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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토(樂土)의 아이들
박 완 서
“답사 갔다 올게요.”
아내가 여남은 켤레나 되는 구두 중에서 마침내 한 켤레의 구두를 골라 신고 나서 나에게 던진 말이다.
마치 배드민턴 공처럼 경쾌하게 날아온 이 말에 나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
서재의 커튼을 외눈으로 밖을 살필 수 있을 만큼만 민다. 초가을의 햇빛이 눈부신 아파트 주차장에 낯익은 파란 승용차가 멎어 있다.
그 승용차가 아내를 태우고 저만치 멀어져간 후에야 나는 커튼을 활짝 밀고 멀어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좇는다.
뒤창으로 아내의 뒷모습과 분홍색 크리넥스통과 남자의 장발이 보인다. 짐작건대 아내와 남자는 어디까지나 신사 숙녀답게 크리넥스통 길이 만큼은 떨어져 앉았음직하다.
설사 그들이 정답게 어깨를 기대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들 사이를 크리넥스통과 연관지을 수 있는 외설스러운 상상으로 의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해 그 정도의 인간적인 불안이나 의혹조차도 품을 수 없을 만큼 아내에 대한 나의 한탄과 열등감은 철저하다.
아내는 담대하고 탁월한 사업가였다. 내가 일생 걸려도 벌까말까 한 돈을 아내는 한 건만 잘하면 벌 수도 있었고, 자기가 번 액수에 결코 도취하거나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파란 차는 곧장 일직선으로 아파트 단지를 지나 상업단지의 번화가에서 많은 차들과 섞이면서 내 시야를 벗어났다. 그들은 불과 십 분 이내에 어느 민둥산 봉우리나 골짜기에 가 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와 고급 주택단지와 상업단지와 고육행정 단지로 엄격하고도 편리하게 구분되어 있는 이 무릉(武陵) 신시가지는 썩은 강 건너로 구(舊)시가와 마주 보고 있는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이 야트막한 불모의 민둥산이었다.
눈으로 보기엔 민둥산이지만 지도를 보면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택지였다. 시에선 무릉 신시가지 건설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주위의 민둥산까지 백 평 이상의 택지로 구획정리를 해서 그 매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내가 답사하러 간 데는 그 민둥산 일대일 테고, 아내에게 답사를 권유하고 수행하는 사람은 무릉부동산의 탁사장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내야말로 무릉부동산의 굵직굵직한 단골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가장 무시 못 할 단골이었다. 탁사장이 아내를 대하는 친숙하면서 정중한 태도에도 그건 잘 나타나 있었다.
아내가 극구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탁사장이 젊은 나이에 억대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자기 덕이라는 거였고, 탁사장이 은연중 비치는 말투에 의할 것 같으면 아내가 지금만큼 돈을 번 것은 순전히 사람 하나 잘 만난 덕이라는 거였는데, 그 사람이라는 게 탁사장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내와 탁사장은 이렇게 서로 상반된 주장들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주장도 불쾌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는 막상막하의 동업자끼리인 것만은 확실했다.
우리가 이 고장에 제일 먼저 들어선 평민 아파트에 입주 신청을 할 때만 해도 신청이 분양 가구수에 미달돼 무추첨 당첨이 될 만큼 이 고장은 살 만한 고장이 못 됐다.
더군다나 입주시기가 겨울이어서 매운 북풍이 온종일 강가의 모래를 실어다가 황량한 들판에 뿌렸다. 평민 아파트에서 바라보이는 거라곤 얼어붙은 들판과 모래바람과, 그 모래바람을 삼면에서 막고 섰는 민둥산뿐이었다. 뭐 하나 정붙일 만한 거라곤 없었다.
나는 결혼하고 삼 년 만에 겨우 이런 사람 못 살 고장에 이십 년 연부(年賦)의 평민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게 고작인 내 미약한 경제력이 아내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아내는 하루하루 생기발랄해지고 당당해졌다. 그것은 이 고장 땅이 벼포기나 감자 알맹이를 배반하고 엉뚱한 야망을 품으면서 내뿜기 시작한 이상한 활기하고도 닮은, 기분 나쁘고도 걷잡을 수 없는 활기 였다.
그 무렵 아내는 탁사장을 만난 것이다.
지도상으로는 엄연히 상업단지의 오십 미터 도로변으로 돼 있지만 현실적으론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황량한 들판의 한줌 흙에 불과한 백 평 미만의 땅을 사서, 천막을 치고 부동산 중개업을 개업한 탁사장의 모습은 초라할뿐더러 그 자리에 삼 년 안에 십층짜리 빌딩을 세우리 라는 그의 장담 때문에 허황한 허풍선이 대접을 면치 못했다.
