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황 금 찬
싸늘한 달빛이 석류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며칠 전부터 숲속에선 ㄸ째...째...풀벌레가 울고
벽에 걸린 녹슨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치고 달이 걸렸던 자리를 옮기며 지금이 몇 시냐고 내게 묻고 있다.
새
황 금 찬
새는 몇 십 년이나 될까 내 가슴에 집을 짓고 살았네.
어느 날 칼날의 날개를 펴 둥지를 떠나고 말았네.
빈 집은 바람이 부는 날 울고 있다네.
나는 아직도 그 새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네.
꽃뱀 울음
최 은 하
윤기 나는 맨살로 뙤약볕 길 한 나절을 기거나 며칠토록 또아리져 앉아서도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울음 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달래주는 이 없다. 한 줄기 바람기가 머얼리 비켜갈 뿐 징허기 만한 살 무늬라 곱기만 하다.
몰래 숨은 자리로 찾아들어 천벌을 달게 받고 살며 눈빛 서러이 굴리고 이빨 끝에 독을 모아 뿜어 바라는 하늘빛은 푸르러 사무친다.
무어라 이를 말 다 못해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이제 탈대로 타버려 검기만한 속으로 울다 울다가 하루씩 지내 넘기는 평생이다.
피로 멍든 울음에 그 무슨 말을 부치랴. 소리 죽여 꺾이는 울음에 그 무슨 말을 보태라. 어이 할 수 없이 시린 몸매에 달빛만 요기롭구나.
이 땅 어느 기슭에선가 뱀딸기 한 숭어리 탐스럽겠다.
눈을 감고 보니
최 은 하
흐린 날이 개이고 그대 떠나보내고 나서야 알았지, 세상에 이런 낭떠러지가 일어서고 있는 것을
급기야 절벽은 아우성치는 파도로 휘몰아와 나를 바다 가운데 섬으로 떠돌게 하도 첩첩 산으로 다가와선 그대 부르는 목소리마저 산산이 흩뜨려버렸다.
그날 이후 노출된 나는 침몰 당하지 않으려 당겨지고 조여드는 오금이란 오금 안간힘 다 해 펴고 악몽의 식은 땀 속에서도 발설치 못했던 날마다 지피는 고빗길로 지내온다.
처음부터 강산은 적막이었으리 흐르는 물과 바람, 온갖 꽃의 웃음소리 나 혼자 열고 있는 귓결에 이제 눈을 감고 보니 더 많은 이야기 환히 보고 듣겠구나.
원추리 바람
황 송 문
그대가 원추리라면 나는 그대 스치고 가는 바람
한번만 스치고 가는 바람 아니라 다시 돌아와 속삭이는 바람
바람은 원추리에 잠이 들고 원추리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영원한 섭리의 춤과 노래로
정착된 神話는 그리움의 농축액 시간을 천년만년 아껴서 쓰느니라.
과수원집 소녀
황 송 문
탱자나무 울타리가 철옹성 같았다.
아무리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쑤석거려도 탱자는 딸 수가 없었다.
노랗게 익으려면 차례 멀었는데 아직도 시퍼런 탱자 알을 아이들은 기를 쓰고 따고자 하였다.
아서라 말아라 익지도 않은 것을 손대지 말아라.
탱자나무 울타리가 철옹성 같느니라.
가면의 꽃 -사람치
김 년 균
당신의 성품은 괴이합니다. 당신은 모양만 화려할 뿐, 향기가 없습니다. 당신은 꿈이 없습니다.
당신은 하늘보다 세상을 믿고, 의로운 사람보다 악한 사람을 따르며, 길을 거꾸로 걸어갑니다.
아무리 낯설어도 무릎 꿇고 손 비비는 비굴한 사람에겐 마음을 주고, 바르고 정직한 사람은 눈 부릅뜨고 쫓아냅니다.
돈을 보면 돈에 금방 미치고, 권력을 보면 권력에 납작 엎드리고, 여자를 보면 여자에 홀딱 반합니다.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앞뒤 형편도 가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확연히 다릅니다.
그래도 명색이 꽃이기에 몸뚱이조차 불태워 버릴 수는 없지만, 등돌리며 침을 뱉습니다.
당신은 장미꽃이 아닙니다. 망초꽃이나 쑥부쟁이꽃도 아닙니다. 개똥처럼 버려진 달개비꽃도 아닙니다.
假面의 꽃입니다. 僞善의 꽃입니다. 無知의 꽃입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옵니다. 가다가 가파른 언덕이나 돌밭이나 만나거든 하얗게 부서져 날리십시오.
객지 -사람
김 년 균
집을 떠나 세월의 꽁지 따라 둥근 섬, 한 귀퉁이,어둑한 곳에서 잠시 머뭅니다.
바람 불고, 눈 오고, 하루도 잔잔한 날 없는 가파른 언덕에서,
외롭고 괴로워서 가끔씩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이 씨가 되고, 나무되어 무럭무럭 자랍니다.
눈물의 나무는 오늘도 잘 자랍니다.
새 . 2
가 영 심
비 그친 후 질척거리는 삶의 밑바닥에 숨어있던 꿈의 새가 갇힌 상상력으로 울부짖는다. 제 푸른 내장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울어간다.
