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알 동기 심현섭 악우가 이알 칼럼에 쓴 글입니다.
좋아서 무단으로 퍼 왔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아우지요 ^^
여자면 더 좋았을텐데...ㅋㅋ
한 여자의 독백이 흐른다. “토니는 말했어요, 절벽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어떻게 오르지, 왜 오르려는 거지? 묻게 돼. 하지만 몇 시간 후,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걸 잊어버려.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한 사람만 빼고.” 격정적이진 않았으나, 오랜 세월 애잔한 사랑으로 지켜봤던 한 남자를 회상하며 여자는 등반일지를 넘긴다. 가느다란 여자의 손가락 사이에 낀 흰 담배는 뿌연 연기를 흘리다가, 철제 재떨이 위에서 필터 깊숙이 타 들어간다. 툭툭 끊어지는 여자의 독일어 발음이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긴장을 자극한다. 1936년, 독일의 토니 쿠르츠와 힌터 슈토이저의 아이거 북벽 등반을 다룬 영화, [노스페이스∙Nord Wand)]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시 등반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패권적인 정치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는 시기였다. 독일 나찌 역시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산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적극 지원하였다. 알프스 철시대 복판에서 많은 산들의 초등은 이런 배경 하에 이뤄졌다. 더 높은 산에 오르기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산악인의 존재 목적이라면 정치적인 배경이 잠시 그를 뒷받침했더라도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다. 다만 배경에 휩쓸려 자신의 스탠스를 잃고 목적을 수단화하면 등반의 본질적인 의미 훼손이니 하는 추상적인 문제뿐 아니라, 생명까지 잃게 되는 실제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요사이 한국 산악계에 대두한 지원 등반의 문제점도 지원에서 그쳐야 할 자본의 힘이 도를 넘어서지 않았나, 그 힘 때문에 늘 위험선에 걸쳐있는 인간의 경쟁심이 더욱 유혹 받지 않았나 하는 논의일 것이다. 자본과 경쟁이 등반을 위해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산악인에게 그것은 계륵 정도의 선을 넘지 않는 절도와 자제를 요구한다. 단, 이러한 논의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은 결코 역사적 배경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깔려있는 자본의 권력화, 무한경쟁, 물질만능주의 같은 사회 구조의 개선에 눈을 돌려야 한다. 특히 내 눈의 들보를 보는 심정으로 산악인들의 모임이, 여느 사회처럼 맘모니즘과 경쟁의식에 물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토니와 힌터의 성격은 좀 다르다. 토니가 내성적이라면 힌터는 외향적이다. 등산철학도 토니는 자신을 위해 오르는 자기수양의 태도지만, 힌터는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 오르는 다소 경쟁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둘은 서로의 장단점을 조율하며 아이거 북벽에 이른다. 거기서 취재를 위해 직장 상사와 함께 알프스 산장에 와 있는 어릴 적 고향친구, 지금은 베를린에서 수습기자로 일하는 여자, 루이제를 만난다. 얼마 전, 루이제는 고향을 찾아와 자신의 특종과 진급을 위해 아이거 북벽 등반을 권했으나,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힌터와 달리, 산은 그런 동기로 오르는 게 아니라는 토니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토니와 힌터는 훗날, 유명해지는 힌터 슈토이저 횡단코스에서 오스트리아대 두 명과 합류한다. 등반 도중에 부상자가 발생하여 악천후를 뚫고 하산하지만 토니만 남고, 모두 목숨을 잃는다. 불투명한 의식의 토니는 천신만고 끝에 구조대가 내려준 로프를 걸고 내려오지만, 카라비너에 걸린 매듭을 동상으로 타 들어간 시커먼 손이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토니는 루이제가 바라보는 불과 몇 미터 앞에서 너무 춥다는 말을 남기고 참담하게 죽는다. 루이제는 허공에 매달린 토니를 바라보며 오열한다. 토니의 허리 춤 아래로, 살아있는 동안 숱한 등반에 함께 했을 낡은 해머 하나가 처연히 늘어져있다. 카메라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아이거 북벽을 굽어본다. 바이올린 소리가 애끓다. 루이제 이야기를 빼면 워낙 유명한 등반기라 설명이 더 필요 없다.
슬픔에 빠진 루이제에게 직장상사는 베를린에 데려다 주겠다며 손을 잡는다. 루이제는 그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한다.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거기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아요.”
사고 전날 밤, 토니를 비롯한 등반대가 등정에 실패하고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 때, 직장 상사는 “그냥 물러선 등반은 3면 몇 줄 기사거리도 안 된다.”며, 루이제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등반 행위를 경쟁의 대상으로 알고, 성공과 실패에 따라 그 가치를 정하고, 특종 기사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생명의 존엄성마저 경시하는 상사의 태도에 루이제는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사 개인에라기보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집단에 대한 환멸이었고, 어느 샌가 그런 쪽으로 기울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다.
루이제는 토니의 죽음이 날 구했다고 회상한다. “내가 아는 것은 그의 죽음이 날 구했고, 토니가 그날 영원히 떠났다는 사실이에요. 사랑 받는 사람은 늘 살아있어요.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만 지금 나는 매일 살아있음을 느껴요. 사랑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지요.” 토니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지켜야 할 삶의 가치가 적어도 저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경쟁 사회에 있지 않고,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존재하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 관계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도시 한 복판에서 아이거 북벽, 그 치열하고 순수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간직한 채 사진사로 살아가는 루이제는 두툼한 입술을 오므려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삶의 저 편을 건너온 순례자처럼 담담히 과거를 읊조린다. 루이제의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화면은 아이거 북벽처럼 도시의 빌딩 숲을 조망한다. 이어, 2년 후 토니와 힌터의 루트를 따라 아이거 북벽 초등이 이루어졌다는 자막이 나온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눈과 마음은, 이미 허탈과 당혹스러움, 두려움 같은 것으로 멍한 상태다.
나는 아직 루이제가 벗어나고자 했던 비정한 사회에 동조하고 때론 강화하면서, 방향 잃은 조각배처럼 흔들리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어디에서 잠시나마 그런 혼란을 벗어나 안식을 취하고 루이제와 같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영화 [노스페이스]는, 아무래도 아이거 북벽에 그 답이 있지 않겠냐고 말하고 있다. 나의 아이거 북벽은 어디인가?
멋진 넘이지요?
언제 요세미티에도 함께 갈겁니다.
아~~~~ ㅆㅂ 나두 루이제가 되고픈데...참...ㅜㅜ
첫댓글 오래된 흑백 영화...
산에 대한 정열 과 사람에 관한 사랑...그리고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