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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이어령.이광주. 정수일 / 명사.석학의 인문학강좌
이장희 추천 0 조회 94 14.05.31 14: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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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명사.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제1강 이어령, "겸재와 호쿠사이의 시점

 

인문학자의 미술 이야기

 

 

 

 

 

겸재(謙齋 鄭敾, 1676∼1759)와 호쿠사이(葛飾北?, 1760~1849)는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고, 미술과 인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이 두 예술가를 함께 묶어 연구하거나 강연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강연에서는 미술전문가와는 다른 인문학자의 시선에서 미술과 인문학, 나아가 삶을 다루고자 한다. 미술전문가가 그림을 보는 영역도 중요하지만, 화가들이 전문가만을 위해 그림을 그렸을 리 만무하다. 미술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술과 인문학의 이야기를 할 것이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전문가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

 

보통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한다. 특히, 추상화라 하면 무척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이미 미술을 자주 접하고 있다. 백화점에서 넥타이나 옷을 살 때 마음에 드는 색과 문양을 고르는 것은 이미 미술적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화투 속 춘, 하, 추, 동의 그림 역시 미술이다. 미술은 이렇게 쉽게 접근하면 된다. 무조건 어렵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미술은 질료(質料, hyle)와 형상(形相, eidos)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든다고 할 때, 눈사람을 만드는 재료인 눈은 질료에 해당하고 이 질료를 통해 눈사람으로 표현한 것이 형상이다. 인문학 역시 질료와 형상의 관계를 따르며, 특히 형상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앞에서 말한 눈사람을 한 번 더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 사람에게 눈사람을 그려보라 하면 당연한 듯이 눈 두 덩이를 그린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눈 세 덩이를 그린다. 이는 문화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질료는 같아도 문화의 차이에 따라 형상의 차이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경우다.

 

오랫동안 모방 실력을 미술 실력과 동일시하며 대상을 그대로 재현해 낸 것이 진정한 미술이라 여겨왔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 가지에 새들이 앉으려 날아오다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는 솔직히 실제 나무를 모방한 것이지 진정한 미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짜처럼 그린 그림과 훌륭한 그림은 사실 밀접한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런 그림은 서툴다고 본다. 새가 진짜로 날아올 만큼 비슷하게 그린 것은 그냥 소나무를 모방한 눈속임일 뿐이다. 그림은 질료와 형상이 조화를 이루면서 특히, 형상(관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번 강연에서는 현실을 단순히 모방한 미술이 아닌 현실에 관념을 넣은 미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시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남종화법 등의 새로운 산수화 기법과 여러 시인과의 교우를 통해 예술적 자극을 받게 되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개척하게 된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조선의 땅을 그린 실경산수화에 화가의 이상과 관념을 담은 것으로, 주로 금강산과 관동 지방, 서울 근교를 화재로 삼았다. 이는 플라톤적 관념론이 미메시스적 물질론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로 볼 수 있는데, 오직 먹과 붓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표현하고 그 속에 관념을 담아내기 때문에 서양화와는 차별화되는 멋이 있다. 따라서 진경산수화를 그릴 때는 입체감과 원근감은 중요하지 않았다. 겸재의 「금강전도」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금강전도(金剛全圖」는 겸재가 영조 10년(1734)에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진경산수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금강산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모습인데 정작 화가의 시점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겸재는 과연 어디에서 금강산을 바라본 것일까.

 

그는 이 그림을 하늘에서 금강산을 조망하는 시점으로 그린 듯한데 원근감이 전혀 없다. 마치 지도와 흡사하다. 서양화는 화가의 시점, 즉 화가가 어디서 대상을 바라보고 그렸는지가 중요하지만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는 이처럼 화가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겸재는 그림 속에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원근법을 대신했다. 우리는 그림 속에 등장한 사람을 통해 화가의 시점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시점으로 그림 속 자연을 볼 수 있다.

