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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제단 원문보기 글쓴이: 아드숨
소공동체 사목에 앞서 쇄신해야 할 것들
들어가며
한국교회에 소공동체 사목이 도입된 지 벌써 17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 소공동체를 이끌어 온 사목자들 조차도 표본이 될 만한 모범사례 하나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실정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소공동체 사목을 위한 선결 과제를 도외시한 결과다. 교회의 구태의연한 사목문화를 먼저 쇄신하지 않고 그대로 둔데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소공동체 사목이 그 추구하는 정신에 역행하여 기존의 교직자 중심적이며 비자발적이고 획일적인 교회구조를 더욱 공고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필연적 결과다.
그런데도 대전교구도 올 해 들어 기존 사목문화의 사전 쇄신작업 없이 교구차원에서 소공동체 사목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소공동체 사목에 앞서 쇄신해야 할 다음과 같은 것들을 도외시한 소공동체 사목은 그 진정성마저 의심스러운 것으로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1. 교직자 중심주의 교회관의 쇄신
2. 평신자의 무조건적 순명의식의 쇄신
3. 계급주의적인 신앙언어의 쇄신
4. 일방적 의사소통 구조의 쇄신
5. 가난한 이들을 중심에 두는 교회로의 쇄신
1. 교직자 중심주의 교회관의 쇄신
소공동체 사목을 한다면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 이론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 그렇지 못한 사목자의 행동을 너무 자주 목격한다. 소공동체의 주요 봉사자로 겪었던 한 가지 경험담이다.
새로 부임한 사목자가 부임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사목회 모 분과장에게 지시하여 “소공동체 기획팀”을 구성토록 한 일이 있다. 당시 건재하고 있던 소공동체 주요봉사자들의 의견 청취 없이 일방적으로 한 일이다.
당시 저는 직책상 소공동체와 관련하여 사목자가 그 의견을 구해야 할 분명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새로운 소공동체 관련 조직을 신설하는 중요한 일을 합의는커녕 협의나 의견 청취 과정도 없이 사목자로서의 결정권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보아야 했다.
이 일은 평신자와 수도자 그리고 사목자가 함께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합의적으로 일을 결정하며 협동하여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자는 소공동체 사목의 기본이론과 완전 배치된 결정이었다.
구태의연한 교직자중심주의 교회관의 극치였다. 소공동체 사목이란 실상 교직자가 짜놓은 각본대로 평신자들에게 연극을 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목자인 자신은 결정권자이므로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선포하면 되고 사목자가 한번 결정한 것은 번복할 수 없다는 남루한 권위주의 그것을 다름 아닌 소공동체를 사목지표로 내건 교회의 사목자에게서 보는 것, 그리고 이런 사목자의 이치에 맞지 않는 전제 군주적 행태에 제동을 걸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굴종적이며 무조건적 순명의식에 빠져있는 영혼 없는 평신자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것, 또 사리에 맞지 않아 “아니오 할 것에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봉건시대에 가있는 착각이 들었다.
인간인 우리는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식을 늘 상 비난하고 꾸짖으며 살아간다. 잘하라고 그렇게 한다. 관심이 없으면 그러지 않는다.
사제도 인간이다. 하느님 앞에 턱없이 부족하고 초라한 인간이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비판을 받을 수도 있고 비판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며 어떤 일이 잘 안되면 하느님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경우도 많다.
욥을 비롯한 여러 성인들도 하느님을 비난한 적도 많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을 많이 했다. 따라서 사제를 비판하는 말만 하면 죄인인양 취급하는 잘못된 풍토는 전형적인 교직자 중심주의 교회관의 아주 잘못된 산물이다. 교회쇄신의 커다란 장애물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습이다.
평신자 신학자 민경석 박사는 “한국 교회처럼 모든 실권이 사목자들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사목자들의 쇄신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하고 이제민 신부는 “역사적으로 교직자중심주의의 교회가 형성되고 평신자의 무능력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평신자 신학자 황종렬씨도 "사제의 권위주의가 평신자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신앙 실천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2000년 모 연구소의 “수도자들의 눈에 비친 교직자 상”이라는 조사를 보면, 사제들의 종합적인 인상이 독불장군(46.6%), 행정가(27.9%)로 비춰지고 있다. 거기다가 정신적인 스승(7%), 사목자(19%)로 보고 느끼는 정서는 아주 적은 수치다.
또 청빈생활을 소홀히 한다(63.9%), 소외계층에 관심이 적다(81.4%), 물질생활은 상류(41%) 또는 중상류(54.3%)라고 답변했다. 위와 같은 많은 정황들은 사제직 쇄신의 긴박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제직 쇄신을 위한 어떠한 징후도 없다. 따라서 교직자 중심주의 교회관을 쇄신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본다.
첫째, 교회 내 사목 이외의 분야 즉, 행정과 재정분야 등의 사목자의 통제와 간섭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정의 수입과 지출의 투명성과 사목자의 독단적 재정집행을 견제하고 감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현재의 사목회 재정분과위원회보다 권한이 한층 강화된 재정위원회를 두고 사목자의 교회재정의 독단적 사용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
한걸음 더나가 사목자는 교회에서 사목만 전담하게 하고 교회재정과 행정의 결제라인에서 손을 떼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교직자중심주의 교회관은 점차 약화되고 교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자가 진정으로 함께 한 하느님 안에서 평등한 존재로 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둘째, 현재의 본당 사제가 본당의 사제관에 기숙하는 제도를 지구 이상의 단위로 사제 공동 기숙사를 만들어 생활하게 하여야 한다.
이는 사제의 독불장군적 성격을 선후배 사제들이 함께 생활하게 하여 교정하게 하고 재정지출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또 현재의 중류층 이상인 사제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에 영적 가난의 참맛을 맛보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현재 본당의 사제들은 너무 안락한 생활에 젖어 있다. 사제와 어울리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 속에 어렵고 소외받으며 사는 이들이 단 1%라도 있어도 이런 말 하지 않는다.
소공동체는 작고 가난하며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그 중심에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먼저 사목자부터 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모든 신자가 마찬가지지만 특히 사제는 예수님을 닮아 세상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다. 더욱더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가난해질수록 예수님을 닮은 사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존경은 덤으로 절로 받게 될 것이다.
셋째, 사목자들이 사목자와 평신자들의 평등성을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인정하도록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사목자들은 평신자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책임을 행사하려고 하였을 때 그것을 고무하고 격려해야 하고 평신자들에게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와 설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자도 사목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 일을 할 수 있도록 일부 교회 중요 직책을 평신자에게도 할애해야 한다.
미국 모 교구의 경우 사무처장이 평신자 그것도 여성이다. 본보기로 대전교구의 경우도 사목국장은 몰라도 사무처장이나 홍보국장 중 한자리는 평신자에게 개방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도 평신자의 위상이 일시에 업그레드 되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리는 꼭 사제라야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넷째, 본당, 교구 또는 전국 차원에서 순명만을 강조하는 그런 교육이 아니고 평신자들의 의식을 일깨워주고 이들의 책임과 권리 행사에 필요한 성숙한 평신자 교육을 해야 한다.
순명을 강조하는 피정의 기회는 많아도 평신자들의 평등성을 깨우쳐주고 이들로 하여금 성숙하고 자율적인 신앙을 갖게 하는 넓고 수준 있는 교육의 기회가 거의 전무한 것은 큰 문제다.
더 나아가 사제양성과정에 준하는 교육과정으로 평신자 지도자를 육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교구 내 주요기관과 단체 등에 기용해야 한다. 소공동체 사목을 한다면서 소공동체를 전문으로 배운 평신자 지도자가 교구에 단 한명도 없는 현실은 소공동체 사목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교구 소공동체 핵심 지도자의 적어도 반수 이상은 평신자가 되어야 한다. 소공동체 전국모임에 가보면 10여 명 중 기껏해야 2명 정도가 평신도 지도자도 아닌 강사로 온다. 이것은 문제이다.
