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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같아지신 하나님의 아들”
□ 히2:10-18 □
박창환 (본원장)
I. 들어가는 말
이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히브리서 전체의 성격과 내용 구조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전체 맥락 속에서 이 본문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작용을 하는 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서를 서신의 범주에 넣어 취급하지만 그것은 13:20-25이 바울 서신의 결미(結尾)를 닮았기 때문에 생긴 견해일 뿐, 사실은 하나의 신학적 논설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 자신은 그의 글을 “말씀”(ὁ λόγος) 혹은 “권면의 말씀”(ὁ λόγος τής παρακαλήσεως)이라고 지칭하였다(5:11;6:1;13:22).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고, 투옥되고, 재산 차압을 당하는 경험 속에서 믿음이 약해지고 삶이 해이해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이야말로 궁극적인 것임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따라서 그 구원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권면하는 글(2:1;10:32-36;13:22)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저자는 짜임새 있는 논의를 통해서 단계적으로 자신의 확신을 정교하게 전개해 나간다. 세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들보다 월등하다(1:1-3). 천사들보다 월등하다(1:5-2:18). 모세보다 월등하다(3:1-6).
(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레위 지파의 대제사장직보다 월등하다 (4:14- 7:28).
(3)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하늘 성소에서 드려진 것으로서 해마다 땅에서 레위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보다 월등하다(8:1-10:39).
독자들이 많은 환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 왔으니,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과 선행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권면을 한다(10:32-39).
이 권면에 뒤이어 성경에 나오는 과거의 많은 신앙의 용사들의 예를 소개한다(11:1-40). 그리고 예수의 성실한 생애를 표본으로 보여 주며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모방할 것을 종용한다(12:1-11). 동시에 독자들의 공동체의 옛 지도자들의 모범적 삶을 본받을 것과, 그들의 현재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한다(New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1991,p 316NT 참조)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과는 달리 어떤 주장을 한 다음에는 이어서 권면을 하고, 그 다음 주장을 하고서는 또 거기에 해당하는 권면을 하는 식으로 권면을 갈피갈피 삽입한다. 즉 이론(理論)을 다 말한 후에 권면을 서신 후반부에 다 몰아서 하는 바울의 형식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David L. Barr의 분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An Introduction: New Testament Story. 2nd ed., Wads-worth Publishing Company,1995, p 430).
아들의 계시는 천사나 선지자를 통한 계시보다 우월하다(1:1-14)
권면 : 그리스도를 더욱 주목하라 (2:1-4)
사람이 되신 예수는 천사보다 우월할 뿐 아니라 모세보다도 우월하다
(2:5-3:5)
권면 : 약속된 안식을 놓치지 말라(3:6-4:13)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가장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시다(4:14-5:11)
권면 : 초등 원리를 탈피하라(5:12-6:20)
예수는 멜기세덱 반차에 속한 대제사장이다(7:1-10:18)
권면 :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10:19-39)
믿음의 증인들(11:1-40)
권면 : 힘써 거룩해져라(12:1-10)
잡다한 권면들(12:11-13:21)
서신 형식으로서의 마지막 권면(13:22-25)
이상의 분해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본문은 둘 째 권면이 나오기 전에 나온 교리 부분에 속한 것으로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는 천사보다 우월하다는 이론 전개 속에 속한다.
II. 주 해
< 10절 >
원어에는 10절에 ⌈가르⌋ γάρ 라는 접속사가 있고 그것은 앞에 나오는 말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10절 이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위에 있는 2:5-9의 내용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속에서 장차 완성하실 세계를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시려는 것이 아니라(2:5)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시 8:5-7 LXX) 인간의 지배 아래 두시기로 하셨다. 그런데 아직은 만물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상태에 있지를 않다(2:6-8). 그러나 잠시 동안 사람이 되셔서 천사보다 낮아지셨던 예수는 영광과 존귀의 월계관을 쓰신 것을 우리가 아는데, 그것은 그가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그렇게 되셨고, 그가 맛보신 죽음은 모든 인간을 위한 죽음이 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한 분의 죽음의 효과가 모든 인간의 죽음에 해당한다는 것은 인간의 수학과 이론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 한 분의 죽음이 어떻게 수많은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2:9).
