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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다스리는 나라 / 열왕기상 4:1-34
이 세상을 살면서 잘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힘이 있은들 얼마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그를 믿고 그에게 맡기며, 그를 경외하면서, 그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것,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고 잘 사는 길이며, 평생을 보장받는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노후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 죽음에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천국까지 우리를 보장해 주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천국에 대한 규정과 원칙을 세워 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규정과 원칙대로,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라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규정과 원칙이라는 것은,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규정과 원칙에 의한, 천국과 인간이 구상하는, 곧 종교 활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천국은 전혀 다릅니다. 결국 하나님의 규정과 원칙에 의한 천국이 세상이 드러남으로써, 평소 인간이 생각했던 천국이 천국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꾀하였는지도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알게 되면, 자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구상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세워진,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갈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주를 믿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가 어떤 주를 믿으며, 어떤 주를 부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다면, ‘주여 주여’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부인 받을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이, 어떤 규정과 원칙으로 일하시는가를 알아야 하고, 천국이 어떤 규정과 원칙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며, 그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사람이며, 그러한 성도가 모인 교회는, 또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라는 말을 합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언급하는 것은, 솔로몬이 다스리는 솔로몬 왕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언급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솔로몬은 두 여인이 한 아들을 두고, 각기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줬습니다. 곧 하나님의 지혜는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였던 것입니다. 아들이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여인의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여인을 구분하는 그것이야 말로, 솔로몬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지혜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솔로몬의 지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솔로몬의 왕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솔로몬의 신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사리아라는 제사장으로 시작해서, 서기관(엘리호렙과 아히야), 사관(여호사밧), 군사령관(브나야), 제사장(사독과 아비아달), 지방관장(나단의 아들 아사리아), 제사장이며 왕의 벗(사붓), 궁내대신(아히살), 노동감독관(아도니람) 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나라의 공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며, 재정을 맡아 일했습니다. 사관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비서와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지방관장의 두령은 열두 관장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으며, 궁내 대신은 왕궁의 살림을 맡은 관리이고, 노동감독관은 세금과 부역을 담당한 직책이었습니다. 여러분께 조금 생소한 직책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린 것은, 본문에서 언급된 여러 직책의 신하들 모두, 솔로몬 왕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왕국이 유지되고 굳건한 질서 위에서 번성하기 위해서는, 위의 직책의 신하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의 “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는 제사장이요”라는 구절을 보면, 솔로몬의 신하들 중 가장 먼저, 제사장이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하들의 다른 직책을 보면, 왕국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왕국의 유지와 번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솔로몬 왕국의 번성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원을 하는 역할로, 제사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까? 제사장은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이방 나라도 각기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고,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이방 나라가 신에게 제사 드리는 것은, 국가의 발전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하지만 솔로몬 왕국의 제사장은 그런 역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목사들이 모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들은, 참된 기독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 종교의 행위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하나님께 기원하는 역할이 아니었으며, 목사 역시 그런 역할로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왕국의 발전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사장이, 왜 솔로몬의 다른 신하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까? 제사장이 없이도, 왕국의 존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기관이나 사관 등 다른 신하들이 없으면, 왕국을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왕국과는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은 죄와 연관이 있는 직책입니다. 죄와 용서, 이것 때문에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필요 없다는 것은, 죄의 문제에 전혀 관심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나아가 용서라는 것 역시 필요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출 19: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이 중심된 나라를 뜻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중심된 나라가 되려면,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자신들을 상대하지 않고, 제사장을 세워서 제사장으로만 만나신다는 것을 알 것이기에, 자연히 제사장이 중심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안에서 제사장이 푸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죄에 대해 무관심하며, 용서에 대한 것 역시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국이, 아무리 뛰어난 신하들로 말미암아 번성하고 강대하게 된다고 해도, 제사장이 없다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이방 나라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단지 윤리와 도덕에 어긋나지 않게만 살아가면, 착하게 사는 것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이 없기에, 하나님이 제사장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필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주여 주여’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현장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현장에서만,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만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 세우시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면, 교회의 번성과 발전에 눈독을 들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피 흘리시며,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공로와 은총에 감사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모아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인간의 선행이나 윤리 도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에게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다스림에 종속되고 복종하는 것이, 제사장으로 인한 용서의 은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 되셔서, 모든 죄를 덮으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긍휼로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복종하는 그들만이, 진정한 예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누구입니까? 