아내만이 그를 선견지명이 있는 젊은이로 대접했다. 앞으로 시의 변두리 개발을 위한 투자가 이 무릉 신시가지에 우선적으로 투입되리라는, 탁사장이 극비리에 얻어냈다는 정보를 아내만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리고 배짱 좋게 빚까지 얻어 남아도는 아파트를 한꺼번에 서너 채나 계약하고 미처 중도금도 치르기 전에 탁사장이 극비리에 얻어냈다는 정보는 현실화됐다. 구시가지와 무릉 신시가지를 잇는 교량공사가 곧 착공되리라는 시의 공식 발표가 난 것이다. 아파트 값은 급등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오붓한 재미를 본 아내의 아파트 장사는 아파트 업자들이 너무나도 들이덤벼 평수 큰 호화 아파트를 짓는 데 따라 그 규모가 커졌고, 곧 우리 네 식구가 오십 평의 맨션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도 그 사업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돈도 벌었다.
교량이 완공되고 아파트 단지가 꽉 들어차면서 부동산 붐은 강풍을 탄 불길처럼 위세를 떨치며 상업단지와 주택단지 쪽으로 인화됐다. 아내가 그 붐에 앞장을 섰던 건 말할 것도 없다.
단지의 택지는 눈부시게 전매에 전매를 거듭하면서 당초 시에서 메각한 값의 열 배 내지 스무 배도 넘게 된 후에야 비로소 실수요자에게로 넘어가 집을 짓게 되었다.
그 열 배, 스무 배의 폭등을 부채질하는 게 아내와 탁사장과 그 밖의 무수한 그들의 동업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오로지 내 집 장만의 꿈을 위해 십 년, 이십 년 애면글면 모은 목돈을 꾸려들고 무릉동이 변두리란 약점 하나만 믿고 싼 땅을 구해 이곳을 찾아온 가난뱅이가 있다면 우선 그 엄청난 땅값에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마음껏 농간을 부린 땅장수들을 원망하며 돌아설 것이다. 무릉동의 땅은 그런 가난뱅이와 인연을 맺기엔 너무도 도도하게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로도 땅장수들이야말로 무릉 신시가지 발전사에 길이 기억될 공로자들이었다. 왜냐하면 호화주택 일수록 비싼 땅에 자리잡기를 소망하니까. 변두리 중에서도 유독 무릉만이 호화주택 많기로 이름난 일급 주택지로 말전한 것은 시의 집중 투자 덕도 있겠지만 땅장수들의 농간의 덕을 무시 못 할 것이다.
이 고장에 초기에 자리잡은 주민치고 많든 적든 땅재미 못 본 사람이 없었으니 미력하나마 무릉동 발전에 이바지 안 한 사람도 없는 셈이었다.
그래 그런지 무릉동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부유했고, 무릉동의 주민이란 프라이드 또한 대단했다.
무릉동이야말로 낙토였다. 이곳의 땅은 시시하게 벼포기나 감자 알맹이 따위를 번식시키진 않았다. 직접 황금을 번식시켰다. 그 황금은 그 땅을 땀 흘려 파는(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파는(賣) 사람의 것이었다.
마이다스 왕은 그의 손에 닿는 것을 모조리 황금으로 변화시켰지만 아내와 탁사장은 그들의 구두굽이 닿는 땅을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드는 보다 신기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아내와 탁사장은 지금 어디쯤을 답사하고 있을까. 그들의 소위 답사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뱃속이 아니꼬운 것 같은 기분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내는 땅을 사기 위해 보러 가는 일을 꼭 답사라고 했다. 나는 아내가 하는 모든 일의 황홀한 관객이요, 열렬한 펜이지만 유독 답사란 소리만은 안 좋아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거부반응 같기도 하고 피해의식 같기도 한 고약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여보, 나 답사 갔다 올게.”
이 소리는 본디 내가 아내한테 하던 소리였다. 무릉동으로 이사 오기 전 전셋집으로 전전할 때 나는 아내한테 자랑스럽게 이 한마디를 던지고 며칠씩 집을 비울 수가 있었다. 내가 이 말을 하고 집을 떠날 때면 아내는 고독한 듯 그러나 존경스러운 듯 나를 배웅했었다.
학구적인 젊은 지질학도였던 나에게 답사여행은 고되지만 자랑스러운 나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순수한 학구적인 의미를 지녔었다.
나는 그것에 의해 외관상 행려환자처럼 지쳐서 돌아왔지만, 내적으론 충만해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땅장사를 시작하고 나서 마치 아내가 나로부터 무단 도용해다 유포시킨 것처럼 답사라는 말은 땅장수들 사회의 상투어가 되었다.
“사모님, 먹을 만한 땅이 나왔는데 우선 답사 먼저 하실까요?”
