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론-1.pdf
기독교의 미래
(교회의 위기를 보며)
김윤식 목사
교역자론
목 차
서 론 2
1. 신학생 선발과정 개선 8
2. 신학교육 개선 17
3. 소명과 사명의식 21
4. 물질과 이성 초월 26
5. 겸손과 섬김 41
6. 훈련과 연단 47
7. 응답과 헌신 53
8. 절제와 순종 58
참 고 63
서론
이구동성으로 한국교회의 위기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뚜렷한 대책이나 노력이 없고 비평과 한탄만 난무하지 않는가? 교역자는 필요할 때 인력센터에서 불러다 쓸 수 있는 하루품꾼이 아니지 않는가? 교역자의 양성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본인은 개신교 전체와 한국교회 전반적인 문제와 대책을 묵상하면서 우선 교역자의 문제점과 대책을 생각하며 그 해결의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 24-28)
오늘날 교계 지도자들은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장로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지도자 한 사람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그 단체는 존폐의 여부가 결정되며 발전과 퇴보가 좌우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흥망성쇠도 전적으로 교역자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교역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은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고, 방언과 신유의 은사로 많은 표적을 행하여 구름처럼 몰려오는 교인들로 순식간에 큰 교회를 이루고, 유명한 목사가 된 분들을 신령한 분, 능력이 있는 분, 참신한 분으로 인정하고 또한 교역자들도 이러한 분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참고하며 조심해야할 것을 생각해 보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또한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목사가 되었든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우신 종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평신도의 일반적인 인식인 것 같다. 그러나 상기 말씀을 보면 분명히 잘 못된 주의 종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분별할 것이며 혹 잘 못된 분별로 어느 교역자를 불신하거나 무시하게 된다면 이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조심스럽게 몇 가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속담에도 “되려는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8-20)
현 시대의 기독교 지도자들(목사)의 타락과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저 사람은 목사인데도 믿을 만하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부터 살펴보며 무엇이 문제인가?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신학생 선발과정 개선
좋은 씨를 뿌려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교역자는 신학입학선발 과정이 아주 중요한 단계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신학교지원자 일부는 실력이 부족해서 이 대학, 저 대학에 지원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다가 안정권을 찾아 “신학대학에나 지원하자!”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이심전심으로 모 신학대학에 몰려 백 몇 십대 일의 지원율이 된 적이 있다고 들은바 있다.
반면에 미달된 신학교가 많아서 학생유치를 위한 안간힘을 쓰기도 하며 그러한 신학교에서는 지원자를 무조건 다 합격시켜 받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교역자는 선택된 자이며, 선별된 자이어야 한다. 과연 누가 그것을 판정할 것인가?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신학교 입학생 선발은 한국교회 개혁의 첫 단추라고 말 할 수 있다. 씨앗이 좋아야 좋은 나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교역자는 선천적인 적성과 후천적인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성악가를 기르는데 선천적 음치를 아무리 교육을 해도 성대 구조상 제대로 발성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개인적으로 노래는 잘 하는 것 같으나 전문가가 볼 때 미숙한 면이 많을 것이며, 반드시 좋은 스승을 만나서 교육을 받아야 훌륭한 성악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믿음이 좋고 열심이 있고 재능이 뛰어나고 지능이 높으면 좋은 교역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근본적인(선천적) 교역자의 영성 DNA가 필요할 것이다. 즉 음악의 천재성이나, 체육의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자들을 발굴해서 양성시키는 것처럼 교역자도 선천적인 속성이 있는 자들을 발굴해서 육성해야 할 것이다.
교역자는 인격의 순수성과 진실성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이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부흥회에서 은혜 받아 회개하고 교역자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지원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잘 못된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 결심 보다는 선천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할 것이다.
우선 객관적으로 신앙적 가족환경을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선조의 신앙 이력과 가족, 친척의 신앙적 배경을 참작하고 선조의 사회적 이력도 참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단히 조심스럽게 비유를 들며 이 비유로 시비가 없기를 바란다. 단순한 이해를 돕기 위함임을 전제한다. 옛날 양반집 자녀들은 기풍(氣風)이 달랐다. 즉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이 달랐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랬다. 신앙적 가문에서 자란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기 마련이다. 보고 듣는 것이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다를 것이다.
