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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밖으로
석굴암이 건너간 길을 따라 가다.
1. 신발 밖에서 여행하다.
우리는 오나가나 신발을 신고 다닌다. 특히 여행 중에는 잠자리에 들 때라야 겨우 신발을 벗는다. 발이 자유로우면 몸이 자유롭고, 몸이 자유로우면 생각이 자유롭다. 그런 까닭에 신발을 벗고 발을 씻은 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을 때 여행의 묘미가 있다. 생각이 특정한 틀 속에 갇혀있으면 발이 신발 속에 있는 것 같다. 신발이란 자기의 의식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끼고 있는 안경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듯, 신고 다니는 신발에 따라 경험이 달라진다.
“석굴암이 건너 간 길”을 따라 일본 관서지방으로 갔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몸과 마음의 자유를 만끽하며 지나온 길들을 되새김 해 본다.
2. 석굴암이 왜 일본으로?
석굴암이 왜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사람마다 여러 가지 대답을 내 놓을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정답은 될 수 없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영화의 제목이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원전은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祖師西來意)”이다. 당나라 때 유명한 조주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달마 대사는 뭣 때문에 서쪽에서 오셨을까요?”라고 묻자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라고 대답했다. 또 회양 스님이 혜능 스님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什麽物伊麽來)”라고 물었다.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던 회양 스님이 팔 년이나 지난 뒤에야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一物卽不中)”라고 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석굴암”이 나더러 “이 더위에 뭣 하러 왔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해야할까? 할 말은 생각나지도 않고 의문만 가슴 속에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고 있다.
3. 길 위의 삶, 가쿠린지(鶴林寺).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가쿠린지는 고려불화(高麗佛畫) 도난 사건으로 유명해진 절이다. 그러나 나에겐 가쿠린지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가쿠린(鶴林)은 ‘사라쌍수 숲’이라는 뜻이다. 가쿠린지에는 사라쌍수와 보리수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있다. 석가모니는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셨다. 그래서 사라쌍수는 석가모니의 열반을 뜻한다. 사라쌍수의 맞은편에는 보리수나무가 있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석가모니는 부처를 이루었다. 큰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사라쌍수와 보리수나무 사이에 ‘불족석(佛足石)’이 있다. 석가모니의 발자국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발자국은 깨달음과 열반 사이를 끝없이 오고간 발자취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던 발자국과 큰 깨달음을 이룬 뒤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걸어 나온 발자국은 완전히 다르다.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던 발자국이 꿈속의 일이라면 보리수나무 아래서 걸어 나온 발자국은 완전히 깨어난, ‘지금여기’의 생생한 발자국이다. 석굴암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발자국을 남겼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걸어 나온 발자국과 석굴암이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남긴 발자국은 똑 같은 ‘지금여기’의 생생한 발자국이다. 우리는 그 발자국을 따라 이곳에 왔다.
4. 도래인(渡來人)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스카데라(飛鳥寺)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내린다. 안내소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한다. 기후변화로 일본에도 스콜이 내린다고 한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잠시 더위를 몰고 간다. 비가 내린 뒤의 아스카데라는 더욱 깨끗하고 조용하다. 소낙비 떨어지는 소리는 도래인의 영혼이 우리를 맞이하는 박수인가 보다.
‘도래인’은 “물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이다. 일본 사람들은 도래인을 보트피플이라고 외국에 소개한다. 보트피플은 재난을 피해 보트를 타고 바다를 떠도는 사람들이다. 자기들이 도래인에게 선심을 베푼 듯 생색내며 보트피플이란 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도래인 가운데는 보트피플도 있었겠지만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들의 속내가 엿보여 듣기에 민망하다. 제비 다리 부러뜨려 놓고 다시 치료하는 놀부 심보다. 5세기 이후 아스카에는 한반도를 기원으로 하는 토기나 건물, 기와, 온돌 등 도래인의 흔적들이 이를 증명한다.
도래인들이 세운 아스카데라는 일본 최초의 사찰이다. 봉안된 대불도 도래인의 작품이자 일본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금동불상이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스카 지방에 불교가 전래됐다. 당시 아스카 사람들에게 불교는 큰 충격이었다.
숭불파 호족인 소가씨(氏)와 배불파 호족 모노노베씨(氏)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소가씨가 이 싸움에서 이기자 588년에 아스카데라를 짓기 시작해 596년에 완공했다. 1956년 아스카데라를 발굴 조사한 결과 오층탑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서쪽에 금당(金堂)이 하나씩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3개의 불전(佛殿)이 있는 것을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이라고 하는데 고구려 사찰의 기본 형식이다. 최근에는 백제 왕흥사나 신라 분황사도 일탑삼금당 배치였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음은 안내서에 있는 아스카데라 대불에 대한 설명이다.
