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남저수지 / 전 성훈
칼바람이 부는 오남저수지 계절은 틀림없는 가을인데 갑자기 겨울 찬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니 저수지 물결은 찬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너울너울 춤춘다. 저 하늘 높은 곳에 북극의 차디찬 기운이 다가와 가을 속 겨울을 맞이한다. 시월에 이토록 차가운 날씨를 만나는 것은 몇 십 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수지 터줏대감인 오리가족은 분주히 물갈퀴를 움직이고 춤추는 물결위로 유유히 헤엄치며 엄마를 따라서 나들이를 간다.
남양주시 오남저수지에는 그 전에 한 번도 가 본적도 없고 특별한 인연도 없다. 글쓰기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웃으시며 내려다보고 계실 선생님께서, 오남저수지를 소개해주신 게 몇 년 전 일이다. 언제 한 번 가보리라 생각하면서 짬을 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시월 중순 어느 날 찾아 나선다. 집에서 오남저수지 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아 토요일 아침에 느긋하게 출발하니 자동차로 50분 정도 걸린다. 길이 막히지 않아 정오 전에 도착하여 저수지를 바라보니 마치 드넓은 호수 같다. 남양주 종합관광 안내판을 보니까 이곳은 남양주 8경의 하나이다. 다산유적지, 광릉숲, 북한강 자전거길, 천마산 일출과 운해, 축령산, 오남 호수공원, 불암산과 수락산 그리고 미음나루와 삼패한강공원이 8경이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으려고 찾은 어느 한적한 음식점, 산과 저수지에 어울리는 황토 흙으로 지은 음식점이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니 벽에 흙을 바른 흔적이 보이고 식탁에는 수저를 놓는 1인용 종이 테이블보가 놓여있다. 음식점 상호 ‘다송(多松)’의 낙관을 찍어 ‘어느 산골 소나무언덕 아래에서,,, 지나간 기억에 잠기어 있는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 글을 보니 주인의 마음씀씀이가 묻어있는 듯 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진다. 아담한 항아리에 담겨 나온 동동주 한 모금 마시니 술맛이 달달한 군밤처럼 향기롭게 느껴진다. 저수지 주변의 산들은 여전히 푸르고 하늘은 높고 맑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차가운 바람이 많이 불어, 호수공원 둘레를 걷는 사람들도 옷깃을 저미고 여유롭다기보다는 다소 빠르게 걷고 있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둘레길 데크에 기대어 저수지를 바라보다가 나 홀로 호수공원을 한 바퀴 빙둘러본다. 농업용수를 모아 놓은 저수지 주변 곳곳에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저수지 제방 밑에는 제법 큰 야외공연시설이 있다. 분수시설까지 있는 것을 보니 한여름에는 이런저런 볼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해주는 것 같다. 야외공연시설 이곳저곳에 몇 쌍의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가져온 음식을 나누며 소곤거리는 모습도 눈에 띤다. 강화유리판 밑으로 맑은 저수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으니 넓은 호수가 산과 하나 되어 가을날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낸다. 같은 장소라도 사람에 따라 혹은 계절에 따라 그 느낌이나 풍취가 다르기 마련이다. 마음을 열고 자연을 바라보면 한결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처음 만나는 곳에서도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의 질이나 모습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지고 따뜻해질 것 같다. 예전에는 봄은 여인의 계절이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구별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가을을 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듯 하다. 장기간 코로나 시국에 너도 나도 모두가 지치고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년 내내 마음이 먹먹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런가하면 삶의 무게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허덕허덕 거리며 힘겨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뿐인 목숨을 스스로 저버리는 사람들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타깝다. 게다가 심심치 않게 잊을 만 하면 들리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하며 삶을 놀리는 듯 야유하는 사람들의 추한 행태를 보면 그것 또한 슬픈 우리들의 자화상임은 틀림없어 서글퍼진다.
삭풍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어 손이 시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운 저수지 둘레길을 걸으며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고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생각해 본다. 새빨간 거짓말이 황사처럼 눈앞을 어지럽히는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지고 재미없어져 간다. 더없는 진진한 눈빛으로 요설을 내뱉는 인간들이 판치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따뜻한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 중순 차가운 바람 속에 물결이 출렁이는 저수지를 바라보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마저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다. (202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