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느 문학지에 게재된 본인의 부끄러운 글임다.
------------------------------------------------------------------------------------------------------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6시에 일어났다.
큰 애는 구석으로 굴러가서 벽을 마주보고 자고 있고, 작은 애는 집사람의 품에 폭 파묻혀 쌕쌕거리며 자고, 집사람 또한 매일 애들과 씨름해서 그런지 ‘푸아푸아’ 거리며 단잠을 자고 있었다.
살며시 문을 닫고 나와 변함없이 출근준비를 했다.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고서 제발 집사람이 아침의 공기변화에 깨지않도록 간절히 소망하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를 몰고 급히 집을 나섰다.
10여 분 만에 도착한 곳은 사무실이 아닌 테니스코트였다.
그렇다. 오늘은 바로 ‘근로자의 날’이기 때문에 공직생활을 하여 ‘근로자의 날’이 ‘근로자들이 쉬는 날’이라고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집사람한테는 평소마냥 사무실로 출근한 것으로 하루를 가장해야 했다.
집사람은 내가 테니스에 점점 빠져든다고 하며 테니스 ‘테’자도 싫어했다.
‘1시간만 운동하고 오면 되지 않느냐’ 말하지만 테니스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산술적으로 계산만 해서 될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코트가 없으면 기다려야 되고, 고수들끼리 칠려고 하면 게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1게임을 하면 보통 30분 정도가 걸리고 또 다음 게임까지는 1게임을 쉬는 것이 뒷사람을 위한 동호인의 배려인데 어떻게 집에서 출발한 지 1시간만에 집에 도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테니스 ‘테’자를 싫어하다 보니, 비슷한 음이 들어가는 테니스를 낙으로 삼는 남편인 준태도 싫어하는 것 같다.
근로자의 날에 집에서 애들과 같이 놀아주지 않고 테니스치러 갔다는 것을 알면 아마 바가지 밑바닥 긁히는 소리까지 들으며 밥 몇 끼는 굶어야 될 것이다.
마침 코트에 회원이 몇 명 나와 있었다.
아직 8시밖에 안되었는데도 약속을 했던 것도 아닌데 조 구성이 되었다.
나와 실력이 비슷한 회원을 파트너로 하고 상대편은 고수인 자와 쉰을 넘었지만 발이 아주 빠른 하수가 파트너로 정하여 졌다.
아침의 상큼한 공기를 모두들 한껏 머금고 나서 상대편하수의 서브로 게임을 시작하였다.
강한 포핸드스트록을 자랑하는 파트너는 역시나 다름없이 상대편 하수의 약한 세컨드 서브를 강하게 요리했다. 서버의 왼쪽인 센터쪽으로 빨랫줄 같은 플랫구질의 공을 보내니 상대편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애드지역에서 나에게 서브가 넘어왔다.
자세를 낮추고 드라이브 구질로 볼을 감아, 뛰어 들어오는 상대편의 왼쪽 앨리쪽으로 몰아쳤다.
역시 공은 생각대로 위닝샷을 가져왔다.
기분 좋게 0:30으로 앞서갔다.
세번째 서브 또한 파트너가 강하게 리턴을 했고 서버가 얼떨결에 받아 넘겼지만 전위를 지키고 있던 나에게 쉬운 포핸드 발리를 제공해 주었다.
네번째 서브는 잘 들어왔지만 전위를 보던 상대편이 센터쪽을 커버하기 위해 센터쪽으로 치우친 틈을 보고, 나는 앨리지역으로 패싱샷을 보기좋게 성공시켰다.
고수한테 패싱샷을 위닝샷으로 결정지으니 머리에서는 엔돌핀이 아침부터 퐁퐁거리며 솟는 느낌이었다.
상대편의 서브인데도 가볍게 브레이크를 걸고 나니 게임이 술술 풀릴 것 같았다.
역시 생각대로 게임은 평소 게임답지 않게 6:0으로 가볍게 이겼다.
상대편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우리앞에 무너진 것이다. 특히 잘 친다는 고수가.
물 한 컵을 조용히 마시던 고수가 갑자기 제안을 해왔다.
“5세트를 해서 지는 쪽이 점심 내기 합시다.”
앞선 게임의 기분좋은 승리에 고수의 그 정중한 제안을 마다할 우리가 아니었다.