 

위의 그림을 보면 그린 사람과 그려진 사람의 시점이 복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림 속에 등장한 사람을 따라 우리는 그림으로 들어가서 그림 안에서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대부분 원형구도로 그 중심에 정자(亭子)와 사람이 있으며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퍼스펙티브(perspective: 원근감) 대신 파르쿠르(parcours: 돌아다니면서 보는 시점)를 취하고 있다.

 

겸재의 산 그림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그린 사람과 그려진 사람의 시선을 다 담았는데, 사람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있다. 겸재는 이렇게 붓의 한계를 넘어섰다.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의 시점

 

“나는 6살 때부터 계속 그림을 사랑했고, 50대에 괜찮은 그림을 몇 점 그렸다. 그러나 70세 이전에 그린 것은 모두 가치가 없었고, 7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연의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80세가 되면 그림이 좀 더 발전할 것이고 90세가 되면 그림의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다. 100세가 되면 나의 그림은 숭고해질 것이고, 110세에는 내가 그리는 모든 선과 점들에 삶이 스며들어 내 마지막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는 일본 에도시대에 활약한 목판 화가로, 어렸을 때부터 목판화 기술을 익히며 우키요에에 관한 관심을 키워가다 19세가 되던 해(1778년)에 우키요에의 대가인 가츠카와 순쇼(勝川春章)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우키요에 수업을 받았다.

 

당시 우키요에(浮世繪: 17~20세기 서민의 일상이나 풍경 등을 주제로 제작한 일본 채색 목판화)는 주로 가부키 배우와 매춘부를 그린 저렴한 오락물이었지만 호쿠사이의 뛰어난 그림이 세상에 나온 이후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 작품이 되었다.

 

「카나가와의 큰 파도(The Great Wave of Kanagawa)」는 호쿠사이가 70대에 제작했던 연작인 『후지산 36경(富嶽 三十六景)』의 첫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의 명곡 중 하나인 「바다(La Mer)」가 탄생할 수 있게 영감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의 예술가들까지 매료해 반 고흐, 모네, 르누아르, 클림트 등이 연작 중 일부를 소장했으며,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점은 앞에 있는 파도는 거대하게, 뒤에 있는 후지산은 작게 그렸다는 점이다. 즉, 서양의 원근법을 도입해 거센 파도를 입체적이고도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호쿠사이는 겸재와 달리 시점을 외부에 둠으로써 그림 속과 밖은 단절되게 그렸다. 즉, 겸재가 산속의 인물을 통해 산을 바라보는 시점을 취했다면, 호쿠사이는 산 밖에서 산을 바라보는 시점을 취했다.

 

호쿠사이는 기존 일본 미술에서는 볼 수 없던 원근법을 실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평면적이던 우키요에를 개성적으로 창조했다. 그의 작품 중 원근법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는 「강호 일본교」를 꼽을 수 있다. 미술사학자인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 1909~2001)는 그의 저서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서 ‘일본 판화의 거장인 호쿠사이는 우물의 발판 뒤로 언뜻 보이는 후지 산의 정경을 재현했는데, 유럽 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을 과감하게 무시한 점이 인상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을 스스로 ‘가쿄진(畵狂人: 그림에 미친 화가)’이라 칭했던 호쿠사이는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던 화가였으며, 그런 그의 고집과 인생이 「83세의 자화상」에 오롯이 담겨 있는 듯하다.

 

 

 

 

 

 

 

 

 

 

 

 

 

제2강 이광주, " 선비와 유럽 교양인의 놀이문화"

 

우리 옛 선비와 유럽 교양인의 놀이문화

 

사람의 하루를 이분하면 노동과 놀이로 나눌 수 있다. 놀이는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에 즐겁게 노는 것으로 놀이문화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과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놀이는 신중하게 선택해서 노동의 시간보다 더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

 

옛 선비들의 놀이문화는 실로 대단했는데, 노동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 때문에 그들의 놀이문화는 대놓고 자랑하지는 못했다. 선비들의 놀이는 교양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놀이를 즐기는 시간을 문화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놀이의 중심에는 늘 ‘독서’가 있었는데, 주로 고전(古典)을 읽으며 인생의 의미를 탐구했으며 이러한 놀이는 주로 혼자 즐겼다. 반면 유럽 교양인의 놀이문화는 사교 중심이었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중시했다. 또한, 가부장적인 선비들의 놀이문화와 달리 유럽에서는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놀이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고독을 즐긴 선비의 놀이문화