“아유, 어제 두어 군데 답사를 하고 왔더니 오늘은 몸살이 나려나 어째 몸이 안 좋으네요.”
“귀찮다고 현지답사를 안 하시고 지도만 보시고 땅 사실 건 아닙니다요.”
“하긴 그래요, 돈 벌어줄 땅은 답사할 때 미리 영감을 보내주더군요.”
“그러믄요, 바로 그게 초보자의 답사와 우리 구로우도들의 답사의 다른 점 이잖습니까?”
“여보, 나 답사 다녀올게요.”
나의 학문에의 정열을 은밀하게 충동질하던 답사라는 말이 이렇게 천박하게 쓰이는 걸 들을 때마다 나는 아끼던 소녀가 눈앞에서 능욕당하는 걸 보는 것처럼 수치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답사 그 자체로부터 점점 정이 떨어져갔다.
더 나쁜 것은, 답사라는 것에 흥미를 잃어가는 것과 더불어 학문에 대한 정 열도 식어가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지질학도다. 내가 십 년 전부터 속해 있던 지질학회에 아직도 속해 있고, 십 년 전부터의 지질학 강사직에 아직 아무런 변동도 없다.
가끔 학회 친구들이랑 가르치는 학생들과 답사를 가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아직도 나에겐 있다.
그러나 아내한테 여보 답사 갔다 올게, 하고 호기 있게 말하지 못한다.
칫솔은 같이 쓸망정 답사란 말을 아내하고 같이 쓰기는 싫기 때문이다.
네 것 내 것 없는 부부 사이에서 유독 ‘답사’ 에만은 명확한 소유권을 부여해놓고 이미 빼앗긴 걸 치사하게 넘보는 일이 없드록 소심하도록 전전긍긍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아마 그걸 공유함으로써, 아내와 나의 능력 차에서 생기는 그것의 효용의 차이를 너무도 명확하게 비교당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정식 답사를 떠날 때도 관광여행이라도 떠나는 척한다.
“여보, 나 며칠 바람이나 쐬고 오리다.”
그러나 아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땡전 한 푼 안 생기는 답사를 떠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열등감을.
답사여행을 위한 채비를 도와주고, 배웅을 해주는 아내의 표정엔 이미 남편에 대한 존경심도 혼자 남겨진 고독감도 없다. 다만 깔보는 듯한 표정이 있을 뿐이다.
표정뿐 아니라 말로 깔본 적도 많다.
“열 번에 한 번이라도 석유를 잡든지, 하다못해 노다지를 잠든지 해야지 맨날 허탕만 치는 답사를 무슨 신명으로 또 떠나요?”
아내는 내가 하는 일을 이렇게 시답잖게 알면서도 대외적으로 자기 신분을 교수 부인으로 자칭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내 직업에 대한 애착도 전공한 학문에 대한 정열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또 직업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도 아내가 버는 막대한 돈 때문에 묵살당한 지 오래다. 아내가 시답잖아하기 전에 이미 나는 내가 택한 학문을 되게 끗발 없는 학문으르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고 앞으로 딴 일을 할 계획이나 열의도 없다. 직업 전환이란 웬만한 결단성이나 웬만큼 절박한 필요성에 의하지 않고는 어렵거늘, 하물며 나같이 안일이 보장된 상태에서 될 법이나 한 소린가.
게다가 아내는 교수 부인이란 대외적인 호칭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다. 아내의 허영심에 봉사할 수 있다는 걸로 나 역시 내 직업에 한 가닥 매력을 못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 나의 직업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부관계의 타성이요 의무감 이상의 뜻을 지니지 못했다.
답사 나간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일학년짜리 아들이 돌아오고 이어서 오학년짜리 딸이 돌아왔다.
“엄마 어디 갔어?”
“엄마는 답사 나갔단다.”
“엄마 어디 갔어?”
“엄마는 답사 나갔단다.”
이런 대답을 되풀이하면서 나는 이번 학기부터 고속버스 타고 출강 나가던 지방대학을 한 군데 그만둔 것이 약간 후회스러워졌다.
그러나 아직 한 군데의 일자리는 가지고 있고, 그 일자리마저 놓치지 않는 한 아내는 교수 부인일 수가 있다.
아내에 의해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대로 아이들은 깜찍하도록 꼬마 신사 숙녀답다.
누가 시키기 전에 목욕부터 하고 로션 냄새를 싱그럽게 풍기며 간식을 들고 숙제를 한다.
아이들이 다니는 무릉국민학교는 ‘완전한 학습’ 과 ‘완벽한 질서’ 라는 교훈을 가진 학교인 만큼 숙제가 많고 규율이 엄하다.
