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저(金䃴)
[본관] 경주(慶州)
[문과] 중종(中宗) 34년(1539) 기해(己亥) 별시2(別試2) 을과(乙科) 1[榜眼]위(02/06)
[생졸년] 1509년(중종 4)~1547년(명종 2) / 향년 38세
조선 전기에, 검열, 어사, 교리, 지평 등을 역임하다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학광(學光). 할아버지는 김훈(金薰)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김세필(金世弼)이며, 어머니는 이탁(李鐸)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에 유학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 뒤 검열(檢閱)이 되었다. 1542년에 심한 흉년이 들자 경상도와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이를 진휼하였고, 인종 초년에는 시독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곧 교리(校理)·지평(持平)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사사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 선조 즉위 후 복권문제가 논의되다가 1570년(선조 3)에 다른 10여 명과 함께 복권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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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세필(金世弼)[文]
[조부(祖父)]
성명 : 김훈(金薰)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영유(金永濡)[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탁(李鐸)(주4)
본관 : 고성(固城)
[처부(妻父)]
성명 : 신수(申洙)(주5)
본관 : 고령(高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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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 증 이조판서 충민 김공 묘표(持平贈吏曹判書忠愍金公墓表) - 김종수 (金鍾秀, 1728~1799)
김저(金儲, 1509~154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학광(學光),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김세필(金世弼)이고,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으로, 1539년(중종 34)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심한 고문을 받고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선조 초에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정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충청북도 음성의 지천서원(知川書院)에 아버지 김세필(金世弼)과 함께 향사되고 있다.
[조선조에서 일어난 사화(士禍)인, 기묘년 을사년의 명현(名賢)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미치어 눈물을 흐르게 만든다. 기묘년의 옥사 십청헌 김문간 공은 이전에 위태하게도 갑자기 죽지는 않았다. 그 아들(金䃴) 충민공은 마침내 을사사화로 인해 죽었다.
이기(李芑) 자붕(磁朋)은 흉악한 모리배였다. ‘곤정(남곤과 심정)’이라는 말이 떠돈다. 조심스런 문간 공의 바른 길에는 가히 천지가 얼마나 쇠하고 성함이 오고갔을까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충민공의 소년시절에는 뛰어난 기상으로 용감하게 나아감으로써, 도리를 위해 죽음도 피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군자로써 마땅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여겨진다.
그 혹은 죽고 혹은 목숨을 건졌다. 하늘에 달렸었다 이른다. 충민공의 휘는 저(䃴)이고 자는 학광(學光), 김씨 선조의 모든 조상이 신라왕이자 경주가 본관이다. 고려 태사 김인관(金仁琯)을 시조로 삼는다. 5세조는 휘가 자수(自粹), 호(號)는 상촌(桑村)이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광주(廣州) 추령(태재고개)에 도착하자 절명사를 짓고 마침내 자진했다. 고조의 휘는 근(根)이고 평양 소윤(정4품)으로 증 병조판서이다. 증조의 휘는 영유(永濡)로 지중추부사(정2품 무관),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조부의 휘는 훈(薰), 상의원 첨정 증 공조판서이다. 문간공의 휘는 세필이며 벼슬이 이조참판 증 이조판서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고성 이씨로, 부사의 귀여운 여식이다. 공(김저)은 명나라 정덕 기사년(己巳年, 1509, 중종 4)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기해년(己亥年, 1539, 중종 34) 광화문 별시 차석으로 급제하시었다. 한림원에 천거되어 옥당[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 교리(校理), 부교리(副校理), 수찬, 부수찬을 통틀어 일컫는 말)의 청직을 거쳐 홍문관 저작(정8품), 박사(정 7품)를 역임하였다.
이조좌랑에 승진될 때 명나라 인종 천자가 죽었다. 윤원형 권세에 기대었고 대단한 기세가 올라 공은 사헌부지평(정 5품)이 되었다.
윤원형이 물품을 매권하는 형세가 되니 곧 부사가 윤원형의 여종을 붙잡는 일이 발생했으나 궁궐에서 석방토록 했다.
급기야 을사년(乙巳年, 1545, 인종 1) 8월 21일, 윤원형이 양 사장관을 미친 듯 위협하여 학자들이 대간에 모여 간하는 중에 유관, 유인숙, 윤임의 죄를 논하였다. 밀지가 있음을 알리며 사헌부 대사헌 민제인, 사간원 대사간 김광준 등이 꾸짖으며 말하길, “궁궐이 흉흉하다.