 

선비는 멋스러운 풍류인이었다. 그들은 사예(四藝), 즉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고, 글을 쓰며,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겼다. 선비를 가리켜 ‘교양 속에서 놀이를 즐긴다(遊於藝)’1)라고 한 공자의 말씀처럼 선비들에 있어 놀이는 예술(藝術)이자 교양(敎養)이었다.

 

 

 

 

 

선비들은 교양으로서의 놀이, 놀이로서의 교양을 문방(文房)에서 즐겼다. 문방은 선비들의 서재로 멋스럽게 놀이를 즐기던 풍류의 공간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넓이의 문방에는 가구라곤 사방탁자와 문갑뿐이고, 나머지 공간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다기(茶器), 거문고, 책 정도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방주인의 성품이 담겨 있는 시화 한두 폭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 달항아리나 분청사기 혹은 청자매병이라도 하나 놓여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문방이 된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상류계층의 놀이문화는 공통적으로 교양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특히,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2)라는 말처럼 유교 문화권의 사대부들은 놀이의 본질을 독서에 두었다. 사대부들은 유유자적하는 독거(獨居)의 즐거움과 더불어 독서를 즐겼는데 이는 유럽의 놀이문화와 다른 참으로 멋스러운 풍경이라 할 수 있겠다.

 

군자불기(君子不器)3)라고 했던가. 우리의 옛 선비들은 이렇게 단순히 학식을 갖추는 것을 넘어서 비일상적인 상상력과 정념의 세계를 토대로 고고하고 청아한 향기를 풍기는 수준 높은 놀이문화를 즐겼다.

 

 

1) 『論語(논어)』, ‘述而(술이)’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에 근거하며, 인(仁)에 의지하고, 예(藝)에서 노닌다.”

2) 『論語(논어)』, ‘學而(학이)’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 아오면 또한 즐겁 지 않은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3)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 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

 

 

 

 

 

사교를 즐긴 유럽 교양인의 놀이문화

 

놀이가 교양이며 삶이었던 옛 선비들과 닮은 오네톰4)을 우리는 18세기 프랑스 사교문화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선비의 모태가 문방이었다면 취미, 교양, 예절을 두루 갖춘 오네톰의 요람은 살롱5)이었다.

 

살롱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플라톤의 『향연(饗宴, Symposion)』에 나오듯이 아테네의 애지자(愛知者: 철학자)들은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갖가지 주제의 담론을 즐겼다.

프랑스 살롱의 첫 문은 17세기 초 파리 랑브예(Rambouillet) 후작 부인의 저택에서 열렸다. 랑브예 부인의 살롱에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부르주아 출신의 문인, 철학가 등이 참석했는데, 당시 그녀의 살롱은 ‘궁정 멋쟁이들의 모임’이라는 찬탄을 받기도 했다. 이 살롱을 모방한 살롱이 파리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 많이 생겨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롱과 살롱문화는 유럽식 교양의 요람이 되었다.

 

글랑담(Grand madame)이라 불린 귀부인이 주재하는 살롱에서는 출신 가문이나 종파, 정파는 가리지 않았지만, 살롱의 단골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세련된 호모 루덴스(Homo ludens)6) 즉, 교양 있는 놀이꾼이어야 했다. 살롱에서는 무엇이든 화제가 되었고, 대부분 담론의 주제는 귀족적인 취미, 즉 놀이를 둘러싼 것이었다. 이처럼 살롱은 자유로이 열린 담론과 사교의 장이자 놀이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자유로운 놀이의 공간에서도 예절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이는 우리 선비의 놀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禮)야말로 옛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서 으뜸으로 요구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 놀이문화의 상징적 공간인 살롱 등의 사교장은 출신 성분이나 직업, 종파, 정파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타인과 교류하던 열린 공간이었다. 물론, 선비의 세계에도 사랑방이나 기방(妓房)처럼 사교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신분과 정파를 공유한 사람들만 교류하던 끼리끼리의 모임 장소였기 때문에 유럽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 또한, 유럽의 사교문화 중심에는 여성이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점 역시 가부장적인 유교 윤리를 따르던 선비들의 놀이문화와는 다른 점이었다.