“아스카불상은 605년 천황과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 소가노우마조 및 각 왕자들의 발원으로 609년 구라스쿠리도노리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높이는 3m로 동 15톤과 황금 30kg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대화재로 전신이 불에 탔다. 후에 다시 보수 됐는데 대체로 아스카데라 조각미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세부적으로도 확실한 아스카의 특색이 전해지고 있다.”
아스카데라를 뒤로 하고 비를 맞으며 다카마스 고분으로 간다. 1970년 10월 경 마을 사람들이 생강을 저장하려고 굴을 파다가 발견된 것이 다카마스 고분이다. 1972년 3월 1일부터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장의 지휘로 간사이대학팀이 발굴 조사했다. 3월 21일 경 석실이 드러나고 선명한 채색벽화가 발견돼 1974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고분벽화의 여인상은 입고 있는 주름치마와 위에 걸친 겉옷의 형태와 색깔이 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와 아주 닮았다. 고분의 조성 시기가 694~710년으로 보이는데 이때는 고구려가 망한지 50년이 지난 뒤다. 벽화의 복장은 고구려 형태지만 얼굴이나 그림 구성이 중국풍을 닮았다. 이때 일본은 당나라 문화 수입을 시도했을 것이라 추정되며 여기에도 도래인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고분은 천여 년 전의 일을 지금 이야기 한다. 나는 이 고분의 주인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천여 년 전의 그의 삶이 궁금하다. “백성과 함께 하는 삶”이었을까? 아니면 권력의 맛에 잔뜩 취한 무자비한 폭군이었을까? 무덤을 만들 때 동원된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일을 했을까?
계속 비를 맞으며 이시부타이고분(石舞臺古墳)으로 간다. 이 무덤의 봉분은 다 벗겨지고 내부의 현실도 외부에 노출 돼 있다.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노출된 돌의 무게가 2300톤이나 된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고 아스카데라 창건을 발원한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소가노 우마코가 이 무덤의 주인이라면 그도 또한 ‘석굴암의 발자국’을 새겨 새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사람이다.
4. 나라(奈良)의 상징, 도다이지(東大寺)
도다이지라고 하면 먼저 대불(大佛)을 떠 올린다. 나라현(奈良縣)에 있기 때문에 나라대불(奈良大佛)이라고도 한다. ‘대불’은 단순히 크다고 해서 대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을 뜻한다. 나라대불을 비로자나불이라고도 하고 노사나불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같은 부처이다.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지권인(智拳印)인데, 나라대불의 수인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시무외(施無畏)’는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말이다.
728년 쇼무(聖武) 천황이 요절한 황태자 모토이(基)를 추도하기 위해 도다이지를 창건했기 때문에 불상의 수인이 시무외인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쇼무 천황은 도다이지를 창건하기 위해 조서를 발표했는데 조서에 “돈이나 권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백성의 마음과 힘을 모아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찰 건립 기금을 모으기 위해 권선한 사람은 교키(行基) 스님이었다. 교키 스님은 고승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고, 다리를 만드는 등 사회사업을 많이 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752년 인도 스님인 보리선나가 대불에 점안(點眼)을 했고, 점안한 보리선나 스님, 사찰 건립을 발원한 쇼무 천황, 개산조인 로벤(良弁) 스님, 권선한 교키 스님 등 네 분이 도다이지 사성인(四聖人)이다. 로벤 스님과 교키 스님은 도래인의 후손이고, 건립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도래인이었으니 도다이지 창건은 국제적이었다고 할 만한다.
1567년 대불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이 소실됐는데 100여년이 지난 뒤 1692년에 중건됐다. 현재의 대불전은 정면 57m, 측면 50m, 높이 47m로 목조 건물로는 세계 최대급이다.
도다이지의 니가쓰도(二月堂)에는 매년 2월에 슈니에(修二會)가 열린다. 슈니에는 평소에 범한 잘못을 관세음보살님께 참회하고, 맑고 깨끗한 몸을 얻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법회로 매년 음력 2월에 열린다. 3월 1일부터 14일까지 니가쓰도(二月堂)에서 진행된다. 슈니에는 렌교슈(練行衆)라 불리는 승려 11명을 중심으로 진행하는데 렌교슈가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대신 참회하고 복을 기원한다. 이 행사는 인기가 높아 멀리서도 참관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5. 부르는 힘, 산쥬산간도(三十三間堂)
정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가 33개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삼십삼간당(三十三間堂)이라고 한다. 건물의 길이가 120m나 된다. 중앙의 큰 불상을 기준으로 좌우에 500분의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정식명칭은 ‘천수천안관세음’이다.
