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발명과 화장지로의 혁신♥
◈ 종이의 발명과 화장지로의 혁신 ◈
종이(paper)란
식물성 섬유를 나무에서 분리시킨 다음 다시 이것을 물속에서 짓이겨
발이나 망으로 떠서 건조시킨 얇은 섬유조직으로 정의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쓰임새도 다채롭지요
종이를 갖지 못했던 선사 시대의 인류는 무덤이나 집터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후세에 전할수 밖에 없었어요
이후 인간은 의사 전달을 위해 증표나 기호, 문자를 만들었고
이를 점토판, 대나무, 목편(木片), 석판, 짐승가죽 등에 표시하여 후세에 전하였지요
바로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지요
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편리하게 기록하고 남길수 있는 재료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종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어요
고대 아즈텍인들은 종이 속에 심오한 세계가 깃들여 있다고 믿었지요
그들에게 있어서 종이는 신들을 달래는 의식(儀式)의 수단인 동시에
통치자의 언행을 전파하고 기록하는 물질이었어요
중국인들도 종이를 악을 쫓는 부적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종이를 태운 재를 허공에 날림으로써
사람의 영혼이 천상(天上)의 세계에 도달할수 있다고 믿기도 하였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종이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였어요
기록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창호지, 장판지 등으로 일상 생활에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신을 종이에 묶어 염을 하고 제사를 지낼때는 소지(燒紙)를 올림으로써 죽은자의 영원한
안식을 빌었지요
이렇듯 종이는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을 거듭해 왔어요
즉 종이는 우리의 정신적 토양을 담는 그릇이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온 것이지요
인간이 맨 처음 사용했던 기록 재료 중의 하나는 무른 찰흙판에 송곳 같이 끝이 뾰족한 것으로
기호나 문자를 기록하고 이를 말려 보관한 점토판이었어요
이러한 점토판 문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거대한 점토판 도서관이 남아 있을 정도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지요
종이와 유사한 재료로 가장 오래 된 것은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 나일강가에서 자라던 파피루스(Papyrus)였어요
그러나 페이퍼(Paper)의 어원이 된 파피루스는 식물성 섬유를 초지(抄紙)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종이라고 규정짓기는 곤란하지요
중국에서는 서기 105년 후한시대 화제(和帝)때 궁중의 물자 조달 책임자였던
채륜(菜倫)이 종이를 발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 이전까지는 대나무나 나무 조각을 끈으로 묶은 죽간(竹簡)과 독(牘)을 주로 사용하였지요
그러나 최근 전한 시대의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종이의 기원은 채륜의 발명보다
150~200년 정도 거슬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당시의 종이는 마포(麻布), 마승(麻繩) 등 넝마를 원료로 하여 미숙한 초지 기술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채륜(菜倫)은 필기가 용이하도록 개량함으로써
최초로 종이다운 종이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고 있어요
제지 기술의 전래는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 기술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아요
하지만 채륜(菜倫)이 제지술을 개량했던 서기 105년 경은 한나라가 한반도에
낙랑군을 비롯한 4군을 설치했던 시기이지요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세력이 정립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남만주 일대까지 확장되어 있었어요
따라서 지역적, 문화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었음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는 3~4세기 경에 중국의 제지술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요
당시의 문헌에는 중국 오(吳)나라 장수인 준추가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여 잡은 포로를
신문하는 기록중에 백제가 제지술을 전수받은 사실을 확인할수 있는 기록이 전해 오고 있어요
당시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던 시기였으므로 제지술과 불교의 전래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요
중국의 [조지사화(造紙史話)]에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384년)가
제지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특히 중국 [송사(宋史)]는 신라에서 백무지, 우지, 학청지 같은 종이들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어요
비록 제지술의 기원은 중국이었지만 이를 전세계로 전파시킨 것은 우리 민족이었지요
서기 610년 고구려 스님 담징은 일본에 처음 제지술을 전하였어요
그리고 서기 751~757년, 당나라 군사를 이끌던 고구려 출신의 장군 고선지(高仙芝)는
이슬람군과 탈라스에서 전투를 벌이다 많은 부하들이 적의 포로로 잡혔지요
그 포로들은 사마르칸드로 잡혀가 그곳에서 제지기술을 전파하였어요
이후 사마르칸드의 제지 기술은 793년에 바그다드로
960년에 이집트 카이로로, 1100년에 모로코로, 1151년에는 스페인으로
1420~1470년에는 인도에까지 확산되었지요
이렇듯 중국의 제지 기술은 고선지 장군의 부하들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어요
하지만 19세기를 기점으로 서양 문물이 수입되면서
중국 제지술은 더욱 정교한 기계와 새로운 원료의 형태로 변모되어 다시 동양으로 역수입 되었지요
일본에서는 1872년에 최초의 양지 제조 공장인 "유우꼬오샤(有恒社)"가 가동되었고