 

 

4) [프] 지식과 교양이 풍부하고 예절 바른 교양인. 고전주의의 융성기인 17세기에 프랑스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표현하던 말.

5) [프] 상류 가정의 객실에서 열리는 사교적인 집회. 특히 프랑스에서 유행하였음.

6) [라] 유희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은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인간관.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제창한 개념임.

 

이광주 / 인제대 명예교수

 

 

 

 

 

 

 

 

 

제3강 정수일, "우리에게 실크로드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실크로드는 무엇인가

 

실크로드는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범칭으로 초원로, 오아시스로, 해로가 있다. 그리고 신(新)실크로드는 근대적 교통수단의 이용으로 입체적 교통망이 형성된 근, 현대의 문명교류 통로를 일컫는다. 이와 같은 실크로드는 문명교류의 가교 및 세계사 전개의 중추역할, 세계 주요문명의 산파 역할을 했다.

 

뿌리를 내리게 한 길

 

한국의 뿌리는 남방, 북방, 서역, 자생 등 다원적인데, 그중 북방 뿌리는 바이칼 중심의 북방 초원지대에서 시원(始原)한 일군(一群)의 조상이 해빙기에 홍수를 피해 초원로를 따라 남하해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남하 과정은 ’순록민족이동설’, 즉 바이칼 동쪽의 코리족(야쿠트) 등의 순록유목민 일파가 순록의 먹이인 이끼를 따라 만주지역으로 이동, 남하해서 한반도에 이른 것이다.

 

북방 뿌리설은 체질인류학적 상관성과 문화적 상관성이 뒷받침되는데, 이중 체질인류학적 상관성의 증거로는 한국을 포함한 동시베리아인들의 감마유전자(ab3st)가 서로 가깝다는 점(일본 학자의 견해), 야쿠트인과 부랴트인, 아메리카 인디언, 한국인의 DNA가 거의 같다는 점(에모리대학 연구소)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문화적 상관성의 증거로는 샤머니즘, 수조(獸祖) 전설, 전개형 복식, ’나무꾼과 선녀’, 솟대와 성황당, 적석 목곽분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남방 뿌리는 6만 년 전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동남아와 시베리아로 이동해 집단 형성을 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문화적 상관성으로는 양석(陽石)문화를 비롯한 남방 해양문화(지석묘, 옹관, 벼농사 등)의 공유, 남인도 타밀과의 언어문화적 상관성 등을 들 수 있다.

 

 

 

 

 

세계와 소통시킨 길

 

■ 인물 내왕을 통한 소통

 

16살의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AD 48년 2만 5천 리 항해 끝에 남해에 도착해 가락국 수로왕과 합환(合歡)한 뒤 140년간 해로하면서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낳았다. 그녀는 죽로차(竹露茶)를 가락국에 전래했고, 묘견공주(妙見公主)는 불교와 차 씨앗, 부채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한국-인도-일본’ 간의 첫 교류가 이루어졌다.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정일 교수는 2004년 허황옥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 고분의 왕족 유골의 DNA를 분석한 결과 유골 주인이 인도 남방계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처용설화’ 속 주인공 처용을 통해 신라와 서역 간의 소통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 때(879년) 신라에 온, 외모와 의관이 괴상한 처용은 서역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외방인 처용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정사를 돕게 하고, 미녀를 아내로 맞게 해 신라의 대표적 향가의 주인공으로 윤색·승화시킨 것은 신라의 차원 높은 수용성을 잘 보여준다. 이 외에도 사마르칸트 아프라 시압 궁전 벽화의 두 고구려 사절도를 통해 초원로를 이용한 고구려 사절의 중앙아시아 파견(650년 경)도 확인할 수 있다.

