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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서정을 엿보는 시적 공감화법
----조숙진 시집 {우리, 구면이지요?}의 시세계
신병은 시인, 문학평론가
조숙진의 시정신의 밑자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인문과 자연의 통섭에 의해 서정을 확보해 가는 아르떼,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일상을 재발견함으로써 서정의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공감, 그리고 기억의 회로를 더듬어서 낯선 상상력의 서정으로 안내하는 유추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아르떼는 무엇보다 연결시키는 힘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여 낯선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관계없다고 인지하는것을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한번 연결해 보고 어떤 가치 있는 변용이 일어나는지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일어나는 차이와 변용을 존중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 가는 상상력을 확장하게 된다. 경험과 경험이 연결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체를 형성해 내는, 관념의 재구성으로서의 창작은 고정관념을 벗어나 이전과 다른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창작은 이것에서 전혀 다른 영역의 저것을 보는 일이고, 비유과 은유와 역설에 의해 관습적 사고의 틀을 깨어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런 의미로 보지 않은 새로운 풍경을 엿보는 유혹의 응시다.
그렇다고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 대한 비밀을 헤아리고, 하나를 보이면서 둘을 감추고 둘을 보이면서 셋을 감추는 독법이다.
여기에 조숙진의 매력이 있다.
그의 시를 만나면 먼저 미술의 현대적 기법인 현대적 기법 데콜라주(Décollage)가 생각난다. 데콜라주(Décollage)는 오브제를 뜯어내거나 찢거나 해체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효과를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시켜가는 기법으로, 오브제를 오려 붙이거나 재구성하는 미술 기법 콜라주의 반대 기법으로 세상에 눈비가 내리듯 스며든 먹빛 흥건한 한지를 뜯어낼 때마다 드러나는 먹빛의 번짐과 변화의 그림자가 자연스러운 층을 이루며 풀잎이 돋고 꽃잎이 피어나며 자연에 깃든 생명의 숨결이 살아나는 기법이다.
세상은 어느 한순간도 멈춤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되면서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낯선 풍경으로 나아가게 된다.
조숙진 또한 대상에 대해서 눈앞의 현상에만 급급해 하는 것이 아니라, 거쳐 온 공간과 시간의 포즈를 헤아려 보이지 않은 삶의 풍경을 되짚어내어 보이거나 감추기도 한다. 여기에는 자연과학적 발상과 인문과학적 발상의 융합과 통섭과정을 통해 대상과 현상의 본질에 접근해간다. 그런가하면 ‘기억의 회로’에 남아있는 불순물을 걷어내어 대상과 현상의 숨겨진 원형을 축출해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만의 시적 발상법이다. 즉 인문학을 자연과학적인 발상으로 만나고, 자연과학적 현실을 인문학적 발상으로 전이하는 가하면, 범 우주적인 시선으로 본질을 더듬어내는 폭소노미(folksonomy)적인 통찰을 보여주는가 하면,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통찰洞察로 전체를 환하게 내다보고 예리하게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과학을 전혀 몰랐을 때 나는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했다.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인간을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예전보다는 더 다양한 관점에서 훨씬 많은 것을 살핀다”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에는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며,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인간과 자연과 생명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라고 했다. 과학은 인문학으로 깊어지고 인문학은 과학으로 정확해지는 통섭적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세계를 보는 안목을 갖는다.
이점이 조숙진의 시적 안목이다.
시 창작은 삶의 구조, 성질, 관계, 변화를 연구하는 인문과학으로, 과학과 물리학, 생물학을 모르면 세계의 관계성과 운행, 온 생명의 관계성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는데 동의한다. 그러한 동의 속에서 존재들을 관계짓고 투사하면서 삶의 본래적 포즈를 재발견하려한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의미를 지니고 있어 어느 쪽이 다른 쪽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를 결정해가는 상호의존관계다. 어떤 사물도 관계를 떠나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고, 관계와 연결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 존재의미는 관계의 의미라는 점에서 대상과 현상을 만나고, 그 숨겨진 의미와 포즈에 접근해간다.