교장선생님은 일제시대의 사범학교 출신이라는 걸 특별히 자랑스러워하는 분으로, 어린이들한테 왜라는 의문의 여지를 주지않는 철저한 주입식 교습법을 교사들한테 강조하고 실행시키고 있었다.
왜라는 의문이야말로 완전학습의 능률을 저하시키는 사고의 낭비요, 청소년의 이유 없는 반항이나 불온의 싹이요, 좀더 긴 안목으론 탄탄한 출셋길에 가로걸리는 돌부리 같은 거라는 거였다.
이렇게 길들여진 아이들은 딴 국민학교 아이들보다 월등히 높은 학력 수준을 갖고 있는 것으로 교장선생님은 물론 선생님이나 아이들도 자부심이 대단했다.
구시가로부터 전학해오는 아이들은 누구나 당분간은 지진아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걸 구체적으로 증명했고, 각종 경연대회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그건 증명됐다.
중고등학교까지 평준화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특수 국민학교가 웬말이냐고 구시가 사람들의 질투 섞인 불평은 대단했다.
구시가 사람들은 워낙 무슨 꼬투리만 있다 하면 잡고 늘어져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귀담아들을 것도 없지만.
하긴 무릉 신시가의 주민들이라고 교장선생님이 하는 일에 처음부터 전적으로 협조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무릉국민학교가 개교하고 교장선생님이 초대 교장으로 부임해온 지 얼마 안 돼서 있었던 학교와 학부모 간의 대립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도 무릉동 사람들다운 이야기여서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게 돼 있다.
사건의 발단은 교과서 무상배부에서 비롯됐다.
시에서 극빈자의 자녀들을 위해 각 국민학교마다 무상으로 배부해주는 일정 량의 교과서가 무릉국민학교에도 배당이 됐다.
교장선생님은 직원회를 열어 교사들과 누구에게 그 교과서를 거저 줄 것 인가를 의논했지만 도대체가 무릉동엔 구시가에서 말하는 소위 극빈자라는 게 살고 있질 않다는 거였다. 결국 무릉동 신시가에 맞는 새로운 상식의 극빈자를 조작해낼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급히 조작해낸 극빈자가 바로 가장 평수가 적을뿐더러 그 이름도 겸손한 평민 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평민 아파트 입주자들은 맨션아파트 입주자들보다 일률적으로 가난하다기보다는 식구가 단출해서 작은 평수를 택한, 이를테면 식구와 집의 크기와의 관계를 몸과 옷의 크기와의 관계와 같이 생각한 순진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의 자녀가 구시가에서 극빈자의 자녀나 받는 교과서 무상분배 대상이 되었으니 노발대발 안 할 리가 없었다. 그들 역시 자존심 높은 무릉동 주민임엔 틀림이 없었으니까.
학교 당국으로 항의가 빗발치듯 했다. 손가락마다 있는 대로 보석반지를 끼고 와 얼굴을 가리고 그 원통함을 온종일 통곡한 특별히 극성맞은 자모 이야기는 아직도 유명하다.
이런 소동과 함께 평민 아파트 값이 낭떠러지를 구르는 속도로 하락했다. 너도 나도 평민 아파트를 내놓고 공주니 왕자니 궁전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맨션으로 옮겨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경제상의 무리가 생기는 집도 한두 집이 아니었을 테지만 전세로 옮겨앉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위해선 우선 평민 아파트 신세는 면하고 볼 일이었다. 자식을 위해서.
커다란 폐가가 될 위기에 처한 평민 아파트를 어느 약삭빠른 부동산업자가 헐값으로 구입해서 약간의 구조변경을 한 후 독신자 맨션으로 개명을 해서 독신자들 사이에 새로운 인기를 얻게 된 것은 그후의 일이다.
우리는 평민 아파트의 초창기 입주자였지만 그 사건이 있을 당시는 이미 그곳을 뜬 직후여서 물질적인 피해도 정신적인 피해도 입은 바 없이 마음 편한 구경꾼일 수가 있었다. 그 점에서도 나는 아내의 선견지명에 압도당략밖에 없다.
교장선생님은 그 사건을 계기로 시의 교과서 무상분배를 단연 사양했다. 구시가의 불쌍한 극빈자 아동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무상분배가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무릉국민학교 아이들의 착한 마음을 얹어서.
그후 말썽 많은 구시가 사람들은 무릉국민학교를 시체 귀족학교라고 야유조로 부르게 되었지만 교장선생님은 수재학교라고 자칭하면서 더 한층 ‘완전한 학습’ 과 ‘완벽한 질서’ 를 강화해 갔다.
현대의 수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부모의 물질적인 뒷받침과 학교에서의 가장 정선된 지식의 가장 기술적인 주입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거기 때문에, 자기처럼 유능한 교육자와 골고루 있는 집 자식들로만 된 학생이 만난 자리인 무릉국민학교야말로 수재 교육의 행복한 온상이라는 거였다.
