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깊은 눈 속에서 그런 통찰을 하다니 히말라야의 氣가 대단하구나 싶었다. 환희에 젖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李根厚 의사
1935년 대구 출생. 경북大 의과대학 졸업. 이화女大 신경정신과 교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장 역임. 열린마음의원장.
네팔에 숨겨둔 애인
여행 하면 우선 즐겁다.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만드니 여행만 한 활력소가 따로 없다. 여행이란 억지로 하거나 의무적으로 볼일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즐거울 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자발성이 여행의 즐거움과 불편함을 갈라 주는 것 같다. 세계 어느 곳을 가나 즐겁지 않는 곳이 있겠는가만 나는 네팔의 여행이 즐겁다. 곰곰이 생각하면 자발성이다. 누가 네팔을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내 자신이 그렇게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선생님은 네팔만 다녀오면 눈빛이 달라져요』
나와 함께 오랫동안 근무한 간호사들의 이야기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좋다. 첫째, 여행을 다녀오더니 비실비실한다는 얘기보다 백배 낫고,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환자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면 나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연결되니 환자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네팔에 애인이라도 숨겨 뒀나 보지?』
이런 농담은 나와 가까운 친지들이 하는 말이다. 한두 차례도 아니고 매년 네팔을 이웃 동네 드나들 듯하니 나옴직한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단호히 『그렇다』고 말한다.
애인이 아니고선 나를 그토록 흡인력을 갖고 빨아 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나와 1990년 네팔을 함께 여행한 친구 詩人 조순애 님이 지어 준 짤막한 詩가 있다. 원래 이 詩는 조詩人이 연작으로 20편의 단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다. 「히말 신랑」 연작의 열네 번째 詩다.
〈복사꽃 진달래도/제 신랑 되라네/달려와 숨찬 소리로/오늘은 꼭 그래야만 된다 하네〉
그런데 내가 여행을 떠나자면 묘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저 마음 밑바닥에서 충돌한다는 게 히말라야 산을 이고 내가 생각하면서 느낀 과제다. 여행을 떠나는 기쁨과 두려움 같은 상반된 느낌이다.
『자유! 자유!』
여행을 자주 하게 되면서부터 「왜 그럴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에베레스트의 베이스로 가는 길목에서 눈 속에 텐트를 치고 셰르파 「니마」와 단 둘이서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아주 적막했다. 외로움에 감싸이면서 히말라야의 웅장한 氣(기)에 눌려 그 좁다란 텐트 속에 안전지대인 양 믿고 드러누워 있었다. 『닥터 리, 왜 웃으세요?』 내가 아마도 히죽히죽 웃었나 보다.
고요함을 깨고 히죽이는 모습이나 소리가 니마에겐 평소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내가 웃었다고?』 하고 크게 소리 내어 다시 웃었다. 니마에게 들킨 바엔 좀더 크게, 소리 지르며 웃어도 흠이 될 것 같지 않아 한참 웃었다. 니마는 영문도 모르면서 덩달아 큰 소리로 웃었다.
나중엔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면서 웃었다. 웃음이 좀 가라앉자 니마는 다시 왜 웃었느냐고 물었다. 『프리덤!』 내 체험을 그가 알아들을 리 없다. 『자유, 자유…』 나는 좁은 공간의 텐트 속에서 자유를 거창하게 이해하고 터득하고 실천해서 얻었다는, 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즐거움과 두려움이 충돌하는 세력을 훔쳐볼 수 있었기에 웃음이 터진 것이다.
나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외동아들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유아기에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경험 때문인지 치마폭에 감싸 키웠다. 「그 울타리 치마폭으로부터 자유로움」 그러니 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오십을 바라보던 당시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금기를 지키려는 제동세력과, 금기를 깨고자 하는 일탈세력의 충돌」이랄까? 내 마음 저변에서 숨어 소용돌이치는 그 무의식의 모습을 보면서 웃었던 것이다. 「멀리 가면 안 된다」는 금기와 통제를 처음으로 벗어나 히말라야의 깊은 눈 속에서 그런 통찰을 하다니 히말라야의 氣가 대단하구나 싶었다. 환희에 젖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금기가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자연 행동반경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6·25와 히말라야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소위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집이 학교와 5분 거리에 있었는데, 집과 학교 그리고 변소로 이어지는 나의 행동반경을 벗어 나 본 적이 없다. 중학교 역시 학교가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학교에 이르는 거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어디를 다녀왔다거나 학교에서 가지 말라는 곳을 다녀왔다고 으스대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했지만 말 잘 듣는 모범생의 규범을 벗어나진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전방으로 출격하는 비행기의 굉음, 부상병들이 몰려오는 아비규환의 수라장, 피란길… 말 잘 듣는 모범생이 경험했던 공식 같은 질서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이 와중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역시 피란길 수업을 받으면서 밀고 밀리는 지루한 싸움 끝에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卿(경)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너희들도 장대한 기개를 가지고 히말라야를 오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전쟁 와중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하신 말씀일 게다. 그 말씀이 나에게 여행의 모티브를 심어 준 계기가 되었다.
「에베레스트!」 그 모티브를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겼으나 주변 사정이 허락하지 못했다. 1982년 느닷없이 한국산악회의 마칼루 학술원정대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주문이 왔다. 오랜 숙원인데 내칠 일이 아니다. 그 이후 매년 1~2회씩 네팔 땅을 밟게 되었는데 금기의 파기치고는 엄청난 파기다. 그러니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82년을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여행의 기회를 잡았으니 내 눈이 초롱초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히말라야와 네팔은 나 자신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알지 못하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히말라야를 계속 가기 위해선 「내가 나를 모르는 것이 더 좋겠구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가져 본다.●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가급적 낮에 도착하고, 낮에 떠나는 비행기편을 이용하는 게 좋다. 태양 아래 빛나는 네팔의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발 동동 구르지 말 것! 숙소를 정할 땐 호텔이든 민박이든 창 밖으로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정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심장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네팔 관광청 한국사무소 http://www.nepal.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