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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21세기』
머리말과 사전필독
1. 머리말
고조선은 현실적인 문제이고 현대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떻게 그 먼 옛날 일이 현재의 문제일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한때는 설명을 해보려 애썼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있는 대로 두고 그냥 바라보기로 했다. 애를 쓰는 것도 한 가지 일이고 그냥 두고 바라보는 것도 한 가지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거칠고 규모가 크다. 현대 한국사와 세계사, 현재 한국 상황과 국제 정세가 서로를 물어뜯으며 태풍을 일으킨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자주 경고를 한다. 그래도 이 책을 만난 독자가 있다면 영화를 구경하듯 편하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전쟁 이야기라도 영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이 책의 부제인 '영실평원의 독사들'은 고조선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비유한 말이다.
한라산 영실코스를 오르면 1,500고지쯤에서 넓은 평원을 만난다. '선작지왓'이라 불리는 한라산의 완사면이다. 그 높이에 그런 평원이 있다니 새삼 신비한 평화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평원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보기에는 연인과 아이들이 뛰어놀 것 같지만 그 안의 키 작고가시 많은 나무들이 한 발짝 걸음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 평원은 보기와는 달리 갈 수 없는 곳이며 보기와는 달리 평화롭지 않은 곳이다. 나는 이 작은 덤불들이 독사들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나 고조선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영실평원 한가운데 저 멀리 왕관처럼 솟아 있는 백록담 정상과 같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처럼 보이는 고조선은 그 주변에 독사들이 엎드려 위장한, 가짜 평원의 한가운데 서 있는 봉우리와 같다. 그곳은 아무나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비유가 독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머지는 본문에 맡기기로 하자. 이 책의 출간에 도움을 준 많은 분께 감사를 드린다.
2. 사전필독
이 책을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의 주제는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며 이 책의 저자인 나는 무엇 하나 주목할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어쩌다 이 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면 우선 비극적 코미디라는 역설적 함정에 들어선 것을 환영(?)하겠다. 왜 비극적 코미디이며 역설적 함정인가.
조금 미안하지만 별로 예쁘지 않은 예를 들어보겠다. 방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보였다면 그 집엔 수천 마리의 바퀴벌레가 산다는 말이 있다. 축축한 구석방 비닐 장판을 들어보았더니 거기에서 수백 마리의 바퀴벌레 떼가 발견되었다고 하자. 당연히 놀랄 것이다. 그래서 비극적 코미디이며 역설적 함정이다. 그 안온한 집이 바퀴벌레 천국이었고 나의 잠자리 밑에 수백 마리의 바퀴벌레가 함께 자고 있다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또 미안하지만 비슷한 예를 한 가지 더 들겠다. 단독주택 마당에서 뱀 한 마리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래서 집을 뒤졌더니 마루와 구들장 밑에 수백 마리의 뱀이 살고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하자. 역시 당혹스러운비극적 코미디이고 역설적 함정이다. 바퀴벌레와 차이가 있다면 뱀의 경우가 더 끔찍하다는 것뿐이다.
이 책의 함정이 지독하다는 걸 말하고자 이런 예를 들고 있다. 그만큼이나 이 책의 이야기가 모질다는 말이다.
왜 고조선 이야기가 그런 함정이란 말일까. 그것은 까마득히 먼 역사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세상이란 그 까마득한 게 문제가 될 때가 있다. 특히 그것이 특별한 형태로 현재와 만날 때 그렇다. 이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보겠다.
2021년 2월, 여자 배구계에서 스캔들이 하나 발생했다. 인기 절정의 국가대표급 쌍둥이 자매 선수가 학창 시절 폭력을 자행한 학교 폭력가해자였다는 것이다. 학교 폭력이야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고 동서고금에 특이한 일도 아니며 사정이 그렇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분노했으며 그 덕에 이런 일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배구계가 강력한 징계를 내리고 대책을 강구했다. 나중에야 어찌 될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그만큼이나 심각했으며 나아가 이 사건은 다른 스포츠계와 연예계로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까마득한 옛날 학교 폭력의 기억이 현재와 기묘하게 얽히는 순간 이런 폭발이 일어났다. 고대사도 비슷하다. 잊고 살면 옛날의 학교 폭력보다 깜깜한 사건이다. 그러나 현재와 특별하게 얽히면 아주 심각한 일이 된다. 수천 마리의 바퀴벌레와 뱀이 모를 때는 없는 것이지만 발견된 순간에는 견디기 어려운 악몽이 되는 것처럼 고대사도 그렇다.