영리하고 지적인 성찰법이다.
x가 튼 살 사이로
손과 발을 뻗고 마침내 머리를 내밀면
x = 봄이라는 등식
물길을 찾고
꽃과 잎의 배색과
그늘의 평수를 따져보고
한 해 동안 쓸어 담을 이야기의 곳간과
추억의 당도 조절을 위한 완벽한 수를 헤아려 본다
지층을 들썩이는 수많은 숫자, 숫자들
한참 봄을 푸는 과정이다
뒷심 강한 꽃샘바람에도
계획은 어긋남이 없고
어제 들은 빗소리는 연락도 없이 나타난 오랜 친구지
이윽고, x가 보이는 한나절
햇볕을 먹은 고양이가 등을 펼친다
고요한 등식의 은근한 활동성
공식 성립의 결과다
봄의 성질이다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전문
위 시에서 ‘x’는 ‘봄이라는 등식’이고 ‘쉽게 오지 않는 봄’이다. 봄은 무작정 오는 것이 아니라 ‘x의 틈새’에서 ‘물길을 찾고, 꽃과 잎의 배색을 따져보고 이야기 곳간을 살피고 추억의 완벽한 수를 헤아린 후에야 ’고요한 등식의 은근한 활동성‘의 봄이 온다.
그래서 x인 봄의 성질은 공식성립의 결과가 된다.
세상 어떤 것도 허투루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세상은 돌아간다는 것은 잘 안다. 어떤 일이 시작될 때 있었던 아주 작은 변화가 결과에서는 매우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나비효과, 브라질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이론처럼 숲속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서 강물과 바다를 바라보는 인과적 안목이다.
시는 관계의 미학이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 즉 온 생명이라면 그 안에 존재하는 개개의 생명체는 세포다, 그렇게 보면 우주는 하나의 유기체로 서로 통하지 못할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다.
관계의 미학으로서 객관적 상관물은 대상을 그 자체로 초점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관계 속에서 재발견하는 일이고, 인문학적 관념을 자연과학적 대상에 투영하는 관계 속에 위치 시켜 세계를 재발견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위 시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가 의미 깊게 다가오는 것이다.
바삭바삭 볕이 마르자
토독 톡 톡
혹독한 여름을 이겨낸
별들의 자축, 폭죽 터진다
해의 부름으로
생의 작은 문을 나온 풀씨
싹을 보고서야 그 존재를 알았다
대대로 답답함을 싫어했기에
애초에 흩어뿌림을 주문했다
돌볼 틈 없는 다산에서 길러진 성품일까
줄 맞춰라 밥상머리 교육에 열 올렸지만
은둔형 고립형 내성형이 아닌
튀기 좋은 자유형의 DNA
마루 틈새에
나물 그릇 언저리에
서랍 속의 나이 잊은 깨알 씨앗
허를 찌르는 본성
빈틈으로 숨어든다 -<참깨의 성격>전문
참깨가 햇볕 속에서 톡톡 씨방을 터트리는 풍경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 현상과 움직임을 해부학적인 시선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를 주목하는 것은 해의 부름으로 ‘토독 톡’하고 참깨가 스스로 생의 작은 문을 뛰쳐나오고, 대대로 답답함을 싫어해 애초에 흩어뿌림을 주문했었고, 돌봄 틈이 없는 다산에서 길러진 성품이고 자유형의 DNA라는 발견에 있다. 그리고 시인의 안목이 유별난 점은 ‘참깨’의 성격을 ‘허를 찌르는 본성’에 전이한 것도 그렇고, 참깨의 생태학적 성격과 인간형을 절묘하게 오브랩하여 공감하게 한 점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조화롭게 버물려 자유분망한 생의 모습을 유추해 낸다는 점이다. 대상을 자기화하고 자기를 대상화하는 곳에 생기는 의미정신이 삶의 재발견이기 때문이다.
