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0월 20일
방랑 시인 김삿갓
박 훈 석 지음
임 진사가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고 묻는 바람에 김삿갓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제가 ‘김삿갓 ’으로 불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 그러나 ‘유명하다 ’는 말씀은 당치 않은 말씀니다 .”
임 진사는 어쩔 줄 모르도록 기뻐하면서 감격에 찬 소리로 말을 한다.
"선생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뵐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 오늘 같이 기쁜 날 , 선생께서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게 된 것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 주신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 ."
임 진사가 자신을 알아보고 너무도 기뻐하므로 김삿갓은 어리둥절할 밖에 없었다.
"진사 어른께서는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옵니까 ?" "무슨 말씀을 ! 시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선생의 함자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소이까 . 나는 수년 전에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그곳을 먼저 다녀가신 김삿갓 선생의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답니다 . 그래서 선생을 한번 만나 뵙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는데 , 이렇게 나의 환갑잔치에 우연히 왕림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
그러면서 가족들을 김삿갓에게 일일이 소개하고 나서 김삿갓에게 술잔을 직접 건네 주며 말한다.
"선생이 나에게 축배를 주셨으니 나도 선생께 반배 (返盃 )를 올리겠소이다 ." "고맙습니다 . 이 잔을 영광스럽게 받겠습니다 ." "무슨 말씀을 ! 영광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나 자신올시다 ."
김삿갓이 어떤 위인인줄 모르는 축하객들은 임 진사가 거지 행색을 하고 나타난 김삿갓을 귀객으로 환대하는 광경을 모두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임 진사는 주위를 돌러 보며 ,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 이 어른은 우리나라의 시선 (詩仙 )이신 김삿갓 선생이시라오 . 오늘 이 자리에 이 어른을 모시게 된 것은 나의 다시없는 영광이오 ." 하고 소개하며, 또 다시 술잔을 건네는 것이었다 . 임 진사의 회갑 잔치는 김삿갓이 나타남으로써 졸지에 김삿갓을 위한 환영연으로 둔갑한 느낌이었다 . 김삿갓은 매우 계면쩍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 "시생은 술을 마실 만큼 마셨으니 ,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하고 꽁무니를 빼려고 하자, 임 진사는 한사코 손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
"선생이 오시기는 맘대로 오셨지만 , 가시는 것만은 맘대로 못 가시옵니다 . 선생께 부탁드릴 일이 있사오니 꼭 들어주십시오 ."
김삿갓은 ‘부탁 ’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였다 .
"저에게 무슨 부탁이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 "선생도 보셨다시피 , 이 자리는 우리 집안에서는 다시없는 기쁜 자리올시다 . 이 자리에 선생이 참석해 주신 것을 두고두고 기념하고 싶사오니 , 선생은 이 자리에서 자작시 한 편만 친필휘호 (親筆揮毫 )를 해 주시옵소서 . 그러면 우리 가문에서는 대대로 물려가며 가보로 삼겠습니다 ." "시생의 글씨를 가보로 삼으시다뇨 .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김삿갓은 지금까지 수많은 즉흥시를 읊어 왔지만, 누구한테 부탁을 받고 지은 시가 아니라 그때그때 흥에 겨워 아무렇게나 읊어 댔던 것이다 .
그러니 남의 부탁을 받고 휘호를 해 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임 진사는 간곡히 부탁을 하며 , 사람을 시켜 지필묵 (紙筆墨 )까지 갖다 놓게 하는 것이 아닌가 .
<동여 놓고 치는 매는 피할 수 없다 >고 했던가 .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 이제는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
"그러면 , 제 글씨가 서툴기는 하지만 , 시를 한 수 써 보기로 하겠습니다 ."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며 붓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붓을 들었기 때문에 어떤 시를 써야 할지 지극히 막막하였다. 당연히 수연을 축하하는 시를 써야 하겠지만 , 창졸 간에 당하는 일이어서 시상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
손에 붓을 든 김삿갓이 눈을 들어 사허정 아래를 굽어보니, 능라도의 푸른 버드나무 숲과 하얀 모래밭이 보였다 . 끝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는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 ,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 붓을 든 김삿갓의 손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
可憐江浦望 (가련강포망 ) 저 멀리 강포 풍경 아름다워라 明沙十里連 (명사십리연 ) 고운 모래가 십리나 이어져 있네 令人個個拾 (영인개개습 ) 그 모래 하나하나 모두 주워다 놓고 其數父母年 (기수부모년 ) 양친부모 그만큼 수를 누리게 하소서 .