한 세트는 이미 따 놓았기에 남은 네 세트 중에서 반타작만 하면 되는 것이고, 앞서 끝난 우리의 찰떡궁합같은 플레이에 스스로를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조금 쉬다가 자리를 바꾸어 2세트를 시작했다.
2세트도 첫 세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6:1로 가볍게 이겨 버렸다.
파트너도 잘 했지만 오늘은 아마 나를 위한 날인 것 같았다.
세컨드서브도 퍼스트서브처럼 강하게 들어가기에 고수도 자기 생각대로 쉽게 리턴하지 못했고 내 머리위로 올린 상대편의 로브도 뒤돌아 가서 베이스라인에서 그라운드스매시로 후려치니 평소에 좀 친다고 까불락거리던 고수의 기를 처절히 꺾고 있었다.
조금 쉬다가 3세트를 시작하였다.
회원이 몇 명 나와서 이 경기를 관전해주면 좋으련만 오늘따라 나오는 회원은 코트 근처에서 사업한다는 사장님 외에는 더 이상 없었다.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자 하면서 파트너와 하이파이브를 기운차게 하면서 상대편 고수의 서브로 게임을 시작하였다.
복식은 두 사람이 하는 관계로 한 사람이 고수라 하더라도 그 파트너가 기본이하로 약하다면 그 파트너 쪽을 많이 공략하길래 좋은 조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한 우리 쪽이 확률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역시 앞선 두세트와 마찬가지로 게임은 쉽게 풀려갔다.
오늘은 아무리 해도 우리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5:2의 매치포인트까지 거침없이 몰고 갔다.
아무 말없는 고수와 쉰이나 넘은 하수가 마음에 걸렸다.
매치포인트에 몰린 쉬운 공을 파트너가 힘없이 상대편으로 넘겨주니 고수가 가만히 놔 둘 리가 없었다.
독이 잔뜩 올라 광기를 뿜으며 냅다 친 공이 우리 사이를 ‘팽’ 소리내며 빠르게 지나갔다. 게임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분한 감정을 가득 담은 아주 위력적인 상대편 고수의 위닝샷이었다.
매치포인트가 풀리고 상대편이 1게임을 만회하여 스코어는 5:3이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다보니 타이브레이크까지 가게 되었고 상대편에 대한 배려도 조금 배어있어 그 세트는 아쉬움 속에 넘겨주고 말았다.
사기가 오른 상대편은 4세트에서는 적극적으로 공격해왔다.
고수의 날카로운 서브 앤드 발리와 그의 파트너의 아리랑 로브에 생각지도 못하게 실점에 실점을 하고 말아 결국 최종 진검승부는 5세트로 넘어가게 되었다.
비록 간단한 점심내기였지만 어느 덧 서로에게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게임이 되고 말았다.
오월이라 하지만 태양은 대지를 서서히 달구어 왔고 코트장에서는 뜨거운 열기마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얇은 티셔츠는 어느 새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쉽게 풀렸던 경기가 어렵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리에, 팔에 나모르게 힘이 들어가게 되고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이널 세트도 결국 타이브레이크까지 가게 되었고 급기야 매치포인트의 상황까지 우리가 몰리게 되었다.
상대편 하수의 평범한 볼을 먹이를 낚아채는 한 마리의 굶은 짐승처럼 나도 힘차게 포핸드스트록으로 임팩트하였다.
그러나 한 낮의 뜨거운 햇살을 갈아 마셔 늘어진 스트링은 반발력이 커져서 우리의 커다란 탄식을 실은 채로 마지막 볼을 상대편 베이스라인 넘어 멀리 멀리날려 버렸다.
결국 전체 세트 스코어 2:3으로 역전패하였다.
지켜보던 회원이 아주 재미있게 봤다면서 박수를 보내주었다.
점심을 사는 것은 사면 되지만 쉽게 이길 경기를 이렇게 눈뜨고 도둑맞은 격이 되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파트너는 선약으로 인해 연신 나에게 미안해하다며 자리를 떴다.
차에다 모두를 태우고 줄서서 기다린다는 냉면집으로 향하였다.
그래, 오늘은 회원분들을 위해서 게임도 드라마틱하게 져 드리고 점심도 대접하는 것이 평소 나에게 고맙게 대해왔던 그 분들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주차장이 복잡하여 회원분들을 먼저 들어가게 한 뒤 잠시 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불이라서 냉면값을 고수가 먼저 지불하였다고 했다.