그럼 고조선이란 아득한 고대사는 지금 이 순간 현재와 특별하게 얽혔는가? 아직은 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30년 이내로 폭발할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그렇게 본다는 것인데 이왕 시작했으니 조금 더 말해보자.
고조선이 현재와 특별하게 얽히는 때는 일본 경제가 무너져 그 악명 높은 1경 원 이상의 재정 적자가 곪아 터지고, 중국 정치·경제가 기간의 모순으로 인해 최소한 시진핑 제체가 붕괴하고, 서구와 미국이 극동 아시아의 파트너로 일본 대신 한국을 선택하는, 바로 그때이다.
낯선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낯선 김에 한마디 덧붙이기로 하자. 이때는 그저 한마디의 구호 같았던 4차 산업 혁명이란 것이 구체화되고, 한국의 그 유명한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이 4차 산업 혁명의 석유와 같은 기초 첨단 기술의 메카가 되는 때이다. 도로의 대부분을 전기차가 점유하고, 바다의 배들이 국제항해기구의 협약과 환경 조약으로 인해 더 이상 벙커시유(중유의 일종)를 사용하지 않는 때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 자본주의 구조의 질적 변화와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앞으로 30년 이내에 올 것이며 그때 고조선은 현재와 만나 폭발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짐 로저스라는 유명한 투자가는 '일본이 50년 이내로 범죄 국가로 몰락할 것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일본을 탈출해야 하며 정 그럴 수 없다면 총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는데 나는 이 말에 상당히 동의하는 사람에 속한다. 또 2021년 2월 한국의 유명한 전투기 사업의 총아인 KF-X가 4월 출시를 앞두고 조립완성품을 공개했으며, 바로 그 시점에서 찰스 브라운 현직 미 공군참모총장이 '페라리는 주말에 타는 것이다'라는 말로 미 공군 전략의 전환을 시사했다는 기사가 발송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KF-X 사업과 적지 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2021년 3월 1일, ‘노컷뉴스'의 “다음 달 첫 순수 국산 전투기 KF-X 나온다..… 4.5세대 '다크호스'"라는 제목의 기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잘 모르지만 수입된 깡통 비행기나 운용하던 한국 공군이 아니었던가? 그런 한국이 언제부터 이런 비행기, 미국과 세계 공군 전략을 재고하게 할 만큼 위력적인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일까? 이 전투기 KF-X는 긴 실험을 거쳐 2026년에 실전 배치된다고 하는데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계획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빨리 변하는 시대 속에서 내가 말하는 특별한 시기의 정립이 30년 이내라는 것은 그리 긴 기간이 아니다. 추측기로는 그보다 빠를 것이다. 바로 그때 고조선의 기억이 현재와 특별하게 만난다는 것, 이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그때는 배구계의 학교 폭력 사건보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바퀴벌레 떼처럼 보이지 않던 사건과 사람들이 조명을 받을 것이며, 학교 폭력 사건보다 훨씬 잔혹했던 죄악과 악몽들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미래형으로 말한다고 해서 너무 무시하면 안 된다.귀신처럼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는 시대라는 건 점쟁이의 수다가 아니라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이다. 이것도 예를 들어보자.