왜 이렇게 많은 관음상을 조성했을까? 관음신앙은 동아시아 불교의 중요한 부분이다. 관음신앙의 바탕은 법화경 보문품이다. 잠시 보문품을 소개한다.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부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이”, 즉 시무외자(施無畏者)다. 삶은 두려움의 연속이다. 어찌 보면 두려움을 없애려는 노력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싶다.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제할 때 32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32간은 관세음보살의 활동을 뜻하고, 중앙의 주불(主佛)까지 합쳐 33간이 된 듯하다.
당 내부에는 국보로 지정된 뇌신상(雷神像)과 풍신상(風神像)이 있다. 우레와 바람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풍성한 오곡을 생산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또 국보인 28부 신중상이 있다. 이들 신의 무리는 천수관음과 불자를 수호하는 신들이다. 이들의 신화적인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했고, 눈에는 수정을 끼워 넣어 옥안(玉眼)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사실성을 두드러지게 했다.
관세음보살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엄마를 부르면 달려오는 엄마 같은 존재도 아니다. 그럼 왜 이렇게 공을 들여 보살상을 만들었을까? 상견중생(相見衆生)이란 말이 있다. “구체적인 모습을 봐야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란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곳을 물을 때, 잘 아는 사람이라면 말로만 해도 충분하다. 말로 안 되면 약도를 그려주거나 지도를 보여준다. 그래도 안 되면 손을 잡고 데리고 가야 한다. 상견중생을 위한 약도나 지도 구실을 하는 것이 보살상이다.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보살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보살님께 부탁하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 셈이다. 잘 부르면 한 번만 불러도 되지만 마음이 산란하면 천번만번 불러도 소용없다.
6. 다 털어 버린다.
- 료안지(龍安寺) 석정(石庭)
아파트를 잘 꾸며 놓았다고 소문난 집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모두 좋다고 했다. 주인더러 물어보니 꾸민 것은 전혀 없고, 가구들을 다 치워버렸다고 했다. 잘 꾸미고 공을 많이 들인 도다이지나 산쥬산간도를 둘러보고 료안지 석정(石庭)을 보러 갔다. 정원이라고 하지만 가로 25m, 세로 15m의 조그마한 정원이다. 나무도 없고 풀도 없다. 돌과 모래만으로 정원을 꾸몄다. 선(禪)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Zen Style이라는 말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일본정원의 특징은 축경(縮景)이다. 축경은 자연을 축소해 표현한다. 유기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를 이용하기 때문에 고산수(枯山水)라고도 한다. 모래는 큰 바다를 상징하고 돌은 섬을 표현한다. 돌 주변에 마른 이끼를 심어 해변의 모래톱을 형상화했다. 또 모래를 갈아 파도를 만드니 조그만 정원이 바로 큰 바다로 바뀐다. 축경은 원래의 자연을 축소한 형태로 사진이나 사생화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축소한 의미가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 나무를 심더라도 천천히 자라는 침엽수를 활용하고, 활엽수를 사용하더라도 늘 깎고 다듬어서 축경한 것을 계속 유지하게 한다.
어디 가서 뭘 얻어오면 간 보람이 있다고 하지만 버리고 오면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가뿐하다. 낚시꾼도 등급이 있다. 어획량 자랑하는 어부급이 있고, 월척을 자랑하는 낚시꾼도 있다. 낚시가 어느 단계에 오르면 빈 망태 들고 왔다 갔다 한다. 료안지 석정을 떠나려니 빈 망태 들고 다니는 낚시꾼 생각이 난다.
7. 신사(神社)에 울리는 고려종(高麗鐘)
효고현(兵庫縣) 오노에(尾上) 신사에 고려종이 있다. 고려 전기에 청동으로 만든 종이다. 우리나라의 종루는 완전히 개방돼 있는데, 오노에 신사의 종루는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문에는 큰 자물쇠가 걸려 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관리인이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어준다. 이 종루는 일본의 주요 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타종한다고 한다.
종루 안에는 특이한 조각 작품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남근을 상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나무토막을 상하로 포개 놓았는데, 남근과 여근을 상징하는 듯하다. 절에 있어야 할 종이 신사에 있고, 종루 안에 이런 조각상이 있으니 그 관계를 가늠할 수 없다. 효고(兵庫)라는 지명처럼 효고는 군의 보급기지라는 뜻이 있으니 언제나 앞날을 짐작 할 수 없고, 죽음이 늘 가까이 있는 탓인 듯하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생각 따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신발을 신어야 할 시간이 다 됐다. 어쩔 수 없다 빈 망태 들고 간사이공항으로 갈 수 밖에.
첫댓글 김일두 선생님.
두루두루 고맙습니다.
글빨이 워낙 좋아 '흔적'이 다 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