천둥과 번개 속에서 비로소 수많은 의혹의 접시들이 깨진다. 튀는 파편들 의식의 나비 떼처럼 훨훨 먼 곳까지 날아간다. 시간의 허기 속에서 더듬거리며 야맹증의 새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헤맨다.
더는 꿈꿀 수 없는 세상 주파수와 맞지 않는 새장 속에서 탈출하는 건 진실 또는 신념을 향한 피 묻은 날개의 퍼덕임으로 날아가기 위하여서다.
聞香에 들다
가 영 심
삶에 절망하면서도 꿈꾸는 자 꽃 의자처럼 앉아 있다. 그윽한 향기에 제 마음을 입맞춤하듯 깊은 혼을 길어 올린다.
가득 어리는 향기로운 생각들이 알알이 투명 언어로 퍼져간다. 그 영롱한 눈부심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
백리향 잎사귀를 손끝으로 비비면 분홍 입술 끝에 묻어나는 진한 향기
언젠가 가야산 백리향 꽃밭에서 따온 잎사귀로 향을 띠우면 나를 따라와서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머물던 그 향기.
동생은
김 일 순
동생은 말기 암 판정을 받고 통장을 헐었다. 평생 모은 돈을 들고 죽어가는 사람 살려준다는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설암(舌癌)을 치료한다고 목을 두들겨 깊은 상처를 내고 그 부위에 맹물만 발랐다.
한 방에서 지내던 갓 서른을 넘긴 자궁암 환자 새 아침을 맞지 못하고 옷 한 벌 선물하고 떠났다.
죽은 사람 옷을 입으면 수명이 연장된다는 말에 몇 달 동안 받은 옷이 한 보따리다.
동생은 기도원을 빠져 나오면서도 옷 보따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돌고 돈다
김 일 순
세탁기가 세제를 듬뿍 안고 돌고 돌다가 거품을 사정없이 토한다.
거품은 하수구를 타고 잠시 집을 떠나서 상수원을 맴돌다 물고기를 질식시킨다.
물을 마신다. 집을 떠났던 거품이 금방 내 몸 구석구석을 돈다. 세포가 자지러진다. 간지럽다고
병원이 만원이다. 의사 앞에서 죄를 자백한다. 페암 환자는 담배 때문이라고 간암 환자는 술 때문이라고 정신병 환자는 너 때문이라고 아무도 나 때문이라고 안한다.
나는 죄인이라 얼른 빨래비누를 샀다.
이방지대
정 지 운
언제부터인가 개미의 더듬이를 달고 회색 숲을 헤맨다. 지하에서 옥상끄트머리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헛 디딘 여섯 개의 다리 중 한 다리, 더듬이로 감지하며 햇볕을 찾고 있었다.
사각의 융단 위에 구르는 돌 신의 놀이 닮으려는 인간들 어느 날 구른믄 돌 틈에 잃어버린 한 쪽 더듬이 신의 놀이 닮으려는 인간들의 색다른 심심풀이로였다.
마주치는 돌과 돌 그때마다 일으키는 회오리 나머지 더듬이들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거리엔 황사로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꿈인가, 꿈이었던가. 제 자리를 맴 돌며 햇볕을 찾는 이방의 모퉁이, 그러나 짙은 회색 숲엔 햇볕 들어 올 틈이 없었다.
광대 .6
정 지 운
외로워 못견디겠걸랑 노래나 부르지 뭐 꽃이 나비를 부르듯
아픈 모습을 보이면 인생에 패배자가 되니까
감추고 감추고 안으로 안으로 만 소리 없이 울고
얼굴은 반짝이는 시대의 조명아래 웃어야 되지 슬픔일랑 감추고
현대의 불협화음 속에 산다는 것은 이런거라고, 생의 환희를 가르쳐 줘야지 그리고 관객을 웃기고 저는 울고....
외로워 못견디겠걸랑 노래나 부르지 뭐 아무도 없는 데서 노래나 부르지 뭐
바람 부는 날 .6 -그리움의 肖像
이 동 백
그대 바람이네. 하늘 가 떠도는 한 떨기 구름이네. 그리움이 깊어 그대 한 줄기 강물로 흐르네.
강 건너 그대를 두고 오늘도 물길 따라 오르내리네.
떨리는 손끝에 힘주어 한 줌 물수제비를 띄우면 그대, 환한 물비늘로 파닥파닥 살아오를 수 있을까.
허공 가차이 어디선가 그대 목소리 노을빛으로 생생히 메아리 지네.
다시 옷깃을 여미고 그대 앞에 서면 새벽 강 물안개로 늘상 피어오르기만 하네.
축제는 끝이 나고 -허수아비
이 동 백
끝과 끝이 마주한 갈림길에서 허옇게 삭아 내린 뼈마디로 기울어진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가,
이 지상의 축제는 끝이 나고 이제는 다들 발걸음을 돌리는 시간 길 잃은 갈가마귀 몇이 마지막 타오르는 노을빛을 쪼고 있다.