무릉국민학교야말로 무릉동 주민의 자랑이었다.
선견지명이 뛰어난 아내가 조만간 이 고장의 부동산 붐이 한 풀 갈 거라고 점치면서도 딴 개발지역으로 무대를 옮길 엄두를 못 내는 것은 순전히 학교 때문이었다.
나의 넓은 서재에 딸린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작은 북창으로 멀리 퇴락하고 조잡한 구시가가 안개 같기도 하고 먼지 같기도 한 불투명한 잿빛 속에 잠겨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흐르고 있는 건지 정지하고 있는 건지 분명치 않은 탁한 강이 보인다.
차의 왕래가 빈번한 튼튼하고 드넓은 다리가 탁한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고 있지만 구시가에 대한 친근감은 거의 없다. 막연한 혐오감이 있을 뿐이다.
무릉동 사람들이 썩은 강이라 부르는 강이 그런 거리감을 만들어주고 있는지, 구시가에 대한 혐오감이 멀쩡한 이름 있는 강을 썩은 강이라 천대하게 됐는지 그것까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무릉동 사람들은 아이들이 강가에 가서 노는 걸 막기 위해 아이들에게 미리 강에 대한 호기심 대신 공포를 가르쳐야 했다.
강은 구시가의 공장에서 버리는 독이 있는 물과, 구시가의 가난뱅이네 구식 뒷간에서 직접 흘러내리는 똥오줌 때문에 썩었노라고 죽었노라고, 거기 손이나 발을 담그는 일은 똥통에 손발을 씻는 것만큼이나 비위생적인 일이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그래 그런지 강가의 모래사장이나 풀밭에 아이들이 나와 노는 걸 본 일이 없다.
풀숲보다 더 가까이에 강변도로가 보인다. 강변도로는 늘 기름칠해놓은 것처럼 매끄럽게 번들대고 있어 왕래하는 차들이 힘 안 들이고 미끄럼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
강변도로 안쪽으로 교육행정 단지의 굵직굵직한 건물들이 보인다. 무릉국민학교도 보인다. 외관상 귀족학교다운 데도 없다. 그러나 주위의 건물들과 조화를 잃지 않을 만큼 적당히 세련된 현대식 건물이다.
넓은 운동장이 있고 그 속엔 각종 운동틀과 나무들이 있다. 나무도 이 학교의 역사처럼 아직 어리다. 가을의 문턱이라 나무들은 아직 청청하다.
그중엔 은행나무도 있고 벚꽃나무도 있다. 곧 예쁜 단풍이 들 것이다.
그러나 단풍이 들자마자 이 어린 나무들이 얼마나 모진 곤욕을 겪게 될 것인지 나는 안다.
완벽한 질서를 부르짖는 교장선생님은 나무가 물들어 매일매일 낙엽을 떨구기 시작하면 환경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해서 아이들을 나무에 올려보내거나 장대를 휘둘러 낙엽을 한꺼번에 깨끗이 떨구게 하곤 한 번에 쓸어내게 했다. 그래서 무릉국민학교 교정의 나무들은 가을도 깊기 전에 어느 날 갑자기 나목(裸木)이 된다.
작년에도 그랬었고, 재작년에도 그랬었다. 나는 변기에 앉아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발가벗긴 나무들을 바라볼 적마다 정서의 불모지대를 보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완벽한 질서를 위해 행해지는 그런 유의 무리가 완전한 학습을 위해선 또 얼마나 많이 행해지고 있을까, 또 눈에 보이는 무리가 저렇게 추하거늘 눈에 안 보이는 무리는 얼마나 끔찍할까를 자못 심각하게 회의했었다. 그런 유의 회의에 사로잡히면 내 아이들이야말로 낙엽을 한꺼번에 떨구는 부자연을 강요당하고 있는 어린 나목 같은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로서의 가책과 사랑으로 가슴이 저렸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불편은 변기에 앉았는 동안만 나의 것이었다.
아파트의 생활양식이란 게 티끌만한 불편도 허용 안 하는 것처럼, 내 생활의 안일은 내 마음의 불편을 더운물이 눈 녹이듯 흔적도 없게 했다.
변기에 앉아 있는 동안이라도 불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나의 오랜 버릇 때문이었다. 얌전한 소년이었을 적에도 뒷간에 앉았는 동안만은 엄청난 모반도 꿈꿀 수가 있었던 나의 오랜 버릇 때문이었다.
아내가 돌아왔다. 아이들이 엄마를 반겼다. 아내는 서양 여자처럼 아이들을 능숙하게 포옹하고 빰에 뽀뽀를 했다.
