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9.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6장 7~8절
중언부언 말고 ‘간절함’의 기도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3)
■ 술 취한 사람과 소위 미친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정신 빠진 것? 그렇군요. 그러나 제가 원하는 답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답은 ‘중언부언’(重言復言)입니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는, 중언부언입니다. 말이 안 되는 비문(非文)과 비논리(非論理)는 둘째치고 한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는데, 이를 들어주자면 참을 인(忍) 셋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순교자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들이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이유는 혹시 그 말에 사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한 말만 계속 되풀이할까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오늘 본문에서 지적받은 중언부언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연이 있는 중언부언인데 예수님께서 너무 몰아치시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그럴까요? 그럼 본문으로 가보죠.
■ 예수님은 앞의 5절과 6절에 이어 이런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니 하지 말라고 호되게 지적하십니다. 혹시 5절과 6절의 기도가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외식 기도’입니다.
‘외식 기도’는,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고자 하는 ‘잘난 체’ 기도입니다. 자신의 위세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이것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짓은 숨긴 채 선한 척하는 ‘위선’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사람들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도이기에 하나님께 결코 인정받지 못하는 기도입니다. 당연히 응답도 받을 수 없는 헛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인정받고 응답도 받고자 하면, “은밀히” “숨으신” “감추어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만 대화해야 합니다. 솔직히 다 내놓고 드리는 기도여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금지 기도를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외식 기도에 이어 ‘중언부언 기도’를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언부언’은 무엇인가요? 중언부언(重言復言)이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금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술 취한 사람 같아 보여서일까요? 미친 사람처럼 보여서일까요? 아닙니다.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 기도를 금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방인이 하는 기도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선택한 신을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기도 태도/특징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사실 반복하는 기도는 불가피하지 않을까요? 꼭 들어주셔야 하는데, 꼭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럼에도 응답이 없을 때, 반복하게 되지 않습니까? 벼랑 끝에 몰린 절박한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 기도는 반복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응답을 주실 때까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의 반복 기도도 금지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금지하신 중언부언은 간절함에서 반복하는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빈말’입니다. ‘빈말’을 반복하는 중언부언입니다. 빈말이란, 실속이 없는 헛된 말입니다. 의미 없이 반복하는 말입니다. 바로 이 빈말, 더욱이 이방인처럼 믿음도 없이 되풀이하는 기도이기에 이를 금지하신 것입니다. 불신앙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기도가 단지 반복의 문제가 아니라, 불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금지하신 것입니다. 왜 불신앙의 기도일까요? 8절을 볼까요?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미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습관적으로 아무 느낌도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7절에 “이방인과 같이”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태도로 의미 없이, 믿음 없이 기도를 반복하기 때문에 불신앙입니다. 더욱이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기도라고 이해하고 있는 이방인의 태도를 본받는다는 것이 못마땅하신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비는 아닌데 회의감이 듭니다. 다 알고 계신다면, 굳이 기도가 필요할까요? 알아서 해주시면 될 텐데 말입니다. 오히려 기도 한 번 더 했다가는 중언부언 기도라고 혼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기도에 회의감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기도에 희의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다 아시지만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 것 같습니까? 기도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지, 믿는지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신앙고백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는 것에 그 어떤 시비나 회의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기도의 선물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기도의 선물’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셨습니까?
‘기도의 선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얻는 것은 모두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죠? 기도는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행위임을 아시죠? 그렇습니다. 기도는 ‘의지 행위’입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 의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기도는 더욱더 선물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꽉 붙잡고 청해야 합니다. 때로는 악착같이, 때로는 읍소로, 때로는 아양으로, 때로는 협박으로 기도드려야 합니다. 나의 필요,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지만 나와 우리의 신앙고백을 받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악착이, 읍소가, 아양이, 협박이 기도의 방법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방법이 아니라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다 아시는, 나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으로서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럴듯한 기도 공식과 프로그램과 비결을 가지고 기도하자는 제안이 온다면 일언지하로 거절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말은 다 허튼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일대일로 은밀한 중에 나누는 영적 데이트입니다. 공식과 프로그램과 비결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기도가 무엇인지 일도 모르는 이들이 공식과 프로그램과 비결을 선전하며 기도의 용사라고 떠드는 것은 다 설레발입니다. 다 허튼소리입니다. 결코 속지 마십시오. 대신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 도넛에 구멍이 없다면 맛이 변할까요? 아닙니다. 도넛의 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양이 달라진다고 맛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세상이 달라진다고 기도가 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맛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하나님 나라의 맛인 기도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 나라의 맛인 기도에 푹 빠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기도의 세계에 흠뻑 취하시길 바랍니다. 바라기는 비전교회가 기도하는 교회이길 소망합니다. 자, 기도하러 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