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기사는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소급하여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여운형은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에서 사퇴하였으며 신문은 폐간되었다. <동아일보>는 간부 사직과 함께 이길용, 신낙균, 현진건 등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으며 무기 정간조치를 받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당시 기자들의 행동이 사측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정간을 풀고 9개월 만에 신문을 재발간 했다.
이 사건에 더하여 손기정은 월계수나무로 일장기를 가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후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은퇴 후 행보
영광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식민지의 금메달리스트는 일제로부터 합당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손기정은 일본의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다. 1944년 손기정은 조선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 때 관계를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의 연락담당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손기정은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활동하여 서윤복과 함기용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후 손기정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서울특별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뛰었다.
한편, 당시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가서야 손기정의 손에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되어 있고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살아생전 손기정은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일본 올림픽위원회가 손기정에 대한 국적 변경 신청을 해주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손기정의 일대기를 쓴 자료에는 국적을 한국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의 이름 손기정을 표기하였고, 당시 그가 일본국적을 달고 경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힘들게 딴 금메달을 조국의 영광으로 돌리지 못한 한 때문이었을까? 1992년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손기정은 누구보다도 황영조의 우승을 기뻐하며 마치 자신의 우승처럼 여기며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