 

■ 문물교류를 통한 소통

 

1. 신라와 그리스 로마 간의 문물교류

- 요시미즈 쯔네오(由水常雄)의 『로마문화의 왕국, 신라』(2002)

- 신라와 로마 간의 상관성 유물 : 각종 유리제품과 계림로단검 등 전래 유물, 각종 장 신구와 각배(角杯) 등 창의적 수용 유물

 

2. 서역(아랍, 페르시아 등)과의 문물교류

- 심목고비(深目高鼻)한 서역인상 출토 :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석상, 경주 용광동 돌방무덤의 28점 토용

-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발견된 녹색 사리병(1959)

- 경주 본원사(本願寺)에서 입수쌍조석조유물(立樹雙鳥石造遺物) 출토(1966) : 페르시아계 유물 문양 특징은 대칭문, 고리문, 연주(聯珠)문 - 석류의 전래 : 원산지는 이란의 사자산(獅子山), 8C 중국을 통해 유입

- 마상격구놀이(폴로경기)의 전래 : 3~4C 이란에서 유행, 고려 초에 한국에 전래, 『경국 대전』에 상술(세종은 격구장 30개를 하사함.)

- 이슬람 역법과 천문의기의 도입 : 조선 세종 때 이슬람 역법을 참고해 『칠정산내외편 (七政算內外篇)』재작 : 사마르칸트 울루 그 벡 천문대 소장의 지구의와 혼천의가 조선 의 그것들과 동류

 

3. 몽골과의 교류

- 한,몽 간의 역사적 특수관계:인류학으로 동군(同群,인종군) 동족(同族, 어족) 

- 몽골풍 :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분야에서 철리, 족두리, 소주, 설렁당('슐루' 설), 조랑 말,

마마(왕과 왕비),마누라,수라(임금음식) 등 라,수라(임금음식) 등

- ’고려풍 ’: 공녀들에 의한 고려문화 전파

- 담배와 소의 교역 : 17C 전반 인조 때 우질(牛疾)로 농경이 불가하자 성익(成?)을 몽골에 보내 담배와 소 교환, 몽골에 ’코담배’ 생김

-고대동방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景敎)의 전래: 불국사 출토(1965) 돌십자가와 성모마 리아상, 발해 동경 용원부(훈춘)의 십자가를 목에 건 삼존불상, 경북 영주 왕유동의 분처상(分處像) 등 유물

 

4. 한국 문물의 서전(西傳)

- 신라가 아랍-이슬람 세계에 비단, 검, 도기, 육계, 범포, 사향 등 11종 수출

- 발해시대 ’초피로(貂皮路)’를 통한 중아(소그드)와의 교역 : 노보고르데예프카 성터에서 8세기 소그드 은화 발견

- 터키 이스탄불 토프카프 궁전박물관 소장의 태극무늬 청화백자(16C) : 1884년 최초로 발행된 ’대조선국우초’ 5문과 10문 (공통적 태극무늬)

- 중앙아시아로 고려인 이민에 따른 벼농사와 김치 등 한국문화의 서전

 

 

 

 

 

위상을 드높인 길

 

■ 인물 내왕을 통한 위상 드높이기

 