시가 일상의 재발견 혹은 일상의 장엄함을 새롭게 짚어내는 것이라면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이 각각의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서로 만남으로서 새로운 관계의 의미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처럼 시창작이 시인이 시적 대상과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개선이라는 점에서 조숙진의 시적 안목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서정시의 원형은 일반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추구, 즉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늘어진 마당이 접힌 곳
올봄 민들레 앉았던 곳
그 자리엔 시간이 거꾸로 간다
햇살이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는 아침나절
깔깔깔 모여 나물 캐던
산골짜기 가재 잡던
아이들 그 속에 다 모였네
바람의 장난에 숨어 버릴까 봐
노란 대문 살며시 닫자
눈웃음 마주친
꽃과 나
우리, 구면이지요? <우리 구면이지요> 전문
시가 재미있고 정겹다. 한번 쯤 나도 저런 대화를 해보고 싶은 간절함이 샘솟는다. 올봄 민들레가 앉았던 마당 구석진 곳에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첫발상이 그렇고, 거꾸로 가는 시간의 선로를 따라가며 오랜 기억을 만나는 시적 안목도 그렇다. 그 시간의 풍경 속에 모여 있는 깔깔대며 나물캐던 아이들과 산골짜기 가재잡던 아이들도 그렇다.
그런가하면 바람의 장난에 그 새록한 기억들이 달아날까봐 마음속의 노란 대문을 살며시 닫자 눈웃음 마주친 꽃이 ‘우리 구면이지요?’라고 묻는다.
‘우리 구면이지요’
이 한마디의 의미는 깊고도 넓다.
‘통합의 안개’ 속에서 형태와 힘이 끊임없이 뒤섞이며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살며, 다른 동물도 다른 존재로 구분하지 않고 그저 겉모습이 다른 생명체로 인식하며 하나의 생명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산, 폭포, 숲도 주체성이 충만한 살아있는 존재로 여긴다.
인류가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며 지구의 작용들을 사유화하여 효율성을 사회의 지배적인 주제자리에 올린 우려를 밑자리로 해 놓았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같이 자연의 순리에서 모방하고 훔쳐온 것임을 자인하면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훼손된 본질을 복원해가야 하는 터닝포인터에 와 있다.
그래서 자연의 일부로서 어떻게 적응하고 회복하며 살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관계하고 통섭하는 관계의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나를 힐끔 쳐다본 꽃이
돌아오는 길 또 힐끔거린다
왜 그렇게 보느냐고 눈썹을 올리자
봄 아니에요?
되레 묻는다
봄이 아닌 것 같냐고 물으니
아직 겨울인가요?
또 묻는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니
표정이 아직도……
고목 나뭇가지에
늦게 피우는 꽃이라서 그렇다고 해 둘까
한겨울 찬바람에 휘둘려서 그렇다고 할까
여린 싹은
굳은 흙도 어영차 밀어 올리고
돌덩이도 둘러메치는데
내 표정의 행방을
거울 속의 그녀와 이야기해 봐야겠다 <계절의 훈수>
우리 삶의 모든 게 계절의 훈수다.
봄이 오면 온몸으로 봄을 느끼고 여름이 오면 여름을 느끼고 가을이면 가을을 만나는 것이 순리대로 사는 삶이고 철든 삶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봄이 와 세상 모든 것들이 봄을 완상하는데도 겨울 속에 멈춰있는 철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사소한 일상에 안겨있는 삶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그 관계성을 토대로 생태학적 사유와 통섭한다.
서정시에서의 중요한 키워드는 생태학적 사유다. 생태학적 사유를 밑자리로 세계의 관계성을 풀어낼 때 서정의 본질을 헤아릴 수 있다. 이것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공감의 말하기 방식이다.
공존과 공감,
공감은 공존에서 가능한 삶의 아름다운 가치다.
호모사피엔스인 인간은 지구상의 동료인 생명체와 공존하며 번영할 새로운 방법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생명애 의식은 평등의 가장 심오한 표출이면서, 자율성이 아닌 포용성에서 비롯되는 평등이기 때문이다. 평등의 표출은 법률과 선언을 통한 인정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공감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공감의 진화는 ‘내 것과 네 것’이 아닌 오직 ‘나와 너’로 존재한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다. 전부가 모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함께하는 인류가 진정한 인간이고 개인은 스스로 전체의 일부로 느끼는 용기를 지닐 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서정으로의 확장이다.