물론 신학교지원자 자신의 신앙이력은 더 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어려서부터 교회출석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친구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온유 겸손한 자였는지, 난폭한 성격은 아닌지, 진실하고 성실한지 등등 참조하면 좋겠다. 주일학교나 교회에 신앙기록부가 있고 객관적으로 잘 평가기록 되었다면 참 좋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모태신앙인지, 직분자의 자녀인지 당연히 참고가 되어야 할 것이며, 사회봉사활동 이력이나 희생정신이나 베푸는 삶의 이력도 참고해야할 것이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이 목사가 되었어? 그분이야말로 성직자감이지" 또는 "그놈이 목사가 되었어? 말도 안 돼" 이런 평가는 무시할 수 없는 말이다. 그가 자랄 때 주변에서 그 사람을 잘 알던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라면 상당한 참고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입학지원자는 초, 중, 고, 대 전 과정의 생활기록부, 성적표를 첨부해서 평가를 받도록 하는 것도 좋은 지원자를 선별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성적의 정도를 보고 성실성이나 진실성을 참고할 수도 있고 생활기록부에 나타난 평가를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으면 그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역자만은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스프링이 제압장치에 눌려 있을 때는 일반 코일 같지만 장치가 벗겨지면 튀어 오르지 않는가?
이상의 내용들과 더 참고해야할 내용들을 전문요원들이 연구하여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평가하고 선발 조건에 반영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바울이 다메석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다고 단번에 변화되어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삼년간 기도와 영적 수련의 생활이 있었고 육체의 가시가 있는 고통을 견디면서 더 큰 은혜를 깨닫게 되고 결국 위대한 사도가 되지 않았던가?
그는 베냐민 지파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율법의 정통자요, 로마 시민권 자였으며, 이러한 것들이 사도로 쓰임을 받는데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씨앗의 종자를 선택하는 것, 그 종자를 개량하는 것, 그 씨앗을 잘 가꾸는 것에 비유해 보자. 호박씨를 수박씨로 만들 수는 없다. 먼저 호박씨인지 수박씨인지 선별되어야 하고, 수박씨를 씨 없고 당도 높은 수박으로 개량하기 위해서 연구와 실험과 노력이 필요하며, 그 씨를 심고 잘 가꾸는 과정을 거쳐서 결국 좋은 수박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가 되는데 수학이나 미술이나 과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목이 목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과목을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공통으로 수업을 받았다면 어느 수준은 되어야할 것이다. 그 수준이란 그 사람의 성실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성적이 좋아야 신학입학생이 된다는 것은 모순이 있는 것 같으나 또한 성적만 좋다고 합격이 되는 것도 모순이다. 성적은 성실성의 척도로 삼고, 앞서 거론한 내용들과 잘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다.
2. 신학교육 개선
세 살 버릇이 여든 살 까지 간다.
앞에서 논한 과정을 거쳐 엄선된 신학생이라도 신학교육을 어떻게 받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신학 교육과정 커리큘럼은 매우 중요하다. 교육은 신학교교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 초 중 고등과정도 대단히 중요하다. 학문적 지식을 위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윤리적 도덕교육도, 사회적 봉사활동 등 전반적인 교육을 정상적으로 이수하여야 할 것이다.
같은 철이라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철을 자르기도 하고 뚫기도 한다. 불에 달구고 식히는 과정과, 불에 달구어 연마한 정도에 따라 즉 불에 달구고 망치질을 하는 과정을 몇 번을 했느냐에 따라서도 다르며 용광로에 녹일 때 어떤 금속을 합성했느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공수부대 훈련을 받은 군인은 일반 보병훈련을 받은 군인과 전투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과목도 중요하고, 그 과목을 누가 어떻게 가르치느냐 도 매우 중요하다.
명문학교의 기준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수진, 커리큘럼, 도서관, 신입생 선발기준 및 수준 등이 평가될 것이다.
간혹 예능분야에서 지원자는 많아도 합격자는 한 명도 없는 경우가 있다. 신학교는 더더욱 그러한 원리에서 신입생을 선발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던지 신입생 정원을 늘리려 하고, 정원을 채우기 위해서 실력 미달자도 합격을 시키는 것은 대단히 큰 모순이다.
나는 대학 입학식에서 “여러분 중에 한 명이라도 졸업생이 나오기를 바란다.” 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철저한 교육을 받아서 졸업 수준에 달해야 할 것을 말했다. 강도 높은 수업을 하였더니 수업거부 운동도 일어났었다. 입학생 수준이 너무 낮았던 것이다. 중학교에 유치원생이 입학한 격이었다.