굳이 선불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먼저 지불할 의사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의 게임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하면서 시원한 냉면을 먹고는 사무실로 나왔다.
메신저를 켜놓고 있으니 집사람 아이디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녀석도 메신저를 어른 못지 않게 잘 하는 편이라 집사람인지 딸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이제 가볍게 퇴근하는 일만 남았다.
남은 일거리를 마무리하고 나니 그래도 해가 서쪽에 걸려 있어 다시 코트장으로 향하였다. 추가로 3게임 정도 더 하고 나니 코트에 어슴프레 어둠이 내려온 것처럼 늘어진 피곤함이 내 발 밑에 밟히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출근했던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테니스를 처음 배우기 시작할 무렵 회원 누군가가, 출근한다는 핑계로 토,일요일 아침에 넥타이 매고 나와서 운동하다가 저녁에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고 집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마냥 철없이 웃었던 나인데 내가 그 사람이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흐르는 땀은 에어콘 바람으로 식혀 두었다.
얼굴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사무실 엄청 덥네”
묻지도 않은 대답을 먼저 집사람에게 하고서는 샤워하기 위해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은 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모로 누워서, 집안을 난리통으로 만들었을 어린 애들과 오늘 하루도 씨름했을 집사람을 생각하니 킥킥거리는 웃음이 달빛에 벚꽃 터지듯 속에서 퍽퍽퍽 터져 나오고 있었다.
타인으로 하여금 말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직장의 업무속성이 그대로 몸에 배어있는 집사람이지만 오늘 일은 남편에게 깜빡 속은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리라.
다음 날 출근을 할려고 신발을 신고 있었다.
뒤에서 집사람이 말했다.
“여보, 어제 어디 갔었어요?” 나지막하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사무실!” 강하게 힘주며 말했다.
“빨갛게 탄 얼굴은 어떡하고!”
“........”
- 2009年 作
첫댓글 ㅎ... 매치 포인트 잡고 상대를 의식하여 마음을 풀다가 뒤 늦게 어~어 이게 아닌데... 그때는 이미 게임에 지고
고수는 역시 고수군요 배려하다가 게임이 꼬였다는걸 잘 알지요 고수도 그런 경험 세도나님보다 먼저 겪었으니...
저도 많이(조직에서 상급자와 볼 치면서)있었습니다
요즘 테니스 운동 안 하심까?
계속 하신다면 환경님이 치신다는 내곡동으로 원정 함 가시지요.
테니스도 좋고, 클래식 기타도 좋고, 글 쓰는 것도 좋고, 그리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고.....
테니스 라켓놓고 골프 배운지 십여년이 넘었고
골프도 허리 아파서 그만두고 이젠 기타에...
나이 좀 있으면 골프가 안성맞춤인데... ㅎ~
저도 허리아파서 테니스운동 하지말라 했는데 테니스 운동으로 말끔히 나았슴다.
운동 안 해본 의사는 운동에 대해서 또 정확하게 모르는 듯....
기체조가 참 좋죠.
어떤 절에 가니 문구에
'늙어 안 아플라면 기체조라도 하라 하던데.'
저도 기체조하러 가야되는데 추워서 조금 게을러졌나 봄다.
테니스! 참 재미있는 운동이지만 배우기가 쉽지않은 운동이기도 하죠. 세도나님팀이 만약 승리하셨다면 그 나이드신 하수님이 마니 속상해하셨을듯... 전 운동으로 mtb를 즐깁니다 ㅎㅎ
잘 진 것 같슴다. 밥도 공짜로 먹고...
요새는 mtb에다 atv도 있고..
즐건 mtb와 함께 즐건 guitar요!!!
"집안을 난리통으로 만들었을 어린 애들과 오늘 하루도 씨름했을 집사람을 생각하니 킥킥거리는
웃음이 달빛에 벚꽃 터지듯 속에서 퍽퍽퍽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위의 글은 진심인가요?
아니시겠죠?
아직 철이 덜든 개구장이 같습니다.ㅎㅎㅎ
어부인께 잘 못하시다간 쫒겨나기 쉽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꽁트 끝부분에 제 얼굴이 얼마나 뻘개졌는지 상상해보세요.
쪽 팔려 죽을 뻔 했다는 거.....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그래도 쪽팔려....
저가 집사람 손바닥안에서 놀았다는 거.
그 때 얼굴 타는 것은 왜 그리 생각을 못했는지.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