그는 공감회로의 회복을 통해 문화적 공감력, 생태적 공감, 거버넌스적 공감대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관계적 자아를 회복하고 서정적 상상력을 확장해간다.
프리즘을 가로지른 오색의 빛으로
쌓아 올린 컵과일
혀끝 조바심
군침 도는 초여름 맛
욕심이 드러난 손끝
중심을 잃자
난색의 시선 겹겹이 에워싼다
화들짝 놀란 맛의 탑
와르르 무너지고
버릴까
살릴까
앞에 앉은 바람
냉큼 떨어진 체면 주워 먹고
살아난 체면도 얼른 따라 주워 먹고
마주 본
흰 이
견장처럼 눈부시다 <체면을 주워 먹고> 전문
일상의 풍경 속에 안겨있는 삶의 정겨움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서정이 눈부시다.
시는 거창한 화두의 언어예술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의 장엄한 발견’으로서의 일상의 미학이다.
컵과일을 먹다 떨어뜨린 과일 한 조각을 그냥 버리자니 아깝고 주워먹자니 체면이 서질 않는 상황에서 앞에 앉은 사람이 ‘떨어진 체면과 살아난 체면’을 주워 먹는 흑기사를 보고 서로 마주보고 환하게 웃는 사람 사는 세상의 정경이 서정적으로 안겨온다.
시를 대하는 독자의 흰 이도 견장처럼 눈부실 수밖에 없으리다.
상상력은 또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적 안목에서 더 탄탄해지는 화법이다. 이 시 또한 ‘프리즘을 가로지른 오색의 빛, 군침 도는 초여름 맛, 난색의 시선’ 등과 같은 자연과학적 안목이 곳곳에 자연스레 놓여 인문학적 공감을 이끌어 삶의 본래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그의 시적 배려는 그동안 보지 못한 세계를 다시 보게 되는 철든 혜안으로 자리하게 된다.
기공이 활짝 열린 아파트에 젖은 햇살이 걸려 있다
볕을 훔치는 회색의 분자에 신경이 곤두선 요즘
잔고가 급격히 낮아지는 이상 현상에 건조대의 자리다툼도 물타기 한다
나는 가장 핫한 곳에 오선을 펼치고 높은음자리표를 달았다
볕의 가시가 콕콕 찌르는 높은 도 자리에서
투명한 수건이 명랑한 장조에 가볍게 몸을 흔들면
정화된 피가 모세 혈관까지 스며들 것 같아
뒤따라 콧노래를 내다 걸었다
뜨거운 곳이 가장 깊숙한 곳이어서
어머니는 그곳에 부끄러운 조각들을 걸어 두시지
남편 삼은 아들의 백색 러닝셔츠까지
오른손에 들린 것들은 항상 시렁에 두고 싶어 하셨어
그곳은 익명의 빛이 잠깐 어슬렁대다가 사라지곤 했지
온음표가 널린 뜨끈한 돌담이 없어서
가끔 단조의 곡조가 새어 나오곤 했어
음지의 발싸개들을 받아야 했던 아래 첫째 줄은
잠깐잠깐 때우는 임시 분량의 볕에 마름을 갈음했다
단조와 장조가 섞여 어긋난 화음 사이를
신경이 날카로워진 햇살이 얼핏 들여다보곤 했다 <두 여자의 베란다>
이 시는 빨래를 건조대를 중심으로 시어머니와 시인의 일상의 관계성에 내재하고 있는 미묘한 심리를 잘 엿보고 있다. 그 엿보기에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동참하면서 시적 매력을 더해준다. 특히 ‘뜨거운 곳이 가장 깊숙한 곳이어서 / 어머니는 그곳에 부끄러운 조각들을 걸어 두시지’ ‘단조와 장조가 섞여 어긋난 화음 사이를/ 신경이 날카로워진 햇살이 얼핏 들여다보곤 했다’ 등의 언표는 매혹적인 엿보기로서의 서정시의 본질을 말해준다. 이처럼 서정시의 본질인 언어적 인식이 돋보이는 시의 시적 인식은 새로운 진실 (리얼리티)의 발견이며 세계를 눈 맑게 바라보는 시적 양심이다.
