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을 지나 <오래된 정원>의 주영작 역할까지, 윤희석은 은근하지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꼭 다시 영화로 관객과 만나고 싶다는 그의 지나간 해와 신년 계획을 물었다.
임상수 감독과는 언제 처음 만났나? 2000년 뮤지컬 <록키 호러 픽쳐쇼>에 출연할 때였다. <바람난 가족> 준비하시면서 제의를 하셨는데 봉태규가 연기한 지운 역이 어떠냐고 했다. 2시간 정도 거의 담화에 가까운 오디션도 봤는데 정작 시나리오를 보고서는 자신이 없었다. 사실 성지루 선배가 연기했던 우체부 역할이 탐나긴 했지만, 임 감독님이 이미 그건 성지루 선배를 염두에 두고 쓰신 거더라. 그리고 마침 그때가 내 병역문제가 걸려 있던 시기였다. 더 이상 미루기 힘든 나이이기도 해서 군대 갔다 와서 다시 감독님과 함께하기로 했다. 그게 그냥 지나치는 인사치레일 수도 있는데 정말 감독님이 그걸 기억하고 나를 다시 불러 줄지는 몰랐다.
임상수 감독은 연극계 배우를 발견하는 눈이 탁월한 사람이다. 어떤 점을 마음에 들어 했나? 뭐라고 할까, 난 무대 위에서도 지나친 연극적 연기를 하는 게 맞지 않다. 장르를 떠나 굉장히 자연스런 느낌을 선호한다. 그리고 또 임 감독님이 나처럼 동양적으로 찢어진 눈을 좋아하시더라. <오래된 정원>의 라스트에 등장하는 딸의 눈을 봐도 그런 것 같다.(웃음)
지금은 영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선균, 오만석과 절친한 사이라고 들었다. 거의 10년 된 친구들이고 친하다는 말조차 어색한 형제들이나 다름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들이 거의 사생활 없이 학교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니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학창시절 일종의 유랑극단을 꾸려서 전국 각지를 돌며 연극을 공연했다. 그들보다 난 좀 방황을 많이 한 편이었다. 생활고 같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연극 접고 일반 직장 들어가서 생활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또 연극 제의가 들어오면 때려 치고 또 무대에 오르기도 했고, 그렇게 한때는 이것도 저것도 못 하는 처지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때도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보면 영화계 선배들인데 별다른 조언은 없었나? 선균이는 주눅 들지 말라고 했다.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라고. 나 스스로가 20대 초반에 이리저리 맴돌다가 학교 들어가서 연기 배우다가 나와서 방황하다가 다시 학교 들어가고 그런 과정을 거쳤던 터라, 늘 공력을 더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이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오래된 정원>처럼 실제 운동권 시절의 기억이 있나? 75년생이고 수능 첫 세대라 격렬했던 시절의 기억은 물론 없다. 다만 일찍 좀 눈을 떴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나에게 영감을 줬다고까지 할 수 있는 존경하던 선생님이 전교조셨고, 결정적으로 고등학교 시절 교회 다닐 때 좋아했던 누나가 격렬한 운동권이었다. 당시 정원식 총리가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때 그 사건에 대해 쓴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주기도 했다. 집에도 사회과학 서적들이 많이 있는 편이었는데 그즈음 신영복 선생의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뭔가를 제대로 알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입시제도에 대한 환멸 같은 것도 생겨났다. 아마 그런 체험이 나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정원>의 주영작은 원작의 송영태와 좀 다르다. 임상수 감독과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었나? 새롭게 만들어진 캐릭터라 봐도 무방하다. 임 감독님이 “나처럼 하면 돼” 그러셨다. 실제로 임 감독님은 옷도 좀 타이트하게 입고 행동 하나하나 특이한 면이 많다. 나는 아무래도 옛날 운동권 학생이니까 머리도 더벅머리고 좀 더 고증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감독님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다. 옷도 세련되게 입고 절대 촌스러우면 안 된다고 했다. “전두환 죽여버리죠” 같은 대사도 난 굉장히 진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은 그냥 껌 짝짝 씹으면서 껄렁하게 내뱉어도 된다고 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는데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니 감이 잡혔다. 또 이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도, 나중에 보니 그게 전혀 오버가 아니고. 그래서 대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웃음) 나중에 메이킹 다큐를 보신 분들이, 내 스타일대로 연기하던 모습이 어떻게 점점 임 감독님과 닮게 변화해 가는지 그 과정이 보여 재미있다고 하시더라.