“엄마아, 우리 반이 수해의연금 모금에서 일등 했어. 그래서 내일 신문사로 전달하러 가는 대표로 뽑혔다, 나.”
딸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잘됐다. 아이, 신통한 내 새끼.”
아내가 다시 딸애를 포옹하다 말고 밀치더니 옷장으로 달려갔다.
“가만있자, 뭘 입혀 보내지? 사진이 잘 받는 걸로 입혀얄 텐데…….”
아내는 딸애의 디즈니장 속에 첩첩이 걸린 옷 중에서 이것저것 꺼내서 딸의 어깨에 걸쳐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단 팽개치고, 다시 딴 것을 걸쳐보는 일을 되풀이했다.
올여름 장마에 구시가에선 지독한 물난리를 겪었고 많은 수재민을 냈다. 각급 학교 및 사회단체에선 즉각 구호금품을 걷기 시작했다.
무릉국민학교는 수재민뿐 아니라 모든 불우이웃돕기운동에 열성적이었다. 그 결과 다른 학력 경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체 국민학교 중에서 단연 으뜸가는 성과를 거두어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다.
수재민은 여름마다 잘도 생겼고, 온정을 기다리는 불우이웃은 겨울마다 잘도 생겼다. 무릉국민학교가 이름을 떨칠 기회도 그만큼 자주 생겼다.
일등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교장선생님은 무릉국민학교가 일등 가는 모금 실적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교내에서 반끼리 경쟁을 붙이는 묘안을 강구해 냈다.
모금 실적이 가장 우수한 반은 반에 걸어놓을 수 있는 상장을 주어 칭찬하고, 그 반 반장 부반장은 학교를 대표해서 신문사에 성금을 전달하러 갈 수 있는 영광을 준다는 게 그거였다.
교장선생님은 청소도 환경미화도 실력고사도 고운 말 쓰기도 착한 일 하기도 이런 식으로 경쟁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의 조그만 가슴이 늘 경쟁의식으로 고무풍선처럼 충만해 있도록 하는 거야말로 교육의 사명이란 신념에 투철했다.
딸애는 부반장이다. 작년 연말 이웃돕기 모금 때 딸애의 반은 이등을 해서 애석상장을 타서 반에 걸어놓을 수는 있었지만 신문사에 가서 모금한 걸 전달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영광만은 애석하게도 놓치고 말았다.
그때 아내와 딸애는 어서어서 여름이 와서 다시 수해가 나서 수재민 돕기를 할 수 있기를 조급스럽게 별렀었다. 마침내 소원이 성취된 것이다.
학교나 학부모가 합심해서 이렇게 불우이웃돕기에 열성적인 반면, 왜 불우이웃은 도와줘야 하나, 왜 불우이웃은 도와줘도 도와줘도 끊임없이 생기나, 우린 도대체 불우이웃과 어떤 관계에 있나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하기는 매우 꺼린다.
눈치 빠른 아이들 역시 하다못해 불우이웃이란 어떤 모습을 한 족속일까 하는 아이들다운 호기심조차 없이 그 대목을 그냥 넘긴다.
마침내 아내와 딸애는 합심해서 가장 사진이 잘 받을 만한 옷을 골라냈나보다. 나에게도 동의를 구한다.
“여보, 영미 이 옷 잘 받죠?”
“응, 당신 닮아서 영민 무슨 옷이든지 잘 받는걸.”
나는 불필요한 아부의 말까지 하고 밉게 웃는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아부해야 할 것처럼 느끼고 있다.
“여보, 참 오늘 저녁은 당신 혼자서 아이들 데리고 외식하셔야 겠어요.”
“왜, 당신 어디 가우?”
“네, 오늘 저녁 탁사장 단골이 몇 명 모여서 탁사장을 축하해 주기로 했어요.”
“탁사장한테 무슨 경사가 있었는데?”
“제가 얘기 안 했던가요. 이번에 탁사장이 석사학위 받은 거.”
나는 탁사장이 석사학위를 받았단 소리에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어지지 않고 안면근육이 초라하게 경직하는 걸 느꼈다.
“언제? 어디서?”
“며칠 전 신흥대학 후기 졸업식에서요.”
“흥, 복덕방학이라는 거라도 생겼나보지.”
“왜 아니래요. 바로 부동산학 석사과정을 마쳤다나봐요.”
“부동산학?”
“네, 아주 전도유망한 학문이라나봐요. 신흥대학에만 그 과가 있었는데 내년부턴 그 과를 신설할 대학이 여럿 생긴다나봐요. 탁사장한테 강의 맡아달라는 교섭이 지금부터 쇄도한다니 까요.”
“웃기고 있네.”
“정말이에요. 다 거절하고 모교에 남기로 했대요.”