아무 생각도 없이 모래사장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에 즉흥적으로 써 갈긴 시였다 .
이것을 지켜보던 어떤 하객은 너무도 놀라워, "야아 , 시 한 편을 눈 깜빡할 사이에 써 갈기니 과연 시선이 틀림없구나 !" 하고 감탄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하객은 , "시도 좋지만 , 글씨가 또한 명필일세 그려 !" 하고 맞장구를 쳐보인다. 임 진사는 휘호를 한 폭 받고 나자 춤을 출 듯이 기뻐하며 옆에 있는 자식들에게 명령한다 .
"애들아 !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 그냥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이 어른을 우리 집 별당으로 모시게 하여라 .“
42. 능능기중별하능 … 야월삼경호부능 (能能其中別何能 ? … 夜月三更呼夫能 !) (특별히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 … 달밤에 서방을 불러들이는 것이라오 !)
김삿갓은 이날부터 임 진사 댁 별당에서 귀객 대접을 받아가며 평양 구경을 맘놓고 다닐 수 있었다. 임 진사는 워낙 시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 김삿갓과 어울려 술을 나눠 가며 시를 짓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거워했던 것이다 .
그 뿐만이 아니라, 임 진사는 김삿갓의 수발을 들리기 위해 <산월 >이라는 애송이 기생까지 딸려 주어 김삿갓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객고도 맘대로 풀 수 있게 되었다 .
기생 산월이는 나이가 17세가량 되었을까 , 비록 나이는 어려도 성품조차 서글서글하고 , 무슨 일이든지 막힘이 없어 재주가 뛰어나 보였다 .
첫날밤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자, 김삿갓은 희롱의 말로 수작을 걸어 보았다 .
“平壤妓生何所能 (평양기생하소능 : 평양 기생은 어떤 재주를 가졌는가 ?)”
산월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다.
"能歌能舞雙能詩 (능가능무쌍능시 :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고 , 두 가지와 함께 시도 잘 짓는다오 .)"
산전수전 다 겪은 노기(老妓 ) 뺨칠 정도의 멋진 화답을 한다 .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어보았다 .
"能能其中別何能 (능능기중별하능 : 모두 잘한다지만 , 그 중에 특별히 잘하는 재주는 무엇이냐 ?)"
그러자 이번에는 산월이 "호호호 " 소리 내어 웃으며 ,
"夜月三更呼夫能 (야월삼경호부능 : 달밤에 서방을 불러들이는 것이라오 !)"
산월의 대답을 들은 김삿갓이 "하하하 " 소리 내어 웃자 , 산월은 , "희롱의 말씀은 그만 하시고 이제는 술이나 드사이다 ." 하고 옆에 마련된 소반을 끌어당겨 술을 따라 주는 것이다 .
"자네가 모든 재주에 능하다고 하니 ,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에 춤이나 한 곡 추어 보이게 !" "어렵지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
산월은 바시시 일어나더니 스란치마의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나더니 바라춤을 나비처럼 나풀나풀 추기 시작하였는데, 몸놀림과 손놀림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
"장단이 없어 어색하지 않사오니까 ?" "아니다 ! 더 할 나위 없는 천상 선녀의 유희 (遊戱 )를 보는 것 같았다 ."
김삿갓은 춤추기를 끝낸 산월을 와락 끌어당겨 가슴 그득히 품에 안았다. 열 일곱 산월의 봉긋한 유방은 풋풋하게 익은 두 알의 복숭아처럼 탱탱하고 야무졌다 . 유취 (乳臭 )가 나는 듯한 몽롱한 체취는 어떤 향기보다 더 정신을 취하게 하였다 .
김삿갓은 그녀가 편안하게 드러눕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육체의 앞부분을 내놓았다 . 그러자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속으로 끌어당겼다 .
그가 자기 속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살에 닿는 맨살을 느꼈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엉덩이는 그의 손바닥 크기였다 . 그가 그녀의 보드랍고 매끄러운 엉덩이를 양 손으로 감싸 안고 자신의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
그러자 좀체 움쩍도 않던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뜨겁고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러운 불길이 깃털처럼 날리듯 , 자신의 몸속에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는지 , 눈을 감은 채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있었다 .
