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형 시집,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출간
이원형 시인은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고, 2021년 계간시전문지 {애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이별하는 중입니다}가 있고, 현재 경희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사이버) 중이며, 흙빛문학과 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원형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는 ‘낯설게 하기’의 진수로서 일상적인 언어의 목을 비틀고, 새로운 시세계를 창출해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이원형 시인의 시들은 재미있다. 한편 한편이 모두 말의 재미를 느끼게 만들어 준다. 시에 등장하는 말들은 그 어느 것도 상투적인 일상어의 쓰임에서 벗어나 있다. 그 말들은 애초에 그 말들이 지칭했던 사물의 생생함을 다시금 환기해 준다. 그래서 우리가 자동화된 의식 속에서 지우고 있던 사물과 그 사물들의 세상이 가지고 있는 본모습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운다.”(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오늘의 기후를/ 오늘의 기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수문 활짝 열어놓은 하늘/ 비를 쏱아부으려는지 이부자릴 펴고 드러눕는/ 구름의 잠버릇은 때때로 고약해서/ 드르렁으르렁 코 고는 소릴 우레라고/ 얼버무리는 기상청이 있고// 내 이럴 줄 알았다/ 막무가내 뛰어내리는 비 때문에/ 비 온다 빨래 걷어라/ 목청 돋구던 할미꽃 같은 할매는/ 허청허청/ 구름 타고 장으로 가시고// 오십 미리는 족히 오겠습니다/ 우산까지 들고 나와 호들갑 떠는 아가씨에게 건넨/ 철썩 같은 믿음은 종종/ 과녁을 빗나가 내가 나를 실망시키고// 겉만 번지르르한 구름 탓일까/ 겉 다르고 속 다르잖아욧/ 비를 파종하는 척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늙은 여우 같은 하늘과 한 판 붙고 싶은
- 「오늘의 기분」 전문
시인은 “오늘의 기후”라는 일기예보를 통해 삶의 아이러니함을 경험한다. 빗나간 일기예보처럼 예상을 벗어나거나 대비하진 못한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하나의 단일한 질서와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확실한 안목은 누구에게도 없다. 기상청이라는 국가 기관에도 항상 가족을 염려하는 나의 사고 속에서도 그런 확실한 믿음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기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다양성의 세계이고 흔들림의 세계이다. 규정하고, “오십 미리”라고 수치화할 수 없는 불완전한 세계이다. 이 불안한 아이러니를 견지하며 “늙은 여우 같은 하늘” 즉 알 수 없는 세상과 “한 판 붙고 싶은” 것이 바로 이원형 시인의 시적 세계가 아닌가 한다.
너를 보면 꽂고 싶어
쪽쪽 빨고 싶어
그렇고 그런 고백의 배후에
삐닥하니 버티고 섰는 그것이 바로
입술의 버팀목입니다만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아요
한 번 쓰고 버리지 않아요
비록 일회성 생을 살지만
일회용은 사절합니다
목이 마르군요
꽃차나 한 잔 할까요
제멋에 겨워 가는 단골집
꽃다방에 주문을 넣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꽂고 빨고
꽃은 꽃에게 돌려주고
연장은 둘둘 말아 넣어두기로 합니다
취한 기분으로 길을 나선다고
누가 뭐라겠어요
참, 깜박했군요
쓰고 또 쓰고 다시 쓰는
빨대의 기쁨
빨대의 순정을 아시는지요
- 「빨대의 순정」 전문
‘갈대의 순정’이라는 노래의 제목을 “빨대의 순정”으로 재미있게 패러디했다. 그런데 유사어을 통한 패러디가 언어의 유희만을 노리고 있지는 않다. 빨대는 발음도 그렇지만 그 긴 외관이 갈대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래서 갈대처럼 가볍고 쉽게 흔들리고 또 아무 생각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빨대는 ”타는 목마름“을 달래주고 “쓰고 또 쓰고 다시 쓰는” 언제든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지만 여러 사람에게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 그런 순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닌 빨대에서 세상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인간의 가치를 발견해 내는 시인의 안목이 반짝이는 작품이다.
잊을만하면 나타나곤 한다
시의 행간에 목 빼고 앉아 먼 산 바라보는 목련
그녀 흰 목덜미에 마음이 흥하여
꽃이나 보러 갈까 하는 당신의 유혹
따라나설까 하는 이 마음의 유흥
수국나라 수문장 같은 당신
꽃보다 유창한 헛꽃의 말인 줄 알지만
내 시에 쏟아 붓는 살가운 환대로 받아
시냇물처럼 졸졸 따라나서지
이꽃 저꽃 시를 쓰는 창가
당신은 또 벌처럼 징징거리지
암술과 수술이 그러하듯이
이 생에 한 번은 해봄직한 신방을 차리고
시의 웃자란 말을 다듬어주는 동안
당신은 꽃에 물을 주고 켰다 껐다 하고
꽃의 흐린 말에도 귀가 솔깃한 당신에게
책상 모서리처럼 지루한 시를 이해시키느라 하루가 터무니없고
내 시를 오해하느라 한 시간이 하루 같은 당신
나무가 꽃을 버린 건지 꽃이 나무를 떠난 건지 분분하지만
그들이 그러하듯이
그놈의 시 때문에
우리 헤어질까 하는 말 꺼내지도 못하네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전문
시인은 꽃과 시를 대비하고 있다. 거기에다 쓰다와 썰다를 함께 가져와 일종의 언어유희를 만든다. 이 두 말이 언어유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시를 쓸 테니’라는 말을 경상도 방언으로 발음하면 “시를 썰 테니”가 되기 때문이다. 꽃을 보러 먼길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여유 있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시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꽃의 흐린 말에도 솔깃한 당신”이지만 “내 시를 오해하느라 한 시간이 하루 같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대비를 통해 꽃이 쉽게 시가 될 수 없고 너무 쉽게 꽃 같은 시를 찾거나 만들고 있는 태도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시를 쓰는 행위를 시를 썬다고 표현한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칼날의 긴장감으로 언어를 썰어내는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형 시인의 시들은 재미있다. 한편 한편이 모두 말의 재미를 느끼게 만들어 준다. 시에 등장하는 말들은 그 어느 것도 상투적인 일상어의 쓰임에서 벗어나 있다. 그 말들은 애초에 그 말들이 지칭했던 사물의 생생함을 다시금 환기해 준다. 그래서 우리가 자동화된 의식 속에서 지우고 있던 사물과 그 사물들의 세상이 가지고 있는 본모습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운다. 그것들은 이미 세상에 만연한 편견과 선취된 개념들을 뒤흔들어 우리를 각성시킨다. 시인의 재치와 말의 재미에 웃다가 가슴을 누르는 말의 무게를 감지하며 나를 돌아보고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게 된다.
닭은 죽어
꽃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맨드라미는 닭의 후생
- 「그러니까 맨드라미」 부분
상투와 권태의 세상에서 생기를 잃은 언어의 목을 비틀어 다시 맨드라미 꽃으로 후두둑 살아나게 하는 이 마술이 이원형 시인의 시의 힘이라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이원형 시집,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썰테니},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