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자 나발
삼상25:1-3
(삼상 25:1, 개정)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삼상 25:2, 개정)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삼상 25:3, 개정)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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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다’는 평가에는
두 가지 차이가 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교의 대상으로서의
나 라는 존재가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의식하는 한
자기 빼놓고는 다 어리석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각자가 배운 전문 분야가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좋아하는 요리사가
14좌 등정한 전문 등산가 앞에서
산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일 겁니다.
반면에 음식점에서 등산가가
요리사의 솜씨를 논하는 것은
조심해야할 부분일 것입니다.
이로서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음은
각자가 자랑할 만한 것들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근거로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어리석다고할 근거가
과연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것입니다.
즉 무슨 직종에 종사하던지 간에,
그리고 아무리 그 사람이
선행으로 이름이 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끝까지
‘어리석은 자’로 일관 짓는 기준이
과연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 기준은
하나님의 등장으로 비롯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두 가지 자기 운명과 관련된 나무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입니다.
곧 생명과 사망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생명과 사망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피조물로서 탄생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입장에 봐서는
생명만 있고 사망이 찾아오는 요건은
아예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피조물이 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 얼마든지
생명 뿐만 아니라
사망도 만들어 낼 분인 것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처한 곳은
마치 양식장과 같아서
양식장 밖에 나가면 죽고
그 안에서는 사료를 공급받기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부터
생명 동산에서 죽음의 대지로 추방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이 금지됩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감금이요 추방입니다.
죽음과 저주 아래에서의 감금상태입니다.
이제부터 인간은
사는 게 정상이 아니라
죽는 게 정상이 된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받지 않고
성경을 거부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는
‘사는 게 비정상,
죽는 게 정상’이라는 원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살고자 하는 것이 정상,
죽는 것은 나쁜 상황’이라고 우길 뿐입니다.
그렇게 되니 무엇이 ‘총명’이요
무엇이 ‘어리석음’인지가
모조리 거꾸로 되어버립니다.
즉 신앙이 없더라도
순수한 마음만 가져도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떼를 쓴다고해서
악마를 예수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생명 뿐만 아니라
저주도 만들어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들만 낳는 것이 아니라
딸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식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앞세우면서
쳐들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죽는 이유를 아느냐?”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1:3-5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말이 그 말입니다.
죽음 속에서 갇혀
꼼짝 못하는 인간들 속에
‘움직이는 생명’,
‘찾아오시는 생명’,
‘운동하시는 생명’이 다가 오셨습니다.
2000년 전에 말입니다.
그 분은 죄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혜와 총명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는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과 같은 분으로
사건 속에서 불쑥
이 두 부부 일상에 개입된 사건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사건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두 부부는 함께 인생을 마감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임하니
이 세상에 각기 다른 두 노선의 인생길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본문 끝에 보면,
어리석은 나발은 죽습니다.
38절에 보면,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나발이라는 사람은
분명히 다윗 사람들만 상대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상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전체에서,
하나님 역할을 했던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즉 나발이라는 자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사업에서는
대성공을 거둔 부자입니다.
그를 어리석다고 볼 자는
사람들 가운데 별로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얼마나 지혜롭게 살았으면
거부가 되었는가 하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물입니다.
특히 그의 처신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성공한 경우’로
칭송받을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즉 손해되는 짓은 안하는 겁니다.
10-11절에 보면,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돈 달라고 한다고 해서 돈 줄 수 없고,
떡 달란다고 해서 다 떡을 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은
오로지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노동한 것이기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소비될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나발의 주장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오히려 나발의 아내의 생각이
참으로 이상하고 정상이 아닌 듯이 보입니다.
남편 말대로,
“다윗이 뭐길래?”가 맞는 말이 아닐까요?
출애굽기 5:1-2에 보면,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왕은 자기 소유의 땅에 묻혀있습니다.
따라서 내 것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에
내 것을 투자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발의 아내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네집 재산은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그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입은 자가
바로 다윗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되찾으려 왔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떻게 이해했느냐하면
다윗 일행과의 만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다윗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26절에 보면,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원수가 누구도 아닌 자기 남편이 될수 있으며
이는 곧 자신의 적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집단의 한 일원으로 살아온 셈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인간을 죽임으로서,
반대로 다윗과 함께 있는 자를
끝까지 살리는 작업을 쉬지 않는 사실을
아울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눔의 기준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정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