주영작이라는 인물이 언제쯤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것 같았나? 정말 촬영 끝날 때까지 몰랐다. 이윤기 감독님은 큰 상황만 던져주고 내가 애드리브를 해가면서 자율적으로 이끌어가게 하는 반면, 임상수 감독님은 구체적으로 직접 시연까지 보이면서 세세하게 지도해주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임 감독님 같은 경우 연기를 하면서 ‘내가 여기서 왜 이렇게 연기를 해야 하나’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게 나중에 보면 다 맞다. 그래서 더 비굴하게 했었어야 하는데, 좀 더 불쌍하게 할 걸,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임상수 감독 전작 중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나? <바람난 가족>을 좋아한다. 임 감독님의 작품은 작품으로서는 무척 좋은데 배우로서는 정말 쉽지 않은 작업 같다. <그때 그사람들>도 마치 2시간 10분짜리 ‘돌발영상’을 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웃음) 그중에서 연기하고 싶은 작품을 하나 고르라면, 내가 좀 나이가 들었다고 가정할 때 <그때 그사람들>에 한번 출연해보고 싶다. 연기자로서 경험이 쌓이면서 까뮈의 <이방인>처럼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돌발적 상황이 좀 더 와 닿는다. 감정을 조금씩 축적해가다가 폭발하는 상황보다 묘한 순간의 해프닝 같은 상황이 더 매력적이라고나 할까.
<록키 호러 픽쳐쇼> <그리스> 같은 뮤지컬이 당신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영화에서도 그런 장르를 연기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겠다. 왜 없겠나. <물랑루즈> 같은 영화 보면서 정말 반했다. 굳이 뮤지컬이 아니더라도 음악적 요소가 가미된 영화들을 정말 좋아한다. <헤드윅>은 물론 <레이>도 한 스무 번 정도 본 것 같고, 제리 리 루이스를 소재로 한 <열정의 록큰롤>은 내 인생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음악영화들을 좋아해서 중학교 때인가 신촌 블루스가 출연한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영화도 좋아했다. 또 내가 원래 아동극을 해서 그런지, <가위손>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영화도 좋아한다. 어떤 매체에서 나를 두고 ‘뮤지컬계의 장동건’ 이런 제목의 기사를 써서 무척 민망했던 적이 있다. 여기서 좀 정정을 하고 싶다. 저 두 작품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전문 뮤지컬 배우는 아니다. 오래도록 뮤지컬 해오신 분들 중에 내가 누군지 모르는 분들도 많을 거다. 그런 분들한테 누를 끼치는 거 같아 죄송하다.
TV 드라마 <90일, 사랑할 시간>에 출연한 소감은 어떤가? 그 역시 드라마 데뷔작인데. 너무 속도가 빨라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난 좀 느린 편이고 습득력 자체도 무지 더디다. 그러다보니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연기자로서는 또 다른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됐다. 반면 영화는 그보다 느린 편이니 나로서는 무척 좋았다. 배우의 감정을 기다려주기도 하니까.
2006년 TV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본격적인 영화 신고식도 치렀다. 2007년을 맞는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주변에서 그런 얘기들 많이 하시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동안 워낙 포기하면서 살아오다보니 큰 욕심이 없다.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는 지혜도 터득했다고나 할까. 20대 초반에는 내가 서른 살이 넘고 그러면 마치 세상을 평정할 것 같은 생각도 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옛날에 비해 심장박동수가 달라졌다. 이왕 여기까지 기다린 거 더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가늘게 오래 살아남는 것도 중요한 미덕이지 싶다.(웃음) 그래도 2007년에는 무대나 TV 말고 먼저 영화로 다시 관객들과 만나고 싶다.
사진 김병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