이렇게 말한 다음에 “왜냐하면” γάρ 이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논리 전개를 계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이시다. 만물이 인하고라는 번역은 ⌈디 혼 판타⌋ δι’ ὃν πάντα 를 오역한 것으로 “만물이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이다. 만물이 존재하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자신을 위해서, 즉 그 자신의 목적이 있어서, 그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물은 그의 집적적인 창조 행위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예수로 말하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고 영광을 누리게 하셨다. 결국 예수는 많은 인간 구원의 선구자(⌈아르케고스⌋, ἀρχηγός, pioneer) 창시자 founder, originator 가 되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창시자, 선구자를 단순히 “주”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신비하고도 엄청난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수난(受難)이라는 요소를 사용하셨다. 즉 예수가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시고 세상에서 온갖 고통을 다 당하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고통을 통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구원을 이룩하셨다는 말이다. 즉 예수의 대속적 고통과 죽음이 아니고서는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전능하신 창조자이시며 명확한 주체 의식을 가지신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이었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합당하도다(⌈에프레펜 아우토⌋ Ἒπρεπεν αὐτῷ). 그러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일은 마땅히 할 만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 11절 >
11절도⌈가르⌋(γάρ, ‘왜냐하면,’ for)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10절의 내용의 논리적 근거를 말하려고 한다. 한글 개역판에는 그 접속사가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 전후 관계를 알기가 어렵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호 하기아존⌋ ὁ ἁγιάζων)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를 성육신시켜 사람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다. 그의 직책을 저자는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라고 했다. 즉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불러내어 구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을 가지게 하신다는 말이다. 주께서 신자의 과거 죄를 다 용서하여 무죄한 자가 되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도 계속 죄를 짓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우선 구별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요 17:19).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호이 하기아조메노이⌋ οἱ ἁγιαζόμενοι)은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라는 표현은 원문을 과거 동사로 오인한 것이고 사실은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 자들”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즉 다 하나에서 난 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의 구원 사업을 통하여 성별된 신도들도 하나님의 자녀(양자와 영녀)이다. 결국 한 분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에서 난(⌈엑스 헤노스⌋ ἐξ ἑνός)자들 곧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 많은 자녀들의 구원의 창시자인 것이 사실이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그 구원 사업의 완수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도 지당한 말씀이다(10).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구주 예수와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성도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 12절 >
저자는 구약 성경의 몇 가지 성구를 인용하여 예수가 신도들을 당신의 형제 자매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려고 한다. 먼저 시편 22:22를 끌어온다. 시 22편은 피탄(悲嘆)의 시 lament 라는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시인이 자기가 처한 비운을 하나님 앞에 탄식하면서 호소한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에 부르짖은 말씀(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이 바로 이 시의 첫 행(行)에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 시(詩)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시로 간주하고 예수의 생애에다 우화적으로 연결시킨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에게 선포하고. 저자는 여기서 나를 예수로, 내 형제를 구원받은 성도로 생각한 것이다.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저자는 여기서도 나를 예수로,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로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약 성경에서도 메시아가 당신의 백성을 형제 자매로 여겼다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에게서 실현됐다는 것이다.