이 기술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지요
세계적 제지사가(製紙史家)인 다드 헌터(Dard Hunter)에 의하며
우리 민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료 염색에 의한 색지를 만들었으며
또한 종이 봉투를 만들어 사용한 첫번째 민족으로 기록 되어있어요
이처럼 역사기록에 선구적인 종이는 우리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세계 여러나라에 전파한 기술 또한 자랑스런 우리민족이 행한 것이지요
그런데 1877년부터 문자전달의 매개체인 종이에 대하여 일대 대변혁이 일어 나지요
마치 의약계의 기적이라 일컷는 페니실린(penicillin)이 발견 되었듯이
종이에도 대변혁이라 할수있는 화장지가 만들어 지게 되었어요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용도로 종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57년 미국 뉴저지 주의 기업가인 '조셉 가예티'가 처음으로 화장지를 만들었지요
그러나 현재와 같은 형태의 두루마리 휴지는 1877년경 영국과 미국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미국의 스코트 형제는 두루마리마다 오래된 린넨처럼 '부드러운' 이라는
슬로건을 찍어 판매하기 시작 하여 크게 성공하였어요
우리나라는 5,6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볏짚이나 잎사귀(호박잎) 같은 것으로 해결을 했으며
시멘트 푸대나 신문지, 헌잡지, 달력 등이 사용되었고 현재와 같이 화장지를 사용하게 된 것은
70년대 유한양행이 미국 킴벌리클라크와 손잡고 세운 '유한킴벌리'에서
하얀 두루마리 휴지를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면서 부터 이지요
그뒤 아파트의 건설과 새마을운동으로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면서부터 실용화 되었어요
그러나 종이를 처음 발명해낸 것은 후한 시대인 서기 105년경 중국의 채윤에 의해서 이지요
그후 중국의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무려 천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어요
그런데 세계에서 최초로 종이로 뒤를 닦은 사람도 역시 중국인이었지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한 아랍상인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더러워서 용변후에 물로 씻지 않고 중국 종이로 닦고 있었다' 는 기록이 있어요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문자가 쓰인 종이로는 절대 뒤를 닦지 않았지요
오늘날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 정도가 용변후의 뒷처리로 종이를 사용하고 있어요
지금 쓰이는 것과 같은 화장지는 수세식 변기의 보급과 동시에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없는 것
그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뒤처리를 하는 방법이었어요
그러나 발상의 전환은 미국에서 시작 되었지요
그러니까 상업적으로 가공된 화장지를 최초로 시장에 내놓은 나라는 미국이었어요
1857년 미국의 '조셉 가예티'는 낱장을 꾸러미로 묶은 화장지를 상점에 내놓았지요
그러나 그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하였고
따라서 가예티의 화장지는 곧 진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어요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도대체 화장지 같은 것을 사기 위해 귀중한 돈을
지출할 필요가 과연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었지요
그들은 수없이 날아오는 광고지, 신문, 잡지 등을 모아 화장실에 쌓아 두고
그것을 이용해 쉽게 뒤처리를 했던 것이지요
또 무료한 화장실에서 그것들은 좋은 읽을 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으니
구태여 비싼 돈을 줘가며 화장지를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다 영국에서 1879년 '월터 알콕'에 의해 화장지가 처음 소개되었어요
알콕의 화장지는 미국에서 판매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지요
가예티의 것이 낱개로 포장된 것이었던 것에 반해 알콕의 것은
잘 끊어지도록 만든 두루말이 형태였어요
알콕의 화장지는 오늘날의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까지 접근해 있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역시 냉담했지요
그러나 같은 시기에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스코트, 클레런스 스코트"라는
세살 터울의 형제가 이미 가예티가 실패했던 화장지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지요
스코트 형제는 '조셉 가예티'의 발상은 참으로 놀라운 발명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그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기회를 우리가 잡자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이 상품이 성공할수 있는 세가지 요인으로
필요불가결하고, 일회용이며, 다시 사용할수 없는 점 등을 꼽았고
이 세가지 요인을 만족시킬 만한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어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두루마리 형태의 소형화와 부드럽고 깨끗한 이미지를 부각시켰으며
무엇보다도 값의 부담을 주지 않았지요
또 소변과 대변을 보는 변소(便所)라는 더러운 이미지에서
변소에 커다란 거울을 붙임으로해서 부드럽고 깨끗한 이미지를 부각함으로서
얼굴에 화장도 고치도 의복의 옷 매무새도 고치는
새로운 작은 문화공간이라는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에 주력 하였어요
바로 이것이 변소(便所)가 "화장실(化粧室)"이 되는 순간이었지요
결국 그들은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상품을 찾아냈고
당연히 그 상품의 이름은 '화장지(化粧紙)'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지요
기회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남들은 다 안된다고 할때 반드시 성공할수 있다는 확신과 굳센 의지를 보인것이지요
스코트 형제는 운이 좋았어요
운(運)이란 무엇인가요?
