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대는 애벌레
하 승 미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인적은 드물고 바람만 잦다. 화장기 없는 푸석푸석한 얼굴로 겨울의 밉살스러움에 몸을 맡긴다. 감싸 안을 잎도 숨어들 꽃도 없이 코끝을 에는 풍동(風動)에 본연의 속살만으로 앙상한 가지를 붙든다. 꿈틀거리는 생명의 숨소리에 오롯이 귀 기울인다.
중학생인 아들의 외투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다. 마네킹의 호객을 받으며 잠바를 거울에 대어본다. 온몸을 감싸도록 털을 누빈 롱패딩이다. 이리저리 봐도 비슷한 모양과 길이의 잠바가 매장마다 즐비하다. 올록볼록한 모습이 애벌레를 닮은 롱패딩은 청소년들 사이에 한때 겨울 교복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행했다. 제각기 다른 아이들의 개성을 살릴 맵시는 사라지고 겨우내 교복을 감싼 애벌레들의 행렬이 등하교 시간이면 여기저기 무리 지어 다닌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아이가 있다. 저녁이면 운동화 끈 질끈 묶고 동네를 뛴다. 몇 바퀴든 쉬지 않고 뛰는 학생은 아는 낯을 만날 때면 소리 없이 방긋이 웃으며 먼저 인사한다.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가 부끄러울 법한 중학생 남자아이는 상냥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런 아이가 문자로 용돈을 보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버스비가 없어 학교를 걸어 다닌다. 아침도 거르고 컵라면 사 먹을 돈도 없다. 계좌번호와 함께 날아온 애절함에 교통카드를 충전해주기도, 용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한데 이런 문자를 받은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 동네 아줌마 몇몇이 똑같은 문자를 여러 차례 받은 사실을 안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한창 자라는 나이에 오죽 배가 고프고 힘들었으면 싶다가도, 여기저기서 받은 돈이 꽤 많을 거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부터인가 유명 상표의 롱패딩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속은 듯 아닌 듯 괘씸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교복 위 수줍은 단발머리 여고 시절, 한겨울이면 요즘의 패딩과는 다른 솜 잠바나 직접 짠 털 스웨터를 입었다. 그도 아니면 내복과 두꺼운 스타킹으로 견디었다. 나는 주로 내복을 애용했다. 간혹 오리털 패딩과 일명 떡볶이 코트라고 불리는 더플코트를 입은 친구는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 선망을 하필이면 내 짝꿍은 둘 다 가지고 있었다. 남색 떡볶이 코트를 입고 오는 날에는 연신 곁눈질했다. 주황색 오리털 패딩을 입은 날은 소매가 더러워질세라 오른팔은 빼고 공부하는 불편한 모습조차 부러웠다.
짝꿍과 소원 들어주기 빙고 게임에서 이겨 떡볶이 코트를 입게 되었다. 동그란 단추를 작은 구멍에 밀어 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학교 앞 분식점 떡볶이 모양을 닮은 막대 단추를 가죽 고리에 끼워 허리 아래까지 채우는 모직 코트다. 탈부착 가능한 모자는 덤이다. 한 반에 한두 명 입을까 말까 한 그 떡볶이 코트를 하교 시간까지 점령한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나의 등 뒤로 친구는 통 크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선물한다. 속 깊은 친구의 마음이 무릎까지 내려와 따뜻하다. 등하굣길이면 3단 떡볶이 단추는 잔뜩 고개를 쳐들곤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내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입고 있는 시간만큼은 교복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어 칼날 같은 바람을 저지하고 친구들의 눈길을 흡족하게 즐긴다. 빳빳한 깃은 시한부 자존심을 한껏 올려준다.
네모난 교실 속 네모난 책상, 옹기종기 앉은 애벌레들 사이로 밋밋한 뒤태의 아이. 롱패딩이 없다는 것은 빈궁의 상징이다. 제아무리 운동 삼아 걸어 다니고, 배고프지 않은 척해도, 롱패딩은 입은 척할 수 없었으리라. 유행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나만의 스타일을 뽐내고 싶지만 남루함은 가방에도 신발에도 묻어있다. 알몸을 숨기기 위해 양심과 바꾼 문자를 힘겹게 적어갔을 녀석은 언제나처럼 동네를 뛰며 미소 짓는다. 먼저 어른의 길로 들어선 나는 엷은 눈인사로 속아주기보다 지켜주기로 한다.