그의 시적 인식은 삶의 깊이와 넓이를 보듬어 내는 감각이 깊고 넓다는 것이며, 삶의 후미진 곳을 파헤치고 존재의 아픈 곳을 들여다보는 촉수이며, 일상의 나른하고 심드렁한 풍경 속에서 미세한 균열과 상처를 발견해내는 힘이다.
여기에서 조숙진시인의 삶의 진정성과 언어부림의 힘이 출발한다.
아직 갈무리 중인 둥근 가로등이
마른 나무에 걸려 있는
초겨울 이른 아침입니다
출근을 서두르는 검은 승용차가
조심스럽게 아파트를 돌아나옵니다
째재잭 째잭 먼지를 일으키듯
한 무리의 새들을 달고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아직 눈이 반쯤 감긴 차와
뒤따르는 새들의 환한 소리가 하나 되는
순간,
승용차로 태어난 새인 줄 알았습니다
꿈처럼
나풀거리며 일어나는 소리
노래하는 생명으로 우화한 승용차
뜻밖의 발견이었습니다
화구를 챙기려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세렌디피티>
주를 달아놓은 것처럼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의도치 않게, 우연히 얻은 좋은 경험이나 성과, 운 좋은 발견, 뜻밖의 발견'을 일컫는 말로, 우연이 주는 재미, 경험과 과학적 현상에서 나타나는 법칙이다. 그래서 ’뜻밖의 재미‘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경험이 누적되다보면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거나 우연찮게 흥미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가 재미있는 것은 백마디 시 창작 원리보다 더 창작의 실제를 시인의 시적안목으로 보여주는데 있다. 출근을 서두르는 승용차가 아파트를 돌아 나오며 먹이활동을 하는 참새 무리를 날리는 풍경체험으로 ‘눈이 반쯤 감친 차와 새들의 환한 소리가 하나 되어, 승용차로 태어난 새’를 순간포착하게 된다. 그 순간에 시인은 뜻밖에 ‘나풀거리며 일어나 노래하는 우화한 승용차’를 발견한다.
아침 출근길에 만난 일상인 아침과 승용차와 새의 관계성을 내적미학으로 풀어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시인은 늘 보던 일상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 예전의 경험과 기억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재미있고 새로운 상황으로 안내한다.
시 창작이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다.
환호성이 뒤엉킨 티비 상자는 노래에 덮인 꽃밭
헤픈 눈물까지 꾹꾹 찍어내는 시간이 막을 내리자
꽃밭은 급속히 냉각된다
주섬주섬 아쉬움을 챙겨 들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딸깍, 문을 닫는다
뒤따라간 여운의 발길이 문 앞에서 엉킨다
잠시 우리가 언제 함께 웃었나 의심하자
방 문밖 적막한 물 위에 핀 살얼음의 냉기가
문틈으로 스멀스멀 습격해 오는가 했지만
청각의 경계가 한없이 느슨해진
방 안은
커튼 밖 궁금증이
아련히 달팽이 길로 사라진다
한 줄 분량으로 가벼워진 잡념의 페이지
뒤척이는 데시벨을 다독여봐
고요하게 풀어진 방이 너를 해체할 거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보온의 공간을 파고들며
그냥, 조금 전 노래의 뒷골목을 따라만 가면 돼 <단절의 감각>
조숙진의 시창작의 또 하나의 키워드는 기억의 회로를 더듬는 일이다.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 부여한 아레떼는 연결시키는 힘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를 연결시켜 새로운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그래서 인간은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야기는 연결의 형식이고, 연결 그 자체다. 오랜 이야기 구조인 신화, 전설, 민담도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식물,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결되는 이야기 형식이다.
기억의 회로를 더듬는 키워드 또한 상상력을 확장하는 모티브다.