< 13절 >
이번에는 70인역 LXX 에서 이사야 8:17-18을 인용한다. “내가 그를 의지할지라”의 ‘나’와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의 ‘나’와 ‘내게’는 메시아를 가리키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파이디아⌋ παιδία)는 곧 그 메시아의 형제자매로 간주한 것이다. ⌈타 파이디아⌋ τὰ παιδία 는 원래 어린아이라는 말이고 따라서 부모에게는 자녀(子女, children)라는 뜻이 되고, 주종(主從) 관계에서는 하인이란 말도 된다. 이사야서의 원 맥락에서는 자녀라는 의미를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메시아도 하나님의 자식, 그 밖에도 하나님의 자식들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메시아에게는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 14절 >
13절의 이사야 인용구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타 파이디아⌋ τὰ παι- δία)라는 말을 하고 나서 14절에서는 그것을 토대로 하여 저자는 자기의 이론을 일보 더 진전시킨다. 즉 14절이 원어에서는 ⌈운⌋(οὖν, ‘그러므로’)이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으며,13절이 한 말에 근거를 두고 이제 연결하여 말을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 τὰ παιδία 은 물론 인간들이고, 따라서 혈육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케코이노네켄⌋ κεκοινώνηκεν)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살과 피를 다 같이 가지도록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말이다. 즉 원어에는 현재완료 직설법 동사로 표시되어 있어서 과거 동작의 현재적 결과를 말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디 사람을 살과 피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고 지금도 사람은 예외 없이 혈육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그런데�예수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의 함께 속하셨다는 원어는 위의 것과는 다른 단어로 표시되었다. ⌈메테스켄⌋ μετέσχεν 은 예수가 원래부터 사람들처럼 혈육을 가지셨던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사람의 혈육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 목적이란 곧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지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가진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하셨다.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였고 그 죄 값으로 죽음이라는 벌을 받은 존재이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할 수가 없다. 저자는 인간을 죽음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마귀 (⌈디아볼로스⌋ διάβολος)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라고 묘사하였다. 영원 무한의 존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자기들의 죄의 대가로 당하는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모든 죄에 대한 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마귀는 더 이상 구원받은 인간에게 죽음을 요구할 권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개역 번역에는 “마귀를 없이 하셨다”고 되어 있지만, ⌈카타르게세⌋ καταργήση 라는 말은 아주 없이 한다는 말이 아니라 “무력하게 만든다”든가 “힘을 못쓰게 만든다”는 뜻이다. 마귀도 본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영원한 존재로서 결코 없어질 수 없는 존재다. 사람도 결코 죽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마귀와 그의 졸개 노릇을 하는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고 지옥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일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가 성육신하셔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은 첫째로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무능케 하셔서, 인간을 죽음의 벌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둘째 목적을 15절에서 설명한다.
< 15절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죽으신 둘째 목적은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실존을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엔오코이 에산 둘레이아스⌋ ἔνοχοι ἧσαν δουλείας 는 종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법적으로 죽음이라는 벌을 받도록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종살이를 하게 된 인간을 가리킨다. 사람은 일생에 παντὸς τού ζήν 즉 살아야 하는 모든 날동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영원히 누리도록 창조된 인간이기에, 그 반대인 죽음은 인간의 가장 큰 무서움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이 가지고 살아야 하던 인간들을, 예수는 당신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하여 해방시키셨다(⌈아팔락세⌋ ἀπαλλάξῃ)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묘사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해방의 대상은 그 공포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외에도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고 자유 없는 상태에서 속박된 삶을 살고 있다. 저자는 죽음 공포의 종살이를 대표적으로 내 세운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인간을 해방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또 죽으셨다.
< 16절 >
16절도 역시 ⌈가르⌋(γάρ, for)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윗 대목과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가 성육신하시어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마귀를 무력화했고, 평생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을 해방시키셨다고 위에서(2:14-15)말 했는데, 거기서 분명해진 것은(⌈데일루⌋ δήλου) 예수께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오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려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천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에피람바네카이⌋ ἐπιλαμβάνεται 라는 현재 직설법 동사는 하나님(그리스도)의 원칙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개역 성경에는 붙들어 준다로 번역되었지만 “돕는다 help”는 뜻도 있고“…의 본성을 취한다 assume the nature of”라는 뜻도 있다. NRSV는 전자를 취하여 “he did not come to help angels, but the decendants of Abraham”이라고 번역했으며 과거사로 취급했다. 후자일 경우에는 예수가 천사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스라엘 사람. 여기서는 아마도 새 이스라엘)의 본성을 취하셨다라고 될 것이다. 저자의 관심은 예수가 천사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해서 오셨는가를 밝히려는 데 있는 것이다.
