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국내 1호 음성해설 방송작가 서수연 씨
“장애·비장애 구분 없이 함께 즐기는 콘텐츠를 만듭니다”
음성해설은 본래 시각적 매체에 접근이 어려운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콘텐츠다. 그런데 최근에는 비장애인에게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오디오 콘텐츠가 주목을 받으면서 ‘새로운 감상 기법’으로 음성해설을 손꼽기 시작한 것이다. 20년간 음성해설의 길을 걸어온 서수연 작가는 “뿌듯하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어르신, 언어를 배우는 어린이, 외국인 등으로 수요가 늘어난다면 국내 음성해설 시장이 커지고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 또한 다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Q. 만나서 반갑습니다.
A. 안녕하세요. 2003년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시작으로 20여 년간 음성해설 대본을 집필하고 해설하는 방송작가 서수연입니다. ‘더 킹: 영원의 군주’, ‘대장금’, ‘CSI: 과학수사대’ 등의 드라마와 영화 ‘블라인드’, 연극 ‘트랜스 십이야’ 등 6,000편 이상을 해설했어요. 올해는 드라마 ‘로스쿨’, ‘런온’, ‘알고있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이 네임’과 연극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의 해설을 맡았어요.
Q.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요?
A. 처음에는 한 케이블방송사의 작가로 일했어요. 기획부터 게스트 섭외, 편집 등 프로그램 제작 과정을 두루두루 경험했지요. 힘들었지만 프로그램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고, 그 경험이 음성해설 콘텐츠 제작의 자산이 되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2001년부터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낭독봉사를 시작했는데, 사명감보다는 ‘책 읽기를 좀 더 의미 있게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인연으로 미디어접근센터에서 음성해설 작가 제안을 받았죠. 낭독봉사가 삶의 전환점이 된 셈입니다.
Q. 음성해설을 처음 시작했던 때를 기억하나요?
A.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참여했는데, 지금이라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배리어프리 콘텐츠가 첫발을 떼던 시기라 이렇다 할 이론서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어요. 요즘은 영상을 파일로 제공해주지만 그때만 해도 방송을 비디오로 녹화해야 음성해설을 할 영상을 마련할 수 있었죠. 항상 본방송 시간에 맞춰 대기해야 했어요. 음성해설 대본을 작성하기 위해 같은 영상을 연거푸 되돌리다 보니 종종 비디오 플레이어가 고장 나기 일쑤였죠. 수리점에 들고 가면 “도대체 어떻게 사용했기에 이 정도로 망가졌나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다소 생소한 작업이다 보니 우왕좌왕하고 자주 헤매기도 했죠. 음성해설 방송을 시청한 뒤 재활사이트 게시판에 남긴 시각장애인의 코멘트를 길잡이 삼아 노하우를 찾아갔어요. 그 시간은 제게 큰 성취감과 보람을 안겨주었습니다. 음성해설 작가로의 방향을 굳히게 됐고요. 지금도 그때 받은 코멘트를 종종 들여다봅니다.
Q. 음성해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요?
A. 대개 ‘화면해설’로 불리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음성해설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화면해설이라고 하면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매체만 해당되지만, 음성해설 작가는 뮤지컬이나 사진, 수목원의 식물 설명, 그림책 등 작품이나 매체의 구분 없이 일하기 때문이죠. 가장 중요한 건 ‘정보의 선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상으로나 지면상의 이유로 장면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해요. 하지만 장면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주요 대목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간략하게나마 이해하기 쉬운 음성해설 대본으로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드라마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요, 오프닝 장면에서 목적성이나 주제를 소품 혹은 글자체 등을 통해 은연중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키포인트는 꼭 짚어줘야 시각장애인도 좀 더 깊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여백의 미도 중요합니다. 특정 장면에서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소품이 등장할 때가 있는데, 그걸 직접적으로 해설하는 것도 좋지만 “○○가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식으로 시각장애인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것이 중요해요.
Q. 이 일의 장점, 그리고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요?
A. 많은 방송작가들이 밤을 새우곤 하는데, 저는 눈을 좀 붙이다가 새벽에 깨서 작업하는 편이에요. 그때가 조용한 시간대라 그런지 집중이 잘됩니다. 혼자 묵묵히 작업하기 때문에 시간 분배가 자유로운 게 장점이에요. 가끔 사람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그때는 ‘얼른 마감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여요. 아쉬운 점이라면 인력 부족과 공급 부족을 들 수 있습니다. 각종 기관에서 음성해설 작가를 양성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원하는 전문가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또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을 만큼 작품 제작이 활발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제작비 등의 문제로 소극적인 실정이에요. 화면해설방송 의무편성 비율이 10%를 겨우 지키거나 넘기는 데 그치고,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지원하지 못하고 있죠.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은 화면해설을 제공하지 않고요.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더듬어보면, 화면해설이나 음성해설이 매우 활발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이 제작되고 있었어요. 그만큼 배리어프리 콘텐츠에 관심이 많죠. 우리나라도 배리어프리 콘텐츠에 대한 여건과 인식이 좀 더 나아지길 바라봅니다. 아울러 제작자들이 시청각 장애인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A. 지난 8월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온라인으로 주최한 ‘2021 무장애예술주간 프리뷰’ 행사에 참석했어요. 각 분야 창작자 및 문화예술 관계자들이 모여 각종 배리어프리 콘텐츠를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죠. 음성해설이 스크린 밖을 나와 다양한 작품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벅차올라요. 장애로 인해 한정된 콘텐츠만 볼 수밖에 없는 현실, 같은 작품을 봤으나 부득이하게 벌어지는 격차…. 그런 것들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벽을 쌓는다고 생각합니다. 음성해설이 그 단차를 조금이나마 낮추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극장에 나란히 앉아 음성해설이 가미된 영화와 연극을 보고, 무대 조명과 효과에 대한 감상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점묵자 혼합 월간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 제168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