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호윤
병원에 갔다. 건강을 회복한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직도 병원 출입이 잦은 편이다. 마침 월요일이라 그런지 평소와 달리 대기실이 혼잡했다. 한참을 기다려 구석에 있는 테이블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았다. 폰을 열어 e북을 보려 했지만 집중이 되질 않았다. 간호사가 큰 소리로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거는 여기서 안 주고 약국에서 사실 거야. …한 알씩 열네 번을 드실 거예요. 한꺼번에 먹는 건 너무 힘들잖아. … 6시에 물 한 컵을 드실 거예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하는 그녀의 높은 목소리는 끝없이 울려 퍼져 대기실 안 누구라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속으로 그녀의 말에 반문하고 있었다. ‘(…약국에서 사실 거야) 내가? (…너무 힘들잖아) 갑자기 반말? (…드실 거예요) 아니 내가 먹을지 어떻게 알았지 ?’
속엣말을 하면서 웃었지만 한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이런 말투를 가진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쪽에 앉으실게요.’ ‘기다리실게요.’ ‘…하실게요.’를 무분별하게 붙이다보니 스스로에게 존칭을 하기도 한다. ‘바로 계산 도와주실게요.’ 이런 ‘…실께요’에는 존대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오해일까? 그저 습관적으로 붙이는 기계적인 존댓말, 엉터리 존댓말 같아 영 불편하다. 음정이 맞지 않는 화음을 듣는 것처럼.
중장년 이상의 환자들이 많은 정형외과에라도 가면 간호사들의 ‘아버님’ 혹은 ‘아버지’와 ‘엄마’가 넘쳐난다. “엄마, 어제도 많이 아프셨어?”라는 반말을 무심코 들으면 친딸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내 부모님처럼 정성껏 돌봐드리겠다는 취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존댓말로 공손히 응답하는 그 ‘아버지’에게 은근 슬쩍 반말이라도 섞어 말하는 걸 목도하면 몹시 불쾌하다. 어느새 내가 ‘꼰대’가 된 걸까?
병원에서 돌아와 남편에게 불편한 심기를 털어놓았다. “어쨌거나 잘 하려고 그러는 거 아냐? 마음만 봐, 마음만.” 공연히 말을 꺼냈다 후회하면서도 병원에서의 일을 돌이켜보았다. 진료받으러 온 사람들과 건강검진을 위해 방문한 사람들로 빼곡했던 대기실. 데스크 위로 설명서를 내밀며 나직하고 빠른 말투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설명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내게 옆자리로 이동해달라고 부탁하곤 테이블로 어르신을 모셨다. 그러곤 귀가 어두운 노인 옆에 앉아 설명서를 차근차근 큰 소리로 읽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그녀의 어법이 옳고 그른 것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시간을 내어준 그녀의 친절과 눈높이를 맞춘 그녀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보이는 것에 가려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을 놓쳤었다. 서툰 내 요리 솜씨보다는 오랜 시간 공들인 정성을 인정해 주는 남편이 그것을 단번에 알아본 것은 당연하지 싶다. 마음을 품는 것, 또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알아주는 것이 때론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고 틀린 것을 고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 같다. 법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중하지만, 세상에서는 사람이, 마음이 제일 귀한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설거지를 도와주던 딸아이의 다정한 마음보다는 어수선한 뒤처리가 먼저 보였고 빨래를 널어준 남편의 배려보다는 털지 않고 널어 꼬깃꼬깃해진 셔츠 주름에 마음이 쓰였던 때도 있었다. 새삼 부끄러웠다.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문제풀이를 할 때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맞은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틀린 문제에 주목하고 그 부분을 고치는데 힘쓰자고. 어쩌면 그 때문에 일상의 긍정적인 면들보다도 부정적인 면들을 더욱 눈여겨보는 나쁜 습관이 드는 건 아닐까. 아직도 나는 문자 메시지의 틀린 맞춤법이나 적절치 못한 비유에 신경이 쓰이곤 한다. 글 쓰는 일을 시작한 후론 더욱 그런 것도 같다.
문득 옛사람들의 글 쓰는 모습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붓을 들기 전 연적에 깨끗한 물을 담으며 마음을 맑게 헹구고 벼루에 먹을 가는 동안 마음도 함께 갈고닦았을 것 같다. 붓을 들지 않는 나는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해 보았으나 쉬이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다행히 이천년의 세월을 두고 미리 준비해둔 노자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선자불변善者不辨,변자불선辯者不善
지자불박知者不博,박자부지博者不知
선한 사람은 따지지 않고 따지는 사람은 선하지 않으며 아는 자는 넓지 않고, 넓은 자는 알지 못한다. 내가 지닌 지식 체계를 통해 대상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래적, 본질적 의미를 체득해 내는 인식능력, 곧 명明에 대해 노자는 말한다. 보이는 것들에 갇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려 드느라 선善을 향한 마음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단어 암기하듯이 몇 번이고 되뇌고 필사해 본다. 마음에 새기듯이 종이에 꾹꾹 눌러쓰니 비로소 편안하다.
첫댓글 내 안의 틀을 깨고 세상을 품으려는 허망한 날갯짓으로라도 한발짝 나아가보렵니다 호윤샘이 필사하는 그 문장의 먼지만한 액션이라도 삶으로 담아내기를 늘 고민합니다
감사해요, 늘 응원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살펴야되는데 나도 잘 안 돼요.~~^^
호윤 샘이 필사하는 노자의 말씀을 나도 마음에 새기고 되뇌어 보겠습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으로 읽고 또 요렇게 폰으로 읽네요.
사람인지라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속세에 있다보면
쉽지 않지요.
오히려 속세에서 부딪히며 고뇌하고 힘들고 하는 것도 어찌보면 수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속세를 떠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매여사는 나는 오늘도 눈을 감아봅니다.
속세에서도 수행하는거 맞을거에요~또 읽어주어 감사해요~^^
호윤쌤 글을 읽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또 한번 절실하게 깨우칩니다. 매사 깊이 생각을 해야겠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상과 본질의 문제를 일상에 비추어 형상화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군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마음에 담기는 문장에 멈추어 제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꼰대여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지금 꼰대일뿐
저들은 미래의 꼰대리니..
엉터리 존대도
다정을 빙자한 버릇없음도
한심한 노릇
딸과 남편의 못마땅한 면 보임 어쩌랴
뒤에라도 긍정의 시선 깨달았다는 기쁨 있으니
꾹꾹 눌러쓴 노자를
독자인 내게 가르쳤으니
보이지 아니하는
호윤의 지성과 감성에 감탄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