< 17절 >
그러므로(⌈호덴⌋ ὅθεν)는 16절에서 말한 내용의 당연한 귀결(歸結)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즉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오셨으니까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처럼 혈육의 몸을 가지셨고, 사람처럼 세상에서 살면서 지정의를 가지신 존재로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되시는 것이 마땅하도다(⌈오펠론⌋�ὤφελον)는 과거 동사이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의 과거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예수가 사람이 되셔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예수가 성육신하신 목적은 우선 하나님을 위한 일(⌈타 프로스 톤 데온⌋τὰ πρὸς τὸν θεόν)을 하는 자비롭고도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구원 사업이 하나님의 이니셔티브 initiative 에서 시작됐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업이다.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구체적으로 하셔야 할 일은, 하나님께 범죄한 백성(⌈라오스⌋ λαός)과 하나님 사이에 개재한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힐라스케스타이⌋ ὶλάσκεσθαι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개역 성경에는 단지 구속이란 표현을 했지만, 옛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양의 피를 법궤 상판에 부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예수가 그런 역할을 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4:14;5:1). NRSV에는 to make a sacrifice of atonement로 번역되어, 예수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백성의 죄의 대가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맡기신 과업이며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해 내신 예수는 그야말로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충성된 분이시다.
<2:18> 18절 역시 ⌈가르⌋ γάρ 로써 앞 절과 연결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인과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즉 17절의 내용이 18절의 내용으로써 증명되고 보충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세상에 오셔서 그의 형제자매인 인간의 온갖 시험을 당하셨고 고통을 겪으셨다.�그래서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아시고 뼈저리게 연민을 느끼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능히 도우시느니라(⌈뒤나타이 보에데사이⌋ δύναται βοηθήσαι)의 “능히 …한다”는 동사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 예수가 과거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는 것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시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17절에서 말한 내용의 근거와 보충이 된다.
III. 사 역
10 만물이 하나님을 위해 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겼기에, 그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에로 인도하신,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신 것은, 그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이었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하심을 받는 자들이 다 같이 한 분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그(예수)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
12 그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단신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할 것이며
회중 한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렵니다.
13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그를 신뢰할 것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시오.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 있나이다.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같이 가지고 있으므로 그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피와 살을 함께 가지셨다. 그것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즉 마귀를 죽음을 통하여 무력화(無力化)하시려는 것이었다.
15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일생을 살아야만 하는 그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16 분명한 것은 그가 천사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17 그래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한 일에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
18 그는 시험을 당했고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 당하고 있는 자들을 능히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IV. 메 시 지
1. 오늘은 크리스마스 후 첫 주일이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사실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는 많은 행사들을 가졌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우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도록 하셨다. ㈁ 이 사건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친히 자기의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다.
2. 예수는 우리를 성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전을 가진 자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마귀의 자식이요 세속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적 삶에서 떠나고 죄악을 미워하고 남달리 구별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다 같이 형제자매가 되는 영광을 가지게 됐다. 얼마나 우리의 위상이 높아졌는가 말이다. 마귀의 자식이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를 형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최고의 자격을 가지기에 이르른 것이다. 지금은 시공 세계에서 보잘 것 없이 살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을 현재적으로 맛보며 살고 있으며, 영원한 소망 속에서 살게 되었다.
3. 이러한 결과를 내기 위해서 신비하고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즉 신성을 가지셨던 독생자 예수가 사람처럼 혈육을 지닌 존재가 되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고 죽으신 것이다. 그래야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인하여 온 대가요 벌이다. 죄인은 생명이신 하나님 어전에서 쫓겨나서 분리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이란 그 죽음을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하나님 어전에서 떳떳이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은 죄인 자신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계획하셨고 실천에 옮기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사건이다.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의 사건이다. 악마는 인간을 죽음에 가두어 두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악마를 이기시고 그를 무력화하셨다. 이제 그는 맥을 추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마귀가 건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의 찬가가 나온 것이다(롬 8:35-39).
4.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살던 우리를 구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기쁘게 용감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고민하거나 걱정할 것이 없다.