우리가 스스로 먼저 밝히지 못한다면 국가 대사가 장차 이를 곳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공이 분격해 말하길, “충성과 어짊이 짓밟히게 될 것이다. 학자 유림이 곤정(남곤과 심정)의 행동을 참는 까닭이다.” 사헌부 집의 송희규가 곧 말하길, “비록 조금이라도 꺾인다면 우리의 뼈가 바람에 날려 갈 것이다. 나는 따르지 아니하겠다.”
이제야 사간 박광우, 장령 정희등, 헌납 백인걸과 함께 정언 김난상, 모든 우공 장령 이언침, 지평 민기문이 오직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쉴 뿐, 공은 혹 앉았다 혹 일어나곤 했다. 원통하여 분한 기운이 왕성했다. 마침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마쳤다. 이튿날 충순당 회의 일이 드러났다.
공은 또한 7개 대간과 더불어 상소를 논하자 마침내 하옥되었다. 고문당하고 맞고는 안동으로 찬축되었다. 이듬해 병오년(丙午年, 1546, 명종 1) 삼수(三水)로 이배되었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길 따라 정부인은 기묘년(己卯年, 중종 14) 옥중 피 묻은 옷 입은 문간공을 지키고자 서울 밖으로 나와 공(公)을 맞아서, 공의 손을 잡고 크게 통곡하며 말하길,
기묘년에, 현명한 군주가 위에서 트집을 잡아 네 아버님은 죽지는 아니하였으나, 지금의
주상이 어리어, 간신들이 나라를 멋대로 하니 반드시 네 아버님은 돌아오지 못하리라. 이어
이듬해 정미년 1547년에 사약을 받았다. 궁궐에서 계집종을 잡아 이상한 죄안을 만들어 꾸
며서 보고했다. 마침내 숨을 거두니 향년 39세였다. 죽음에 임하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붓을 잡고는 정부인에게 이별의 글을 쓰고자 했다. 그 후에 어머님은 비통만 더할 뿐, 마침
내 그치었다. 대궐을 보고 4배하고 꿇어앉아 독약을 먹었는데도 가히 숨이 끊이지 않아 의
금부 관리가 끈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경기도 용인시 죽전리 부간(負艮)의 언덕에 장사 지
냈으며 문간공 묘 아래에 위치한다. 후에 김명윤(金明胤, 1493∼1572)이 급변을 상고했다.
정언각의 벽서에는 출생의 지위에 따른 노비의 문서를 거두어 살폈다 한다. 선조 즉위와 함
께 이율곡 문성공의 건의로 왕명이 내려 관작이 복구되었다. 지금 정조대왕 을사년(1785)이
되어서야 지난 세월이 다시 돌아오니 공은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시호 ‘충민’, 배 숙인 고
령신씨, 부사 수녀가 기른 자식이 없었다. 공은 남쪽으로 귀양갔다가 북쪽으로 이배되었다.
결시(訣詩)를 지어 둘째형 승지공(承旨公)에게 보내곤 그 둘째 아들로 후사를 잇게 해 달라
청하니 승지공이 허락하여 죄인의 가문이 이어졌다. 분명히 합법하게 일을 하니 감히 관청
에 고하지 못하였다. 숙종 을축년 1685년에, 삼정승이 이 사건을 임금께 아뢰게 되어 예조
성책에 인정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를 옳다 여겨 결시(訣詩)를 직접 자필로 적었다. 더
욱이 조정에는 후자(後子) 중경이 진사로 있었는바,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1589) 문충
공이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하여 전설사 별제(종6품)를 제수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호
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세 아들이 태어나니 든든한 산과 같았다. 문과 직제학을 지내고 관직
이 동중추(同中樞)에 이르렀다. 예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우뚝 솟고 뛰어난 율곡의 문인으로
호는 ‘남곡’으로써, 천거 제수받아 관직이 공조정랑에 이르렀고 이조참의로 증직되었다.