그도 그녀의 활짝 열린 자궁 속으로 조수에 밀리는 해초처럼 물결 따라 너풀거렸다. 이윽고 , 그가 그녀의 귓가에 거친 신음 소리를 토해 내며 불덩이를 쏟아내자 ,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힘차게 껴안았다 . 두 사람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 서로 놓아주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
창가에는 달빛이 환히 비치고 있었다. 담 밖에서는 오경 (五更 )을 알리는 순라꾼의 딱딱이 소리가 들려왔다 . 평양에 와서 처음으로 즐겨 보는 기생 외도가 너무도 즐거웠던 김삿갓은 하도 흥에 겨워 , 용만곡 (龍灣曲 )이라는 옛 시 한 수를 읊었다 .
舞妓腰肢白雪輕 (무기요지백설경 ) 춤추는 기생의 허리는 눈처럼 가볍고 華筵對酒月盈盈 (화연대주월영영 ) 술을 마시다 보니 달빛이 휘영청 밝구나 與君歡笑行人醉 (여군환소행인취 ) 그대와 함께 웃다 보니 술이 취해 오는데 無事巡軍報五更 (무사순군보오경 ) 순라꾼은 어느새 밤이 깊었다고 오경을 알리는구나 .
하룻밤을 즐겁게 보낸 김삿갓은 다음날부터 혼자 평양 구경에 나섰다. 그리하여 연광정 (緣光亭 )을 비롯하여 부벽루 (浮碧樓 ), 망월루 (望月樓 ), 풍월루 (風月樓 ), 영귀루 (詠歸樓 ), 함벽정 (涵碧亭 ), 쾌재정 (快裁亭 ), 영명사 (永明寺 ), 장경사 (長慶寺 ) 등 , 평양에서 이름난 명소는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가보았다 .
김삿갓은 발길이 이르는 곳마다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정신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경치도 경치지만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은 옛날에 이곳을 다녀 간 시인묵객 (詩人墨客 )들의 자취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
시인묵객들은 이름 난 경치 좋은 곳을 다녀가며 시를 남기기 일쑤였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기억하고 현판 (懸板 )에 새겨 걸어 놓는 관습이 있었다 .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걸려있는 현판 시를 감상하는 것은 김삿갓에게는 다시없는 즐거움이었다 .
부벽루에는 정도전(鄭道傳 )의 시가 걸려 있었다 .
영명사 절 앞에는 커다란 강이 흘러 놀잇배 타고 와서 부벽루를 찾노라 바람과 피리소리에 날이 저무는데 아득한 물안개가 시름을 자아 주네.
김삿갓이 돌아보는 평양의 명소에는 이르는 곳마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가 현판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명시를 워낙 많이 보아 온 김삿갓은 시흥이 자꾸만 솟구쳐 올라왔지만 정작 자신의 시상을 형상화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
따라서 숫제 시 짓기를 단념하고 발길을 연광정으로 옮겼다. 김삿갓이 연광정을 자주 오르는 데는 볼 때마다 감흥이 새롭기 때문이었다 .
연광정은 덕암(德岩 )이라는 수백 척 절벽 위에 날아갈 듯이 솟아 있는 정자다 . 연광정은 성종 (成宗 )대왕 시절 평안 감사로 있던 허광이 지은 것으로서 , 평양에 있는 수많은 명승고적 중에서도 규모로 보나 건축미로 보나 가장 뛰어난 정자인 것이다 .
연광정은 일찍이 임진왜란(壬辰倭亂 ) 때 , 명나라 장수 심유경 (沈惟敬 )과 왜장 소서행장 (小西行長 )이 강화 담판 (講和談判 )을 했던 장소로 유명하고 ,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적진 속에 들어가 왜장을 살해하고 순국절사 (殉國節死 )한 평양 명기 계월향 (桂月香 )도 평소에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
이러한 연광정은 높은 벼랑위에 우뚝 솟아 있는 관계로 눈앞의 전망이 광활하기 이를 데가 없다. 바로 눈앞에는 능라도와 백은탄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데다가 , 왼쪽으로는 대동루 (大同樓 )와 오른쪽으로는 읍호루 (揖濠樓 )도 지척 간에 보였다 .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용하게 흐르는 대동강물 위에는 사시장철 놀잇배가 무수히 떠 있어서 연광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실로 인간 세계가 아닌 선경이었다 .
연광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때마침 진달래꽃이 만발한 시절인지라 , 그 잔디밭에서는 10여 명의 노기 (老妓 )들이 둘러앉아 화전 (花煎 ) 놀이를 하고 있었다 .