5. 예수는 인간으로 오셔서 온갖 시험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시련을 가장 잘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고 또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계신다. 구원받은 우리들도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얼마든지 시험을 당하게 될 것이다. 특히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마귀는 갖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도우실 의지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람과 같아지신 하나님의 아들”
□ 히2:10-18 □
박창환 (본원장)
I. 들어가는 말
이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히브리서 전체의 성격과 내용 구조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전체 맥락 속에서 이 본문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작용을 하는 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서를 서신의 범주에 넣어 취급하지만 그것은 13:20-25이 바울 서신의 결미(結尾)를 닮았기 때문에 생긴 견해일 뿐, 사실은 하나의 신학적 논설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 자신은 그의 글을 “말씀”(ὁ λόγος) 혹은 “권면의 말씀”(ὁ λόγος τής παρακαλήσεως)이라고 지칭하였다(5:11;6:1;13:22).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고, 투옥되고, 재산 차압을 당하는 경험 속에서 믿음이 약해지고 삶이 해이해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이야말로 궁극적인 것임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따라서 그 구원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권면하는 글(2:1;10:32-36;13:22)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저자는 짜임새 있는 논의를 통해서 단계적으로 자신의 확신을 정교하게 전개해 나간다. 세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들보다 월등하다(1:1-3). 천사들보다 월등하다(1:5-2:18). 모세보다 월등하다(3:1-6).
(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레위 지파의 대제사장직보다 월등하다 (4:14- 7:28).
(3)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하늘 성소에서 드려진 것으로서 해마다 땅에서 레위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보다 월등하다(8:1-10:39).
독자들이 많은 환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 왔으니,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과 선행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권면을 한다(10:32-39).
이 권면에 뒤이어 성경에 나오는 과거의 많은 신앙의 용사들의 예를 소개한다(11:1-40). 그리고 예수의 성실한 생애를 표본으로 보여 주며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모방할 것을 종용한다(12:1-11). 동시에 독자들의 공동체의 옛 지도자들의 모범적 삶을 본받을 것과, 그들의 현재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한다(New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1991,p 316NT 참조)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과는 달리 어떤 주장을 한 다음에는 이어서 권면을 하고, 그 다음 주장을 하고서는 또 거기에 해당하는 권면을 하는 식으로 권면을 갈피갈피 삽입한다. 즉 이론(理論)을 다 말한 후에 권면을 서신 후반부에 다 몰아서 하는 바울의 형식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David L. Barr의 분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An Introduction: New Testament Story. 2nd ed., Wads-worth Publishing Company,1995, p 430).
아들의 계시는 천사나 선지자를 통한 계시보다 우월하다(1:1-14)
권면 : 그리스도를 더욱 주목하라 (2:1-4)
사람이 되신 예수는 천사보다 우월할 뿐 아니라 모세보다도 우월하다
(2:5-3:5)
권면 : 약속된 안식을 놓치지 말라(3:6-4:13)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가장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시다(4:14-5:11)
권면 : 초등 원리를 탈피하라(5:12-6:20)
예수는 멜기세덱 반차에 속한 대제사장이다(7:1-10:18)
권면 :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10:19-39)
믿음의 증인들(11:1-40)
권면 : 힘써 거룩해져라(12:1-10)
잡다한 권면들(12:11-13:21)
서신 형식으로서의 마지막 권면(13:22-25)
이상의 분해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본문은 둘 째 권면이 나오기 전에 나온 교리 부분에 속한 것으로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는 천사보다 우월하다는 이론 전개 속에 속한다.
II. 주 해
< 10절 >
원어에는 10절에 ⌈가르⌋ γάρ 라는 접속사가 있고 그것은 앞에 나오는 말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10절 이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위에 있는 2:5-9의 내용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속에서 장차 완성하실 세계를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시려는 것이 아니라(2:5)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시 8:5-7 LXX) 인간의 지배 아래 두시기로 하셨다. 그런데 아직은 만물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상태에 있지를 않다(2:6-8). 그러나 잠시 동안 사람이 되셔서 천사보다 낮아지셨던 예수는 영광과 존귀의 월계관을 쓰신 것을 우리가 아는데, 그것은 그가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그렇게 되셨고, 그가 맛보신 죽음은 모든 인간을 위한 죽음이 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한 분의 죽음의 효과가 모든 인간의 죽음에 해당한다는 것은 인간의 수학과 이론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 한 분의 죽음이 어떻게 수많은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2:9).
