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흡혈귀 영화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그 속에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으며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가 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힘을 근거로 약한 자에게 강제적 고통을 준다. 강한 자/지배자/착취하는 자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그러므로 흡혈귀 영화의 희생자는 여자들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피다. 남성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여성의 모습은 명백하게 성적 상징을 갖고 있다.
붉은 피는 보편적으로 생명과 희생을 상징한다. 피가 없다는 것은 생명의 고갈을 보여 주며, 피를 바친다는 것은 희생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 흡혈귀의 공격으로 피를 빨리게 되고 창백한 죽음에 이르게 되거나, 제단에 자신들의 피를 바친다. 공포 영화의 관객들은 희생당하는 피해자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카메라는 강한 자, 공격하는 자의 시선을 대신해서 움직인다. 따라서 관객들의 공포감은 더욱 극대화 될 수밖에 없다.
무덤에서 빠져나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흡혈귀Vampire의 전설은 동유럽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도 흡혈귀들은 등장한다. 여자의 머리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하르퓌이아, 갓난아기를 잡아먹는 라미아 같은 괴물은, 일종의 흡혈귀라고 볼 수 있다. 피를 빨아먹는 행위의 문화적 전통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마시고 신에게 바치는 행위는, 원시 공동체 사회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아즈텍 문명권을 비롯해서 세계 각지의 원시부족들은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마셨다. 그 무의식 속에는, 풍요로움에 대한 갈망, 한시적 삶이 아닌 영원불멸의 삶을 원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흡혈귀에 관한 전설에는 몇 개의 원칙이 있다. 우선 흡혈귀들은 마늘과 십자가와 햇빛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사람은 또 다른 흡혈귀가 된다. 또, 죽어서도 저승에 갈 수 없는 흡혈귀지만, 심장에 말뚝을 박으면 영원히 흡혈귀를 죽일 수 있고, 그래도 못 미더우면 시체를 불사르면 다시는 흡혈귀로 움직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피를 흡입하는 행위 속에는 영원불멸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억압이라는 정치적 상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흡혈귀를 문화적으로 처음 차용한 사람은 브람 스토커다. 그는 소설 [드라큐라](1897년)에서 흡혈귀 전설을 다시 부활시켰다. 흡혈귀 문화는 19세기말의 불안한 정서를 대변하며 순식간에 당대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드라큐라 백작의 근거지인 트란실바니아는 관광객의 순례코스로 발돋움했다.
국내에서도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곳에 많이 걸려 있는 구스타프 크림트의 그림 [키스]는, 사실은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여성의 황홀함을 묘사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처녀와 흡혈귀의 관계는 세기말 유럽에 널리 유행했던 트랜드였다. 즉 피를 빠는 행위 속에는 단순히 공격성만 잠복해 있는 게 아니라, 불안한 지상에서의 삶을 확실한 것으로 보장받고 싶은 심리, 영원불멸의 욕망, 그리고 성적 상징이 숨어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한 신경학자는, 전설 속의 흡혈귀는 광견병에 걸린 사람을 잘못 오해해서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광견병에 걸린 확률이 7배나 높은데, 이것은 흡혈귀가 대부분 남자들이라는 것과도 관계있으며, 광견병에 걸리며 불면증이 생겨 밤에 돌아다니고 과도한 성욕을 보이며 자극에 민감하기 때문에 마늘 같은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또 흡혈귀 전설이 시작된 18세기 초의 헝가리에는 광견병이 크게 유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과는 별개로 흡혈귀 전설이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심리적 동인이 중요하다. 피를 빨아들임으로써 유한한 삶을 극복할 수 있다는 영원불멸의 욕망이 있고, 또 피를 빨림으로써 살아있는 시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서, 살아있는 인간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들은, 영원불멸에 대한 인간의 꿈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어떤 공격으로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 강인한 몸의 흡혈귀들은, 연약한 인간 욕망의 대체적 표현이며 강력한 성적 에너지의 상징적 표현이다.
