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사님, 제 전생이 뭡니까' 정말 많이 들어온 질문이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과연 전생이 있을까. 전생이 있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 흐르는 강이었을까, 부지런한 소였을까, 아니면 왕이었을까. 답답한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전생을 상상하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절실히 전생을 알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개는 현생이 전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직후다.
내가 처음 전생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우리 반에는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양수길이란 친구가 있었다. 수길이와 나는 절친한 딱지친구였다. 우리는 딱지와 구슬로 돈독한 우정을 쌓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길이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너는 전생에 명이 짧아서 오래 못 살겠다"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전생이 뭔데?" 수길이는 되물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 "태어나기 전에 자기가 진 업이야"라고 짧게 말한 뒤 입을 닫았다. 지금 생각해도 간단명료한 답 같다.
며칠 후 수길이는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뇌염에 감염된 것이다. 그때부터 불안해졌다. 희미하게 보였던 수길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수길이가 죽으면 어떡하지?' 잠시 상태가 좋아졌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얼마 못 가 수길이는 눈을 감았다. 수길이의 죽음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교실에 앉아있는 죽은 수길이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10월, 완연한 가을이었다. 당시 전주초등학교 교정의 수영장 뒤쪽에는 비료로 쓰기 위한 건초더미가 높이 쌓여있었다. 나는 그 위로 올라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내가 왜 수길이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과연 내가 말하는 전생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전생에 누구였을까. 그때 수길이 영가가 찾아왔다. 우리는 평상시처럼 딱지를 칠지, 구슬을 칠지 얘기했다. 또 더 추워지기 전에 물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약속하는데 수길이 영가가 물었다. "내가 일찍 죽을지 어떻게 알았어? 정말 전생이 보였어?"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어머니였다. 땅거미가 지도록 집에 오지 않자 학교로 사람들을 데리고 찾으러 오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건초더미 위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앉아있자 꽤나 놀라셨는지 서둘러 나를 끌어 내리셨다. "안녕! 또 보자!" 나는 수길이 영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직도 건초더미 위에서 내게 작별인사를 하던 수길이 영가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동안 전생에 대해 잊고 지냈다. 전생을 고민할만한 사건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꿈 많던 사춘기 시절을 보낼 무렵, 당시 덕수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방과 후 장충단 공원을 산책하다 '까악!'하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뛰어 가보니, 덕수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선배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여학생 말로는 깡패들이 자신을 희롱하자 마침 지나가던 선배가 이를 저지하다가 누군가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살인사건을 증언하기 위해 경찰서로 갔다. 알고 보니 죽은 선배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착실하게 공부해온 모범생이었다. 오열하는 선배 어머니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착한 내 아들을 누가 데려갔습니까! 전생에 무슨 죄를 져서 우리 아들이 업을 받아야 합니까!"
잊었던 전생에 대한 화두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열심히 공부하던 선배가 어느날 생판 모르는 여학생을 보호해주다가 불량배의 칼을 맞고 죽은 기가 막힌 사건의 원인이 순전히 현생에만 있을까. 현생에만 있다면, 어떻게 아무런 인연 없는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만나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을 맺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본격적인 전생에 대한 탐구가 시작됐다. (계속)
제 전생은 무엇입니까? (2)
"팥죽같은 피는 내가 마셨던 사약"
살인사건의 증인이 된 후, 전생의 존재는 나를 괴롭혔다. 전생, 전생을 알아야 한다. 전생을 알면 현생의 비밀도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 우선 나의 전생부터 밝혀야 했다.
오래도록 전생의 화두는 해결되지 않았다. 사춘기 소년의 열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기억을 과거로 퇴행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의 일이었다. 고향인 전주에 가기 위해 서울역에 온 나는 기차표를 끊기 위해 망설였다.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았지만 왠지 특급열차인 태극호를 타고 싶었다.
결국 호남행 특급열차인 태극호에 올라탄 나는 한복을 차려입은 중년부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곱게 늙은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어디선가 뵌 것 같았다. 그 분도 그랬는지 몇 번이나 내 교복에 붙어있는 명찰을 훔쳐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차가 대전역에 정차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혹시 차 부소장님의", "혹시 제 돌잔치때 오셨죠?" 사색이 된 쪽은 아주머니였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나도 알 수 없었다. 눈앞에 하얀 섬광이 비치더니 갑자기 모든 장면이 기억났다.
내가 돌 때, 아버지는 S공장 관리책임자로 계셨다. 그때 유명한 역술인 한 분이 내 돌잔치는 무조건 크게 해줘야 한다고 말해 아버지는 마치 마을 잔치처럼 성대하게 돌잔치를 해주셨는데, 그때 온 기생들 중 단연 돋보였던 '소옥'이라는 기생이 바로 부인이었다.
가무에 능하셨던 부인은 훗날 자산가와 결혼했지만 6ㆍ25때 남편이 실종되었고, 남편의 유산으로 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후원 사업을 하시며 전주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셨다. 부인은 내가 '소옥'이라는 기명까지 또렷이 기억하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목적지인 전주역에 도착하자, 부인은 내 손을 꼭 잡으며 "학생은 아버지랑 많이 닮았어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라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렸다. 태극호 기차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고운 한복을 입은 부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기차 안에서 '순간 기억 퇴행술'을 터득한 나는, 내가 태어난 순간까지 기억해내는데 성공했다. 새벽 3시 30분경, 어머니의 출산이 임박하자 밤 12시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의사가 직접 나를 받았는데,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키가 작은 분이었다. 어머니께 여쭤보자 어떻게 기억하냐며 놀라워하셨다. 또한 그날, 뇌성벽력이 울렸던 사실도 확인됐다.