이렇게 말한 다음에 “왜냐하면” γάρ 이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논리 전개를 계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이시다. 만물이 인하고라는 번역은 ⌈디 혼 판타⌋ δι’ ὃν πάντα 를 오역한 것으로 “만물이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이다. 만물이 존재하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자신을 위해서, 즉 그 자신의 목적이 있어서, 그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물은 그의 집적적인 창조 행위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예수로 말하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고 영광을 누리게 하셨다. 결국 예수는 많은 인간 구원의 선구자(⌈아르케고스⌋, ἀρχηγός, pioneer) 창시자 founder, originator 가 되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창시자, 선구자를 단순히 “주”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신비하고도 엄청난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수난(受難)이라는 요소를 사용하셨다. 즉 예수가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시고 세상에서 온갖 고통을 다 당하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고통을 통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구원을 이룩하셨다는 말이다. 즉 예수의 대속적 고통과 죽음이 아니고서는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전능하신 창조자이시며 명확한 주체 의식을 가지신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이었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합당하도다(⌈에프레펜 아우토⌋ Ἒπρεπεν αὐτῷ). 그러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일은 마땅히 할 만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 11절 >
11절도⌈가르⌋(γάρ, ‘왜냐하면,’ for)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10절의 내용의 논리적 근거를 말하려고 한다. 한글 개역판에는 그 접속사가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 전후 관계를 알기가 어렵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호 하기아존⌋ ὁ ἁγιάζων)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를 성육신시켜 사람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다. 그의 직책을 저자는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라고 했다. 즉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불러내어 구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을 가지게 하신다는 말이다. 주께서 신자의 과거 죄를 다 용서하여 무죄한 자가 되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도 계속 죄를 짓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우선 구별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요 17:19).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호이 하기아조메노이⌋ οἱ ἁγιαζόμενοι)은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라는 표현은 원문을 과거 동사로 오인한 것이고 사실은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 자들”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즉 다 하나에서 난 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의 구원 사업을 통하여 성별된 신도들도 하나님의 자녀(양자와 영녀)이다. 결국 한 분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에서 난(⌈엑스 헤노스⌋ ἐξ ἑνός)자들 곧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 많은 자녀들의 구원의 창시자인 것이 사실이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그 구원 사업의 완수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도 지당한 말씀이다(10).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구주 예수와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성도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 12절 >
저자는 구약 성경의 몇 가지 성구를 인용하여 예수가 신도들을 당신의 형제 자매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려고 한다. 먼저 시편 22:22를 끌어온다. 시 22편은 피탄(悲嘆)의 시 lament 라는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시인이 자기가 처한 비운을 하나님 앞에 탄식하면서 호소한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에 부르짖은 말씀(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이 바로 이 시의 첫 행(行)에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 시(詩)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시로 간주하고 예수의 생애에다 우화적으로 연결시킨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에게 선포하고. 저자는 여기서 나를 예수로, 내 형제를 구원받은 성도로 생각한 것이다.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저자는 여기서도 나를 예수로,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로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약 성경에서도 메시아가 당신의 백성을 형제 자매로 여겼다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에게서 실현됐다는 것이다.