자신의 죄를 알고,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번성하고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그들이야 말로,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은혜와 사랑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원칙과 규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죄인임을 알고 있다’라는 것으로, 자신이 마치 천국 백성 된 것으로 착각하지 말고, 예수에게서 샘솟듯 흘러나오는 용서의 은총에 무릎 꿇으며 감사하면서, 제사장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왕이신 예수님께 복종하는가를 돌아보기 바랍니다. 세상은 자신의 번성과 발전에 목메어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것들은 죄로 인한 심판 속에 무가치하고, 헛된 것으로 묻혀 버린다는 것을 잊지 아니하면서, 비록 번성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살아간다고 해도,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소원하는가로, 자신을 점검하기 바랍니다. ‘나는 죄인이다’는 말로, 죄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죄로 인해 애통하지 않고 회개가 없다면, 그는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르는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용서의 은총으로 인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총의 기쁨은, 세상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의 은총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으로 허전한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없는 인생은 영원한 심판으로 종결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다시금 죄의 자리에서 용서의 은총을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21절 “솔로몬이 그 강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그 나라들이 조공을 바쳐 섬겼더라.” 21절은 솔로몬 왕국의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국의 영화는, 그 어떤 이방국가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강대국인 블레셋과 애굽까지 포함될 정도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강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솔로몬의 왕국은 강한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22-23절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고르요, 살찐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 이 말을 보면, 솔로몬 왕국은 물자에서도 아주 풍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식량이 필요할 정도로 수가 많았으며, 그 많은 수가 먹고 살기에, 전혀 걱정이 없을 정도로 물자가 풍부했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24-25절에서는, 솔로몬이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국가까지 모두 관할함으로써,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는 전쟁이 없이 평화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6-28절까지를 보면 솔로몬 왕국의 관장들은, 각기 자신이 맡은 직무를 따라 성실하게 일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솔로몬 왕국은 경제적, 군사력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안정과 평화를 누렸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누린 이런 부귀와 영화가, 솔로몬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곧 왕이었던 솔로몬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들고 어렵게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0절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수많은 백성들이 동일하게,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삶을 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태평성대를 누린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꿈꾸는, 축복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이러한 복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솔로몬의 왕국은 인간이 원하는 바가 완벽히 갖춰진, 축복의 왕국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런 축복을 원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며, 복된 날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축복이라는 것이 인간이 소망한다고 해서,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인간이 힘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솔로몬 왕국의 축복이, 이스라엘의 백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했기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조차도 하나님께 부귀영화를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3:13절의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을 보면, 부귀와 영광은 솔로몬이 구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솔로몬에게 베푼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자신을 위해 오래 사는 것도, 부자 되는 것도, 원수에 대한 보복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 것을 두고, 하나님 마음에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을 주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부귀와 영광을 얻은 것으로 여기고,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 하나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자고 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애당초 솔로몬은 부귀와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은,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선악을 분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백성이 아니라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선악을 분별하여, 항상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백성으로, 잘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솔로몬의 기도로 증거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고,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 하나님은 주셨는데, 그 혜택을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잘 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잘 보인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을 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왕 덕분이지, 백성 자신들의 공로는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희한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보시고, 그에 따라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왕과 상대하여,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기도 하시고, 복을 주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왕입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서있기만 하면, 이스라엘은 자연히 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축복도, 같은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풍요의 복을 누린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 마음에 맞은 결과였던 것이지, 백성들 자신들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거나, 십일조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거나, 봉사를 해야 한다거나, 착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성경을 곡해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다른 교훈을 끄집어내게 되며, 무당의 말과 다를 바 없는 말만 내 뱉게 되는 것은, 소위 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솔로몬과 이스라엘이,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복을 받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아직 솔로몬 왕국의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국의 본질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솔로몬 왕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음으로,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가 혜택을 입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국은,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왕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만 왕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왕국의 이러한 본질을 이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 있으면서, ‘내가 잘해야 복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솔로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평안과 부귀를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 되심으로, 오늘 우리가 하늘의 무한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나의 모든 복이 왕이신 예수님 덕분에, 누리고 있는 것들임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백성인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뭔가를 갖고 누리는, 환경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솔로몬 왕국의 부귀영화가, 여러분 보시기에는 천국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솔로몬 왕국의 부귀영화가 눈에 아른거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천국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솔로몬의 