바로 기회인 것이지요
1880년대 미국에서는 이미 많은 가정과 호텔, 식당 등이 싱크대, 수세식 변기 등을 소화할수있는
배관시설을 갖추어 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보스턴의 트레몬트 하우스는 자신들의 호텔이 편리한 옥내 화장실과 목욕탕을 갖추고 있는
최초의 호텔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지요
맨해튼에는 수세식 공동 화장실을 갖춘 공동 주택이 우후죽순처럼 불어나기 시작했으며
각 상점마다 유럽의 최신식 좌석변기, 최신식 수조를 진열장에 내다 놓았어요
이미 화장실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화장실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화장지에 대한 수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500m짜리 둔해 보이는 패키지로 판매되었던 가예티의 화장지와는 달리
스코트 형제의 제품은 작은 롤(roll) 두루말이 형태로 나왔어요
이것은 당시 화장실을 의미하던 은유적 표현 '가장 작은 방' 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지요
스코트 형제의 화장지는 상표도없는 갈색 포장지에서 '왈도프 티슈'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슬로건과 함께 '스코티슈' 라는 상표를 박아넣었어요
화장지 시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커졌고
스코트 형제는 경쟁자들의 강력한 도전을 피할수 없었지요
그러나 1907년쯤 스코트 형제의 화장지 회사는
이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회사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어요
그들이 생산해낸 고급의 화장지는 대형 종이 공장에서 일단 큰 두루말이 형태로 들어와
알맞은 크기로 잘라 팔았지요
그런데 어느날 종이 공장에서 온 큰 두루말이 하나에서 결함이 발견되었어요
그 두루말이는 제작 공정상의 실수로 인하여 과도하게 컸으며 주름이 잡혀있었지요
화장지용으로 부적합한 그 제품을 반품하려 할때
스코트 회사의 사원중 한 사람이 그 큰 종이를 작은 수건크기로 잘라서 쓰면 어떻겠느냐고 말하였어요
종이수건이 발명되는 순간이었지요
생산라인의 작은 실수에서 비롯된 불량품 하나가 화장지에 이은
또다른 부가상품 페이퍼 타월을 만들어 내는 순간이었어요
최초의 페이퍼 타월은 1907년에 새니 타월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호텔, 레스토랑, 기차역 등의 공공 화장실에서 쓰이도록 판매되었지요
그러나 가정주부들만은 이 페이퍼 타월에 대해서 냉담한 반응을 보였어요
그것은 가예티의 화장지가 외면을 받았던 이유와 흡사했지요
"반영구적으로 쓸수 있는 천으로 된 타월이 있는데
왜 한번 쓰고 버리는 종이 타월에 돈을들이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어요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페이퍼 타월의 가격을 대폭 낮추자
그들은 오히려 일회용 타월을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위생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지요
1931년 새니 타월이라는 이름이 스코트 타월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200장짜리 타월 한 두루말이가 25센트에 팔려 나갔어요
화장지가 화장실의 필수품이라면 이미 페이퍼 타월은 집안 어느 곳에서나 쓰이는
가정필수품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스코트 형제에 의해 화장지가 대중화되면서 화장지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어요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회용 손수건으로 화장지를 사용하며 항상 휴대하고 다니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화장지가 개발된 것은 원래 그런 목적 하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1914년 킴벌 리 클라크는 놀라운 흡수력을 가진 '셀루코튼' 이라는 신소재를 개발하였지요
셀루코튼(Cellucotton)이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 원래 이 새로운 소재는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면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결국 셀루코튼은 전시의 야전 병원에서 외과용 붕대로 사용되었지요
그뒤 본격적인 생산라인이 가동되며 "크리넥스"라는 이름이 붙여졌지요
크리넥스(Kleenex)은 미국의 킴벌리-클라크가 소유하는 생활용품 브랜드이지요
주로 화장지, 종이타월, 기저귀, 생리대 등으로 쓰였으며 1924년 6월 12일에 판매를 시작하였지요
크리넥스의 제품들은 전 세계 30여개 국가에서 생산되고 170여 개의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유한양행에서 처음으로 수입하여 판매를 시작했는데
1970년 3월 30일 유한양행과 킴벌리 클라크의 합작투자 회사를 설립하여
한국에 공장을 짖고 대량생산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뿐만아니라 종이의 혁신은 화장지 뿐만 아니라 물건을 담는 박스(box)와 먹는 그릇으로 이어져
종이컵이 만들어지고 이어서 컵라면에 까지 이용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종이의 발명은 중국의 채륜(菜倫)이었고
발상의 전환은 미국의 "조셉 가예티" 였으며
이때 기회를 잡은 사람은 "스코트" 형제 였지요
이렇듯 기회를 잡은 사람들은 모두가 안된다고 할때
불굴의 투지와 신념 그리고 추진력으로 이를 승화시켰던 것이지요
여기서 다시한번 기회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기로해요
누가 과연 종이를 화장지로 사용할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돈 안들여도 용변후 뒤처리를 할수 있는 온갖 신문이나 잡지책들은 많았는데 ...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요?
이제는 화장지 없으면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리고 종이의 쓰임새는 종이컵을 비롯 우유팩, 쌀가마 등등 사회전반에
곳곳에서 쓰이고 있어요
그래서 기회를 잡는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지요
종이를 만든사람은 중국의 ‘채륜’이지만
그 종이를 가지고 화장지로 성공한 사람은 "기회를 잡은 사나이"
미국의 '스코트 형제'인 것이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 *-
▲ 가예티화장지 ...
▲ 스코트 형제 화장지 ...
▲ 종이수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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