< 13절 >
이번에는 70인역 LXX 에서 이사야 8:17-18을 인용한다. “내가 그를 의지할지라”의 ‘나’와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의 ‘나’와 ‘내게’는 메시아를 가리키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파이디아⌋ παιδία)는 곧 그 메시아의 형제자매로 간주한 것이다. ⌈타 파이디아⌋ τὰ παιδία 는 원래 어린아이라는 말이고 따라서 부모에게는 자녀(子女, children)라는 뜻이 되고, 주종(主從) 관계에서는 하인이란 말도 된다. 이사야서의 원 맥락에서는 자녀라는 의미를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메시아도 하나님의 자식, 그 밖에도 하나님의 자식들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메시아에게는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 14절 >
13절의 이사야 인용구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타 파이디아⌋ τὰ παι- δία)라는 말을 하고 나서 14절에서는 그것을 토대로 하여 저자는 자기의 이론을 일보 더 진전시킨다. 즉 14절이 원어에서는 ⌈운⌋(οὖν, ‘그러므로’)이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으며,13절이 한 말에 근거를 두고 이제 연결하여 말을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 τὰ παιδία 은 물론 인간들이고, 따라서 혈육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케코이노네켄⌋ κεκοινώνηκεν)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살과 피를 다 같이 가지도록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말이다. 즉 원어에는 현재완료 직설법 동사로 표시되어 있어서 과거 동작의 현재적 결과를 말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디 사람을 살과 피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고 지금도 사람은 예외 없이 혈육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그런데�예수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의 함께 속하셨다는 원어는 위의 것과는 다른 단어로 표시되었다. ⌈메테스켄⌋ μετέσχεν 은 예수가 원래부터 사람들처럼 혈육을 가지셨던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사람의 혈육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 목적이란 곧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지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가진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하셨다.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였고 그 죄 값으로 죽음이라는 벌을 받은 존재이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할 수가 없다. 저자는 인간을 죽음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마귀 (⌈디아볼로스⌋ διάβολος)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라고 묘사하였다. 영원 무한의 존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자기들의 죄의 대가로 당하는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모든 죄에 대한 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마귀는 더 이상 구원받은 인간에게 죽음을 요구할 권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개역 번역에는 “마귀를 없이 하셨다”고 되어 있지만, ⌈카타르게세⌋ καταργήση 라는 말은 아주 없이 한다는 말이 아니라 “무력하게 만든다”든가 “힘을 못쓰게 만든다”는 뜻이다. 마귀도 본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영원한 존재로서 결코 없어질 수 없는 존재다. 사람도 결코 죽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마귀와 그의 졸개 노릇을 하는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고 지옥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일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가 성육신하셔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은 첫째로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무능케 하셔서, 인간을 죽음의 벌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둘째 목적을 15절에서 설명한다.
< 15절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죽으신 둘째 목적은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실존을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엔오코이 에산 둘레이아스⌋ ἔνοχοι ἧσαν δουλείας 는 종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법적으로 죽음이라는 벌을 받도록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종살이를 하게 된 인간을 가리킨다. 사람은 일생에 παντὸς τού ζήν 즉 살아야 하는 모든 날동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영원히 누리도록 창조된 인간이기에, 그 반대인 죽음은 인간의 가장 큰 무서움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이 가지고 살아야 하던 인간들을, 예수는 당신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하여 해방시키셨다(⌈아팔락세⌋ ἀπαλλάξῃ)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묘사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해방의 대상은 그 공포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외에도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고 자유 없는 상태에서 속박된 삶을 살고 있다. 저자는 죽음 공포의 종살이를 대표적으로 내 세운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인간을 해방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또 죽으셨다.
< 16절 >
16절도 역시 ⌈가르⌋(γάρ, for)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윗 대목과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가 성육신하시어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마귀를 무력화했고, 평생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을 해방시키셨다고 위에서(2:14-15)말 했는데, 거기서 분명해진 것은(⌈데일루⌋ δήλου) 예수께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오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려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천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에피람바네카이⌋ ἐπιλαμβάνεται 라는 현재 직설법 동사는 하나님(그리스도)의 원칙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개역 성경에는 붙들어 준다로 번역되었지만 “돕는다 help”는 뜻도 있고“…의 본성을 취한다 assume the nature of”라는 뜻도 있다. NRSV는 전자를 취하여 “he did not come to help angels, but the decendants of Abraham”이라고 번역했으며 과거사로 취급했다. 후자일 경우에는 예수가 천사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스라엘 사람. 여기서는 아마도 새 이스라엘)의 본성을 취하셨다라고 될 것이다. 저자의 관심은 예수가 천사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해서 오셨는가를 밝히려는 데 있는 것이다.