모든 영화가, 들에 핀 백합화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 마음에 맞음으로, 이스라엘이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솔로몬도 결국 실패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인간 뒤에 오신 분이,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무한한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환경이 아니라,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세상의 부귀와 영화는 헛된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늘 것에 비해서, 땅의 모든 것은 썩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땅의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했던 소원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늘의 것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되었을 때,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고,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기에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로, 감사함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29-30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리고 31절을 보면, 솔로몬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린 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심히 많이 주신 지혜와 총명 때문이지, 부귀와 영화 때문이 아니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4절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이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이 솔로몬에게로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솔로몬이 세상의 중심에 있게 된 것인데, 그 모든 것이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로 인한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히 많이 주신 지혜와 총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솔로몬에게로 모여든 모든 사람들은, 솔로몬의 힘에 굴복해서 솔로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화를 조금 얻기 위해서, 솔로몬을 찾아왔다면 이해가 되지만, 기껏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았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됩니까? 솔로몬을 찾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서 그가 누린 부귀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혜의 말을 듣기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솔로몬 왕국은 지혜의 나라인 것이지, 부귀와 영화의 나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하며, 교회가 무엇인가, 성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항상 부귀와 영화에 대한 미련이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부귀와 영화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나오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솔로몬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는 것입니다. 곧 지혜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것은, 교회는 사람이 사람을 끌어 모으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오류는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고, 지금 자신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힘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교회로 모이게 하신 힘에 대해서 무지하기에, 스스로 교회를 찾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결국 나를 부르신 분의 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이루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끌어 모아,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는 발상만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로 모입니까? 무엇을 바라보고 왔습니까? 만약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지혜에 이끌려 교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솔로몬의 지혜의 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는, 이미 솔로몬의 재판 사건을 통해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잠 1:7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지혜로 말미암아 유발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경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일상생활에서 고스란히 담겨서 표출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솔로몬의 지혜서인 잠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모든 행동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에 의해서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래서 긍휼과 사랑이 곧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솔로몬 왕국은, 솔로몬이라는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솔로몬의 부귀와 그의 힘에 굴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혜 아래 모이고, 지혜의 통치를 받는 것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이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지혜, 곧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아래, 하나로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분명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인간결속을 위해서, ‘단합대회’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결속된 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모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관계인 것이지, 인간의 결속으로 하나 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러한 하나 됨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것은 인간관계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끼리 단합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그리스도만을 바라봄으로, 하나의 관계는 자연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집스럽게, 그야말로 고집스럽게 그리스도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긍휼과 사랑이 죄인 된 우리에게, 어떤 복을 안겨 주었는가를,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나타낼 때, 그 긍휼과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솔로몬 왕국이었고, 지금 교회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한 것도, 인간이 꿈꾸는 화평, 곧 인간의 결속과 친분관계를 이루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를 해체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새로운 관계를 이루시기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 된 관계 안에서는, 서로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만 높이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랑이 없고 서로가 죄인임을 알기에, 높고 낮음이 없게 되고, 분쟁과 다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이루어지는 질서인 것입니다.
세상은 부귀와 영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부귀와 영화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지혜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세상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원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부귀와 영화가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알고, 긍휼과 사랑의 실체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지혜가 나를 즐겁게 함을 믿으며, 지혜를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지혜를 소망하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모이자는 것입니다. 지혜의 소문을 듣고 지혜를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듣기 위해 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은 부귀와 영화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꿈꿉니다. 부귀와 영화가 인생의 즐거움을 보장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난은 인생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만 안겨준다고 생각하기에, 가난을 불행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를 바라보게 되면, 솔로몬이 누린 그 모든 것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알고, 긍휼과 사랑의 실체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지혜가 나를 즐겁게 함을 믿으며, 지혜를 구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지혜의 소문을 듣고 지혜를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듣기 위해 모이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화보다, 더 뛰어난 하늘의 복을, 예수님을 만남으로 받았다는 그 기쁨을 널리 전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