본래부터 충성스런 인사이니 비로소 말마리 향현사에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십청헌
김세필 및 공(김저)을 향사했다. 이후에 십청헌은 팔봉서원에 배향했다. 서원이 많아져 금함
이 있었는데 공은 효도와 우애가 올곧다하여 일찍이 어진 부형(父兄)으로써 임금의 교명(敎
命)을 받았다. 시험에 급제한 재주와 좋은 평판이 널리 알려졌으나 여러 소인배는 이미 마음
이 완고하고 추악하여, 공이 벼슬에 올라 성격이 곧아 거리낌이 없으니 이로써 악을 제거(除
去)하고 선을 떨침을 임무로 삼기에 이르고 흉악한 역적 무리가 이를 미워하여 원수로 여
겼다. 그런데도 공은 두려워 돌아보지 아니했다. 끝내 공의 행적이 농간에 휘말리고 흉론(凶
論)에 꺾이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후회하지 않았다. 오호라! 예부터 공과 같은 이를, 소위
열사라고 하는 건가? 슬프도다! ]
[國朝士禍 談者以己卯乙巳爲稱首 至今語及 必流涕 己卯之獄 十淸軒金文簡公旣殆而卒不死
其子忠愍公竟死於乙巳 豈芑 磁朋 齡之兇 有浮於袞貞歟 抑文簡之直道 猶能有悟於消長往來
之幾 而忠愍之少年英氣 以直前不避死爲道理 故然歟 君子以爲有是父宜有是子 其或死或不死
則天也云 忠愍諱䃴 字學光 金氏之先 皆祖新羅王 籍慶州者 以高麗太師仁琯爲始祖 五世祖諱
自粹 號桑村 太宗以刑曹判書徵 至廣州秋嶺 作絶命詞 遂自盡 高祖諱根 平壤少尹贈兵曹判書
曾祖諱永濡 知中樞府事 謚恭平 祖諱薰 尙衣院僉正贈工曹判書 文簡諱世弼 官吏曹參判贈吏曹
判書 妣貞夫人固城李氏 府使鐸女 公以正德己巳生 嘉靖己亥 擢光化門別試第二人 薦翰林 旋
入玉堂 爲弘文館著作博士 陞吏曹佐郞 仁宗賓天 尹元衡倚勢張甚 公以司憲府持平 得元衡行貨
賣權狀 卽發府吏捕元衡婢 禁中置之法 及乙巳八月二十一日 元衡倡脅兩司長官 會諸臺諫中學
論罪柳灌,柳仁淑,尹任 謂有密旨 司憲府大司憲閔齊仁 司諫院大司諫金光準等喝曰 宮闈洶
洶 若不自我先發 國家事將不至所屆矣 公奮曰 魚肉忠良 此其兆矣 士流而忍踵袞貞所爲乎 執
義宋公希奎卽曰 雖寸剉我骨而颺之 我則不從 於是司諫朴公光佑 掌令鄭公希登 與獻納白公仁
傑 正言金公鸞祥 皆右公 掌令李彥忱 持平閔起文 惟仰天太息而已 公或坐或起 攘袂勃勃 遂以
議不一而罷 翼日忠順堂會議事出矣 公又與七臺諫 上疏論之 遂下獄 拷掠竄安東 翼年丙午 移
配三水 路由興仁門外 貞夫人抱文簡公己卯獄中血衣 自京出迎公 持公大慟曰 己卯則賴明主在
上 汝父得不死 今主上幼冲 姦臣擅國 汝必不還矣 又翼年丁未 竟受後命 以禁中捉婢與中學立
異爲案 遂卒 得年甫三十九 臨命 沐浴更衣 把筆欲作訣書於貞夫人 已而曰 只以增母悲耳 遂止
望闕四拜 跪而仰藥 猶未絶 金吾吏以繩縊之 葬于龍仁竹田里負艮原文簡公墓下也 後因金明胤
上變 鄭彥愨壁書 又施收孥籍產之律 及宣祖卽位 以栗谷李文成公言 命復公官爵 今上乙巳 以
舊甲重回 命贈公吏曹判書 謚忠愍 配淑人高靈申氏 府使洙女 無育 公之自南謫而北也 作訣詩
寄仲氏承旨公 請以其第二子爲後 承旨公許之 以罪人家也 不敢告官成券如法 及肅宗乙丑 相臣
有以此事白上者 請令禮曹成券以與之 上可之 訣詩手筆 尙在公家 所後子重慶進士 思菴朴文忠
公淳 薦學行 授典設司別提 不就卒 贈戶曹判書 生三男 曰岉 文科歷直提學 官至同中樞 贈禮
曹判書 曰屹 曰嶷 栗谷門人 號南谷 薦授官至工曹正郞贈吏曹參議 初忠之人士 刱鄕賢祠于秣
馬里 享桑村十淸及公 後以十淸已享于八峰書院 疊院有禁 中撤焉 公孝友端方 蚤受敎于賢父
才擢第 聞望大播 羣小固已心惡之 公立朝侃侃 以激濁揚淸爲己任 凶黨嫉之如仇讐 而公不少顧
畏 卒之蹤跡奸竇 折伏凶論 以至殺身而無悔 嗚呼 若公者古所謂烈士非耶 悲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