< 17절 >
그러므로(⌈호덴⌋ ὅθεν)는 16절에서 말한 내용의 당연한 귀결(歸結)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즉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오셨으니까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처럼 혈육의 몸을 가지셨고, 사람처럼 세상에서 살면서 지정의를 가지신 존재로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되시는 것이 마땅하도다(⌈오펠론⌋�ὤφελον)는 과거 동사이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의 과거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예수가 사람이 되셔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예수가 성육신하신 목적은 우선 하나님을 위한 일(⌈타 프로스 톤 데온⌋τὰ πρὸς τὸν θεόν)을 하는 자비롭고도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구원 사업이 하나님의 이니셔티브 initiative 에서 시작됐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업이다.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구체적으로 하셔야 할 일은, 하나님께 범죄한 백성(⌈라오스⌋ λαός)과 하나님 사이에 개재한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힐라스케스타이⌋ ὶλάσκεσθαι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개역 성경에는 단지 구속이란 표현을 했지만, 옛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양의 피를 법궤 상판에 부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예수가 그런 역할을 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4:14;5:1). NRSV에는 to make a sacrifice of atonement로 번역되어, 예수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백성의 죄의 대가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맡기신 과업이며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해 내신 예수는 그야말로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충성된 분이시다.
<2:18> 18절 역시 ⌈가르⌋ γάρ 로써 앞 절과 연결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인과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즉 17절의 내용이 18절의 내용으로써 증명되고 보충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세상에 오셔서 그의 형제자매인 인간의 온갖 시험을 당하셨고 고통을 겪으셨다.�그래서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아시고 뼈저리게 연민을 느끼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능히 도우시느니라(⌈뒤나타이 보에데사이⌋ δύναται βοηθήσαι)의 “능히 …한다”는 동사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 예수가 과거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는 것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시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17절에서 말한 내용의 근거와 보충이 된다.
III. 사 역
10 만물이 하나님을 위해 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겼기에, 그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에로 인도하신,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신 것은, 그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이었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하심을 받는 자들이 다 같이 한 분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그(예수)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
12 그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단신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할 것이며
회중 한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렵니다.
13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그를 신뢰할 것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시오.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 있나이다.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같이 가지고 있으므로 그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피와 살을 함께 가지셨다. 그것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즉 마귀를 죽음을 통하여 무력화(無力化)하시려는 것이었다.
15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일생을 살아야만 하는 그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16 분명한 것은 그가 천사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17 그래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한 일에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
18 그는 시험을 당했고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 당하고 있는 자들을 능히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IV. 메 시 지
1. 오늘은 크리스마스 후 첫 주일이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사실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는 많은 행사들을 가졌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우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도록 하셨다. ㈁ 이 사건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친히 자기의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다.
2. 예수는 우리를 성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전을 가진 자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마귀의 자식이요 세속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적 삶에서 떠나고 죄악을 미워하고 남달리 구별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다 같이 형제자매가 되는 영광을 가지게 됐다. 얼마나 우리의 위상이 높아졌는가 말이다. 마귀의 자식이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를 형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최고의 자격을 가지기에 이르른 것이다. 지금은 시공 세계에서 보잘 것 없이 살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을 현재적으로 맛보며 살고 있으며, 영원한 소망 속에서 살게 되었다.
3. 이러한 결과를 내기 위해서 신비하고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즉 신성을 가지셨던 독생자 예수가 사람처럼 혈육을 지닌 존재가 되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고 죽으신 것이다. 그래야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인하여 온 대가요 벌이다. 죄인은 생명이신 하나님 어전에서 쫓겨나서 분리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이란 그 죽음을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하나님 어전에서 떳떳이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은 죄인 자신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계획하셨고 실천에 옮기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사건이다.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의 사건이다. 악마는 인간을 죽음에 가두어 두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악마를 이기시고 그를 무력화하셨다. 이제 그는 맥을 추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마귀가 건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의 찬가가 나온 것이다(롬 8:35-39).
4.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살던 우리를 구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기쁘게 용감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고민하거나 걱정할 것이 없다.
5. 예수는 인간으로 오셔서 온갖 시험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시련을 가장 잘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고 또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계신다. 구원받은 우리들도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얼마든지 시험을 당하게 될 것이다. 특히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마귀는 갖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도우실 의지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