이제부터라도 적어도 신학생 1인에 평신자 최소 2인 이상으로 신학생들과 질적으로 동등한 교육을 신학생들과 같은 재정지원방식으로 평신자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
말로만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자의 하느님 안의 한 형제성을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끝으로, 먼저 교직자들의 권위주의적인 의식의 오염원은 신학교 교육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
교의 신학적으로는 평신자의 위상을 제고하는 그럴듯한 이론을 배우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사제와 평신자와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설정하고 신부는 장교, 신자는 졸병 정도로 교육시키는 경향이 농후한 현재의 교수진과 커리큘럼 등은 개선해야 한다.
신학교 교육과정이 체험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 “소공동체학”이나 “평신자나 수도자와의 관계학”도 있어야 하고,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몸에 배게 할 수 있는 전인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확충될 필요가 있다. 또 영성교육 못지않게 예절교육도 심도 있게 해야 한다.
차동엽 신부의 말처럼 폐쇄적이고 봉쇄적인 신학교 운영 보다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의 어울림 가운데 인격을 닦고 영성을 쌓을 수 있는 열린 교육이 필요하다.
신학교가 티 없이 해맑고 순수한 성품을 가진 성소가 뚜렷한 기품이 있는 학생까지도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권위주의자로 만들어 낸다면 절망이다.
신자들은 권위주위적인 사제, 호화스러운 것만을 쫓는 사제, 시대의 징표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제, 평신자를 업신여기는 사제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평신자가 바라는 사제직의 모습은 여전히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진솔한 희생의 삶, 시대의 징표를 인지하고 전파하는 역할, 평신자들을 군대조직의 부하들처럼 여기지 않고 동등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대하는 태도, 돈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장상에게 아부하지 않는 정신, 기도와 묵상을 게을리 않는 영성의 삶, 또한 성무집행을 정성껏 하는 사목생활 등을 요구하고 있다.
단언하건만 교직자들의 쇄신 없이 한국교회의 발전과 소공동체 사목의 성공은 결코 없을 것이다.
2. 평신자의 무조건적 순명의식의 쇄신
소공동체 사목에 대한 설문조사 안건을 갖고 회의 한 때의 일이다. 여성 소공동체장으로부터 기획팀에서 사전에 작성된 설문지를 검토해 달라고 하여 검토 후 수정안을 문건으로 회의에 앞서 제출했다.
하지만 이 수정안은 읽어 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되었다. 설문지의 보완을 위해 조사 시기를 좀 미룬다고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님을, 기획팀에서 작성해 온 문건은 소공동체 임원으로서 검토하고 수정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임을 항변 했지만 회의 참석자 누구도 이 항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제의 독단에 농락되었다.
글자 한자 수정 없이 기획팀 안 그대로 통과되어 여성 소공동체 구역장, 반장들만을 대상으로 설문이 실시된 것이다. 당시 회의 참석자중 사제를 빼고 저만 남성 소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라서 그랬는지 남성 소공동체에 대한 설문은 다음에 따로 준비하여 하기로 하는 마치 남녀 소공동체를 구분 짖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는 신자들의 필요보다는 본인의 필요에 의해 만든 소공동체 기획팀을 사목자가 자신의 고집을 무리하게 적용하다 스스로 그것을 ‘본당’차원이 아닌 ‘여성’ 소공동체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웃지 못 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당시 사제의 이런 행동은 분명히 소공동체 사목은 자기가 주관자이고 소공동체 임원은 한낮 그 들러리로 여기고 있다고 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제의 소공동체에서의 평신자의 중요 역할을 무시하는 행동에 당시 회의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장구를 치며 사제와 평신자가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로 함께 의견을 교환하고 토의해서 결정한 사항을 함께 실천하는 소공동체의 기본정신을 지키려는 평신자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이런 체험은 지금의 사제와 평신자와 함께 소공동체 사목을 한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는 심한 회의를 불러왔다.
따라서 교직자중심주의 교회관과 함께 평신자의 무조건적 순명의식도 쇄신되어야 그 기반 위에서 진정한 소공동체 사목이 시작될 수 있다.
아무리 독재적인 사목자라도 신자들이 의식과 책임을 가지고 교회 일에 때로는 제안 하고 때로는 항의도 한다면 감히 독재를 할 수 없다.
훌륭한 사목자를 격려할 수 있는 것도 실망시키는 것도, 그렇지 못한 사목자들의 공권남용을 방지하는 것도 조장하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 자체를 살아있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도 죽은 공동체로 만드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평신자들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평신자의 자의식 함양을 위한 기초적인 사항에 대해 살펴본다.
가) 평등 의식 함양
평신자 쇄신에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 앞에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직분이나 기능의 상이성에 관계없이 품위와 사명의 평등성을 누린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 직분이나 역할의 차이는 있어도 봉건주의적 계급의 차이는 있을 수 없으며 상호 존중은 있어도 어느 특정한 직분에 대한 신격화나 우상화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신격화나 계급주의적 관행이나 사고는 교회 안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사제서품이나 수도 서원을 하였다고 평신자보다 더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교회 안에서의 새로운 역과 직분을 받는 것뿐이다.
그동안 평신자들은 '교직자'들보다 낮고 비천한 존재로 스스로를 평가해 왔다. 그 결과 교회 내의 모든 결정과 책임 그리고 권한은 사목자들에게 집중 되었고 평신자들은 완전히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평신자들은 오랫동안 교회 내의 교직자중심주의 문화에 젖어서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비하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과소평가하는데 익숙하여 왔다.
그래서 평등사상이 비록 성경의 가르침이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해도 많은 평신자들은 그것을 오히려 이단인 듯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쇄신은 하느님 백성의 절대 다수인 평신자들의 쇄신 없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평신자들의 쇄신은 품위와 책임의 평등성에 대한 의식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평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사목자들과 함께 '평등한' 품위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사명 완수에 있어서도 사목자들에 못지않은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목자들 앞에 우리를 비하하는 것은 봉건주의적 비굴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적 겸손은 아니다.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평등한 품위와 책임을 의식할 줄 아는 성숙한 평신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목자들의 '동반자'들이지 '종'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동업자"들이다.
나) 적극적인 책임과 권리의 행사
평신자들의 평등의식은 공동체생활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권리 행사와 책임 완수로써 실천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목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평신자는 사목자와 함께 공동체에 똑같이 책임을 지는 주인이요 주체다. "우리가 교회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모든 것을 사목자에게 일임하고 무슨 일을 하려면 사목자의 눈치만 살피는 타율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는 하루속히 척결 돼야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목자들에게 평신자들의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촉진할 것, 이들의 제안과 권고를 기쁘게 받아들일 것,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신뢰를 가지고 이들에게 직분을 맡길 것, 이들에게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여지를 줄 것, 이들의 고유한 은사, 경험 그리고 자격을 인정하고 교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이들의 시민적 자유를 철저하게 존중할 것 등을 강조하고, 또 평신자도들에게는 사목자들에게 자신들의 의견과 희망 사항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회법도 이러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명문화하여 제 212조에서 교회당국자들과 다른 신자들에게 교회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제 215조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임을 만들고 회의를 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전국적 차원에서 많은 평신자들의 자율적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평신자들이 발간하는 다수의 주간지들도 교회 내의 여론 조성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평신자들이 사제나 주교들을 비판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교들도 그러한 비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러한 비판을 교구 신문에 싣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도 평신자들의 자발적 권리 행사와 책임 완수를 고무하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통하여 평신자들을 활성화하는 분위기와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풍토 조성에 평신자들 스스로가 앞장서야 한다.
모든 일에 본당 신부의 동의나 허락에 의존하는 의타적이고 유아적인 사고방식을 청산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제안하고 협력하며 행동하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야한다.
다) 지식의 습득
교회 내에서 평신자들이 사목자들과 평등하게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려면 그 책임과 권리에 상응하는 지식을 습득하여야 한다.
평신자들이 사목자들과 평등하게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려면 교회생활에 필요한 지식부터 습득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권리 행사만이 공동체생활에 대한 책임 있는 참여를 할 수 있다.
