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4.2 조제핀과 이혼 후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루이즈를 황후로 맞이하다
|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은 이 말로 잘 설명된다. 그는 프랑스령의 외딴 섬 코르시카 출신으로 가난과 설움 속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프랑스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30대 초반에 프랑스 황제로 등극해 유럽의 절반을 제패하고,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오늘날 프랑스의 초석을 남긴 인물이다. 지난 세기 프랑스 위인열전에서 항상 1등의 자리를 고수한(그도 결국 20세기 드골에게 선두 자리를 내 준다.) 위대한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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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하나 나폴레옹
“위대한 군 지도자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앨리스테어 혼의 나폴레옹 평가이다. 오늘날까지 영웅의 아이콘인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은 매우 다면적인 사람이다. 정복자로서,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그리고 황제로서 각 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책이 60만종이 넘는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프랑스와 유럽에 미친 영향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애리스테어 혼은 나폴레옹에 관한 저서를 여러 권 썼는데, <나폴레옹의 시대>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어떤 시기가 나폴레옹 시기인가를 놓고 고민을 할 정도이다. 그는 생몰연대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애리스테어 혼은 나폴레옹의 시대를 1795년 젊은 장군이 정치권을 행사하던 시기부터 1820년 ‘위태로운 왕정복권시대’로 끝낸다고 일단 설명한다. 나폴레옹은 모든 위인들의 이름이 그러하듯, 시간을 초월해서 아직도 생생한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남아, 한 인간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찬양과 폄하를 오가고 있다. 그는 아버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와 어머니 레티치아 라몰니노 사이에서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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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여 귀국하는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인물이 될지 예측했다"
프랑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 코르시카의 가난한 한 소년이 프랑스 혁명으로 왕이 물러난 자리에 다시 황제가 되어 왕정복권을 이루어낸, 말 그대로 한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가게 되었을까? 우선 군인으로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군들에게는 영웅이었다. 나폴레옹은 1785년 브리엔의 사관학교를 졸업하던 16살의 나이로 장교로 임관했다. 작은 키와 빈약한 몸매 때문에 수학자라는 별명을 얻는 이 소년장교는 8년 후인 1793년인 툴롱에서 천재적인 전략으로 영국군들을 몰아냄으로서 무기력했던 프랑스 혁명군의 영웅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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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롤 전장의 나폴레옹(왼쪽), 브뤼메르 쿠데타를 지휘하는 나폴레옹(오른쪽)
그리고 25세의 나이로 소장으로 진급, 마음속에 찬란한 별을 품고 이탈리아 국경군의 포병장군이 되었다. 1795년에는 프랑스 국민공회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정치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폴 바라스는 당시 27살의 나폴레옹이 급성장할까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앨리스테어 혼은 당시 나폴레옹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 병사들은 월급도 받지 못하고 굶주린 데다 무기마저 빈약해서 거의 반란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스탕달은 <파르므의 수도원>에서 장교 세 명이 신발 한 켤레와 바지 한 벌, 셔츠 세 장을 공유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로디 다리에서 영웅적으로 군대를 이끌었을 당시 한 프랑스 장교가 ’전쟁터에서 구한 병사들의 모자로’ 구두창을 달았다고 전한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여겼던 이유(훗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속았다면서 이러한 생각을 버렸지만)는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그는 오합지졸의 군대를 단 며칠 만에 최정예 부대로 변화시키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1797년 10월까지 16만 명의 포로와 2천대 이상의 대포를 전리품으로 주머니에 넣고 귀국한다. 프랑스의 영웅, 우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 나폴레옹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인물이 될지 예측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기라도 하듯이 이 땅덩이가 벌써 발 밑에서 달아나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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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
이후 이집트 원정에서의 승리, 팔레스타인과 레반트 지역에서의 잔혹한 정벌로 이어지면서 그는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철저히 한다. 그리고 혁명 이후 위태롭던 집정부를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무너뜨려 버리고 1799년 11월 9일 집정부의 시대에 마감도장을 찍어버렸다. 나폴레옹의 등장을 본 프랑스 국민들은 “공화국 만세! 나폴레옹 만세!”로 화답했다. 나폴레옹은 집정부의 지도자들을 위선자와 사기꾼들이라고 몰아붙이고,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하고 스스로 절대 권력인 제 1통령의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 훗날, 샤토브리앙과 더불어 나폴레옹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던 프랑스의 지성 스탈 부인도 이 순간에는 나폴레옹을 지지하고 즐거워했다.
