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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7 . 21 (土)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혼이 살아 숨쉬는 생가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에 찾았다.
( 명성황후 생가...)
明成皇后(1851~1895)
본관 여흥(驪興), 성 민씨(閔氏), 여주(驪州)출생, 증(贈) 영의정 치록(致綠)의 딸.
(1894년12월,고종과 명성황후가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접견하는 모습을 그린 일본화가의 삽화)
( 생가 옆으로 부처꽃과 원츄리가 만발한 꽃밭에서 바라본 모습...)
( 생가 옆 화단에 있는 모감주 나무...)
( 근접촬영해본 모감주나무 열매...)
( 열매 껍질을 반쯤 벗기고 보니...스님들의 염주로 이용한다는 열매...)
[ 명성황후의 사상 ]
: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던 시기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명성황후는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외국의 침략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론을
펼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 이제 입구 대문을 통하여 들어가 보자...)
( 대문 양쪽에 붙어있는 행랑채...)
( 하인들의 방인 이 행랑채에서 농한기에 새끼도 꼬고 가마니를 짜는 일을 했다...)
( 대문을 지나 주택으로 들어가는 문...)
( 안채 : 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공간...)
( 안채 : 안방, 대청, 건넌방 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 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안방모습...)
( 가마솥과 아궁이가 있는 당시의 부엌 모습...)
( 단촐했던 당시의 부엌 살림...식기들...)
[명성황후의 인품과 학식]
: 어려서 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강직하였으며 옳고 그른 것을 뚜렷이 밝히는
분별성과 행동에 과단성이 있었고 일찍 홀로되신 어머니를 섬기기를 지성으로
다 하였으며 왕비가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명성황후의 필적은 힘이 있고 당당하여 국모로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 사랑채와 침방...바깥주인이 거처하는 공간, 주택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다...)
( 사랑방은 남자 주인의 일상 거처실, 손님을 대접하는 방으로 정치,사회 방면의 교류가 이 사랑방에서 이루어지며 침방은 남자 주인이 잠을 자는 곳으로 조선시대의 내외법은 남자 주인은 사랑채 침방에서 잠을 자는것이 일반적이었다...)
( 사랑채 내부 모습...)
[명성황후의 생애]
: 명성황후의 생가는
본래 명성황후의 6대 조부인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아버지 민유중의 묘소 관리를 위해 1687년에 지어진 묘막이다.
민유중의 직계후손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곳에서 살다가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부인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서
명성황후(민자영 - 兒名)를 낳았다.
( 안채에서 별당으로 나가는 쪽문...)
명성황후는 대대로
훌륭한 가문인 여흥 민씨로 비록 8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현숙한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손색없는 양가의 규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 별당 : 사랑채의 연장으로 다목적인 용도로 쓰여지거나 노모나 자녀의 거처로 쓰여진다...) ( 따라서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나서 8세까지 이 별당에서 지냈으리라 생각된다...)
( 별당 옆 뒷문의 고즈넉한 정경...)
고종 3년인 1866년 3월(음력),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책봉된 후 황후는 대궐안의 수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시아버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고종임금을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 무궁화가 피어있는 별당...)
( 별당 내부 모습...)
1876년 일본과의 수호통상을 시작으로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고,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내어 서구유럽과 이웃나라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배워오게 하였으며,
1882년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1884년 프랑스와 수교 이후
개신교의 포교가 허락 되었으며, 1886년 최초의 여성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의 이름을 하사하는 등
많은 외교적 노력과 업적을 이루었다.
( 명성황후 기념관...)
( 기념관에 전시된 명성황후의 아들인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어릴적 색동저고리...)
[ 기념관에 전시된 고종 어필 편액...고종이 민영소(1852~1917)의 서실에 걸게끔 하사한 친필 편액...]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개혁을 구실로 우리나라의 왕권과 국권을 침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때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 적으로써 적을 치게 함)의 뛰어난
국방 외교 전략을 강구하였다.
( 명성황후 추모비와 문예관 : 문예관은 161석 규모로 명성황후와 관련된 행사를 하는 공연장...)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교력으로
대 러시아 외교관계가 급진전을 보이자 당황한
일본은 마침내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새벽 경복궁내
건청궁(乾淸宮,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히 난자시해(亂刺弑害)하는 만행으로
4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 명성황후 생가터내의 팔각정과 연못...-1- )
( 명성황후 생가터내의 팔각정과 연못...-2- )
[왜곡된 명성황후의 생애]
: 지금까지 명성황후에 대해
사치가 심하고 시어버지인 대원군과의 정쟁만을
일삼는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 전해진 이유는 <조선근대사>를 쓴 사람이
일본인이었으며,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한데서 비롯하였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반대파 세력이나 친일파들로
하여금 중상모략토록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비하시켜 왜곡했다.
( 고종과 명성황후...)
오늘 우리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가 일본의 만행으로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숭고한 뜻을 되돌아 보면서 잘못된 역사를 올바로 잡고,
역사는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게 또 다시 되풀이 된다는 사실을 가슴깊이 간직해야 한다.
[ 감고당(感古堂) ]
[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에 있던 감고당(感古堂)이 쌍문동으로 옮겨진 뒤의 모습...]
감고당(感古堂)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운현궁 앞에 있는 집으로서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머물던 사재이며 명성황후가 간택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이 여주에 명성황후 생가 입구에 이전하여 중건 중이다.
( 명성황후 생가 입구에 이전하여 중건중인 외삼문...)
( 명성황후 생가 입구에 이전하여 중건중인 사랑채...)
( 명성황후 생가 입구에 이전하여 중건중인 중문채...)
( 명성황후 생가 입구에 이전하여 중건중인 안채...)
생가터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자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가 되시는 민유중 선생(1630~1687)의 신도비가 있었다.
( 민유중 선생 신도비...)
( 생가 바로 뒤의 황학산 산림욕장 올라가는 길...)
명성황후가 어린시절
뒷동산에 올라가 맘껏 뛰어 놀았으리라
생각되는 동산은 이제는 아무런 말도없이 찾는이들의
산림욕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필자는 비가 부슬부슬 나리는 이
오후나절 물끄러미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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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존이 잘됬습니다 깔끔하고 멋진곳입니다 꽃도 이뿌구요 감사합니다
실제 당시의 주위환경은 별루겠지요~~~후세 사람들이 잘 단장했을 겁니다~~~항상 찾아 주시어서 좋은 답글로 북돋워주시는 '귀여운 여인'이여 고맙습니다...
명성황후 ......... 하면 우선 가슴이 아려오지요. 한 시대의 회한으로 무참하게 죽어간 이 나라의 한 여인 ......... 그 영혼앞에 두손모으며 아직 직접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이렇게라도 보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열강의 각축 속에서 스러져 가는 국운의 운명속에서 아무 힘도 없이 가신이를 생각하게 됩니다...고맙습니다...설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