그 동안 교회에서 사목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것은 신품성사에 대한 권위주의적 해석에도 기인한 바 있지만 교회에 대한 지식을 사목자들이 독점하고 평신자들에게는 문답 암기식의 최소한의 지식만을 전달하였던 것에도 크게 기인한다.
지식이 곧 힘이기 때문에 지식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과 같다. 이제는 사목자들에 의한 지식의 독점을 불평할 때가 지났다. 자율적인 평신자들은 누가 가르쳐주기 전에 스스로 배우려 노력해야 한다.
교회 정기 간행물에서부터 공의회 문헌, 교회법, 보편 교리서에 이르기까지 교회생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는데 필요한 책들이 한글로 번역되고 쓰여 지고 있다. 이제 기회가 없다고 탓할 시기는 지났다.
필요한 것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이다. 배울 것은 너무나 많다.
라) 성숙한 신앙의 함양
평신도 쇄신의 필수 조건으로 성숙한 신앙의 함양을 들지 않을 수 없다.
(1) 신앙은 외형적, 형식주의적 것이 아니다. 본명을 부르는 것, 묵주기도의 횟수 또 집안에 신부, 수녀가 많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2) 신앙은 폐쇄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 '끼리끼리'만의 신앙으로 만족하고 '우리' 본당, '우리' 교구, '우리' 교회에만 집착하고 '남'의 교회나 세상일에는 무관심한 것이 아니다.
제가 본당의 쇄신되어야 할 모습들을 교구청 홈페이지에 게재하자 사목회 임원인 친구가 찾아와 교회를 비판하고 신부를 비판해도 좋은데 우리 본당 이름은 빼달라는 말을 했다. 우리 본당을 비판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3) 신앙은 유아적인 것이 아니다. 기적에만 집착하고 교회의 성사생활을 미신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4) 신앙은 의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결정을 신부나 수녀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열심한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봉사자들 중 다수는 사회에서 꽤 출세한 이들이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활동은 사소한 것도 일일이 사제나 수도자에게 물어보고 한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사제의 종처럼 지낸다. 평신자에게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해 주어야 한다는 명분을 걸고 하는 소공동체 봉사자들도 이런 이들이 대부분이다.
(5) 신앙은 말과 기도만의 신앙이 아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입만의 신앙이다. 그런 신앙은 사회에서 크게 나쁜 짓을 하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소공동체에서 단골로 듣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죄를 안 지을 수 없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는 더 그렇다. 할 수 없다.” 이 말은 신행일치를 부르짖는 주님의 말씀과 소공동체의 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이다.
(6) 신앙은 교회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치 열심한 신앙인의 자세로 착각하면 안 된다. 이는 교회 자체가 사회와 세상의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3. 계급주의적인 신앙언어의 쇄신
가) 신앙언어의 이해
신앙언어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의식과 실천인 ‘신앙’을 표현하는 한 종교가 가진 경전과 의례 및 공동체의 제도와 법을 총망라하여 일컫는 말이다.
성경은 물론 교회의 의례 혹은 전례도 그것이 발생할 당시의 문화적 체계와 제약 안에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신앙언어는 시대적 제한을 받는 것으로 과거의 신앙언어는 오늘의 언어로 쇄신하지 않으면 문화적 차이로 그 언어가 지닌 본래적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
인간은 체험한 것을 고유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하면서 인식하고 언어화한다. 현대인에게는 그들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이 있다.
신앙공동체가 전달하는 과거의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공유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새롭게 해석되지 않고 전달된 과거의 언어는 사람들의 이해를 외면한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 독백이 되고 말 뿐이다.
믿음은 경전이 전하는 언어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이미 체험한 바를 전승된 신앙언어에 비추어 새롭게 체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믿음은 전승된 신앙언어로 말미암아 사람이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새로운 체험을 하면서 체험들의 전승, 곧 신앙의 역사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행위다.
계시는 어떤 교리가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 안에 당신 스스로를 전달하시는 하느님의 자유스런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개입하신 사실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체험하게 하였고 그 체험들은 해석되어 메시지 형태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거 한 시대의 해석에 안주하여 같은 언어만 반복하면서 순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자세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신앙 체험의 역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성경, 교리 및 전례가 모두 전달하는 메시지를 지녔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은혜로운 구원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나) 계급주의적인 신앙언어의 실태
중세 유럽 사회는 위계적 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였고 교회는 그 사회의 기득권 집단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언어에는 지금도 그 시대의 유적인 직무자들에 대한 위계질서 신분 개념을 비롯하여 중세적 존칭들과 복장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실태에 대해 간략히 짚어 본다.
(1) 교회의 조직과 제도
현재 교회의 조직과 제도는 대부분 과거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 발생하여 정착한 것이다. 직무자의 선택 방식이나 종신 직무 개념 그리고 직무를 신분 혹은 품위와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
직무에 임하는 사람의 실효성을 외면하고 신분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과거의 제도와 관행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오늘과 같은 다원사회에서 구시대의 제도와 관행을 절대시하면서 그 구성원들의 참여는 차단하고 집단의 실효성은 저하시키고 있다.
봉건사회의 수직적 조직에서는 명령과 복종이 그 조직을 움직였다. 그런데 현대는 많은 정보들이 수평적으로 흐르는 사회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그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고 구성원들의 실효성도 높인다.
따라서 교회도 지각 있는 현대인이 교회 안에서 무기력화 되지 않고 창의력과 자발성을 발휘하고 구성원들 모두가 자유롭게 기여할 수 있도록 쇄신되어야 한다.
직무에 임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자들에게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신앙언어를 고수하지 말고 신자들이 각자가 지닌 능력과 정보로써 기여하고 모두가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한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공감대와 교회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공감대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
교회가 아직도 고수하는 유럽 중세적 의사소통 방식과 조직의 구조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현대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언어의 보존과 전파라는 본연의 사명을 다 할 수 없다.
주일미사 의무, 금육일과 금식일의 관행, 고해성사 의무, 일방적으로 길게 거행되는 혼배미사와 장례미사, 쉬고 있는 신자들에 대한 냉담자 처리와 그들에 대한 대책, 혼배조당의 문제 등 교회가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이런 실천들도 과거 어느 한 시기에 실효성 있는 것들이다.
그 지역 주민 모두가 그리스도인이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삶에 대한 정보가 보잘것없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의미를 지닌 관행들이다.
과거 그리스도 문화권에서 발생한 이런 언어와 실천들은 쇄신되어야 한다. 과거 교회의 관행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봉인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 사회는 신분에 따라 복장을 달리하던 시대였다. 복장을 보면 귀족인지 수도자인지 또 평민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신분에 따라 복장을 달리하지 않는다. 기능에 따라 복장을 달리한다.
작업할 때 작업복 등산할 때 등산복 등, 하는 일이 요구하는 실효성을 위해 복장을 달리한다. 복장으로 신분의 차이를 과시하는 사람들에게 현대인은 거부감을 느끼고 그것은 삶에서의 소외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소외는 곧 인간 실효성의 저하로 연결된다.
교직자의 직책을 일컫는 용어에 있어서도 교황, 성직자 등 계급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성직자’라는 호칭은 성속 이원론적 시각에서 성스러운 특정인에게만 부여한 것 같은 인상을 짙게 풍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넓은 의미에서 주님이 주신 성스러운 직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성직자라는 호칭은 교회 안에서 직무를 맡은 자라는 뜻을 가진 ‘교직자’(敎職者)와 같은 호칭으로 바꿔야 한다.
현대세계에서 ‘황제’라는 단어는 역사 책안에 남아 있을 뿐이다. 현 교황은 자신을 ‘종의 종’이라 스스로 말했다. 그런데 아직도 중세 봉건적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교황(敎會의 皇帝)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교황성하(敎皇聖下)’라고 하고 있다.