공포 영화 속의 살인마나 악령, 귀신, 뱀파이어 같은 초월적 존재들은, 결국 우리 내면의 두려움이 불러들인 또 다른 괴물이라는 해석은 고전적이다. 세기말에 등장한 영원불멸의 육체를 지닌 흡혈귀들에게서 나찌즘의 등장을 예언하는 감성을 읽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들 앞에서 자신들이 만든 필름을 최초로 상영한 1895년 12월 28일로부터 불과 26년 정도가 지났을 때, 최초의 흡혈귀 영화가 만들어졌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전통을 확립한 무르나우 감독의 대표작 [노스페라투](1922년)다. 루이 포이야드의 열편으로 된 무성영화 시리즈 [흡혈귀들](1915년)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제목과는 다르게 흡혈귀 영화는 아니다.
그 이후 서구 문화에는 다양한 드라큐라 이야기의 변종이 등장한다. 벨라 루고시의 [드라큐라](1931년)에서 흡혈귀 드라큐라는 성적 매력이 강하고 로맨틱한 이미지까지 갖고 있다. 최근 [새벽의 저주]로 리메이크 된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 3부작은 좀비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좀비들과 드라큐라는 조금 다르지만, 조지 로메로는 [백색공포](1978년)에서 드라큐라를 본격적으로 등장시킨다. 그러나 70년대말 AIDS의 등장과 함께, 피를 빠는 드라큐라의 이야기에 대중들은 거부감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흡혈귀 영화는 일종의 사회적 금기로 치부되어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프란시스 포드 코플라 감독과 위노나 라이어가 손잡고 만든 [드라큐라](1992년)는 다시 드라큐라 붐을 일으켰다. 불멸의 사랑에 집착하는 드라큐라 백작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는, 흡혈귀 문화의 현대적 변용이다. 흡혈귀들이 갖고 있는 공격성을 거세하고, 대신 순수한 사랑을 그 자리에 배치했다. 그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영화적 반증이다.
그 이후 브래드 피트 주연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년) 등이 쏟아져 나왔으며 올 여름에는 또 다른 드라큐라 영화 [반헬싱]이 개봉할 예정이다. [미이라]로 공포 영화의 맛을 본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작품으로서 [엑스맨]의 울버린 역으로 스타가 된 휴잭맨이 드라큐라를 퇴치하는 반헬싱 교수로 등장한다. 어느 작품이나 최근의 흡혈귀 영화들은 예전처럼 남성 일변도의 공격적 시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남녀의 성적 위치가 급변하고 있고, 흡혈하는 행위의 주체도 변하고 있다. 더 이상 남성은 이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다.
피를 빨아먹는 행위에 숨어 있는 가장 큰 상징은, 성적 공격성이다. 남자 흡혈귀들은 예외없이 여자들의 하얀 목덜미나 팔에 날카로운 이를 박고 피를 빨아들인다. 그들의 뾰죽한 손톱, 날카로운 이빨은 프로이드적 분석을 빌려올 필요도 없이, 남성 성기의 상징이다.
한국 호러 영화는 1960년대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 최근 이광훈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던 신상옥 감독의 [천년호] 등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특징적인 것은 권철휘 감독의 [월하의 공동묘지](1967년)다. 한국 호러 영화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된 이 영화는, 다른 한국 호러 영화처럼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복수를 한다는 대체적인 윤곽은 비슷하지만,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귀신들이 피를 빤다는 것이다. 한국적 흡혈귀가 등장한 것이다. 한국 흡혈귀과 서양 흡혈귀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 주체가 여자라는 점에 있다.
하얀 소복을 입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발 없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한국형 흡혈귀들은 예외없이 여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억울하게 죽은 한을 풀기 위해 귀신이 된 것이고, 남성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으며, 그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피를 빠는 행위로 나타난다. 한국 흡혈귀의 공격성은 연약한 여성의 육체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서구 문화의 흔적이 삼투되어 동양적으로 변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흡혈귀 영화는 남녀의 역학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예전과는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영화가 동시대의 집단무의식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표현이며 그 속에는 인간관계의 본질적 모습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