“뮐로 남아. 제까짓 게.”
“강사로 남지 뭘로 남긴요.”
“그럼 복덕방은 문 닫겠군.”
“미쳤어요? 그까짓 강사료 얼마 된다고 그 노다지판을 닫게. 그러잖아도 여기 일에 조금이라도 지장 있을까봐 일 주일에 두 번 이상은 출강 못 한다고 했대요.”
“그럴 걸 뭣 하러 맡아?”
“순전히 명예욕이죠, 뭐.”
“명예? 그까짓 대학강사가 명예는 무슨 우라질 명예야.”
“여보 당신 왜 자꾸 싸우려고만 그래요? 피장파장이면서…….”
“뭐 피장파장이라니? 누가 누구하고 피장파장이란 말야.”
“당신이나 탁사장이나 알량한 강사자리 하나 얻어갖고 교수 행세 하려는 건 마찬가지란 말예요. 당신보고 누구든지 박교수라지 박강사라곤 안 하잖아요. 탁사장한테도 탁강사라곤 안 해요. 벌써부터 탁사장 단골 여편네들은 탁교수님, 탁교수님, 하면서 알랑 떠느라고 법석들인걸요.”
“탁교수님?”
“네에, 탁교수님이고말고요, 박교수님.”
아내가 아름다운 손으로 투정부리는 아이를 달래듯이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눈웃음쳤다.
아내는 타협적이면서도 깔보는 듯한 특이한 표정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표정은 서로 모순되는 듯하면서도 아내의 얼굴과 몸짓 속에 의좋게 공존하고 있다.
아내의 이런 특이한 표정은 나를 단박 무력하게 만든다. 나는 약간 계면쩍 어하면서 얌전해졌다.
낮외출 때와는 또다른 야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내가 옷걸이에 걸린 나의 산책용 점퍼 주머니에 지폐뭉치를 쑤셔넣으면서 말한다.
“볼품사납게 아무거나 사잡숫지 말고 호화판으로 드세요. 아셨죠?”
아내가 나간 다음에야 나는 아까 못다 한 탁사장에 대한 욕지거리를 마무리 졌다.
답사의 의미를 빼앗더니 교수라는 허울마저 빼앗아가? 조오타 좋아. 다 해먹어라, 너 혼자서 다 해처먹으란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 앞이기도 해서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어둡기도 전에 아이들을 몰고 외식을 하러 거리로 나섰다. 아이들도 배고픈 눈치가 아니었고 나도 조금도 시장하지 않았지만 나는 무슨 싫은 숙제처럼 그 외식 이란 걸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상업단지의 번화가엔 없는 게 없다. 양장점, 양폽점, 실내장식점, 표구점, 골동품점, 양가구점, 고전가구점, 약방, 식료품점, 양식집, 일식집, 한식집, 통닭집, 케이크집……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는 건 부동산 사무실이다. 반 투명의 청색 유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그 내부는 유한마담의 응접실처럼 퇴폐적이고도 유혹적이다. 무슨 구실이라도 붙여서 들어가 쉬고 싶게 쾌적해 보일뿐더러 청결해 보이기도 하다. 꽤 세련되고 호화롭게 실내장식을 해놓은 곳도 적지 않다. 이 단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증권회사 건물이다. 여러 증권회사의 무릉출장소가 한데 모여 있는 건물이니만큼 거대하다.
금속성인 광택을 지니고 하늘 높이 예리하게 솟아 있는 걸 그 꼭대기까지 쳐다볼라치면 아뜩하면서 현기증이 난다.
내가 그 앞에서 번번이 압도당하는 것은 그 높이 때문만은 아니다. 미구에 아내가 이 건물과도 인연을 맺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저녁나절의 이 거리엔 산책을 나왔는지, 외식을 나왔는지 별볼일 없이 오락가락하는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띈다.
가족이라야 젊은 부부가 아이를 하나 아니면 둘 데리고 있다. 때로는 아이들끼리 아는 척을 하기도 한다. 어른처럼 새침하고 예의바르게 아는 척을 한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아는 척을 안 했지만 한 사람도 낯설진 않다. 비슷한 옷차림에 비슷한 표정들을 하고 있다. 특히 타협적이면서도 깔보는 듯한 표정 때문에 이웃끼리라기보다는 한 핏줄끼리 같은 혐오감 섞인 친근감조차 그들에게 느끼게 된다. 잘사는 사람다운 우월감으로 함부로 남을 깔보면서도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는 이중성이야말로 아내의 개성일 뿐 아니리 무릉동 주민 누구나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나는 별안간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급히 가끼운 양식집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실내는 침침하고 거울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양식집 속에도 젊은 부부와 힌두 명의 아이들로 된 가족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나는 능숙하고도 권태롭게 칼질을 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내 아이나 남의 아이나 어딘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하나같이 어른을 고대로 축소해놓은 것 같아 보여서였다. 엄마나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하고는 다른 의미로 아이들은 하나같이 작은 어른이었다. 마치 성장을 억제해서 키운 분재의 나무하고 묘목하고 디·른 것처럼.