차라리 ‘교종’(敎從)과 같은 교회의 가장 낮은 위치에서 일하는 보잘 것 없는 종이라는 뜻의 호칭을 찾아 바꿔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복음의 정신을 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호칭이 되어 현대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2) 교도권
초기 교회가 교회 안의 직무를 지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것은 ‘봉사직무’(ministerium)라는 단어였다. 그러나 16세기 교회분열 이후 ‘교도권’(magisterium)이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봉사직무’는 섬기는 작은 자(mini)의 직무를 의미하는 반면 교도권은 가르치는 권한을 가진 큰 인물(magis)의 직무를 뜻한다. 현재 신앙 언어가 위기를 겪는 것은 바로 이 교도권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사목지침을 내리려 하는 데에도 그 책임이 있다.
제도교회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목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 실존의 여건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여건에서 발생하는 현대인의 ‘인식의 망’이다. 교회는 그 ‘인식의 망’에서 이해되는 언어와 실천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 안의 기득권자들은 신앙 언어가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여건과는 무관하다고 흔히 생각한다.
신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보편성을 지니지만 한 시대의 교회가 만들어서 사용하던 언어들 곧 교리, 교회의 조직, 및 실천들 그 자체를 보편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강요하는 것은 신앙언어의 역사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영원한 신앙이지만 신앙언어는 인간의 것이기에 시대에 따라 다른 언어로 표현된다.
영원한 신앙은 역사성을 지닌 언어로 표현되고 전달된다. 바로 이 언어의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가 오늘 교회 기득권자들의 말을 여러 차원에서 독백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잘못된 확신이 신앙언어가 겪는 위기의 원인이다.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 안에 나타나는 논리, 표상, 신화, 개념 등은 모두 과거 어느 한 시대의 사회에서 통용되던 것들이다.
그런 언어들과 그리스도 신앙을 혼동하여 그 언어들만이 그리스도 신앙이라고 확신하는 그들이다. 그들의 신앙 공동체는 결국 내세와 현세를 위한 기복적 종교 집단이나 하느님을 후광으로 한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3) 순종
중세 봉건 시대 신분 서열은 인간의 실효성을 말하는 서열이었다. 상위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몽매한 하위자의 실효성을 제고하는 일이었다.
상위자는 하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졌기에 하느님의 뜻은 상위자를 통하여 전달된다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단순하고 수직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발생한 순종을 오늘과 같은 복합적이고 횡적인 문화권에서도 강요하면 현대인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제도 교회가 사회를 보는 눈은 아직도 유럽 중세적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순종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적 덕목인 양 제시된 나머지 그리스도 신앙의 메시지가 인간 각자에게 요구하는 자유롭고 다양한 응답과 공동체를 위한 기여라는 풍요로움은 사라지고 지극히 따분한 신앙 공동체로 만들고 있다.
성경은 인간에게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다.
순종을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고 전통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유럽 중세적 ‘인식의 망’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 시대착오적 자세가 교회 안에 우민정책을 장려하고 있다.
그리스도적 순종은 하느님에게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상위에 있는 인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면 인간의 실효성을 떨어트리는 순종이라는 점에서 현대인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실효성 없는 사람이 실효성을 지닌 사람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비극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과 같은 복합 사회에서는 상위자가 정보를 독점하고 있지도 않고 신분 서열 따라 실효성이 정해지지도 않는다.
오늘의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순종은 인간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저하시키고 교회 안에 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들고 있다.
과거의 신앙언어 안에 있는 순종을 전가의 보도인 양 휘두르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다) 쇄신되어야 할 신앙 언어
현대사회는 형이상학적이며 이원론적이고 수직적 사고가 지배하는 중세 봉건적 사회가 아니다. 평등한 세상이다. 따라서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에는 과거와 같이 기적과 신비와 권위가 곧 구원이라는 등식이 없다.
현대인들은 자유, 평등, 평화, 다원성, 섬김, 봉사, 나눔 등을 인류애의 지고한 형태로 공감한다.
인간 삶에 대한 근본적 신뢰, 타인을 위한 투신, 선을 행하고 악을 거슬러 싸워야 하는 마음 등과 연결된 언어를 구원으로 쉽게 이해한다. 따라서 현대인의 이런 ‘인식의 망’을 존중하면서 신앙언어를 새롭게 쇄신해야 한다.
오늘의 신앙언어가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주는 것인 양 말할 때 신앙이 인간 삶에서 발생한 원리들을 마치 하느님을 동원하여 성취하는 수단인 것처럼 제시하게 된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면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언어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원리들을 외면한 것이다.
예수는 율법을 매개로 인과응보를 주장하던 자들에 맞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입신양명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섬김의 실천을, 부귀영화를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작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교회가 전달하는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자기 ‘인식의 망’을 통해서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을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이 자기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생명과 삶의 신비에 접근하여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오늘의 신앙언어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응답을 오늘의 인간 체험 안에 나타나는 인간적 문제들과 연결시켜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보는 의미와 그들이 하는 응답에 해방적 성격을 부여하여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보게 해야 한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이미 터득한 의미와 응답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해석되어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가치로 살아있게 도와야 한다.
신앙의 이름으로 현세적 문화를 거부하는 것은 과거의 언어에 머물겠다는 근본주의적 발상이다. 과거 한 사회를 지배하던 철학과 그 관념들로 만들어진 교리와 복음 선포의 언어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
현대는 모든 이가 신속하게 다양한 정보를 얻어 공유하는 세상이다.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강압적으로 군림하는 권위주의는 설 땅을 잃었다.
교회는 구원을 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평신자와 수도자 그리고 교직자는 교회 안에서 서로가 하는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느님을 향해 함께 길을 가는 벗이고 형제들인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과거 유럽 중세 사회를 지배하던 이념을 아직도 지속하고 있기에 현대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와 복음 선포가 위기를 겪고 있다.
위계질서에 대한 교회의 집착은 교회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정보의 흐름을 차단하여 결정권자가 정보를 받지 못하게 만들고 부족한 정보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 결정권자들이 직권을 행사하여 비효율적인 신앙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
위계질서의 하부 구조에 속한 사람들은 순종이 강요된 나머지 지식인들과 젊은이를 비롯한 일부 신앙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공동체의 일을 방관하는 실효성 없는 무리가 되어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교회 안의 기득권층이 된 이들은 복음서들이 말하는 섬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과거의 언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감수성에 맞게 그 섬김을 새롭게 표현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의 미래가 교회의 미래다.
4. 일방적 의사소통 구조의 쇄신
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육화하신 하느님
대화는 대화자간의 나이, 성별, 사회적 위치 등의 조건들에 얽매이지 않고 "상호 수평적"이어야 한다.
신앙도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듣고 응답하는 수평적 대화관계가 형성되며 이뤄진다. 예수님은 인간과 대화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신적 지위를 버리고 낮은 자세를 취하신 하느님의 육화된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 바로 교회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이 비천한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관계를 형성했듯이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 열린 대화의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교회는 대화 불통의 구조가 고착화되어 결국 교회 안의 ‘무수한 창조적 보물들’을 동면의 상태에 머물게 하고 있다. 합리성과 설득력에 의한 수평적 대화보다는 수직적 권위를 내세운 일방적 자기전달의 언어가 훨씬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허약한 의사소통 구조는 평신도의 자발적 참여 결여, 교회 구성원간의 형제적 친교와 관계의 표리부동 그리고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 등의 문제와도 직결되고 있다.
교회를 더 은혜롭게 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대화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나) 소공동체 사목의 목적과 현실구조의 괴리
제3차 소공동체 전국모임 최종 선언문에 따르면 교회는 소공동체 사목을 통해 제2차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와 아시파의 ‘친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지향하고 또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이는 의사소통이 경직된 피라미드식 교회, 교직자의 일방적인 직권에 따라 유지되는 교회,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존의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진 구조이므로 거부하고 회개하고 섬기는 교회, 신자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으로 유지되고 성장하는 교회,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함께 참여하고 나누는 새로운 교회를 이루는 것이 소공동체 사목의 목적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본당 사목자의 사목열성에 따라 소공동체의 성패가 좌우되고 그의 사목구상에 따라 본당조직이 구성되거나 와해되는 등 그 본래 목적과는 달리 여전히 중앙집권적이고 교직자 중심적으로 소공동체 사목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본당에서도 소공동체 사목을 이것이 앞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이니 믿고 따르라는 상명하달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소공동체는 스스로 활동하기보다는 사목자가 시키는 일이나 하는 잘 조직된 군대식 명령을 수행하는 교회의 하부조직이 되어 그 목적에 정면배치 되는 이상한 기구로 고착화되고 있다.