말렝고 전투 이후 귀국 길에 나폴레옹은 공식적인 환영의 자리를 피하기 위해 새벽 2시에 몰래 파리시의 정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이 영웅의 귀가를 환영하기 위해 더 일찍 모여 폭풍우 같은 기쁨의 환성을 터트렸다. “앙리 4세 이후 어떤 정복자도 그렇게 환영 받은 적은 없다.”고 한 역사학자는 현장을 기록했다. 말렝고는 나폴레옹이 파리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걸 의미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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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12월2일 파리 노트르담 사원에서의 대관식.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왕관을 수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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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1804년 12월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탄생했다. 나폴레옹은 절대 권력을 통해서 프랑스 사회의 대변혁을 추구했다. 이 부분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빛나게 했다. 그는 종교의 신성도 정치에 이용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하느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물었다.”라는 문장은 그가 종교를 국가 통치의 한 수단으로 이용한 면을 잘 설명한다. 나폴레옹은 말한다. “한 국가가 종교의 도움 없이 어떻게 잘 통치될 수 있겠는가? 사회는 불평등한 재산을 제외하면 존재할 수 없고, 불평등한 재산은 종교 없이 유지될 수 없다.” “나는 카톨릭 신자가 됨으로서 방데 지역을 진정시켰다. … 유대민족을 통치했다면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했으리라.” “나는 당신들을(성직자들)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종교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 공포정치가 몰락 한 후, 도덕, 군사 정치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프랑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프랑스는 활기차고 교회의 종소리는 다시 울려 퍼졌다. 나폴레옹의 권력 아래서 사람들은 음주가무를 즐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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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광은 마흔 번의 전쟁 승리가 아니라 내가 만든 법전이다."
가장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해 화려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머물면서 자신의 영광을 회고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읽는다. 그는 우선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목표는 단 하나다. 모두 다시 합치고 모두 화해시키고 모든 증오를 잊고 모두를 하나로 모으고 여러 이질적인 요인들을 통합하여 새로이 하나의 프랑스와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혁명의 원칙과 성문법과 관습법에서 보존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의 문헌으로 작성했다. 모두 102번의 법률 회의에서 전쟁을 하느라고 바쁘신 몸인 나폴레옹은 57번 이상을 참석했다. 그가 프랑스 민법전(속칭 나폴레옹 법전)에 들인 공력을 잘 보여주는 숫자이다.
역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회고한다.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민법전>은 나의 행정재판 절차를 글로 옮긴 것이며 장관들과의 서신을 수집한 것이다. 행정가로서, 또한 광대한 ‘프랑스 가족’을 재조직한 자로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 ”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조르주 보드로노브는 나폴레옹의 법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법전은 출생, 결혼, 이혼, 분배, 증여, 상속, 사망과 같은 개인과 가족에 관한 모든 사항을 다루고 있다. 법 앞에 평등하고, 양심의 자유와 국가의 비종교화를 이루었다는 면에서 이 법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또한 소유권에 대단히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가족 내 위계질서를 세워 남편의 권위를 아내의 상위에, 아버지를 자식의 상위에 둔 점에서는 ‘나폴레옹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민사법은 그 동안 약간 개정되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법전이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일리리아 같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법률제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1806년에는 민사소송법을, 1807년에는 상법을, 1810년에는 형법을, 그리고 1814년에는 지방법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발전에 금강석과 같은 초석을 놓은 절대 권력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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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
나폴레옹은 군인으로서 정권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단순히 군인의 몸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라면, 아프리카 우간다의 무자비한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는 보다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법전, 교육, 종교, 국가를 움직이는 모든 장치를 재정비하고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매진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유럽 어디에 있던 연락이 가능한 커뮤니케이션과 우편제도의 간소화까지도 포함된다. 그에 대한 연구나 평전이나 에세이가 60만 종이 넘는다는 건 나폴레옹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나폴레옹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라고 유배지에서 말했다. 화무십일홍, 회자정리라는 한자성어는 영웅 나폴레옹을 빗겨가지 않았다. 모든 권력과 인생에 가을과 겨울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는 예수의 진언처럼 그는 결국 유배지였던 엘바 섬을 탈출해서 1815년 영국의 웰링턴 장군과 프러시아의 블루허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과 전투인 워털루 전투의 패배와 무리한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장엄했던 나폴레옹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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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핀과의 사랑과 이별, 마리 루이즈와의 재혼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조제핀과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황제가 되어 조제핀을 버리고,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도 했지만, 그의 부인이자 연인이었던 조제핀과 함께 한 말메종 성에서의 생활은 인간 나폴레옹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이었다. 조제핀은 아름다운 육체와 열정을 지닌 여인으로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애증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그녀가 너무 야한 옷을 입는다고 그 옷을 찢어버리는 행동도 했다. 그때 조제핀은 옷장에 걸려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야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과 질투의 감정에 충실했던 나폴레옹의 이러한 면은 연애와 사랑에 헤매고 상처받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었다. 이제 시절이 좋아져서 나폴레옹처럼 위대한 인물은 될 수 없어도, 나폴레옹과 조제핀과 같은 사랑과 열정은 오늘날 연예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연애와 사랑은 나폴레옹이거나 귀족 일부의 특권이었다. 난잡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특권을 누구보다도 잘 누렸던 황후 조제핀도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된 뒤 버림받은 여인의 몸으로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장소인 말메종 성에서 쓸쓸히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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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황후 조제핀(왼쪽), 두 번째 황후 마리아 루이즈와 아들 나폴레옹 2세(오른쪽)
1815년 6월 배신자 푸셰(푸셰 역시 자신이 추대한 루이 18세로부터 국외 추방 명령을 받는다.) 주도로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버렸다. 하지만 민중들의 지지와 권력을 되찾자는 측근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나폴레옹은 말메종으로 향했다. 워털루 전투 이후 마지막 망명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곳을 방문해서 “나의 불쌍한 조제핀! 그렇게 사랑하던 장미를 꺾으며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지금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라고 탄식했다. 나폴레옹은 “내 안에는 다른 두 인간이 있다. 머리를 가진 인간과 가슴을 가진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의 가슴을 가장 강력하게 차지하고 휘저어 놓은 여인은 조제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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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물처럼 되어 버렸소. 이제 사는 것이 아니오."