실력이 높다는 것은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그만큼 성실했다는 증거이다. 중고등학교 실력이 부족하다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재능 또는 취향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면 된다. 그러나 목회자, 선교사로 지원하는 신학생은 각 학과실력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 성적으로 성실성을 측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3. 소명과 사명의식
배운 게 도둑질 격이 되어서야!
신학지원자가 미래 직업의 한 수단으로, 또는 출세의 한 방법으로, 또는 실력이 부족해서 신학의 길을 택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모순이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사명감에 충실하여 소명에 응답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 4:1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20-22)
어떤 이권이나, 명예나, 권위 또는 취미나, 오락도 사명을 위해서는 포기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래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않는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교역자의 길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세속적인 삶에 비교할 때 나온 말이다. 성경은 분명히 쉽고 가벼움의 비결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다. 단 주님께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된다는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십자가라고 할 때 십자가는 고통의 대명사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부활은 영광이다.
이렇게 비유를 들어본다. 평균 일당이 십만 원인데 어떤 힘든 일을 하는데 하루에 천만 원을 준다고 하면 거절하겠는가? 힘들뿐 아니라 수치스럽더라도 마다하지 않겠는가? 왜 그럴까? 당연히 보상이 크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보상보다 큰 것이 어디 있는가? 십자가의 보상은 부활이다. 부활의 가치를 모르면 힘들지만 바로 알면 십자가보다 가벼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사역을 진행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잘 못하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어려움이 있고 밤을 새우고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기쁨이 충만하면 힘든 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4. 물질과 이성 초월
무당이 굿보다 젯밥에 관심 격
교역자의 문제는 물질문제와 이성문제라고도 한다. 교역자가 가족이 없다면 물질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문제는 결혼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을 비교해 본다면 결혼을 한 사람이 더 외도가 많은 것으로 본다.
교역자는 재산을 갖지 않아야 한다.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면 그것에 집중하게 될 것이며 목회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무당이 굿에는 관심 없고 젯밥에만 신경 쓰는 격이다. 그러나 가족부양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 본인이 스스로 헌신을 결단해서 독신을 택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이 좋을 것이다.
물질은 모든 생활에 기본이며 필수이다. 그러나 교역자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한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며 혹 재산이 있다할지라도 관리자(청지기)로서의 자세가 되어야할 것이다.
자연히 가족이 있다 보면 가족부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물질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목사들만 모인 자리에서는 자연스러운 화제는 사례금, 퇴직금, 연금 등 서로 비교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며 노후 대책을 구상을 하기도 한다.
교역자는 물질에 연연하여서는 아니 된다. 교역자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히 일반인들 못지않게 교역자도 경제적 부담을 않고 있다.
사흘 굶어 담 뛰어넘지 않을 사람 없다고 한다. 자연히 사례금 시비가 일어날 수 있고, 저울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을 행하거나 물질에 치우쳐 본연의 사명을 소홀히 할 수 있다.
부정이나 사명에 소홀히 하거나 목회의 열정이 분산된다면 그만큼 교회성장에 영향이 갈 것이며 극단적인 경우는 교회가 폐쇄되는 경우도 올 수 있는 것이다.
교역자도 부동산 투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일반 투자나, 어떤 수익사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현실에서 목회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겠는가? 교인은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세상으로 나가거나 타 종파로 가기도 하지 않겠는가?
목사의 독신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독신이라면 이성적인 범죄 가능성을 고려해서 교회가 미혼 목사를 청빙하지 않는 것이 거의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건전하고 신실한 사명감이 있는 목사라면 독신의 경우라도 이성적 실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기 때문에 결혼한 목사를 찾는 것이다. 독신이기에 이성적 염려가 된다면 그는 결혼해도 이성적 실수를 할 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범죄가 결혼한 개신교 목사와 결혼하지 않은 천주교 신부를 비교해 볼 때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천주교 신부가 이성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는 아직 접하지 못했다. 물론 교황청 안에 일부의 스캔들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번 미투 열풍에 드러나기도 했다.