스스로 기쁨에 넘쳐 이웃들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 ‘소공동체 활성화’라는 피켓을 붙여놓고 참석을 무조건 독려하는 구역장. 반장 등의 성화에 못 이겨 이루어지는 소공동체는 그 이상을 실현하기보다 신자들의 부담만을 가중시키고 있다.
다) 다양한 카리스마를 양성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목구조 구축
초대 교회는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과 그것을 통한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다양한 카리스마를 충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출현한 다양한 카리스마를 폭넓게 수용했다. 그러다 교직자중심주의 교회관이 확립되면서 신자들의 다양한 카리스마는 교도권의 크고 작은 제재를 받으면서 자취를 감추고 중앙집권화 되 가르치고 처벌하는 교도권의 존재만 인정되었다.
자연히 신자들의 다양한 카리스마는 교도권에 의해서 말살되다시피 되고 신자들은 수동적인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신자들의 수동적 처신을 강요하는 교회의 이러한 사목 관행은 일종의 문화적 구조로 자리 잡아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제는 신자들의 다양한 카리스마를 양성하여 피동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교회 삶을 통하여 자신의 카리스마를 공동체를 위하여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카리스마는 기존의 제도와 사목관행을 종종 넘나드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신자들의 다양한 카리스마를 충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출현한 다양한 카리스마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도록 현재의 사목구조와 문화를 신자들의 자율성과 자발성이 최대한 살아나는 구조로 쇄신해야 한다.
현재의 사목구조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쇄신시키지 않고는 신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제고시킬 수는 결코 없다.
라) 반모임의 일률적 소공동체화 시도의 폐기
공동체는 상호 인격적인 수락에 근거하여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유대를 이루는 모임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구성원들은 연대 의식을 갖고 동질성, 개방성, 친교, 사랑을 느끼며 연합하고 다른 구성원을 위하는 마음이 일반 단체와 달리 깊이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 본당에서는 이러한 공동체의 의미를 무시한 채 거주지 중심으로 나누어 반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소공동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소공동체는 그 주체가 되는 신자들의 환경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공동체의식의 공유는 차치하고 모두 모일 수 있는 시간문제, 다양한 계층으로 인한 공통 흥미 유발 문제, 자발성의 결여로 인한 적극성의 부족문제 등 원초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신앙과 거주지만 같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이들을 일방적으로 묶어 공동체를 이루라는 것은 획일주의적인 발상이다. 공동체를 이루기는커녕 모두가 함께 모이는 것조차 어렵다.
또 모인다 해도 공동체의식을 갖고 마음을 열고 생활과 신앙을 나누고 삶으로 신앙을 실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듯 소공동체 사목은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지속하고 되고 있는 이유는 교직자들이 소공동체를 단지 교직자 중심 사목구조의 수직적 하부구조를 이루는 보조적 수단쯤으로 여기고 그 구조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이용하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자인하고 현재의 반모임을 소공동체화하려는 시도는 폐기하고 보다 진실성 있고 현실성 있는 소공동체 사목을 모색해야 한다.
마) 현실성 있는 소공동체 사목의 모색
공동체가 이루어지려면 그 구성방식의 자발성여부와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또 현대인들은 한 동네에 살더라도 대부분 서로 같은 삶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지금과 같은 반모임은 열린 소통구조를 위한 교회의 단위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소공동체는 그 긴요성을 알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같은 삶의 문제를 안고 사는 지, 비슷한 연령인지, 비슷한 환경인지, 신앙 안에서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지 등 신자 스스로 자율적 판단에 의해 다양한 선택을 통하여 만들고 가꾸어 나가게 해야 한다.
한마디로 소공동체는 구역․반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도직 운동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공동 육아, 협동 교육, 대안 교육, 생태적 삶 등을 고민하는 이웃들이 한데 모여 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빈민사목 선교본당과 가톨릭농민회 생산 공동체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서로 가까운 곳에 살 뿐만 아니라 같은 삶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울러 남미에서 신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기초교회 공동체가 구성되고 성장했듯이 신자들의 필요에 의해 탄생하는 소공동체에 대한 연구와 논의도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 실정에 맞는 소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이후로 반모임에 나가지 않고 있다. 지금의 반모임에는 소공동체 이론에 맞갖은 정신도 없고 실천도 없어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데 이웃 신자들은 저만 보면 무작정 반모임에 나오라고 한다.
나가지 않는 이유를 말해 주면 자기도 나가고 싶지 않아도 희생정신을 발휘해서 나간다며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나오라고 한다. 그런 무의미한 희생정신이 교회쇄신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줄도 모르면서 말이다.
바) 조직 체계 구성과 운영의 쇄신
아무리 훌륭하고 이상적인 교회상을 제시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담아낼 그릇이 없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소화하고 실현할 수 있는 사목구조가 필요하다. 이는 교회의 의견수렴과 의사결정구조에 참여하는 탄력적이고 유연한 소통구조와도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
교구는 팀 사목을 통한 수평적 참여 구조의 확립, 평신도. 수도자. 사제들이 대표가 되는 교구 사목평의회의 활성화 등을 통해 일방적 의사 전달 기구에서 벗어나 친교와 사목적 논의가 살아 있는 구조로 개편하여 사목현장의 의제들이 교구 사목의 중심 현안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본당은 아래로부터 자유롭게 선출한 대표들이 본당의 사목기구에 초대되어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백성의 다양한 의견이 수렴되고 본당의 사목 방안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는 몇 가지 방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1) 아래로부터의 리더십 형성
현재 각 단체의 장은 회원들이 선출해서 주임 사제의 인준을 받는 절차를 거친다.
반장은 반원들이 뽑는 게 원칙인데 맡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주임 사제가 강제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다. 구역장도 마찬가지다. 분과위원회의 임원은 거의 대부분 사목평의회 회장의 추천을 받아서 주임 사제가 임명한다.
즉 현재 본당 리더십은 상향식과 하향식이 혼재되어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현실적으로 신자들이 활동 참여와 직책 수행을 기피하는 경향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아래로부터의 리더십 형성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활한 의사소통과 의사 결정을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리더십 형성을 관철시켜나가야 한다.
사목회장도 본당 총회를 통해 신자들의 의견을 들어서 선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총회제도 도입
신자 대표들의 회의체를 통해 본당 운영에 관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본당 전체와 관련된 주요한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신자들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최고 의결 기관인 총회가 필요하다.
우리 본당은 총회 자체도 없는 경우에 속하지만 총회제도가 있는 경우도 대체로 사목회나 단체에서 개별적으로 작성한 사업계획서와 예산안을 보고하는 수준의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총회제도가 의미 있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우선 총회에 신자 전체가 참석하면 좋으나 어려움이 있을 시
① 직무상 참여자(사제, 수도자),
②대표자(구역․반장․단체장․연령별, 계층별 대표자)
③ 이외에 신자들에 의해 선출된 대의원(구성 총인원의1/2, 더나가 2/3이상)제도도 두어 될수록 많은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제도화 하고 총회의 주요 안건에 대해서는 총회 전에 모든 신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반 모임에서 논의한 후 그 논의 사항을 총회에서 나누고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3)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열린 통로 마련
신자 대표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본당 사목의 안건이 결정되고 본당 총회를 연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신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신자들은 본당 운영에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멀어지고 본당과 신자들의 의사소통은 또다시 일방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신자들의 의견을 수시로 모을 수 있는 상설적인 통로로 ‘건의함’, ‘본당홈페이지’ 등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주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공개토론회나 공청회 등도 개최해야 한다.
