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8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하선전야’]
하선전야下船前夜
정씨는 이미 잠들었는지 고요하고
선실 구석에서는 김씨의 '봄날은 간다'가 흘러 나왔다
붕장어 이빨에 손등 찔리우며 익은 가락이지
이따금 숭어 튀는 소리 피안처럼 들리고
마스트 갈매기 잠꼬대가 진하게 가슴을 쳐온다
그럴수록 나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았다
아무리 쓸쓸해도 이웃 침상에 누워있는
저 친구처럼 고적할까
항상 수평선 별빛에 젖어 이운 '봄날은 간다'도
오늘 밤뿐이라니
김씨도 이제는 하선을 셈하고 있겠지
옆자리 이씨의 코고는 소리가 상두꾼 만가소리 같다
뭍에 들어가도 싯누런 유전流轉임을 왜 모르겠나
선창에 부서지는 포말 소리가 '봄날은 간다'에 애잔하다
그럴수록 나는 배 밑창 아득한 저 심연 속에 가물거리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았다
우르르 꽝 푸수수
밤 파도가 점점 높아지니 육지가 가깝다
애초에 바다로 나올 때 돌아간다는 신념은 없었다
어부의 신조는 파도와 바닷고기와 갈무리된 그리움 몇 조각인 걸
목울대 꺼이꺼이 대며 사무친 보고픔에 떨다가도
깡소주 한 사발에 그 피멍을 삭혀 버렸었지
아 미칠 것 같이 그리운 얼굴들아
술대접에 어리는 모습들이 해리海里에 아롱지는 구나
그럴수록 나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았다
그날 밤 포구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불러주었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아직도 그 부두 선창어귀를 맴돌고 있을까
모진 인생유전, 설움뿐인 명함마저 그립구나
북받치는 오열을 막으려고 모포에 머리를 박은 채
코고는 이씨 곁에서 경련이 시작된 손끝을 털었다
그럴수록 나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를 더듬어 보며
선창에 비스듬히 굴절 된 달빛에 버무려진 이중창
'봄날은 간다'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숨죽여 불러보며 찌들은 머리털을 움켜쥐었다
*파도를 이기며 재기의 꿈을 쌓아 가는 어부들을 기리며
⛄ Gemini씨의 비평
♣비 평 : 심연의 파도 위에서 더듬는 존재의 화석 — <하선전야(下船前夜)>
이 시는 육지로 돌아가기 직전, 거친 바다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어부의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낸 수작입니다. 제목인 '하선전야'는 단순한 작업의 종료를 넘어, '고립된 투쟁(바다)'에서 '허무한 현실(뭍)'로 이행하기 직전의 존재론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1. 대립적 청각 이미지를 통한 정서의 형상화
이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치는 소리의 대비입니다.
⚫'봄날은 간다' vs '엄마야 누나야' : 김 씨의 유행가 '봄날은 간다'는 거친 노동(붕장어 이빨에 찔린 가락)과 세속적 한(恨)을 상징합니다. 반면, 아내와 아이들이 불러준 '엄마야 누나야'는 화자가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안식처이자 순수성을 상징합니다.
⚫만가(輓歌)와 파도 소리 : 이 씨의 코고는 소리를 '상두꾼의 만가'로 치환한 대목은 압권입니다. 이는 하선(下船)이 곧 희망찬 귀환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스러운 삶(싯누런 유전)으로의 입도(入道)임을 암시하며 비극적 분위기를 심화합니다.
2. '시잔(詩殘)'과 '형해(形骸)' : 잃어버린 자아에 대한 추적
각 연의 끝에서 반복되는 **"퇴화 된 내 시잔(詩殘), 폐공 속에 누워있는 나의 오랜 형해(形骸)"**라는 구절은 이 시의 핵심적인 후렴구입니다.
⚫시잔(詩殘) : 화자에게는 어부로 살기 이전, 혹은 거친 파도에 마모되기 이전의 '시적 감수성'이나 '인간적 존엄'이 남아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퇴화'한 상태입니다.
⚫형해(形骸) : 정신은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육체를 의미합니다. 화자는 깡소주로 그리움을 삭이며 살아온 시간 동안 죽어버린 자신의 본질을 '폐공(비어있는 구멍)' 속에서 끊임없이 더듬습니다. 이는 자기 연민을 넘어선 처절한 자기 확인의 과정입니다.
3. 공간의 전이 : 바다에서 뭍으로, 그리고 심연으로
화자는 육지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심연을 응시합니다.
⚫바다 : 신념 없이 흘러들어왔으나, 파도와 고기와 그리움으로 버텨온 투쟁의 공간입니다.
⚫뭍 : "싯누런 유전"이라고 표현된 육지는 결코 안식처가 아닙니다. 그곳 역시 바다만큼이나 모진 인생의 파도가 몰아치는 곳임을 화자는 직시하고 있습니다.
⚫심연 : 배 밑창 아래의 아득한 심연은 화자의 내면 깊숙한 곳과 맞닿아 있습니다. 육지로 돌아가기 전, 그는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은 자신의 '형해'를 확인하며 비로소 다시 살아갈 동력을 얻으려 합니다.
4. 결어 : 이중창의 비애와 숭고함
마지막 대목에서 '봄날은 간다'와 '엄마야 누나야'가 버무려지는 '이중창'은 화자의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는 시도입니다. 찌들은 머리털을 움켜쥐며 숨죽여 부르는 이 노래는, 비루한 현실(유행가)과 간절한 꿈(동요)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의 보편적 초상입니다.
♚ 총 평
이 시는 어부라는 특수한 직업적 배경을 빌려왔지만, 그 울림은 보편적입니다. 누구나 가슴속에 '퇴화 된 시잔'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거친 손마디로 자신의 영혼을 더듬는 이 어부의 모습은 삶의 비애를 견디는 인간의 숭고함을 일깨워줍니다.
문장이 묵직하고 비유가 날카로워, 독자로 하여금 차가운 바닷물과 뜨거운 깡소주의 기운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