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베트남의 인연 ‘화산이씨’와 ‘정선이씨’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베트남 해양 실크로드 중심지 호이안 (3)

베트남의 고대 해양실크로드의 최대 기착지 ‘호이안’. 당시 이용상과 이양흔이 우리나라로 떠났던 항구로 여겨지는 곳이다.
고대로부터 베트남에서 표류하면 우리나라에 바로 왔다. 우리나라로 흐르고 불어오는 해류(흑조류)와 바람(무역풍) 때문이다. 베트남 호이안은 그 출발점이다. 그곳은 지정학적 위치로 예부터 베트남 해양실크로드 기착점이 됐다. 때문에 고대로부터 많은 베트남인들이 우리나라로 표류해 왔고, 우리나라 적지 않는 사람들이 베트남을 다녀왔다. 그 중에는 꽤나 잘 알려진 사람도 있다. 900여 년 전, 한국에 온 이용상(화산이씨 시조)과 이양혼(정선이씨 시조)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당시 베트남 호이안 항구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이안은 당시 베트남 최대의 해양실크로드 항구로 세계 여러 나라 선박들이 정박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호이안의 낮과 밤의 다양한 풍경들.
▶790년전 베트남에서 귀화한 ‘이용상’
화산(花山)이씨 시조는 베트남 왕족, 이용상(李龍祥·베트남명은 리롱트엉; Ly Long Thuong)이다. 그는 1174년 베트남 리왕조 제6대 황제 아인똥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베트남 첫 독립국가인 리 왕조(1009-1226)의 9대 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의 군 총수였다고 한다.
1226년, 조카인 혜종이 왕 즉위 후, 혜종의 외척 쩐투도(진수도)가 국력을 잡게 되어 리왕조가 멸망되자, 이용상은 이를 피해 배를 타고 도피했다. 당시 쩐왕조를 세운 진수도는 중국계였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계절풍을 타고 흘러흘러 한반도 황해도 화산(옹진반도)에 도달한다. 장장 3천600여㎞나 되는 거리였다. 그 후 고려에 몽골이 침입하자, 격퇴시키는 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임금(고종)으로부터 ‘화산군’의 작위와 함께 화산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화산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도 받았다.
화산에는 지금도 유적이 남아 있다. 그때 쌓았다는 안남토성,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찾아가 울었다는 망국단, 리 왕조의 시조 이름을 딴 남평리, 나라 이름을 본뜬 교지리 마을 등이 그것이다.
현재 화산이씨는 남한에만 약 260가구에 1천400명 가량 살고 있다. 북한에는 더 많다고 한다. 경북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는 시조 이용상을 모시는 사당(충효당)이 있다.
베트남에는 화산이씨의 사원과 축제가 있다.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박닝성에 있는 도(DO)사원이 그것이다. 매년 음력 3월 1일이면 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766년 만에 1992년 양국 수교 이후 화산이씨 종친회가 고향방문을 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베트남 정부는 왕손으로 예우했다. 화산이씨가 이토록 환영을 받은 이유는 리왕조가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한 왕조이기 때문이었다. 하노이를 수도로 정한 최초의 왕조도 리왕조 이다. 지금도 베트남 동전에 리왕조 종묘가 새겨져 있을 정도이다.
당시 베트남 언론은 ‘800년 만에 끊겼던 리왕조의 혈통이 부활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당시 베트남엔 “나무숲이 사라지고 따오케 강물이 마를 때에 리왕조가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그대로 실현됐다. 1995년에 이용상 후손이 베트남에 갔을 때, 나무숲은 사라지고 따오케강이 있던 곳은 농토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쩐투도(진수도)반란 당시 종묘제사에 쓰던 신성한 향로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베트남을 찾은 이용상 후손이 여기서 제사를 지낸 뒤, 그 동안 찾지 못했던 그 향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마을 촌로들은 전설이 실현됐다며 감격했다. 이후 화산이씨는 아예 베트남인으로 인정받아 베트남에 거주하기를 원할 경우, 까다로운 시민권 제한을 받지 않고, 오히려 우대를 해주고 있다.