옷 입은 것도 그렇고 하는 태도도 그렇고 작은 어른이지 조금도 아이들답질 않았다. 특히 아이들다운 호기심이 없는, 타협적이면서도 깔보는 듯한 표정이 결정적으로 아이들을 아이들답잖게 만들고 있었다.
이 거리의 아이들이 아이들답지 않다는 발견이 새삼스러운 건지 케케묵은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난 새삼스럽게 그 발견을 갖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가 준 두둑한 지폐뭉치로 비프스테이크만 먹이고 끝낸다는 건 뭔가 아이들에게 눈치가 보여 오는 길에 케이크집에 들러 생과자도 먹이고 아이스크림도 먹여가지고 돌아왔다. 일 학년짜리 아들이 숙제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열렬한 뽀뽀를 해주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거르고 잠자리에 드는 아들이 안된 생각이 났다.
그러나 나는 아내 대신 차마 그 짓을 할 순 없었다. 아내는 엄마 노릇을 서양 영화 같은 데서 보고 배운 모양이지만,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비지 노릇에서 배운 대로밖에 못 하는 고지식함을 못 면한 채다.
“잘 자거라. 손은 이불 밖으로 얌전하게 내놓고…….”
시키는 대로 이불 위로 손을 가지런히 내놓고 눈을 감은 걸 보고 그대로 나오려다가 그래도 애정 표시가 하고 싶어서 손을 잡아본다. 너무도 작고 여린 손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는 손이다. 나는 이유가 분명치 않은 가책 같은 걸 느낀다.
“동화책 읽어줄까?”
아들은 희미하게 웃을 뿐 좋다고도 싫다고도 안 한다.
나는 아들의 책장에 꽂힌 동화책 중에서 아무거나 한 권 빼내 읽기 시작한다.
“옛날 일입니다. 새옷 입기를 몹시 좋아하는 임금님이 계셨습니다. 이 임금님은 새로 지은 옷이나 화려한 옷을 남달리 좋아해 언제나 좋은 옷만 입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옷을 갈아입어야 하므로 임금이 자리에 앉을 때에는 나라 일을 의논하시는 중이라고 말하게 되지 않고, 이 나라에서는 옷 갈아입는 중이라고 말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의 사기꾼이 찾아왔습니다…….”
그 대목부터 점점 열을 올리기 시작해서 사기꾼이 빈 베틀을 놓고 비단을 짜는 척 임금님과 대신들을 감쪽같이 속이는 장면에서는 마치 배우처럼 임금님과 대신과 사기꾼의 목소리를 그럴 듯하게 따로따로 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아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는 이야기인 듯 눈을 곱게 감은 채 아무런 감동도 안 나타냈다. 그래도 나는 읽기를 계속했다. 사기꾼한테 속아 아무것도 입지 않은 벌거숭이 임금님이 한길을 행렬하고 국민들은 임금님이 벌거숭이인 것을 보면서 행여 바보 취급을 받을까봐 아, 굉장히 좋은 옷을 입으셨다. 뒤에 받쳐들고 가는 긴 옷자락도 참 아름답군! 과연 임금님에게 꼭 어울리는 옷이야. 어쩌고 하며 부화뇌동하는 대목은 노련한 성우보다 더 실감나게 해치웠다.
그러나 아들애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읽기를 계속했다.
“하하하, 임금님 좀 봐. 임금님은 벌거벗고 길에 나오셨다. 하하하…….” 하는 신선하고 당돌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내기 전에 그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끝까지 동화를 읽고 책을 꽃고 아들의 방을 나오려다 말고 문득 나는 이상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만약 지금 무릉동에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렬이 나타난다면 과연 우리 아이들이 어른의 눈치 보지 않고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느닷없이 가슴에 와 박힌 그 의문이 왜 그렇게 아프고 쓰린지 몰랐다. 아프고 쓰릴 뿐 아니라 그 느낌은 깊은 수면 속을 뚫고 들어온 현실의 촉감처럼 생소하고 기분 나쁜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 아픔으로 하여 내가 속한 편안한 세계를 수면의 세계처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아픔은 아득한 것 같으면서도 실은 인접한 각성(覺醒)의 세계에서 오는 아픔이요, 그걸 통해 각성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아픔이기도 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고자 할 때 살갗을 쥐어뜯듯이 그 아픔에 나의 온 의지력을 모아 쥐어뜯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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