으로 부른다.
아래는 오토스킨 작동 영상.
사실, 이 장치는 옵션이다. 굳이 손가락 집어 넣어서 레버 당길 필요 없이, 자동으로 우아한 개폐가 가능하기 때문에 거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곳곳에 유체 파이프와 펌프를 달고도 무게 증가는 5kg로 억제했다.
이 정도 가격의 차가 손에 때묻혀 가며 후드를 열어야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레게라에서 진짜 봐야 할 것은
쾨닉세그 레게라에서 진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쾨닉세그 다이렉트 드라이브(KDD)'로 불리는 파워트레인이다. 1,100마력을 내는 5리터 V8 트윈터보 엔진은 야사(YASA)가 만든 도합 700마력(토크 90kg.m)짜리 전기모터 3개와 조합돼 전체출력 1,500마력을 낸다. 그런데 여기에는 변속기가 없다.
배터리와 V8엔진 사이에는 스타트모터와 발전기, 토크 컨버터 역할을 하는 전기모터가 위치한다. 그리고 엔진 바로 뒤에는 쾨닉세그가 개발한 특제 클러치-슬립(Clutsh-Slip) 원리의 유체커플링이 위치한다. 이게 중-고속 구간에서 토크를 제어 하면서 급가속 시 저단 기어를 넣은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쾨닉세그는 엔진 힘이 전기모터를 거쳐 바로 바퀴에 도달하기 때문에 동력 손실이 적은 것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그들은 일반적인 다단 변속기나 CVT보다 동력손실이 50%이상 적다고 주장한다.
나머지 전기모터 두 개는 좌우 뒷바퀴에 각각 하나씩 연결돼 있다. 이들은 각각 240마력 이상을 내면서, 코너링 시에는 바깥쪽 바퀴가 더 큰 힘을 내는 토크 벡터링으로 매끄러운 코너링을 돕는다.
그렇다면 패들시프트는 왜 있는거야?
스티어링 휠 뒤에 있는 패들 시프트는 다단 변속을 위한 게 아니다. 정지상태에서 왼쪽만 당기면 후진, 주행 중 오른쪽을 당기면 배터리 급속 충전을 통한 부스트 기능이 실행된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 둘을 5초 동안 같이 당기면 중립(N),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둘을 동시에 당기면 주차(P)모드로 전환된다.
800V를 사용하는 전기모터
그렇다면 전기모터는 어디서 힘을 얻느냐?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위치한 4.5kWh 배터리가 전기 에너지를 공급한다. 한번 충전에 130km를 가는 BMW i3 배터리가 23kWh이므로, i3의 약 20% 용량이다.
쉐보레 볼트EV의 구동계통, 바닥에 위치한 넓은 판이 배터리
이 배터리는 800V로 구동된다. 현재 시중에 팔리고 있는 전기차가 450V를 사용하는데, 이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아우디와 포르쉐가 빠른 충전 속도와 고출력을 내세우며 공개한 전동식 컨셉트카들이 800V를 쓴다. 레게라는 800V를 사용한 첫 양산차 타이틀을 갖게 됐다.
배터리는 엔진과 마찬가지로 냉각이 중요하다. 보통 냉각수가 흐르는 파이프로 배터리집을 감싸 열을 식힌다. 그러나 레게라의 배터리는 모든 배터리 셀 사이에 냉각수가 통하도록 해 효율을 높였다.
컵홀더 아래에 배터리가 있다
이렇게 배터리 셀 하나하나를 감싸다 보면 무게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일반적인 전기차들은 보통 알루미늄 등 금속으로 배터리집을 만들지만, 레게라는 이것 역시 카본으로 감싸 총 무게를 75kg에 맞췄다.
수치상 성능은?
레게라는 각종 오일과 연료를 다 뺀 상태에서 1,470kg, 차가 달릴 수 있도록 오일도 채우고 연료를 가득 넣으면 1,590kg이다. V8 엔진을 얹은 하이퍼카 치고는 상당히 가볍다.
이런 차를 전체출력 1,500마력, 전체토크 200kg.m이 넘는 엄청난 파워트레인으로 밀어대니 차가 빠르지 않을 수 없다. 0-100km/h 가속은 2.8초, 300km/h 까지는 12.3초, 400km/h까지는 20초 만에 도달한다. 전기모터만으로 갈 수 있는 거리는 50k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