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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 여인들의 수난사. 還鄕女(화냥년)
화냥년은 '환향녀'에서 나온 말이고,
이는 우리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일어
났던 이 땅 여인들의 비극이다.사내들이 서로
권력 다툼이나 하고 양반 체면만 따지다가 국가를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국권을 잃으면서 생긴
이 땅 여인들의 비극이다.
먼저는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契丹族)을
평정할 때 몽골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로 관계를 갖게 된 이후,
몽골은 고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고
과다한 공물(貢物)을 요구하여 왔는데,
이 공물 중에는 많은 여자도 달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에 분개한 고려에서는 앞뒤 계산도 해보지 않고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를 암살해버렸다.
이 몽골 사신이 피살되자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고려 고종 18년부터 30여 년간
몽골의 고려 침입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니
몽골군이 처 들어올 때마다 고려여인들은
수 없이 수난을 당했다.
고려에서는 군사적으로당할 수 없으니
차라리 화평 정책을 썼다.
수많은 공물(貢物)을 바치기로 했는데
이 물목에는 여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몽골군의 위안부가되었다.
결국 고려는 몽골의 여자
나 조달하는 부마국(駙馬國)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몽골 군은 조약이외에도
수많은 고려 여인을 더 요구했다.
(수어장대)
고려에서는 할 수 없이 결혼도감(結婚都監)과
과부 처녀를 징발하는 과부처녀
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 등 특별 관청을
설치하여 여자를 징발하였고,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초기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로 보낸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는 50회 이상에 이르렀다.
몽골족을 야만족으로 보는
고려 여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녀가 부족해지자
역적의 부인이나 첩, 그리고 승려의 애인이나
딸까지 충당하는 일도 있었고,
그래도 여자가 모자라자 충렬왕 때는
온나라 안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처녀등록제를 실시하였다.
공녀가 부족하자 공녀의 나이를 내려
13~15세까지의 어린 소녀까지도
대상으로 징발하였으므로,
이 연령의 소녀를 가진 집안에서는
금혼령이 내리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써 10세가 되면 혼인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과 데릴사위 등의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고려 때 이 공녀들은 어쩌다 궁중에
들어가 시녀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 가장 출세를 한 사람이 바로
기 황후이고 그는 결국 원나라와
고려까지도 망치게 했다.
(산성 성곽)
그러나 이 여자들이 어느 정도
늙으면 새 어린 소녀들과 교체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들 덕분에 정조를
보전했으면서도 그들을 가장 괄시한 것은 역시
이기심 많은 여자들이었다.즉, 아무 남자나
상대하던 여성이니 자기 남편도 유혹
할까 미리 겁을 냈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온 공녀들은
부모형제가 있는 동네에는 들어
오지 못했다. 부모형제 조차도 가족 중에
그런 더러운 여자가 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동구 밖에서 술과 몸을 팔아
가면서 생계를 이어갔다.지나족인 명(明)나
라도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예쁜 소녀들을
골라 바치라고 요구했고,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상국이니 이를 바쳐야
만 했으며, 이들도 어느 정도
늙으면 돌아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은고향에 돌아온
여자란 뜻의 '환향녀(還鄕女)'
라는 본격적인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조 인조, 병자호란 때부터였다.
즉, 청나라는 만주족(滿洲族)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인데,
이 만주인은 고구려 또는 발해의 유민들이
많았고, 이들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족속이었다.
이들은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화북(華北)으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 한민족 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현지인을 가르쳐가며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다.
지나족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라의 태조이다.
(산성 남문)
이 청나라가 세워지기 전
만주족들은 사실 고구려나 발해의
유민들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아기 엉덩이에 푸른 점이 있는 같은 핏줄이니,
조선이 들어와 합병해 통치해주길 바랐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할 때도 수없이 신숙주, 성삼문을
만주로 보내 우리 뿌리말을 찾았던
그 만주인들이다.