우리 본당에도 홈페이지가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나 의견수렴의 기능은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오직 본당 행사를 홍보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정치적이거나 비판적인 글은 삭제해도 무방하다고 받아드려지는 전근대적인 낮은 의식수준 때문이다.
(4) 여럿이 함께 하는 팀 사목 도입
과거 사목은 사제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사제, 수도자, 평신자의 각 직분은 서로 고유한 위상을 갖고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사목도 함께 동반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이를 구현하는 것이 팀 사목이다. 팀 사목은 본당 사목의 운영을 책임지는 핵심을 사제 1인이 아니라 사제, 수도자, 평신도, 직원들이 팀을 이루어 분야에 맞춰 전문적으로 분담하자는 의미다.
팀 사목은 사목의 권한과 책임을 사제 혼자서 맡지 않고 사목 팀의 담당자에게 온전히 위임해야 한다.
사목 팀의 각 담당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발휘하지만 합리적인 내부 의사소통 체계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협의나 조정도 거치면서 모든 결정이 본당의 비전에 부합하도록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다.
팀 사목은 단순히 효과적으로 신자들을 관리한다든지 본당의 규모를 성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팀 사목의 팀은 본당 공동체를 구성하는 여러 기구 중 본당 운영에 대해 핵심이 되는 기구로서 다른 기구들이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나누면서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5) 반모임 중심의 의사결정 체제 구축
소공동체 사목은 교회와 신자들의 의사소통이 소공동체모임을 통해 원활히 이루어 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지금의 체제에서는 본당의 지시사항만 전달될 뿐 신자들의 의견이 교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는 반장. 구역장들의 모임이 주로 공지사항 전달이나 강의식 교육 등으로만 진행되고 사목회 각 분과에서 기획한 행사나 사업을 실행하는 조직으로 이용될 뿐 본당의 운영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체제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반모임을 소공동체화화려는 시도는 폐기하고 소공동체는 레지오와 같은 사도직 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반모임이 교회의 중심이 되도록 의사 결정 체제를 쇄신해야 한다.
반장과 구역장의 임명제를 대표성을 강화하는 선출제로 전환하고 아울러 이들이 본당 사목에 관한 주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반장회의와 구역장 회의를 체계화하고 회의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사목회는 신자들을 대표하여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조직체계라기 보다 사제의 일방적 임명으로 조직되고 활동하는 기구이므로 각분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본당 현안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자문기구로 활동해야 한다.
본당 일이 개별 반모임의 의견과 건의를 바탕으로 반장회의를 거쳐 구역장회의를 통해 수렴되어 결정되고 각 분과에서 이를 바탕으로 기획해서 실행되는 체제로 개선되어야 한다.
(6) 규정집 제정과 실천
교회에는 제대로 된 규정들이 갖추어진 경우가 없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도 일단 해보고 안 되면 중단한다. 제대로 된 규정들이 없으면 사제가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보통 국가나 기관들은 미리 법률과 규정들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시험 기간을 두고 이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을 거쳐 최종 확정한다. 이는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미리 검토하고 대비하는 과정이다.
규정들은 교회의 여러 일들을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도 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구와 본당은 규정집을 제정해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규정집을 제정하는 데 그치지 말고 각 규정들이 교구와 본당에서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감독과 지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사제가 독선적으로 교회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사) 언론의 자유 보장
몇 해 전 교회 언론에 종사하는 몇몇 사람들을 접하며 지금의 홍보일변도의 교회 언론의 현주소에 대해 말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언론인으로서의 기본자세인 비판정신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교회 홍보맨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한 것 같은 인상을 받고 실망한 적이 있다. 언론은 보도를 통해 독자들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폭 넓은 의견 교환의 장을 마련해 줌으로써 건전하고 발전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을 한다.
교회 언론도 예외일 수 없다. 아무리 교회 기관지라고 해도 언론의 기본 기능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교회는 언론이 지니는 고유한 기능을 충실히 보장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내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제대로 된 여론이 형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언론은 언론이 지니는 본질적인 기능 곧 소통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교계의 말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이 그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편집권의 독립과 취재, 보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 특히 지도자들은 교회 언론은 ‘교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교회 자체를 비판하고 교회의 이해를 손상케 할 수 있는 기사는 취급해서는 안 된다’거나 ‘아무리 객관적으로 잘못된 일이 있어도 교회 내의 것이라면 보도를 삼가야 하고 다만 교회의 선전과 찬양을 주로 해야 한다’며 ‘교회 내의 언론 자유란 교회를 위한 적극적인 자유밖에 없다’는 식의 잘못된 호교론적 교회관의 잔재부터 먼저 털어 버려야 한다.
이런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교회에도 이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해 주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은 신자들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을 느낀다.
사실 비판은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다.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비판하지 않는다. 이만한 시간과 정력을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여기에 낭비하지 않는다.
세계사뿐만 아니라 교회사의 발전에 있어서 그 강도는 저마다 달랐어도 비판만큼 큰 기여를 한 것은 없다.
한 때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신분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과 절대군주제가 거의 사라진 것도 그것들이 보여 주던 모습이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말끝마다 들먹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시대에 뒤떨어진 기존교회 모습의 비판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상을 얻어 낸 것이다.
공의회 이전에 많은 이들의 예언자적 희생을 통하여 기존 교회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왔고 그것을 수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비판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그 혜택은 지금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 대대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도 비판은 허용되어야 하고 교회언론의 주요 기능으로 이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를 통하여 교회의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건전한 여론이 수렴되어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교회내의 여론은 신자들이 갖고 있는 신념과 태도, 판단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성령의 일상적 활동의 표현인 이 같은 의견은 교회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진리를 명백하게 한다.
이것은 생활과 활동 면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더욱 충분히 그리고 더욱 정확하게 적용되기를 요구하는 그 시대의 생활과 활동에 관계되는 의견의 발표를 포함한다.
그밖에 어느 시대나 인간의 약점을 통해서 교회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남용에 대한 반발을 여론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여론이란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해 언급하는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 개인의 의견을 모으는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가견적 힘이다.
교회는 교회 내의 여론의 힘을 긍정적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
그리고 "여론이 제대로 형성되려면 우선 정보의 원천과 통로에 접근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자유가 사회 안에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일치와 발전, 33항) "알 권리에는 정보를 찾아낼 의무가 따른다."(일치와 발전, 34항)는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교회 언론이 여론을 제대로 조성하거나 반영하는 소통자 구실을 하도록 정보를 개방하고 취재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흔히 언론을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 언론은 교회 공동체의 거울이다. 교회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면, 역설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 언론이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 언론 종사자들의 각성과 함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 땅의 하느님 백성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각성과 자기 쇄신이 있어야 한다.
5. 가난한 이들을 중심에 두는 교회로의 쇄신
가) 교회의 부끄러운 현실
우리 성당 소공동체 주요봉사자가 확신에 찬 어조로 하느님과 돈은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성당활동과 기도를 열심히 하면 부자 된다며 부자 되는 기도 법을 무슨 비법이라도 되는 듯 일러준 적이 있다.
가난은 삶에 불편을 준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에서 정직을 손상시켜가며 가난을 모면하고 싶을 만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산다. 예수의 가난한 삶을 기억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비록 가난할지라도 정직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성당만 가면 가난한 것이 큰 죄로 다가온다. 성경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건만 교회는 오히려 물신숭배를 조장하는 듯하다.
소공동체 사목은 작고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중심에 둔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성당에서는 그들을 소외시키는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교무금 책정시 수입을 우선시 해 구역. 반별로 책정자 명단을 공개하거나 사제와의 직접적인 면담을 하게하는 것, 봉헌금을 바칠 때 교회수입과 집계의 편리성만을 먼저 고려하여 헌금봉투 등을 활용하지 않는 것, 또 주일과 의무축일을 정해 미사참례를 의무화 하고 있는 것, 미사시간을 천편일률적으로 정형화해 놓은 것 등 많은 것들이 그렇다.
