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손과 약손 / 임두호 (2024. 11.)
‘열 효자 악처 하나만 못하다’라는 말, 성년이 될 때까지 그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지난 세월 중에서 언제쯤이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까? 어린 자식들을 품어 키우고 교육하던 때가 우선 떠오른다. 결혼하여 두 아들을 키우고, 결혼시켜 분가까지 마쳤다. 그러고 나니 부모로서 임무와 역할을 다했다는 성취감과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제 크게 신경 쓸 일도 없으니, 이제부터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기대와 다르게, 부부 둘이 살다 보니 그렇지도 않음을 느끼게 될 때도 있었다. 자식들은 다 떠나고,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빈 둥지만 덩그러니 남은 허전한 느낌이랄까. 어떤 때는 집안이 조용한 절간 같다. 부부도 취미가 다르고 생활 방식이 다르니, 별로 아기자기하게 할 이야기도 없지 않은가. 그나마 안정된 일상이 보장됨은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식사나 빨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고마운 일임은 틀림없다. 주변으로부터 자식도 아내도 없는 홀아비 독거노인 소리를 듣지 않는 것 또한 다행이다.
주위에 혼자서 지내는 독거노인이 몇 있다. 그들은 아내를 먼저 보낸 이도 있지만, 아내와 별거하는 이도 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라면서, 이 세상 혼자서 왔고 갈 때도 혼자서 가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으로 삼는 듯한 말을 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하지만, ‘남모르는 외로움과 불편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은 생각이 요즘에 와서 자주 든다.
평소 건강할 때는 그렇다지만,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마음고생이 몸을 더 아프게 할 것이고, 정신세계를 피폐하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효자들도 많지만, 바쁜 일상에서 부모를 알뜰하게 돌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불편하면 움직일 수 있는 한 사람이 돌보기도 하나, 한 사람이 먼저 가버리면 남은 사람의 종착지는 노인 요양원이 아닌가. 옛 농경시대 대가족 사회 때는 노부모를 모시는 일을 당연한 효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요즘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렸다.
부모님은 농사일만 하던 농부였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육체노동을 많이 해서 그럴까, 몸도 왜소하고 허약했다. 어머니는 키가 크고 몸도 튼튼했으며 성격도 활달했다. 아버지는 주로 농사일만 하였고, 어머니는 농사와 집안 대소사까지 맡아보며 가정을 이끌었다. 허약한 아버지는 늘 잔병을 달고 지냈다. 특히 다리가 자주 아프다고 하며 다리 몸살을 앓는다고 하셨다.
농산물이나 나뭇단을 지게에 지고 일어설 때면 무척 괴로워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한쪽 무릎은 땅바닥에 붙여서 지게 작대기를 대각선으로 짚었다. 일어설 때면 두 다리를 떨었고 지게 작대기는 더 떨었다. 지게 위에 올려놓은 나뭇단도 덩달아 부들부들 떨었다. 넘어질 것 같아서 급히 지게를 잡으려 하면 그냥 두라고 하셨다. 겨우 일어서기만 하면 넘어질 듯하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옮겨 놓았다. 마치 호수 위에 소금쟁이가 엉거주춤하게 이동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밭을 쟁기로 갈 때도 절룩거렸다. 내가 한 번 갈아보겠다고 했다. 쟁기를 끄는 소의 속도는 쟁기를 잡는 사람의 손놀림 기술에 달려 있다는 설명을 듣고 쟁기를 양손으로 잡았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했다. 얼마 후 쟁기가 땅에 깊이 들어가니 소가 앞으로 잘 나가지 못했다. 쟁기가 얕게 들어가면 소는 얼씨구나 좋은 듯 빨리 가서 따라가기도 힘들고, 밭고랑이 갈지자 모양으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쟁기를 잡는 요령도 기술이 필요하다며 다시 알려 주었지만, 얼마 못 가서 쟁기를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가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마무리 지었다. 농사일은 얼핏 보면 힘만 있으면 다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상당한 기술이 필요함을 알았다.
여름철 장마가 시작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유난히 허리와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소죽을 끊이는 사랑방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다. 소죽을 끊이는 방은 나무를 많이 지피게 되어 방바닥은 늘 뜨끈뜨끈하였다. 허리와 다리를 바닥에 지지면 시원하고 통증도 많이 풀린다는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한번은 방바닥에 엎드리더니 허리 위로 올라가 꾹꾹 밟아보라고 했다. 한 발은 방바닥에 놓고 한 발로 허리를 지그시 눌러 보았다. 더 세게 밟으라고 했다. 두 손을 벽에 붙이고 두 발로 지그시 힘을 주어 눌러 보았다. “아이고, 시원하다.”라고 하시며 계속하라고 했다. 허리 위로 올라가 두 발로 누르면 매우 아플 텐데 어떻게 시원하다고 할까. 아마 통증이 좀 가라앉는 느낌을 어른들은 시원하다고 표현하는가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효과가 있나 보다 하고 멈추었더니 바로 누웠다. 얇은 이불을 덮어 주며 얼굴을 보니, 그때 아버지 나이에 비해 잔주름이 가득했다. 방이 따뜻해서일까, 파리 두 마리가 아버지 얼굴에 앉았다. 한 손으로 부채질하듯 쫓아 버리고 깊은 잠에 빠져 들렀다. 그 파리는 천정에 붙어서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수건을 휘둘러 밖으로 쫓아 버렸다. 잠시나마 깊이 주무시도록 하고 싶었다.
며칠이 지났다. 가락국수 올 같은 굵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날은 다리가 유난히 많이 아프다며 좀 만져 달라고 하셨다. 두 손으로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꾹꾹 누르며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였다. 한동안 만져드렸는데, 지난번 허리를 밟을 때처럼 시원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픈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손과 팔이 아프고 힘이 들었는데 모르는 듯하여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어머니를 불러 달라고 했다. 무슨 약이라도 지어 오라는가 싶었다. 안방에 있던 어머니께 아버지가 찾는다고 했다. 어머니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왜요?”라고 묻는데, 아버지 대답은 의외였다. 다리를 좀 만지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어머니는 빙긋이 웃었다. 다시 어머니가 아버지의 아픈 다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얼굴을 살펴보았다. 내가 만지고 있었을 때는 불편한 표정이었으나, 어머니가 만지고부터는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어째서일까, ‘아들 손은 가시손이고 아내 손이 약손’이란 말인가? 어머니는 아버지와 늘 같이 지내면서 다리 어느 부분이 아프고, 만지는 방법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불평 한마디 없이 오랜 시간 그렇게 하였다. 어머니 손이 약손이었을까, 아버지는 편안한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가 만져서 통증을 풀어주는 방법은 임시방편일 뿐 완치는 안 되는 듯했다. 아버지는 늘 아픈 다리를 절룩이며 농사일을 계속하였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잔병도 연세가 많아지니 기력이 눈에 보이게 떨어지고 있었다. 감나무에 납작 감이 발갛게 익어가던 초가을, 아버지는 그 홍시 하나 맛보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많이 아파하던 다리를 붙잡고, 이제 좀 일어나 보라고 섧게 울던 모습에 지금도 울컥해진다. 그제야 열 효자보다 악처 하나가 더 낫다는 말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아버지의 아픈 다리를 약손으로 만지고 계실까? 아버지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 있을까? 먼 훗날 좋은 세상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내 손은 가시손이고 어머니 손은 약손이었는지, 꼭 한번 물어보리라.
첫댓글 임두호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카페에서도 자주 뵈면 좋겠습니다.^^
대구지부 임두호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필과비평작가회의에 관심을
가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