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시간 및 역사 인식과 신앙관
전에 아주 오랜 만에 참으로 오랜 벗인 두 분의 목사님과 자리를 같이 하고 모처럼 자정 넘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었습니다. 이런 저런 여러 이야기를 나눈 중에 이야기의 본론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어떤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 전개에는 과학자들의 학설이 등장합니다. 아인슈타인 말한 상대성이론, 스티븐 호킹이 말한 양자역학 입니다. 통상 시간의 흐름에 의한 역사관은 직선사관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과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의해서 출발하는 시작점이 있습니다. 이 시간과 역사는 언젠가는 마지막점을 찍고 종결되게 됩니다. 이 시간과 역사는 빛에 의하여서 존재합니다. 빛은 직선이란 이해를 갖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의한 역사관을 직선사관으로 갖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과 역사는 양자역학의 학설에 이르러서는 달라집니다. 빛은 직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이며 앞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가기도 서로 만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에 의한 시간과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습니다.이 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터널이 존재하여 시간을 초월한 소위 타임머신이 존재하게 되어 과거로도, 미래로도 가게 되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동시에 존재하며 만나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직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에서 그야말로 한 점일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이를 통해서 갖는 대화의 진정한 논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언제 부활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언제이겠는가 하는 것으로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모든 시대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말이죠.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때요, 죽음에서 부활의 생명에 있게 되는 때에 있는 눈을 뜸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음을 맞이하자 제자들에게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라고 하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통해서 오빠의 죽음을 인하여 큰 슬픔에 있는 누이인 마르다를 향하여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분 안에서 죽음에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있는 믿음에 있게 해 주신 것에 의해서 입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과학의 학설과 그 입증의 설명이 없이도 해답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져온 증언은 직선사관에 의한 시간과 역사 인식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의한 존재성과 사건의 발생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서 죽은 이후의 문제를 죽음의 과거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의 미래와 그 사이의 현재에 놓인 신자의 상태로 보았습니다. 그러한데 사도 베드로는 주 안에 있는 자의 시간적 이해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8) 라고 하는 표현으로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믿음에 있는 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 (히 10:37) 라고 말씀해 주신데 따라 그야 말로 잠시 잠간후면 있을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바라보며 따름에 있었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속히 맞이함에 있을 우리입니다.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