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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 가운데서의 부활
본문/빌립보서3: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오늘은 부활후 제3주입니다. 지난 두 번의 주일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고전 15장 전체를 통하여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지어낸 설화가 아닙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목격하고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 목격한 제자들이 500명이나 되었고 그들이 대부분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고 지옥 형벌을 받을수 박에 없는 우리들을 살리기 위하여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어 무덤에 들어가시어 삼일만에 부활하셨는데 아담안에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라 되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죽음에서 부활의 축복을 안겨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 주님의 부활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이 첫열매가되어 주께서 이땅에 심판주로 오실 때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함께 나누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궁극적인 소망은 바로 첫째 부활하여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 복된 사실을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는 부활에 관하여 단계적으로 세가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못 믿는 자들을 향해 지난주 고전 15장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그리고 바울은 사도행전26:8절에서
아그립바왕이여.....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라고 공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성의 눈 때문입니다. 신앙의 눈이 뜨여져야 믿어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수가 없습니다. 롬10:9-10절에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이당에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고 우리를 영생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믿고 싶으나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 그런분이 있다면 신약성경을 구도자적인 마음으로 찬찬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교회와서 목사의 설교만으로 신앙의 전부로 삼으니까 안믿어지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보면 베이직 교회 조정민 목사님은 마누라를 의심해서 즉 의부증 때문에 교회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이상한 소리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더 알아보기 위해서 성경을 5번 읽으니까 성경을 더 알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는데 그분이 47살에 5번 읽고 예수님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은 한국교회에서 알아주는 설교자가 되고 많은 강연을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호기심이나, 아니면 진짜 알기를 원하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알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8:32절에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어야 하는 진리가 있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두가지 다 성경을 통하여 진리를 알면 자유하게 됩니다. 무지에서 자유와 불신에서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서 개인적은 영적인 부활을 체험해야 합니다.(요5:24-25절)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을 좀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우리의 부활은 주님게서 재림하실 때 고전15장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23절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심판주로 오실 때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 보시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시제가 “이때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햇갈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은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 믿고 영적으로 거듭나고 살아나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중생하는 것을 부활이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 에베소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1-5절)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와 같이 육신의 부활뿐 아니라 영의 부활 즉 예수님 믿고 거듭남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영의 부활은 곧 거듭남을 말합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7-80이라고 성경에 말씀합니다.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리고 죽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육체는 이땅에 썩어 죽지 만 영혼은 죽지 않고 육체와 분리되어 영원한 지옥이나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죽은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 있다가 예수님께서 이땅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 첫째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죽은 몸이 이제 둘째 아담을 믿는 믿음과 그 영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부활체를 입게 됩니다. 그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부활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것을 계시록 20:4-6절에서 자세하기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더라도 영의 부활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하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영원 부활을 경험한 자가 모두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한 자들(계20:4-5), 그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라도 거룩하지 않는 자들(계20:5절)은 첫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12:14)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영혼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소중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 중에 이 진리를 알았으면 준비하고 천국에 갔을 터인데 이 진리를 모르는 까닭에 그곳에 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 이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 목적을 통해서 더 자세하게 알수가 있습니다.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오늘 이시간 짧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의 의미를 나누고 부활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1,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은 어떤 뜻입니까? 다시 본문을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의 소망은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부활에 참예 하고자 하는 바울의 이 소망은 그의 모든 소망 중에서 가장 강력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그 강력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어찌하든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소망하는 부활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말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른 시체들 가운데서의 부활” 즉 “부활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부활하게 되는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 모든 자들이 일시에 경험할 부활에 대해 성경은 계20:11-15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와 같이 죽은 자들이 모두 일시에 일어나게 되는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참예하는 이들은 모두 심판을 받고 둘째 사망이라는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심판의 부활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원하는 부활은 “죽은자 가운데서의 부활”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나기 전에 그 중 일부가 먼저 일어나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활을 가리켜서 “생명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부활이 심판의 부활보다 먼저 발생하기 때문에 “첫째 부활”이라고 칭합니다. 바울이 간절한 마음으로 참예하기 원했던 부활이 바로 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즉 성경에서 “의의 소망” 혹은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부르는 그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소망입니까? 그것이 바울이 “어찌하든지”라고 표현한 것같이 목숨다해 강렬한 소망으로 살아가고 있느냐입니다. 그 소망을 위해서 오늘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바로 내게 유익한 것이라고 할찌라도 다 배설물로 여길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도 때로는 걸어가야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무섭다고 교회 안 나오거나 가정사에 조그만 일만 있더라고 일단 그 일부터 하는 사람들은 강렬한 소망은커녕 바늘 구멍만한 소망 같은 자들입니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나 때로는 일제 강점기와 같이, 때로는 반기독교적인 시대가 왔다고 할찌라도 단호하게 끝가지 믿음을 지키는 그런 소망입니다.