첫 번째로는 고선지(高仙芝,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의 서정(西征)을 통한 위상 제고를 들 수 있다. 5차례의 서정(740~751, 11년간)에서 발휘한 ’파미르의 주인’ 고선지의 용맹과 위훈은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만방에 과시했다. 이를 두고 스타인(Sir Mark Aurel Stein)은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다룰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라고 극찬했을 만큼 그의 서정은 중세 동서관계사의 전개와 동서문명 교류에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로는 혜초의 서역기행을 통한 위상 제고를 들 수 있다. 동아인으로는 최초로 바닷길과 오아시스 육로를 동시에 답파한 서역기행(723~727)과 그 기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세계 4대 여행기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보다 약 550년 앞섬)의 세계적 여행기로, 인류 공동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세 번째로는 한낙연(韓樂然, 1898~1947)이 실크로드미술사에 남긴 발자취를 들 수 있다. 중국 연변 출신의 조선족 화가였던 한낙연은 파리 국립루브르예술학교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항일운동에 투신해서 3년간 옥고를 치렀고, 국민당 군용기 추락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돈황 막고굴과 키질석굴 벽화를 모사 및 연구했고, 키질석굴을 2차 탐방해 ’한씨편호(韓氏編號)’ 매겼으며, 아스타나 묘지군에서 미라를 발견했다. 특히, 서구의 사실주의적 화풍과 동양 전통의 필묵 화풍 접목함으로써, ’중국의 피카소’로 불렸으며, 동시에 ’역사문물의 지킴이’, ’열렬한 사회활동가’로 평가되었다.

 

네 번째로는 러시아 고려인들의 개척정신과 애국애족의 충정을 들 수 있다. 1893~1920년대 말까지 고려인 20만이 연해주로 이주했는데, 당국이 황화(黃禍)의 주범으로 박해하는 속에서도 근면성과 성실성, 강인성으로 삶의 터전을 개척했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79)』의 저자인 영국의 비숍 여사는 이런 면에서 조선 사람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애국애족의 대표 주자로는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을 들 수 있다. 그는 최초의 세계일주자이자 시베리아횡단 철도 이용자로 세계 곳곳을 시찰하면서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부심했다. 또한, 러시아 극동관찰사를 찾아가 교포 보호를 요청했으며, 50일간 83개 철도 구간을 고행하고 그 실태를 상술한 『해천추범(海天秋帆)』남겼다. 민영환 외에도 충절을 지킨 인물로 전 재산(7만루블)을 국권회복에 쓰고 자결한 이범진(李範晉, 1852~1911)과 일제침략군과 결탁한 백군과의 전투에서 당당하게 총탄을 맞은 김알렉산드라가 있다.

 

조선(한국)에 대한 배질 홀(Basil Hall)의 찬사와 나폴레옹의 유언도 무척 인상적이다. 1816년 9월 조선 탐사 위해 온 최초 서구인인 영국 선장 배질 홀이 10일간 서해 제도를 탐사한 뒤 쓴 『조선서해탐사기』에서 이방인인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주던 주민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며, 문정하러 온 비인(庇仁) 현감 이승열(李升烈)을 ’세계 어느 곳에 갖다 놓아도 손색 없는 교양과 통찰을 가진 인물’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이후 배질 홀이 귀국 길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 중인 나폴레옹을 만나 ’조선은 유서 깊은데도 남의 나라를 침략해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소개하자, 나폴레옹은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단 말인가.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가보겠다’고 말했다 한다.

 

■ 문물 교류를 통한 위상 드높이기

 

초원로를 따라 기원 전후 약 1천 년간(BC 5C~AD 6C)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동서의 광활한 북방 유라시아에 황금 문화대가 형성되었는데, 신라는 이 문화대의 동단에서 전성기 구가했으며, 고대 금관 10점 중 7점을 보유한 ’금관의 나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벼 문화의 세계사적 기여를 들 수 있는데, 인간 주식의 3대 주종(밀, 벼, 옥수수) 중 벼(서아프리카벼와 아시아벼)는 사실 아직도 시원 문제에 논란이 있다.

그중, 아시아벼(인디카와 자파니카)는 7~8천 년 전 아쌈-운남 지방에서 시원했다는 통설이 있다. 이처럼 벼는 수천 년간 범지구적 문화대를 형성하며 5대 주 110여 개 나라가 재배하는데, 그 주역은 아시아(면적 90% 이상)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1998년과 2001년에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17,000~13,000년 전 볍씨 59톨 출토(소로리카)되었다. 이는 벼 문화에 대한 한국의 세계사적 기여와 벼 시조의 개연성과 연결되므로, 한국은 벼의 생태적 진화와 벼의 전파(중앙아시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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