겨울방학이면 시골 할머니 댁에 자주 갔다. 꽁꽁 언 논에서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썰매를 타는 즐거움과 밤이면 들려주시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는 동심의 겨울을 맛깔스럽게 했다.
완벽할 것만 같은 할머니 집에도 애물단지가 있었다. 방 한쪽 구석 시렁에 걸린 구린내 진동하는 똥색 네모, 메주다. 특히 위에 엉겨 붙은 하얀 곰팡이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메주가 어떤 물건인지 모르던 나는 밥상에 오른 된장찌개를 누구보다 맛있게 먹었다. 그러면서도 메주를 볼 때마다 코를 잡고 인상을 쓰던 나에게 할머니는 말씀해 주셨다. 메주로 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 해의 장맛은 메주에 곰팡이가 얼마나 잘 피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빠져만 주면 좋을 것 같았던 시골 생활의 골칫거리 메주, 그 위의 곰팡이가 내 밥상의 최고 진미였다.
애벌레는 곤충이 알에서 부화한 뒤 어른벌레가 되기 전까지의 단계다. 제 발로 걷지도, 날개로 날지도 못하는 아직은 자라는 중이다. 온전한 어른이 되기 위해 외줄 타기를 한다. 진한 맛을 내기 위해 곰팡이를 피우는 메주처럼 익어가는 시간이다. 기꺼이 방 한쪽을 내어주고도 진동하는 냄새를 참아내고 두툼한 솜이불까지 고이 덮어주던 할머니의 투박한 손끝에서 장은 피어난다. 알처럼 매끈하지도 나비처럼 예쁘지도 않아 눈길을 둘 만하지 못하지만 견디어 날아오를 번데기의 화려한 날갯짓은 머지않아 지천을 흔들 것이다.
너른 세상에 종종 홀로다. 외투는커녕 실오라기 하나 걸칠 수 없어 거짓으로, 허영으로 칭칭 동여맨다. 볼썽사나운 껍데기 속으로 숨어들어 가지만 이내 들키고야 만다. 쿰쿰한 냄새가 나고 보기에 흉할지라도 진정한 본질을 품어 꽃피우기 위한 생명의 역동이다. 아직은 이불 속에서 온기를 마셔야 하는 아이들의 성장통도 봄이 오면 볏짚이 벗겨지리라. 오직 내 안에서만 뿜어 나오는 호흡에 집중하며 본연의 나와 마주할 때 롱패딩으로도 떡볶이 코트로도 덮을 수 없는 나만의 꽃이 피어오른다. 밉살스러운 바람도 장맛이 익어가는 틈일 뿐이다.
봄으로 가는 길목, 애벌레들의 군무로 왁자지껄하다.
첫댓글 2023,07,10 임원회의에서 하승미님 신입회원으로 승인하였습니다.
< 알몸을 숨기기 위해 양심과 바꾼 문자를 힘겹게 적어갔을 녀석은 언제나처럼 동네를 뛰며 미소 짓는다. 먼저 어른의 길로 들어선 나는 엷은 눈인사로 속아주기보다 지켜주기로 한다. >
글 곳곳에서 하승미 회원님의
겨울날 덮던 솜이불처럼
따스하신 마음이 느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회원되심을 환영합니다~♡
하승미 회원의 글에서 따뜻한 마음이 스며나옵니다.
누구나 그런 과거가 고여있는 우물 하나쯤 품고 있겠지요.
내 주변에도 눈길 줄 곳은 없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애벌래들에게 응원을^^
하승미 회원님,
작품으로 뵙게되니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
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승미 회원님 반갑습니다.
자주 글 올리시고 얼굴도 봅시다.
작품 잘 읽었습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거듭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