이때 조선에서 그들 요구대로 말뚝 하나만
박았으면 지금 만주 땅은 우리땅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그 잘난 선비들은 상전국인
지나족 명나라가 그들을 오랑캐 야인으로
보고 있으니 우리도 그들이 비록 발해 유민이라
하더라도 오랑캐로 봐야 한다며 받아주지 않자,
그들은 조선의 국경을 침범해와
노략질을 해가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초기에 그들에게 회유 정책을
쓰려 했다가 당정의 반대에 휘말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삭탈관직까지 되었으며,
원균 같은 이는 그 야인들 목을 수 없이 많이
자른 것을 큰 전공으로 자랑 삼았다.
선조의 임진왜란이 끝이 난 다음
광해군 당시에는 명나라는 다 망해가고
있었고, 청나라의 위세는 날로 떨쳐갔다.
청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조선과 형제국이 될 것을 원했다.
상전 국가가 아닌 형제 국가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우리를
도와준 것보다 피해를 준 것이 더 많았고,
또 국가 안보를 위해서도
다 망해가는 명나라를 더 이상 상전 국가로
섬길 필요를 느끼지 않아,
지나족인 명나라와 관계를끊고 차라리
청 나라와 형제국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신하들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주었다는
의리를 핑계로 광해군을 배은망덕한
자라 하며 몰아내고
인조를 세워 자기네 마음대로 정권을
휘둘렀고, 청나라 사신이 오자
"오랑캐 주제에 어딜 오는냐"고
만나주지도 않은 채 쫓아버렸다.
정말로 호랑이 앞에 쥐새끼가 까분 격이었다.
결국 청나라 군사들은 물밀듯이 처들어왔다.
그리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버틸 대로
버티었으나 결국 수 많은 어린 아이들과
백성들이 그 혹독한 추위에 얼어죽고 굶어죽자,
인조는 한강 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으면서
인조는 청태종의 요청에 따라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대는(三拜九叩頭禮)
항복의 수욕(受辱)을 겪었다.
즉, 그렇게 앞뒤 계산도 없이 양반의 예의와
의리와 체면만 따지던 신하들이
자기네 백성을 다 죽이고 자기네 임금을
이렇게 처참하게 만들었다.
이 청나라 군사들도 군율이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남의 나라에 들어가 함부로
부녀자 강간 등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처들어온목적이 그 양반입네 하고
의리만 따지는 양반들을 골탕먹이는
일이었기 때문에 군졸에 강간령을 내렸다.
특히 그 양반들, 즉 사대부집 여자는
처녀고 부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강간을 하라는 것이었다.
(산성 성곽)
당시 하룻밤만 자고 나면
남산은 하얗게 되었다.
모두 목 매달아 죽은 여인들이다.
즉, 강간당한 여자들은 자살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숨어 나오지 않으면 남편이나 아이들을
마당에다끌어다놓고 목을 자르려 한다.
이렇게 되니 숨어 있던 아내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강간을당하면
남편은 아내의 자살은 당연한 걸로 알고,
나중에 열녀문을 신청하여 명문가임을
자랑하고 첩을 얻어 잘 먹고 잘 산다.
이 얼마나 양반들의 파렴치한 짓이며
이 얼마나 이땅 여인들의 비극인가?
사태가 이렇게 되자 결국 타협을 한다.
즉, 조선 처녀 50만 명을 청나라 군사에게
바치기로 한 것이다.
그저 만만한게 여자다.
물론 처녀들은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공출을 했다.
그들은 집에 남아 있을 엄마,
언니의 정조 보전을 위해서 울며
울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의 성적
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역시 어느
정도 늙으면 새 소녀들과 교체되어
그 일부가 돌아왔다.
그들이 고향에 돌아왔다 하여
'환향녀(還鄕女)'라 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정조를 지킨 여자들은 그들을
환향년이라고 욕을 하며 괄시를 했다.
혹시나 그 정조가 없는 더러운 년들에게
자기 남편이 갈까 걱정한 때문이었다.
그 뒤 우리말에 이 사내 저 사내를
상대하는 여자를 화냥년이라 했고,
서방질하는것을 화냥질이라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선비들은 밥만 먹으면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하는 것이 일이었고,
이조 말년 고종 때는 시아비와 며느리가
역시 권력 다툼만 하다가 일본에게 당했다.
그래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또 수 많은 이 땅의 처녀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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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때와 지금 뭐가다른가요 똑같아요 그저 당파싸움도 하나도 않변했어요~~한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