이성적 경험(결혼이나 부정한 관계)을 가진 사람은 이성적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목회자라면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거나 아니면 모태로부터 구별되고 본인 스스로 목회자의 결심을 하여 이성적 경험이 없이 성결한 삶을 살고, 모든 정열을 주님을 위해서 바치고자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으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상 좋은 목회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목회자는 교회가 재정적 부담을 덜 가질 것이며 그만큼 교회가 성장하는데 재정이 사용될 것이며 목회자 역시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결코 부정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목회 열정이 분산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거론 한 것이다. 독신의 장단점이 있지만 여기서는 독신을 주장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과 현실적인 문제만을 거론하는 것이다. 타 종교처럼 일률적으로 독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목회에 열정을 쏟기 위하여 독신을 결정하는 교역자라면 더 없이 바람직한 목회자라는 것이다.
이성관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 결혼할 사이일지라도 결혼 전 동거나 동침은 절대 용납될 수 없으며 더더구나 목회자가 될 사람은 약혼을 했다할지라도 결혼 전까지는 성결을 유지해야할 것이며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고서 청소년들의 성결을 지도할 수 없을 것이다.
목회자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의해서 선별되어야 하고 성장하며 본인 스스로 결단하여 모든 생활이 경건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인격으로 성숙해 져야할 것이다.
선별된 사람은 교회(교단)가 양육비와 교육비를 전담해서 신학을 졸업할 때까지 전 비용을 부담해야할 것이다. 지금의 신학교 운영 상태는 신학생으로부터 학비를 받아야만 운영할 수 있는 현실이다.
교회는 교역자의 생계를 보장해야한다. 그러니 식구가 많으면 교역자로 청빙을 받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교회도 많은 부담감을 갖기 때문에 꺼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는 교역자가 독신이라면 좋은 조건이 될 것이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마 19:12)
타 종교나 종파에서 독신제도를 갖는 것과 비교하거나 선호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밝혀둔다.
나의 경험상으로 느낀 점도 참고하여 부언하려고 한다. 나는 결혼을 후회한 적이 있다.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특히 자녀들이 남부럽지 않은 자녀들로서 그들이 없었다면 무슨 행복이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다만 주의 일을 하는데 가족을 부양하는 일로 그만큼 열정이 분산된 것은 사실이다. 가족부양의 문제만 없었다면 더욱 집중적으로 한 가지 목회에 전념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으며 내가 지금 총각이라면 결혼하지 않고 목회를 선택할 것 같다.
결혼하여 이성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이성에 대한 절제가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경험이 없는 독신과 결혼을 경험한 사람과 비교한다면 독신자가 훨씬 이성범죄율이 낮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직자로서 경건하고 성결한 삶을 결단하고 출발한 성직자의 경우를 생각한 것이다.
천주교의 독신 성직자와 기독교의 결혼한 성직자의 이성 범죄율이 어느 쪽이 높은가는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보도된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개신교에서는 담임교역자로 미혼 교역자는 청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이성적 불미스런 일이 발생할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미혼 교역자와 평생 독신으로 충성을 다짐하는 교역자와의 비교는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결혼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께만 열정을 쏟아서 충성하려고 하는 교역자라면 경건생활이나 충성정도나 물질문제나 교회 재정문제 등에 많은 개선과 발전이 있을 것이다. 그런 각오와 결심이 있는 목회자 지망생이 있다면 더 말할 것 없이 좋을 것이다. 독신생활도 초월해서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 결심-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4-6)
교역자가 결혼을 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이거나 반드시 독신만이 진실한 교역자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가족부양의 부담이 없는 자가 더 열심히 사역을 감당할 것이고, 물질에 의한 불미스런 일도 없을 것이며, 교회재정의 어려움도 덜할 것이라는 논리다.
이 내용의 목적은 결혼의 필요성 유무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교역자의 열정이 변해야한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의 교역자가 전적으로 교회에 헌신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가족이 있는데도 가족을 외면하거나 초월해서 헌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추리닝만 입고 달리는 선수와 양복과 코트까지 입고 달리는 선수 중 누가 더 잘 달릴 수 있겠는가?