그 후 베트남 정부는 해마다 축제일에 화산이씨 종친회 간부들을 초청하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 인사가 한국을 방문할 경우 이들 종친회를 방문하는 것도 관례가 됐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화산이씨를 자국인으로 인정, 내국인 증명서를 주고 현지 사업권도 허락하고 있다.
대표적인 이로 이상준 회장(골든 브릿지 증권)을 들 수 있다. 그는 베트남에 2004년 진출해 현지 대표사무소를 설치하고 현지인들과 똑같은 조건의 대우를 받으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
양국간의 관계는 더욱 진전돼 2009년 드디어 화산이씨 중의 한사람이 베트남에 영구 귀화하는 일도 생긴다.
이용상의 26대손 이창근씨가 영구 귀화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마치 연어가 옛 강을 찾아 회기한 기분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와 더불어 ‘황숙 이용상’의 베트남어 출판기념회를 가지기도 했다. 현재 그는 호이안에 인접한 다낭에서 환경사업을 하고 있다. 폐비닐을 수거한 후 리사이클 해서 생활용품으로 재생하는 공장이다. 그의 자녀들도 모두 왕손으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잘 적응하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동시통역을 맡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90년전 베트남에서 귀화한 ‘이양흔’
정선(旌善)이씨는 1127년 베트남 ‘리 왕조’ 인종의 셋째 왕자 ‘이양혼(리즈엉꼰)’이 한국 경주 정착한 손이다. 그의 묘가 현재 정선군 바라산에 있다. 화산이씨 이용상 시조보다 99년 앞선다. 후손 중 세도가 중에는 고려 명종 때(1170-1197)에 14년간 철권을 휘두른 6대손 ‘이의민’이 유명하다. 베트남 역사에도 없고, 국내 역사에도 이의민이 천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전적으로 족보를 토대로 하고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자손이 없었던 리왕조 왕(인종)이 양자를 뽑는 과정에서 이양혼(리즈엉꼰)을 왕자로 선택됐을 가능성이 있고, 그의 사망 후 양자들 간의 권력 다툼을 우려해 이양흔이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고려로 떠났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 글을 맺으며…
이들 귀화인 후손의 베트남 방문 혹은 이민에 대해서 베트남 정부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전 세계의 비엣끼우(베트남인 재외동포)들에게 화산이씨의 귀환을 들어, 민족 정체성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 귀국을 망설이는 그들에게 760년 만에 찾은 리왕조 후손의 귀화는 곧 민족 정체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들 귀화인에 대한 베트남의 역사책에도 없고, 한국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서도 명확치 않다. 그러나 대대손손 내려오는 족보에는 명확히 기록돼 있다. 어찌 도망간 자가 흔적을 남길 리가 있겠는가?
한 사람의 삶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치세보다는 난세 때에 그런 인물이 많았다. 고려시대 이용상과 이양흔의 행적은 치욕과 영광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는 한국과 베트남 고대 관계사의 한 단면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으로 시집오는 수많은 월남 아가씨들의 애환이기도 하다.
당시 패망의 아픔을 달래며 떠났던 항구, 호인안! 홍등 너머 바닷길에 쓸쓸함이 적셔온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베트남 역사
베트남의 국명은 ‘월남(越南)’이란 한자어의 베트남어식 발음이란다.
월남이란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전통왕조인 阮朝(1802-1945)가 세워지면서 당시 청나라의 승인 하에 제정된 국호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한때 월남의 별칭이었던 ‘안남’이란 말은 당이 월남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근대에는 프랑스의 식민지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남북이 나뉘어져 있다가 1975년 통일됐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 하나가 있다.
우리는 중국세계의 일부로서만 이야기되는데 비해, 베트남은 북으로는 중국적 세계의 일부였지만, 남으로는 문화를 달리하는 참파와 크메르(캄보디아) 등의 점령을 통해 그들의 문화(고대에는 인도문화, 근대에는 유럽문화)를 받아들여 복합 성격의 문화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남으로부터 받아들일 문화가 없었던 점이 다르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출처: <광주매일신문> 2015.2.26
첫댓글 몰랐던 사실이네요. 베트남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