가난한 이들일수록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이 대부분 주야나 주일과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일례로 음식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을 보면 대부분 경제적 형편이나 가정환경이 무척 열악하다.
대부분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을 하고 오후 10시 이후에나 퇴근하며 휴무는 한 달 2~3회로 그것도 가장 바쁜 주말과 주일에는 거의 쉬지도 못하며 산다.
신자였던 이들도 성당 근처에 갈 시간조차 없이 힘겹게 산다. 하지만 교회는 주일과 의무축일 미사참례를 의무화 하고 있다. 이는 하느님의 계명을 너무도 바리사이파적 시각으로 적용하여 교회가 우선적으로 보듬어야할 가난한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교회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배려하기는커녕 이들의 사정에 대한 이해조차 못하는 교회의 이런 모습은 가난한 이들에게 실망을 넘어 절망을 불러오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은 일반 국민에 비해 소득도 많고 직업도 좋다. 교회가 점점 중산층 이상에게 편안한 구조가 되어가고 있는 증거다. 사제나 수도자들도 중산층 이상의 신자들을 선호한다.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는 없어졌다. 그런데도 세상이 추구하는 힘의 논리와 경제의 우상에 빠진 현 교회의 모습은 그대로 두고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반모임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것만으로 가난한 이들을 중심에 둔다며 소공동체 사목을 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랬듯이 세상 주변부의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그들과 하나가 되려는 대화의 자세로 자신을 낮추어 자기 쇄신부터 해야 한다.
나) 가난과 가난한 이에 대한 이해
‘가난한 이’는 크게 ‘결핍으로 인한 가난한 이’와 ‘마음의 가난한 이’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자신의 인격적 성숙을 올바르게 이룩해 나가는 능력이 모자라는 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정당하게 행사하지 못하는 이,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밀려난 이 등을 뜻한다.
이 같은 이들을 만들어 내는 가난은 물신숭배로 인해 파생된 악이요 죄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들이다. 후자는 하느님께서 보화로 여겨 인간성을 높이는 가난 즉 믿는 이들의 이상이자, 기본적인 덕성을 갖춘 이를 뜻한다.
세상재물에 대한 단순한 내적 이탈에 그치지 않고 물신풍조에 의해 왜곡된 세상의 정의와 인간화를 위해 투신하는 이를 말한다. 이 같은 가난은 교회와 신자들 특히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가난한 이를 중심에 두는 교회로의 쇄신의 출발점이자 열쇠이다.
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의 신학적 기초
예수는 지상에서 가난한 자로 사셨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을 당신 사명의 첫 자리로 삼았다.
또 예수는 가장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그들에게 해주었거나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당신에게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씀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에 대한 행위를 구원과 멸망의 준거점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예수가 당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였다면 그들이 있는 곳에 곧 예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곧 그들이 선택의 우선적인 대상이라는 말을 가능케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선택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대립되지 않는다.
가난한 이를 선택한 이는 그리스도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한 것이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은 죄와 인간의 이기심의 짐을 지면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를 구현한다.
그들은 사회 불의의 희생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결과를 받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일치를 구하는 이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인간을 깊이 사랑하신 고난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이들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가난한 이를 선택한 이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과 그리스도에 대한 선택은 하나의 선택이다.
동시에 선택의 무게 중심은 후자에 있되 전자는 후자에 반드시 수반되는 선택이다.
하느님의 의지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그분의 권능과 정의의 범위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난한 이에게 특별한 선호와 사랑을 보이는 하느님의 모습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다. 하느님이 가난한 이들의 필요의 정도 때문에 그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을 보존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며 타당하다.
그리고 교회가 가난한 이들이 당하는 존엄성의 침해와 고통으로 발생한 절박한 필요들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주목하신 하느님의 관심에 초점을 두고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 그들의 고통, 억압을 선택하는 것이며, 그들의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켜 공동체의 완전한 성원으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선을 증언하는 것으로 인간적인 정의와 선을 초월하는 것이다.
라)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의 지향점
(1) 교회 쇄신과 사회 변혁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결여되고 결핍되어 있고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를 약속 받은 복음의 담당자들이다. 생각할 권리를 가졌고 생활화한 신앙을 축적할 능력을 소유한 이들이다. 사회와 교회 안에서 능동적 참여를 통해 사회와 교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역사적 위력을 소유한 예수의 가난한 이들이다.
다른 이들과 연대하여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잘못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능력과 지금의 교회를 소외받는 이들의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더욱 정의를 위하여 투신하며 교계제도와 종속의 형태가 아닌 공동체와 참여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교회로 쇄신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일하지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도 않고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도 않는 교회가 역사 속에서 베풀어 온 ‘자선’과는 전혀 다른 전망이다.
이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가난한 이들에 의해 복음화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만 가능하다.
(2) 사회 정의의 확립
교회의 사회정의활동의 신학적 기준은 하느님과 예수의 정의다. 하느님은 당신이 정의로우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의를 인간과 나누고자 하셨다. 하느님의 정의는 마음의 회개와 제도의 개선까지도 요구하셨다. 예수의 삶도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 대한 우선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으로 점철되었다.
사회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불의한 구조들은 개인적인 죄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죄에 대한 용서와 회개는 불의한 사회구조에 대한 변화의 노력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의 불의한 구조가 가난한 이를 양산하는데 일조 했다면 사회정의는 사회구조의 개선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의 개선을 통한 사회정의의 실현은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제도적 전향을 불러일으키는 실천적 투신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은 그들과 연대적 결합을 통해서 인격적인 관계의 변화와 회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변화가 사회 구조의 개선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우선적 선택’에서 기인하는 민감한 문제의식은 사회정의를 위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또 공정한 분배를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면 모든 사람이 공정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이미 불의에 희생된 이가 있을 경우 그것은 오히려 불평등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정의는 한 사회 내에서 모든 이에게 기회와 자원을 같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은 어떤 일(선택)을 수반한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한 사회 안에서 가난한 이와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래서 ‘우선적 선택’은 사회 구조의 개선과 관련되며 정의로운 사회를 발전시키는 첩경이라 말할 수 있다.
(3) 공동선의 추구와 실현
모든 개인은 정의를 위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우선으로 하며, 사회의 선익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환경은 모든 이가 질서 있고 번영하는 건전한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삶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공동선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사회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부당하고 불쾌하며 위험한 삶의 공간이다. 그런데 공동선은 사회성원의 한 계층이라도 제외하거나 면제해서는 안 된다.
부자와 가난한 이 사이의 깊은 골로 손상된 사회에 대해 교회는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요구를 맨 앞에 놓아야 한다.
먼저 한 사회 안에서 공동선이 우세해지려면 힘의 부족과 결핍으로 손해를 보는 이들이 우선 보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를 하나로 묶어두는 데 필요한 균형이 깨져서 전체가 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공동선은 구체적으로 “특정 생활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쾌적함과 사회 분쟁의 회피를 핵심 요소로 하면서 그들의 정신적․물질적 만족을 최고도로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사회 구성원의 어느 한 계층이 공동체 생활의 참여에서 제외된다면 그러한 사회적 조건은 공동선에 모순되는 것이기에 수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선적 선택’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주변화 된 가난한 이를 ‘구성원 전체의 정신적․물질적 만족’ 속으로 편입시키고 사회의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공동선의 실현을 촉진하는 선택이다.
(4) 인간 존엄성의 실현
인간의 존엄성을 인격의 존엄성으로 이해할 때 경제적 가난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발전만을 앞세우는 사회구조나 이념도 인격의 성장을 억압한다면 인간 존엄성 실현의 장애물이다.