먹장구름 속 천둥이 울고 바람빛이 몇 번이나 바뀌었던가 그 남루하기만 했던 옷을 걸치고 하냥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에 붉은 눈시울을 하고선 머언 하늘가를 바라다본다.
빈 바람이 들녘을 휩쓸어 지나가고 어느덧 어둠이 깃을 접으면 외발로 그대는 지평선 너머로 걸어가고 있다.
밤 비
정 민 욱
긴 그림자 걸치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검은 고양이 탈색한 빛들이 앓음이 깊어 귀뚜라미 소리마저 지우고 오면 가지 끝에 매달린 잎들이 시나브로 사선으로 물들어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는 시간 하얀 건반 위로 걷는 고요 은빛 현으로 걸린 전선위에 내리면 낮은 음계의 소야곡은 나뭇잎마다 깨지는 빛에 물들어 가는 가을 변주곡
큐브 맞춤
정 민 욱
인연의 숲에서 취향대로 꿰맞추고 흘러 갈 수 없는 시간 속에 모양대로 맞추고 좋아하는 색으로 칠하고 잘라내고 자기만족으로 채워놓고 이건 아니라고 다르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아침 속에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생각의 여울 빛의 나루에서 추려 모으는 채색표 따라 그려지는 풍경
보길도의 비밀
박 정 희
땅끝 파도타고 그섬 여름을 만났다 차르륵차르륵 돌이 부딪히는 소리 얼마나 부대꼈으면 저리도 고울까 공룡 알 같다. 묵선 한 채 그림자 일렁일 때 보길도의 밤은 조용 히 깊어간다.약속한 첫사랑, 별이 떨어져 발등에 박혔다. 피빛 동백꽃 널브러진 공룡 알 해변에서
리어커
박 정 희
가파른 송천동골목 바람차고 쓰디쓰다 마른 생활속에 묵직한 돌덩이 먹장가슴 측은케 쓸어안고 흰피거품을 뿜어내며 바닥을 기어가는 가는 귀먹은 8순 할매 보는 것조차 미안해라 밀어주는 것조차 측은해라 삶 앞에 세상 파란을 전부 걸고 곰실곰실 밀고 가는 저 참혹한 리어커 지하방에 가둬둔 마흔 셋 정신 지체아들 저녁끼니 채우느라 힘줄 같은 파지 몇 장에 그 어디 한 줌 서글픔도 없이 습한 땅에 입술을 문지르며 붉은 노을에 얼굴 숨긴다. 할매 대신 기꺼이 울다간다.
이 가을엔
정 명 숙
갈대밭 걸어오는 보름달 환한 미소로 눈을 마주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을 수 없는 시간이 자꾸만 깊어 갑니다.
한 줄기 바람은 먼 산 너머로 비껴가고 주홍낙엽은 나를 감쌉니다.
자욱한 풀벌레 울음 가을이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무어라 못 다한 말들이 구름으로 떠도는 허공 하염없이 드높기만 합니다.
가을은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출렁이고 나는 강 가 물안개에 싸여 새벽을 기다립니다.
뒷자락에서
정 명 숙
새털구름 사이로 나들이 왔다가 길을 잃었나 봅니다.
그대여 이왕 내친걸음이라면 까치발 앞세우지 말고 그윽한 향기로 남으소서.
언젠가 다시 온다는 말 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함께 했던 어느 자락에 설 수 있을지 내내 안녕하소서.
하늘과 땅 사이 고이 묻어두렵니다.
시인통신 號外
이 동 근
지난밤, 소쩍새 울음소리에 취해서 비틀거리다 잠이 들었느니라.
꿈 속에서 "무상급식 찬반투표" 號外요 號外 소리치는 동창 녀석을 만났느니라.
그녀석이 "김동인의 감자"를 이야기 하는데 그 이야기 듣느니라.
꿈 속에서 먼동이 틀 무렵 첫닭이 홰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백년 초
이 동 근
내 몸에서 돋아나는 파란 가시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한 줄기지요.
물 폭탄으로 뿌리가 썩은 내 이웃을 뉴스로 보았어요.
지향 할 목표가 있어 도처에서 돋아나는 내, 이웃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돋아나는 파란 가시지요.
아우라지 강가에서
민 미 옥
햇살에 물든 노을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림자 하나 가슴에 찬다.
살얼음판에 적막을 깨우는 소리 드문드문 놓인 돌다리를 철새들 비상하며 돌아나간다.
돌다리 같은 인생길을 건녀야 한다고 그림 같은 풍경 속을 헤엄쳐 가고 있었다.
그 엣날 돌다리를 헛딛었던 아픔들 지금에도 다리가 떨린다.
홀로 내 안에 끝없이 피고 지는 아우라지 강*의 돌다리와 철새들 줄다리기 하는 중이다.
* 정선읍으로부터 19.4키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구절리에서 흐 르는 송천과 삼척시 중봉산에서 흐르는 임계면의 골지천이 이곳 에서 합류하여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라지라고 한다. 이곳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서울까지 목재를 운반하던 땟목 터로, 이곳에서 부터 강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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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일순- 하늘과 바다를 늘 그리워하는 원문보기 글쓴이: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