왜 이 소망을 가져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안전인 이 소망에 달려 있으며 이 소망의 강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요일3:2-3절에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2.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거듭남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그 다음인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 지기를 삶의 첫 번째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첫째 부활에 참예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자신의 영의 부활 즉 거답남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첫째 부활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부활에 참예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이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것이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기 위하여 한 노력은
첫째로 예수님을 사모했습니다.
마13장에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거기에는 비슷한 비유들이 등장을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비유 입니다.(마13:44-46절)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치 이 비유에서처럼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얻기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빌3:8) 그리하여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본문을 기록할 당시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알게 하여”(10절)
이처럼 바울은 구원 받은데서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를 더 잘 알기를 원했습니다.
453장 가사처럼 “예수더 알기 원하네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원하네.....
우리도 이 말씀처럼 바울의 소원같이 삶의 제1순위로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알기를 원한다는 뜻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도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 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주님을 더 깊이 더 깊이 알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소원입니다. 바울은 그분을 체험적으로 더 깊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바울은 이미 행9장에서 예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는 그분의 음성도 또한 들었습니다. 그이후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도 생활을 하면서 많은 환상을 보았고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행18:9-10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심지어 셋째하늘에까지 이글려 올라가서 즉 입신하여 천국에까지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서 교재하였고 사람으로서는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향한 더욱 간절하고 지칠줄 모르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평생의 소원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더울 깊이 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라고 고백한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소금을 한 줌 삼킨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에 참예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축복을 더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축복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지고 부패하고 타락합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하였습니다. 마7장22절 이하에 산상수훈 가운데 그 사실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았고 각종 기적을 행하기는 하였지만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사모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그리스도와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거르므로 우리가 마지막 날 버림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사모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는 것이 바울의 간절한 소원중에 하나였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능력에 대하여 막연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활의 능력을 마지막 날 의인들의 부활시에 비로소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소원했다는 기록을 읽을 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고 혼란 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저와 여러분들이 거듭났다면 영의 부활의 체험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보면 이미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것입니다.
요한복음 5:24-25절에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골로새서3:1절에서도 그 사실을 잘 포현해 주고 있습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영의 부활은 부활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부활의 권능을 경험했다고 볼수가 있습니다.(요3:3,롬8:11절) 거듭나게하시는 것도 성령님이시고, 예수님을 살리신자가 성령님이시듯이 첫째부활에 참예할수 있는 부활의 권능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권능에 의해 영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그때부터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면 왜 부활의 권능에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가?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적 무덤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한번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바로 무덤속과 같습니다. 세상은 죄로 가득하고, 기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습니다. 이 무덤과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생명령 넘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 뿐입니다.