기독교 성직자 독신문제는 앞으로 많은 연구와 검토와 공감대가 필요한 문제이다. 이성적 타락과, 사업의 실패와, 가정의 파탄과, 사회적 낙오에서 비로소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은 평신도로서는 대단히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으나 성직자로서는 많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한 번 경험한 사람은 재범할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현 교역자들 중에는 부인이 내조하고 가족이 협력해서 사역을 더 잘 감당하게 하는 분들도 없지 않고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객관적으로 전반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목회자들이여! 과연 결혼을 후회할 정도로 열정을 쏟고 있는가? 역시 독신이 더 잘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혼을 생각만이라도 한다면 그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이라면 이혼을 생각만 하는 그 자체도 이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 성직자들이 이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결행하며, 이중생활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니 진실한 목회가 될 수 있을까?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27-32)”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본인 스스로 결혼을 포기하고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결심하는 자가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러나 강요나 권유에 의해서 독신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5. 겸손과 섬김
교만은 패망의 선봉 겸손의 존귀의 앞잡이
교역자가 영적권위를 가져야한다는 명목으로 다분히 인간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권위는 상당히 교만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영적권위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영적 권위는 겸손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35-45)”
교역자가 주님의 좌편 우편에 있는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교역자는 섬기는 자, 대속물이 되는 제물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권위는 생활과 말씀에서 나와야 한다. 개신교 목회자의 설교가 얼마나 준비된 설교인가?
원고를 빈틈없이 완벽하게 신학적으로, 성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느 면으로 보나 흠이 없게 작성된 설교라고 해도 듣는 이에게 영적 감화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목회에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한 목회자의 설교가 얼마나 영적 힘이 있겠는가?
목회자의 생활이 곧 말씀이 되어야 한다. 경건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겸손하여 생활과 설교의 말씀과 일치할 때 영적 권위가 있지 않겠는가?
목회자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휴식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휴식이나 일반인들이 갖는 같은 휴식을 필요로 한다면 모순일 것이다. 대개 목회자들이 월요일은 스스로 휴일로 정하고 있는 것이 보편화 된 것 같다. 목회자에게 휴일이 있을 수 있는가? 제사장은 평생 제단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구약에서 정하고 있다.
사업이 바쁘면 직원들은 쉬어도 사장님은 쉬지 못한다. 직원들은 삯군이고 사장님은 오너이다. 목회자는 삯꾼인가 오너인가? 즉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직원은 출퇴근 시간만 잘 지켜도 우수 직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는 출퇴근이 없어야 한다. 목사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기 위하여 근무시간이 일정하고 개인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은 직원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사는 물론 필요에 따라서 개인시간이나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24시간 모두 목회에 전념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목사는 기업이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기업이 있거나 공적인 기업의 대표나 실무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개인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로서 맡은 자가 되어야할 것이다. 즉 그 기업이 개인의 부를 형성하고 평안과 만족을 위해서 쓰여 진다면 잘 못이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7-10)
6. 훈련과 연단
일당백의 훈련
국가대표 스포츠선수를 기르기 위해서 특별 선발과정이 필요하고 훈련과정이 필요하다. 즉 선수촌에 들어가서 특별 훈련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더더욱 훈련과정이 철저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집이 가깝다고 해도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신학공부를 하며, 기숙사에서 실시하는 특수 영성훈련의 과정을 잘 거쳐할 것이며, 목사가 된 후에도 수도원 같은 제도에서 일정기간 수련을 마친 후 목회 일선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교단 차원에서 교역자 수련을 위한 제도와 커리큘럼을 만들어 실행하되 의무적인 수련이 될 수 있어야 하며 수련을 필한 자에게는 특별한 혜택이나 자격을 부여하는 것도 좋은 제도가 될 것이다.
교역자는 수련의 과정 중에 최소한의 성경 요절과 찬송가 가사와 곡을 암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신학교에서는 매주 암기상태를 점검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고 외국어도 영어와 제2외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영어나 제2외국어로 성경요절과 찬송가 및 복음성가를 암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시대에 선교사가 되지 않고 국내 목회를 한다고 할지라도 같은 수준의 어학실력을 갖춰야할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2-6)
수련의 프로그램은 전문인에 의한 전문적인 편성이 필요하되 전도실습, 해외선교실습, 설교문작성, 기도문 작성, 찬송부르기, 예의범절, 전문분야 인사 특강 등 적절한 기간 동안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이 성경을 너무 읽지 않는 것 같다. 설교 작성을 할 때 참고 서적이나 성경을 보지 않고도 작성할 수 있어야할 만큼 성경이나 책을 많이 읽어야할 것이다. 한의사가 진단을 한 후 처방전을 낼 때 참고서적을 보지 않고도 처방전을 쓰는 것과 의학서적을 뒤져가며 기록하는 것과는 신뢰도가 다르다.