퇴락한 나폴레옹은 애당초 미국으로 향했으나 영국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영국 선박에서 나폴레옹은 대접을 잘 받았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런던 근교에서 감시는 받겠지만 안락한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탄 벨레로폰 호가 영국 플리머스에 닻을 내리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통신이 두절되었고,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짐을 뒤져 귀중품까지 약탈해갔다. 프랑스 황제는 영국의 전쟁포로, 혹은 유배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나폴레옹은 8월 9일 노섬벨랜드 호를 타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향했다. 대서양 남쪽에 버려진 섬, 바다와 같았던 나폴레옹은 작은 섬에 유배되었다. 10월 14일 나폴레옹은 라스 카즈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 섬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할 생각을 하고 눈앞에 보이는 세인트헬레나 섬을 마주했다. 유배 생활 동안 그의 회고록을 정리하던 다정한 라스 카즈도 강제로 떠나야 했다(이후 라스 카즈는 <세인트헬레나 회고록(1823)>을 남겨 나폴레옹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프랑스의 작가 샤토브리앙은 <저승 비망록(1841)>으로 반 나폴레옹의 선두에 섰다). 나폴레옹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외로운 영웅에게 하나, 둘 등을 돌렸다. 1820년 7월 나폴레옹의 병세는 완연해졌다. 유럽 전역을 안방 드나들 듯 하던 강인한 한 남자는 환자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침대가 내게 아주 달콤한 공간이 되었소. 이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요.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지. 내가 얼마나 쇠락했는지 …,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면 힘겹게 노력해야만 한다오 … 내 근력과 사지가 나를 버렸고 … 나는 식물처럼 되어 버렸소. 이제 사는 것이 아니오.” 그는 아들인 나폴레옹 2세에게 역사를 깊게 성찰하고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자신처럼 살지 말고 평화롭게 유럽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1821년 5월 5일 새벽 5시 나폴레옹은 전설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후, 이 영웅의 죽음에는 독살설 등 여러 가지 추측들이 어지럽게 떠돌아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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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나폴레옹 평전>(조르주 보르도노브 지음, 열대림)은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저자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나폴레옹의 삶과 업적을 되돌아보고 있다. 당대인들의 회고록과 역사가들의 연구서, 추종자들의 추모 글과 반대파들의 비방문, 공문서와 소문에 이르기까지 망라된 자료를 통해 나폴레옹을 그려낸다. 나폴레옹을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불렸던 괴테의 관점에서 나폴레옹의 영광과 인간적인 약점, 천재적인 인물이자 모순으로 가득한 인생의 모습을 통해 역사와 신화가 엉켜있는 인간 나폴레옹을 조망하고 쓰라린 배신을 맛보고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다. 소설처럼 잘 읽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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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전 5권)>(막스 갈로 지음, 문학동네)은 1997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베스트셀러이다. 역사가로서 그리고 소설가로서 막스 갈로는 마치 카메라를 들이대듯 나폴레옹의 내면을 정확히 그려낸다. 이 책은 나폴레옹을 사상 최대의 영웅으로서, 전장의 신으로서뿐만 아니라 권력과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번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흐르는 강물처럼 보여준다. <나폴레옹의 시대/크로노스 총서 15>(앨리스테어 혼 지음, 을유문화사)는 위에 소개한 두 권의 책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고 집중적으로 나폴레옹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문화지도자로서의 나폴레옹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폴레옹에 대한 서적은 우리나라의 출판시장에도 교육, 정치, 리더십 등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형태로 나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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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원재훈 / 시인, 소설가
- 글을 쓴 원재훈 1988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하네>등의 시집과 <만남, 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 <모닝커피>등의 소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