이런 이유로 물질의 소유정도와 관계없이 현대 사회의 소외된 노인․장애자․약물 중독자․수인들․정신병자들 등도 인격의 존엄성에 침해를 당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교회는 자신이 ‘우선적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인간 존엄성을 보호함으로써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참된 인격으로 대우받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교회는 예언자적인 신원에 의거하여 사회의 제반 구조들 속에 존재하는 가난을 양산시키는 구조적 불의를 지적하고 그 구조를 개선해나갈 때 근본적으로 가난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다는 사회적 지평을 열어 주게 된다.
교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고 모든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우선되어야 함을 상기시키는 준거점과 방향지침을 세상에 제시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이들이 그러한 선택에 동참하도록 끊임없이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의 실현은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전제하는 동시에, 그것을 필요로 한다.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대항하는’ 선택이 아니다. 즉 이 선택은 부자들에 대한 배척을 의미하지 않고 악한 체제와 사회의 나쁜 구조에 대한 배척을 의미한다.
이 선택은 ‘죄를 반대하는 선택’의 한 국면일 뿐이다. 이 선택은 구조적 불의를 반대하는 선택과 불의의 희생자를 위한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선택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선택이다.
(5) 모든 이를 위한 선택
비인간화된 모습을 지녔던 가난한 이들은 예수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회복한다.
예수는 이러한 선택에 우리와 우리가 헌신해야 할 가난한 이들을 초대한다. 이 초대는 죄와의 투쟁에서 인간성을 누리는 모든 이들과의 연대 그리고 마음의 회개와 모든 양상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촉진시키는 초대다.
이러한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을 선택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있다.
동시에 그것은 가난함을 영구화하려는 이들과 그러한 시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가난한 이를 양산시키는 구조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 구조를 개선시키거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
또 우리 자신이 그러한 구조를 영구화시키려 한다면 다른 이들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타인을 억압하지 않거나 그러한 구조에 대한 참여를 거부하게 될 때 또 한 사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찾아갈 때 이 선택은 모든 이를 위한 선택이 된다.
따라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구체성은 모든 이를 위한 선택이라는 보편성을 지향한다.
마) 가난의 실천 문제
(1) 가난한 교회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특히 사제와 수도자가 그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이 넘볼 수 없는 개업 축복식과 가정 미사 등에는 다반사로 참여하지만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는 사제나 수도자는 찾기조차 힘들다.
교회와 신자들, 특히 사제와 수도자가 가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창립자로 가난한 삶을 살았고 가난한 이들을 선호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위해서다.
교회가 예수처럼 가난한 이들의 삶의 조건을 함께 나누어지기 위함이다. 이런 교회의 가난은 교회가 가난한 이를 선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교회는 가난한 모습을 지닐 때 비로소 가난에 대항하고 사회의 불의를 비판하는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가난한 이들에게 형제적인 말과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
(2) 봉사하는 교회
교회는 인간에 대한 몰아(沒我)적 봉사를 위해 존재한다. ‘남는 것’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갖고서도 해야 하는 봉사다.
가난한 이들․늙고 병든 이들․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아무 권력도 없으며 교회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행하여야 할 봉사다.
왜냐하면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신 예수가 당신 사명의 첫 번째 대상을 가난한 이들로 삼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준거점이다.
(3) 예언자적 사명
신앙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성을 띄며 교회가 사회 안에 의로움의 지표로 서야하는 것은 신앙의 내적 요청이다.
이러한 교회의 과제는 사회에 대한 공적 투신으로 이루어진다.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문제와 고난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하고 또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가 사실상 어렵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제 목소리를 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교회는 여론을 통해 이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우리 사회에서 꾸밈없는 양심으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은 가난한 이들의 외침과 권리를 사회 안에서 보장해 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익을 누릴 동등한 권리가 가난한 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사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게 하고 이 선익이 보장되도록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용산참사자와 그 가족들, 유해물질에 의해 사망한 한국타이어 직원과 가족들, 단속과정에서 폭행당하는 불법체류 외국인 여성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이 곳곳에서 고통 받고 있다. 예수께서 선호하는 가난한 이들이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인사와 정치인 등을 만나 덕담하는 것은 심심치 않게 하면서도 시대의 아픔에 신음하는 가난한 이들을 한 번 찾아가 위로조차 못하는 추기경 등 교회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몇몇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자들만 그들을 위한 예언자적 사명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해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대운하 사업 반대 미사 및 집회 때 대전교구의 적지 않은 사제들이 수도자 그리고 평신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교구 차원의 정의평화위원회를 발족시킨 것 이외에는 교구에서 자칭 소공동체 사목으로 알아준다는 우리 본당에서조차 이후 이와 연계된 어떤 교육과 강론 및 활동은 전혀 없었다.
하느님을 섬기는 교회, 말씀을 증거하는 소공동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에 함께해야 함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4) 나눔의 정신의 내면화
가난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서로 나누기 위한 가난이다. 서로 나누어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나눔은 가난의 목적인 동시에 가난의 실천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특히 현대 사회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나눔을 통해서 사람들은 정신적 풍요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태도들은 그 자체로 가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과 적극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청빈과 나눔의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과 연대감을 느끼는 신앙인들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5) 연대와 투신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악으로 여기고 가난한 이들은 역사의 창조자요 주체이며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이들로 받아들여 이들과 이 악을 제거하는 일에 함께해야 한다.
연대의 개념을 가난의 문제에 도입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로서의 삶을 사셨던 분이셨고 가난한 이들을 선호하셨기 때문이다. 연대는 반대의 태도를 배제하지 않는다. 반대자라도 공동체에 참여하게 하는 개방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연대는 행동 지향적이긴 하지만 투쟁이라는 말처럼 부정적인 함의를 가지지 않으며 정의를 위한 노력과 공동선을 지향케 하는 말이다.
가난한 이들은 가난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의 형제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남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겪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당하신 예수를 발견해야 한다.
예수는 편하고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시어 경제적 가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투신하셨다.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물질문명 사회와 그 불의한 구조를 변화시키는데 ‘투신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며 동시에 이 현상에 책임과 공모의 죄가 있는 이들의 ‘안일함’에 도전하는 것을 내포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직접적으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가며
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위원인 김정용 신부는 ‘교회 안에서 글을 쓰기 위해 그 어떤 심각한 용기나 각오가 필요치 않다고 믿는다.
만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데 용기와 각오가 필요한 것이라면 정말이지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글을 포함해 교회의 현실을 성찰하는 몇몇 글을 쓰면서 이런 저런 압력을 받았다.
특히 친분이 있는 자칭 주요 인사들의 압력은 다각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압력에는 승복할 정당한 명분이 없었다.
다만 자신이 속한 교구와 성당의 현재의 이미지를 손상하는 것이 자기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이라는 단하나의 아주 편협한 생각이 다였다. 이런 충고를 약으로 써서 앞으로 더 좋은 이미지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이들 같았다.
사회의 발전은 비판과 그 비판에 대한 수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회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이 얘기되듯 교회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없는 사실도 아니고 경험한 사실을 약이 되라고 충고 몇 마디 한다고 질타하는 교회의 풍토가 못내 아쉽다. 마지막으로 김정용 신부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교회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지지하고 고무해야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걷고 있는 순례자이지 하느님 나라 그 자체가 아니며 신앙은 동시대의 기존 가치와 사고체계를 철저히 의문시했던 예수의 비판적 복음선포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인간적 구조와 사회적 조직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자유와 ‘온갖 충만함'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상대적이고 임시적인 성격을 띤다.
교회가 이러한 비판적 본질을 망각하면 자신의 현재를 절대시하게 되며 이는 곧 교회의 현상유지를 지속하고 강화시키는 기반을 쌓게 되고 부적절하게도 고착화되고 정체된 교회를 합법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동시대인들의 폐쇄적 권위와 편협한 율법적 사고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동시대인들 그리고 자신의 품안의 제자들이 그렸던 '승리주의적인 우상의 하느님 상'을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가난한 하느님 상'으로 혹은 '절망적인 지옥의 심연 속에서 희망을 펼치시는 하느님 상'으로 근본적으로(비판적으로) 바꿔 놓으셨다.”
- 기쁨과 희망 사목 연구원 / 2009.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