목회자는 반드시 설교문을 작성하여야 한다. 그러나 설교문을 보지 않고서 대중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설교할 수 있도록 숙지하고 특별한 부분 즉 통계 숫자나, 참고 자료를 인용한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설교문을 읽느라고 대중을 보지 못한다면 설교효율이 반감 될 것이다.
목회자는 주일 설교를 마치면 월요일에 즉시 설교문 원문을 인쇄해서 전도지로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면 교회를 나오지 못했던 사람도 설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현재의 전도지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업체에서 그림이나 사진을 전문적으로 디자인 하고 몇 마디 멘트나 성경구절 몇 구절을 적절하게 편집해서 만든 것이며 다량으로 인쇄된 것을 지교회명과 주소 담임목사 이름 등을 기록해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전도지는 낭비적이며 실효성이 없고 전도지를 접한 사람들이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받지도 않거나 받아도 바로 버리는 현실이다.
교역자는 큰 교회를 부러워하지 말고 현재의 맡은 사역을 만족하며 감사하게 여기고 충성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부러워 한다는 것은 욕심이며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7. 응답과 헌신
죽음보다 더 큰 능력은 없다.
교역자가 된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큰 잘 못이다. 누구의 부름을 받고 누구의 임명을 받았는가에 대한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임명을 받아 청와대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몸가짐이나 언어나 행동이나 직무를 수행하는 자세나 여러 가지 남달라야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직무가 교역자 아니겠는가?
사역을 하다가 힘들면 그만둘 수도 있다는 자세를 가졌다면 그는 본래부터 사명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력이 부족해서 고르다 보니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고, 졸업하고 나니 갈 곳은 없고, 일자리도 없고, “배운게 도둑질”이란 말처럼 신학교를 나왔으니 목사안수나 받고 오라는데 없으니 교회나 개척하자 하는 경우가 있다면 취직 못해서 자영사업을 시작하는 격이다. 과연 온전한 교회를 세울 수 있으며 온전한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목사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생명을 받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할 것이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23-30)
목회자는 받은 사명에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부인은 경제문제로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해야 하고 목사는 목회를 하며 알바를 뛰며 이중생활을 하면서 신령한 목회가 가능할까? 굶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녀 교육도, 경제생활도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현실이 아닌가? 독신이라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큰 교회 유명한 목회자의 자녀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정상적인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랐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교회 담임목사라고 할지라도 어딘가 잘 못된 것이 있지 않겠는가?
8. 절제와 순종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
성도를 십자가의 군병이라고 한다. 군인은 통제되고 절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원칙이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전쟁 중에는 총알받이 부대가 있다. 적군의 매복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명령에 의하여 총알받이로 죽어야한다. 목회자는 총알받이가 아니겠는가? 생명을 제물로 드리는 서약이 없이 목사가 된 자가 있는가?
취미생활이나 대인관계가 일반인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술, 담배, 도박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관계는 철저히 절제하는 경건생활이 되어야 한다. 신학생들 중에도 연애를 하고 혼전 임신을 하고 유산을 시키고 헤어지는 등 일반인들보다 더 음란한 자들도 있다.
회개하면 그만이라는 인식은 깊이 고려해야할 것이다. 상처와 흔적은 남아 있는 것이며 남을 실족케 할 수 있으며 배척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삿 13:7)
천하장사라도 무거운 바위를 굴릴 수 없지만 지렛대를 활용하면 쉽게 굴릴 수 있을 것이다. 교역자의 능력은 물리적 능력이 아니라 영적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교역자들이 병을 잘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면 능력 있는 목사라고 할지 모르나 진정한 능력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능력 있는 자요, 주님은 최고의 능력자이시다. 교역자의 사명은 궁극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며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다. 하물며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어떻게 구령사역을 할 수 있겠는가?
목회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곧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충만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참고
본인은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실버 목회자로서 경험과 깨달음을 중심으로 이 글을 기록 하였습니다. 교회를 세 번째 개척했고, 해외에는 여러 교회를 설립(건축)하는데 기여했으며, 국내에서는 타 교회건축에 여러 번 참여했던 경험도 참고로 하였으며 우선 초안이라도 함께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여러 목회자들의 중지를 모으기 위하여 게시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김윤식 목사 010-3347-3202(카톡)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181번길 17
선교중앙교회(예장통합 안양노회)
www.wccc.ac kim4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