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을 언급한 중국 문헌
탐라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진수(223~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30 ‘동이전’에 나 오는 ‘주호’라는 호칭이다. 즉 “주호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漢(한나라)과 같지 않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했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 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만 입고 하의는 없어서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에서 물건을 사고판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주호국이 바로 탐라국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이 기록은 당시 탐라에 `주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외에도 탐라국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 「유인궤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후한서』에는 섭라, 『북사』나 『수서』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 『신당서』 등 중국의 사서에는 담라, 혹은 탐부라, 탁라, 둔라 등이 나타나 있다.
『당회요』 「탐라국」조에는 『탐라는 신라의 무주 해상에 있다. 당회요(唐會要)는 중국의 북송(北宋)대에 성립된, 오대(五代)의 왕부(王溥 922~982년)가 저술하여 태조(太祖) 건륭(建隆)2년(961년)에 완성한 책이다.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는데, 북쪽으로 백제와는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 성황은 없고 다섯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으며 호구는 8천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문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 지배하에 있었고 용식 원년(문무왕 1661) 8월에는 조공 사신이 당나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