2019년 7월, 그 유명한 일본 아베 정부의 수출 규제 사건이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이 때문에 한국 반도체 산업과 경제가 당장에라도 붕괴할듯 떠들어댔다. 하지만 사정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불매 운동을 시작했다. 이 불매 운동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지금도 지속 중이다. 지속 중이다 못해 일상이 되었으며 이 일상은 일본이 무너지는 그때까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불매 운동과 맞물려 한국산업은 일본에 의존하던 소재 부품 산업을 자생화하거나 공급 루트를 다변화하기 시작했다.그래서 일본의 주요 산업 일부가 한국 시장에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단지 몇천 억이나 몇조 원의 영업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액수 자체는 일본 경제 규모에 비추어 흔적도 남지 않는 푼돈이다. 문제는 일본이 한국에서 잃어버린 돈이 종잣돈의 손실이라는것이다. 한국 전쟁 이래로 일본의 경제 구조를 감안하건데 한국 시장에서 이런 식의 손실은 잠시 가물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용하는 우물 구멍이 막혔다는 뜻이다. 일본은 그동안 받아놓은 물을 사용하거나 멀리 떨어진 강물을 길어 먹을 수는 있어도 집안의 우물물을 길어 먹을 수는 없다. 그 종잣돈을 벌려면 중국 시장과 미국 시장과 동남아 시장에서 손을 벌려야 하는데 이미 기울어진 일본의 힘으로는 반 걸인 같은 짓을 해도 쉽게 벌리지 않는다. 중국 외교부장 왕이가 코앞에서 센카쿠 열도가 중국 땅이라 우기는 데도 모테기 일본 외무상은 웃는 일밖에 못 했다고 모든 뉴스가 시끄러웠다. 또한 코로나가 시작되자 베트남은 갑자기 한국을 멸시하며 일본 자본의 베트남 진출을 도모했지만, 이후 2년도 못 지난 2021년 1월에 베트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주요 인사가 친한파로 교체되기도 했다. 일본은 빌어서라도 중국 시장에서 돈을 벌어야 하며, 베트남은 일본이 장사할 게 별로 없는 나라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정말로 장사를 해야 하는 나라는 한국임을 자각했다는 뜻이다. 불매 운동으로 인해 반영구적으로 자동 입금되던 한국으로부터의 종잣돈 유입 통로가 줄어들자 일본이 무력한 걸인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일본을 이렇게까지 만든 한국의 지속적 불매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건 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렇게 많은 불매 운동을 했어도 이만큼 집요하고 지속적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시킨 것도 조직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필 이 시대에, 그것도 단 한 번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이것이 시대라는 마술이다. 그게 무엇이건 그럴 만한 시대적 조건이 사건을 만든다. 그런 사건이 얼마나 현실적인가를 알려준 사례 중 하나가 '일본 불매 노재팬' 운동이며 실은 위의 학교 폭력 스캔들도 같은 사례에 속한다. 그럼 그 조건이란 무엇인가?
만일 이런 얘기들로부터 '역사는 힘을 가진 자의 서술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눈치가 빠르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역사를 오로지 힘을 가진 자의 서술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역사의 폐기이고 포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서술에서 힘이라는 요소의 위력을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건 역사에 대한 무지이다. 역사에서 힘은 전부는 아니지만 정말로 중요한 요소이다. 위의 학교폭력 사건이나 일본 불매도 한국 민주주의와 국민의 힘, 그리고 국력이라는 요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결국 30년 이내로 고대사로서 고조선이 현실과 얽힌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힘과 직결된 것이다. 바로 그때 구석방의 수천 마리 바퀴벌레와 구들장 밑의 수천 마리 뱀들이 모조리 뜨거운 햇살 아래 드러날 거라는 말이다.
이 책은 고조선이라는 고대사가 21세기와 만나는 특별한 현실을 고찰한다. 그것을 비극적 코미디이자 역설적 함정이라 부르면서 독자들에게 심상치 않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고조선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그것은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 『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 4권이다. 이것을 말해두는 이유는 책을 광고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의 논의와 참고를 위해 말해두는 것이다. 또 그 책들에 기대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도 밝혀두기 위해서다.
이상 사전필독의 내용들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본문의 내용이 험난할 것을 한 번 더 느꼈다면 나는 오히려 만족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각오가 있었으면 좋겠다.
출처: 『고조선과 21세기』, 김상태, 2021. 4~12쪽,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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