화전놀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류적인 봄놀이다. 소금으로 간을 넣어찹쌀 가루를 반죽한 뒤 진달래꽃으로 수를 놓아 전을 부쳐 먹는 놀이인 것이다 . 꽃으로 전병을 부쳐 먹는 것은 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배달민족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
김삿갓은 시인도 아닌 늙은 기생들이 모여 앉아 화전놀이를 하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더구나 화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코끝에 걸리자 별안간 시장기가 동했다 . 그리하여 노기들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수그려 보였다 .
"지나가던 걸객이올시다 . 잔치가 푸짐하신 모양이니 , 걸객에게도 전병 몇 점 얻어먹게 해 주십시오 ."
노기들은 돌연 나타난 불청객 때문에 적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50이 넘어 보이는 기생이 전병 석 장을 접시에 담아 내밀어 주며 말한다 .
"우리들은 지금 막 시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라오 . 남은 전병이 석 장뿐이니 허물치 말고 자셔 주세요 ."
말투가 지극히 공손하였다. 김삿갓은 그들이 단순히 화전놀이만 한 것이 아니라 시회를 하였다는데 내심 크게 놀랐다 . 평양은 팔도 제일의 ‘기생의 고장 ’인지라 , 기생들끼리도 "시회 "를 하는가 싶어 놀라웠던 것이다 .
김삿갓은 전병 석 장을 다 먹고, 빈 접시를 내밀어 주며 고맙다는 말 대신에 이런 수작을 하였다 .
"즐거운 시회에 불청객이 훼방을 놀아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 여러분이 시 짓기 화전놀이를 하셨다 하니 , 나도 고맙다는 뜻으로 화전놀이에 대한 옛 시를 한 수 적어 놓고 가겠소이다 ."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일필휘지로 써 갈겨 놓았다.
정관탱석소계변 (鼎冠撑石小溪邊 ) 솥을 돌로 괴어 놓은 개울가에서 백분청유자두견 (白粉淸油煮杜鵑 ) 흰 가루와 기름에 두견을 튀겨 전병을 부쳐 쌍저협래향만구 (雙箸挾來香滿口 ) 저로 집어넣으니 입안에는 향기가 가득하여 일년춘신복중전 (一年春信腹中傳 ) 한 해의 봄소식이 뱃속에 전해 오네
김삿갓이 시를 적어 놓고 자리를 막 뜨려고 하는데 기생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
"이 시는 누가 지었길래 , 이렇게도 잘 지으셨습니까 ? 혹시 선생이 지으신 시는 아니온지요 ?"
노기 왕초쯤으로 보이는 늙은 기생이 물었다. 그러자 ,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
"아니올시다 . 이 시는 명종대왕 때 풍류객 임백호 (林白湖 ) 선생이 지은 시올시다 ." "임백호 선생이라면 , 그 옛날 평양에 도사 (都事 )로 오셨다는 백호 (白湖 ) 임제 (林悌 ) 선생 말씀입니까 ?" "맞습니다 . 바로 그 양반이 지은 시랍니다 . 그 양반은 워낙 유명한 퓽류객인지라 , 평양에 와서도 많은 일화를 남기셨지요 ." "그 분이 어떤 일화를 남기셨는지 이왕이면 그 말씀 좀 들려주세요 ."
유명한 시인의 ‘일화 ’라는 소리에 노기들은 호기심이 대단해 보였다 . 김삿갓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 "임백호의 풍류기담 (風流奇談 )은 한두 가지만이 아니라오 . 그가 도사로 평양에 와 있을 때의 일화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 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양 감사 다음 가는 높은 벼슬자리인 도사로 임백호가 평양에 왔을 때의 일이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관계로 , 임백호는 수많은 명기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
그러나 수많은 기생 중에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기생은 오직 한우(寒雨 )라는 기생뿐이었다 . 왜냐하면 한우는 풍류를 알고 시를 알고 있어 백년지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한우는 워낙 지조가 굳은 기생인지라 몸만은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 임백호는 일 년이 넘도록 한우를 만나 왔지만 사내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어느 초겨울 밤, 그날도 한우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 임백호는 불현듯 한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솟구쳐올랐다 . 그러면서 한우에게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를 읊어 들려주었다 .
북창(北窓 )이 맑다기에 우장(雨裝 ) 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오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결국 얼어 자게 생겼네.
이 시조에 나오는 <찬비 >는 기생 <한우 (寒雨 )>를 지칭한 말임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 말하자면 임백호가 한우를 찬비에 비유하여 즉흥시를 한 수 읊어 댐으로서 , 은연중에 한우와의 동침을 요구해 본 것이었다 .