기억을 퇴행하자, 출생시 내가 당한 고통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특히 머리의 고통이 심했다. 산통은 산모뿐 아니라 태아에게도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 고통 속에서 죽는 존재임을 알게 됐다. 기억 퇴행술로 출생 순간까지 온 나는 가슴이 벅찼다. 출생순간은 전생과 현생의 분기점이었다. 만약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드디어 내 전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은 힘들었다. 전생을 목격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21세, 당시 나는 폐결핵 말기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매일 피를 토하며 병마와 싸우고 있었는데 저항력이 약해진 탓인지 '모택동 독감'마저 걸리고 말았다. "우웩!" 팥죽 같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 나는 이제 죽는구나!'
그때였다. 너른 마당 한가운데 앉아 사약을 받아 삼키는 상투를 튼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이 눈에 보였다. 집은 마치 임금이 사는 궁처럼 으리으리했다. 그 주위로 장총에 칼을 꽂은 일본 군인들이 사위를 살피며 횡행했다.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기울어버린 국운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현생에 쏟은 팥죽 같은 피, 그것은 전생에 내가 마신 사약이었다. (계속)
제 전생은 무엇입니까? (3)
업의 악순환 피하려면 '용서'해야
나의 전생을 목격한 뒤, 타인의 전생도 보이기 시작했다. 전생은 틀림없이 존재했다. 다만 환생하면서 전생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릴 뿐이었다. 그러나 현생을 보면 전생도 알 수 있다.
현 국립극단 예술 감독인 이윤택씨. 그는 나를 통해 독특한 전생체험을 하게 된다. 91년, 곧 일본으로 출국할 예정인 이씨를 우연히 한국에서 만났다. "이번에 일본에 가면 틀림없이 전생을 알게 되는 사건이 있을 겁니다." 그는 내 말을 흘려들었다고 한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자 모 신문사 편집국장이란 사람이 친절하게 그를 안내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안내로 그가 간 곳은 일본의 유명 시인이자 화가였던 '유메노 교사쿠'의 추모회였다. 1948년에 사망한 유메노 교사쿠는 한국의 천재 시인 이 상에 비견되는 광기와 귀기를 소유한 예술가였다.
유메노 교사쿠에 대한 안내 팸플릿을 읽던 이씨는 놀란다. 그의 시선은 '시간'이라는 시를 읽고 있었다. '시간', 이것은 이윤택씨의 첫 데뷔시의 제목과 일치했다. 제목 뿐 아니라 주제와 문장까지도 비슷하자 자신도 모르게 사진을 대조했다. 자신보다 키는 컸지만 튀어나온 광대뼈, 올라간 눈매, 짙은 눈썹은 현재의 이윤택 씨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또 유메노 교사쿠는 몸에 열이 많아 글을 쓸 때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괴벽이 있었는데 이는 이씨의 버릇이기도 했다.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한국문화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유메노 교사쿠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인 이윤택 씨. 두 사람의 공통점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반면 전생의 업을 피하지 못한 남자도 있다. 실명을 밝힐 수 없는 P씨는 현재 미국 법정에서 살인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14년 전, 그가 처음 뉴저지 법당에 왔을 때, 나의 첫마디는 '갖고 있는 권총을 모두 없애라'였다. 당시 그의 직업은 해결사였다.
그 즉시 권총도 없애고 직업도 바꾸며 열심히 법당에 나왔던 P씨. 그러나 전생의 흔적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자신만의 숟가락을 갖고 다녔다. 남이 보면 위생관념이 투철한 사람이라 생각했겠지만 실은 전생의 습관이었다. 그는 전생에 지리산 빨치산 부대의 부관이었다. 당시 빨치산은 손잡이 부분을 부러뜨린 숟가락을 당증(黨證)으로 삼아 신표처럼 품고 다녔는데, 바로 이런 습관이 현생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전생의 이력은 92년 LA 흑인폭동 때 유감없이 발휘됐다. 폭동 직전 LA에 꼭 가야만했던 나는 예감이 좋지 않아 P씨를 데리고 갔다. 며칠 후 폭동이 터졌고 그는 내 말에 따라 재미교포를 보호하는 작전을 수행하며 화려한 사격 솜씨로 흑인폭도들을 진압했다. 나는 항상 그에게 '살기를 억제하라, 여자를 조심하라, 총을 가까이 하지 마라'고 타일렀지만 인연이 다했는지, 내가 귀국하자 법당에 나오지 않더니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다 그만 여자친구를 총으로 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부처님은 '전생의 일을 알려거든 지금 받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명쾌한 말씀이다. 그래도 전생이 궁금하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있다. 환생하면 전생의 기억도 사라지고 마음의 기억도 지워지지만 몸속에 스며든 영혼의 DNA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후각같은 본능적인 느낌으로, 첫인상이 좋다면 전생에도 좋은 인연이었을 확률이 높다.
더 나아가 전생의 악업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자주 '용서'할 것을 권한다. 나쁜 전생이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용서할 줄 몰라서다. 용서가 무엇인가. 미움으로 꽉 찬 방 하나를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만약 P가 전생의 악연이었던 여자친구를 용서했다면 총을 들지도,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용서야말로 전생의 악순환을 막고 영적 성숙을 돕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요, 신의 선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