레이 스테드만은 부활의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활의 권능은 세상의 다른 어떤 힘과도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일하며, 그것에 견줄 만한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죽음 한 가운데서 역사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력하며 죽음과도 같은 황량한 상태에서도 효력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권능이 처음으로 나타났던 곳이 바로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실 때 죽은 자들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죽음과도 같은 생명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생명과 활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또 알포트라는 분은 부활의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활의 권능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게 영적으로 부활한 자들(엡2:5-8,골3:1)로 거룩한 삶을 살게하시며(롬6:4,엡1:19-22, 2:5)성도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부활의 권능에 의지하여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덤 같은 이 세상에서 힘있고 거룩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 부활의 권능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것은 제가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습니다.
부활의 권능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다시 살리셨고 마지막 날 우리를 무덤에서 다시 살릴 능력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8:11절입니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 성령님이 하셨습니다. 거듭나게 하는 것은 본인이 의지적으로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또한 부활의 권능은 우리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신 능력인데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롬8:9-10절입니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우리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영적으로 생명력 넘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 합니다. 성령님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빌4:13절에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서 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것이 첫째 부활에 이르는 비결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았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홰 말한 후 다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받은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부활의 권능에 대해 말한 후 또 다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되돌아간 것입니까? 이것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논리적인 모순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완벽한 논리를 따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권능이 하는 일은 예수님을 더 닮을수 있게 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은 실제로 의롭고 거룩하셨습니다. 세상은 죄로 가득차 있었으나 예수님은 완전히 의로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 그 권능에 의지해서 살면 점점 더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려면서 우리 주변에서 박해가 시작됩니다.
딤후3:12절입니다.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마지막 때일수록 사실상 이런 핍박은 불가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사실 앞으로 성경대로 설교할 때 설교자가 받게될 여러 가지 반대와 어려움은 예상됩니다. 그리고 과거 문재인 정부에서 더더욱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만약에 동성애 인권법이 상정되면 강단에서 동성애는 죄악입니다. 라고 말하면 감옥에 갇히게되는데 그때에도 담대하게 그런 설교를 할수 있는 목사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가? 성경대로 설교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는 자가 많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모면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감히 그런 고난에 대하여 정면 돌차를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벧전4:12-16절)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결심하면 반드시 박해에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공산주의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고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이 핍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조류와 타협하고 경건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되려면 핍박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계시록에 소면 첫째 부활이 신앙을 위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베임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바른 믿음과 부활의 능력을 매일매일 공급받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믿음ㅇ이 파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담대해야 합니다.
결 론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 드리겠습ㄴ디ㅏ. 여러분 중에 나는 완전히 구원받았다. 이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 말은 바른 대답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느 한순간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에 대하여 세가지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구원의 여정인데요,
첫째로 과거형입니다.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이 말씀을 보면 ”구원을 얻엇나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렇게 과거 시제로 표현할 수 있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둘째로 현재입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절)
”구원을 이루라“이와 같이 현재 시제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 입니다.
셋째로, 미래입니다.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딤후4:18절)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미래시제로 표현해야 옳은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완전한 구원 ”영화“입니다.
이와같이 구원에는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와 믿고 난 후 계속 믿음이 자라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인 성화,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때에 부활하거나 변화하여 영화로운 몸으로 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영화 세 가지 단게가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여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다 합해져야 온전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 세가지가 차례로 모두 나타나고 있습니다.(빌3:9-11절)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9절은 칭의에 대한 진술이고,
10절의 성화에 대한 진술이며,
11절은 영화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 글을 주의해서 읽는다면 충분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과거 현재 미래적으로 다 이루어져 합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히12:14절)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룩을 추구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요5:28-29절에는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계시록20:4-6절에는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이와같이 첫째 부활에 참예할수 있는 자는 오직 선한일을 행한자 즉 거룩한 자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을 추구해야 하고 거룩해져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입니다. 따라서 흐르는 강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물결에 흽쓸려 떠내려가는 것처럼 거듭난 상태로 만족하지 않고 가만히 잇는 사람은 그 거듭난 상태조차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가 태어났으나 적당한 영양분을 섭취해 주지 않으면 죽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거룩함을 좇지 않으면 세상 물결에 휩쓸려 타락화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중생했더라도 멸망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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