명기 한우가 임백호의 그런 심정을 못 알아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한우도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로 응수하여 , 임백호의 소원을 흔쾌히 풀어주었던 것이다 .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로 얼어 자리 비단 이불 원앙 베개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소 찬비 맞으셨다니 내 녹여 드리겠소.
김삿갓이 능란한 입담으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자, 노기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 , 어떤 기생은 가벼운 한숨조차 지으며 넋두리하듯 말을 한다 .
"옛날 분들은 사랑을 해도 그처럼 멋지게 사랑을 했는데 , 요새는 그런 풍류남아를 볼 수가 없네요 ."
이어서 또 다른 기생이 말을 하는데,
"그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 임백호의 일화를 많이 알고 계시니 , 한 가지만 더 들려주세요 ."
김삿갓은 손을 내저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애기는 그만 하고 댁으로들 돌아가시지요 ."
그러나 기생들은 누구도 일어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한 가지만 더 들려주세요 ."
그러면서 기생들의 시선이 모두, 김삿갓의 얼굴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 김삿갓은 마지못해 임백호의 일화를 또다시 아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
"그러면 임백호의 일화를 하나만 더 하기로 합시다 . 임백호는 평양에 있을 때에 어떤 동기 (童妓 ) 하나를 무척 귀여워했다오 . 그래서 한겨울 임에도 그 애에게 부채를 하나를 선사한 일이 있는데 , 그 부채에 임백호가 손수 써준 시가 유명하니 그 시를 소개하지요 ."
그리고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보여주었다.
莫怪隆冬贈扇枝 (막괴융동증선지 ) 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히 여기지 마라 爾今年小豈能知 (이금연소기능지 ) 너는 나이가 어려 아직은 모르리라마는 相思半夜胸生火 (상사반야흉생화 ) 상사병으로 한밤중에 가슴이 탈 때면 獨勝炎蒸六月時 (독승염증유월시 ) 한여름 무더위가 비할 바 아니니라
기생들은 그 시를 읽어 보고 또다시 탄성을 질렀다.
"선생은 어쩌면 이 같은 유명한 시를 좔좔 외고 계세요 ? 그러고 보니 선생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 틀림없으신가 보죠 ? 그렇죠 ? 선생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시죠 ?"
김삿갓은 저물어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더러 시인이 아니냐구요 ? 허허허 ...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걸객에 불과한 사람이라오 ."
그런데 조금 전부터 몇몇 기생들은 저쪽에서 무엇인가 쑥덕거리더니 별안간, "맞다 , 맞다 ! 삿갓을 보니 그분이 틀림없어 ! 그분이 아니라면 옛날 시를 그렇게도 잘 알겠나 ." 하고 외치며 김삿갓 쪽으로 우루루 몰려오더니, 김삿갓을 향해 이렇게 다그쳐 물어 보는 것이 아닌가 .
"실례의 질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 선생은 방랑시인 김삿갓 어른이시죠 ?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 선생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틀림없으시죠 ?“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이 들려오는데 보슬비 내리는 강엔 날이 저문다 )
김삿갓은 자신의 신분이 들통 나는 바람에 크게 당황하였다.
"하하하 , 맞대 놓고 다그쳐 물으시니 ,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군요 . 나는 방랑객 김삿갓인 것만은 틀림이 없소이다 . 내가 김삿갓인 것을 어찌 아셨소이까 ?"
김삿갓은 어쩔 수없이 실토하며 반문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쌍수를 들어 환호하며 , "존귀하신 어른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어 다시없는 영광이옵니다 ." 하고 한결 같이 머리를 수그려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기생은 부랴부랴 술까지 따라 올리며 말한다 .
"선생이 술을 좋아하신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 이 술잔을 받으시옵소서 ."
김삿갓은 술잔을 받아 마시며 또다시 반문할 밖에 없었다.
"대관절 내가 김삿갓인 것을 어떻게 아셨냐 말씀이오 ?"
생전 처음 만나는 평양 기생들이 자기 이름을 알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 김삿갓의 의혹은 지극히 간단하게 풀렸다 . 늙은 기생 하나가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
"선생은 얼마 전부터 임 진사 댁에 기거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 임 진사 댁 별당에서 저녁마다 선생을 모시는 <산월 >이라는 아이는 바로 나의 수양딸이랍니다 . 저는 그 애를 통해 선생이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 >이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촌수를 따지자면 , 저는 선생의 장모가 되는 사람이예요 . 호호호 "
<장모 >라는 소리에 노기들은 허리를 움켜잡고 웃는다 . 김삿갓은 적이 계면쩍어서 , "아 , 그래요 ? 장모님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 지금이라도 큰절을 올리기로 하지요 ." 하고 짜장 큰 절을 올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바람에 모든 기생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 한 기생이 , "너는 삿갓 어른 같은 유명한 시인을 사위로 두어서 얼마나 좋겠니 " 하고 농담을 하자, 장모라고 자칭한 노기는 시큰둥하게 웃어 보이며 , "씨도 안 먹히는 소리 그만 하거라 . <유명 >이 밥 먹여 준다더냐 . 임 진사께서 특별히 생각해 주지 않으셨다면 , 우리 식구는 밥을 굶을 판이었다 ." 하고 능청을 부려대고 있었다.
그러자 한 편에 앉아 있던 다른 기생은 그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아무리 농담이기로 너는 어쩌면 그런 농담을 함부로 하고 있니 ? 얘들아 ! 오늘은 우연하게도 유명하신 선생님을 이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었으니 . 우리가 오늘 지은 시를 삿갓 선생한테 보여 드리고 강평을 한번 받아 보면 어떻겠냐 ?" 하는 엉뚱한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만은 모든 기생들이 정색을 하며 찬성을 하는 것이었다 .
"그래 . 그래 ! 우리가 지은 시를 이왕이면 삿갓 선생한테 강평을 받아 보면 크게 공부가 될 게야 ."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허허허 , 나더러 여러분의 시를 강평해 달라구요 ? 시라는 것은 자기가 멋대로 지었으면 그만이지 , 내가 무얼 안다고 남의 시를 강평한단 말이오 ?"
김삿갓은 사양을 하면서도, 그들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 내심으로는 은근히 궁금하였다 . 그러자 저쪽 구석에 새침하게 앉아 있던 기생이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간곡하게 부탁한다 .
"저희들은 지금 시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 선생 같은 어른께서 한번 보아주시면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니 , 꼭 한번 보아주십시오 ."
대개는 장난삼아 시를 지은 모양이지만 그 기생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였다. 김삿갓은 술과 안주를 잔뜩 얻어먹은 데다가 , 이런 부탁까지 받고 보니 그냥 꽁무니를 빼기는 난처하게 되었다 .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신다면 한번 읽어 보도록 하지요 .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시라는 것은 자기가 직접 지어 보는 데 즐거움이 있는 것이지 . 잘 짓고 못 짓고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
김삿갓은 그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그와 같은 예방선을 쳐 놓고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새치름해 보이던 기생이 이런 말을 일러준다.
"저희들은 오늘 <門 >, <竹 >, <昏 >, 세 글자를 운자로 썼사옵니다 . 그런 줄 알아주십시오 ."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편 한 편 읽어 보았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대로 거의 전부가 읽어 볼 가치가 없는 졸작 (卒作 )들이었다 .
(그러면 그렇지 ! 제깟 것들이 주제넘게 무슨 시를 짓는답시고 ......)
김삿갓은 속으로 그렇게 얕잡아 보고 무심히 읽어 내려오다가 <강촌모경 (江村暮景 )>이라는 시에 와서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시는 대가 (大家 )의 풍모가 엿보이는데 <강촌모경 >이라는 시는 누가 지었지요 ?"
사실 이처럼 훌륭한 시를 발견하게 되라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노기들은 좋은 시를 발견했다는 소리에 혹시라도 자기 작품이 아닌가 싶어 김삿갓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
그러나 자기 작품이 아닌 것을 알고 나자, 모두들 실망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며 , "애들아 ! <강촌모경 >이라는 시는 누가 지은 시냐 ?" 하고 도중으로 물어 쌓는다.
김삿갓은 처음에는 아무리 좋은 시를 발견하더라도, 그 작품을 특별히 치켜 올리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여자들은 워낙 시기심이 많기 때문에 , 어느 한 작품을 특별히 치켜세웠다가는 그들의 우정을 해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워낙 뛰어난 작품을 발견하고 보니 너무도 감격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그 시를 흥겹게 읊어대었다 .
千絲萬縷柳垂門 (천사만누유수문 ) 실버들 천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 綠暗如雲不見村 (녹암여운불견촌 ) 구름인 양 눈을 가려 마음을 볼 수 없네 忽有牧童吹笛過 (홀유목동취적과 )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히 들려오는데 一江烟雨白黃昏 (일강연우백황혼 ) 보슬비 내리는 강엔 날이 저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