‘생각한다’는 것은 내 안에 저장된 정보가 어떤 대상과 현상을 계기로 바깥으로 출력되는 것, 혹은 내 안의 정보와 정보가 만나 새로운 정보로 출력되는, 새로운 상상력으로의 나아가는 기억의 회로를 더듬는 일이다. 기억은 내 안에 있는 정보가 그대로 출력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계기로 재생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기 마련이다. 즉 동일한 기억이라해도 상황에 따라 다른 이야기의 질감으로 재생된다.
그 점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주변의 사소한 모든 것들이 기적 아닌 것이 없다, 꽃이 피는 것으로 하늘의 뜻을 기억하고, 작은 풀꽃 한송이에서 삶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세계를 반추해낸다.
시창작력은 결국 ‘기억의 재생과 변용의 힘’이다.
세상은 상황에 따른 패턴인식일 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대쪽 파열음이 질주하는 고속도로
바람의 고삐를 늦추며 돌아 나오는 길
봄이 환하게 열렸다
먹칠한 도로의 빼꼼한 가장자리
바람만 새어 들어와도
햇볕만 살갗에 닿아도
고향에서 날아 온 추억의 발아는 순식간이지
무리 지어 앉아 머리카락 세던 밭둑의 대화
발밑에 쏟아진 별꽃들과 향수 진한 냉이들이 휘젓던 언덕
새소리 흉내 내던 시냇물은 젖은 바지가랑이 사이로 피라미를 몰고...
이 봄은 그 봄이고
그 봄은 그 꽃으로 그 풀로
여전히 이 봄에 피었다
빼곡한 칼라 사진은 세월에 무력한데
유년의 흑백 사진은 갈수록 선명해
그 시절 그 들판을 봄이 되어 누비고 있다 -<그곳은 늘 설렌다>
기억의 재생이란 점에서 해마다 맞는 ‘이 봄은 그 봄’이고 ‘ 그 봄의 그 꽃으로 그 풀로’ 이 봄을 열었다. 그러면서 유년의 봄의 기억들이 하나 둘 재생되어 이 봄에 그 시절 봄날의 흑백사진이 봄이 되어 누비는 ‘재생과 변용의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그곳은 늘 설레기 마련이다.
시가 뭘까?
살면서 만나는 풍경체험을 통해서, 그 속에 안겨있는 삶의 표징들을 발견해서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인문학적 말 걸기다. ‘시간의 틈에서 그녀를 끄집어내어’ 그녀인 나의 길을 더듬으며 걸어보면 현실을 직감하고, ‘땅심을 디딤돌로 기지개를 켜는 초록의 기미’를 보며 모성의 힘이 발아하는 순간이 바로 시적 순간이다.
시적인 순간은 아주 사소하고 낯익은 일상에서 낯선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다.
내 눈에 든 낯선 풍경을 주목하는 힘이 시적 안목이다.
그의 시는 단순히 기교나 솜씨를 부리지 않고 치장하고 꾸미지 않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생과 변용의 힘’으로 세상 떠난 아버지를 애상하고, 아버지의 동선을 따라 어머니가 보이고, 양은냄비를 보면서 두 분의 부모님을 생각하고, 시집갈 날 찍어둔 볼 발그레한 고모 내음을 만나고, 미끄덩 뒤집어진 검정고무신의 배고픈 한나절의 오디를 기억하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를 해제한 방에서 재고 문자를 만나기도 하고 기억의 마디에서 길을 묻기도 한다.
홀로 집을 지키는 자물쇠의 귀가 예민해진다
익숙한 표정들이 드나들던 흔적은 사라지고
새 주인을 기다리는 집
돌담 밖 까치발 끝에 그리움이 간절하다
끝없는 바닷일을 툇돌에 벗어 놓고
닳은 문고리를 당기면
아버지가 기댄 아랫목 언덕은
부엌과 방 사이 한 겹의 벽
둥둥 파도에 흔들리는 몸을 벽에 붙이셨지
이명처럼 귓전을 휘젓던 바닷바람을 재우고
이물을 들어 올리는 너울의 닻을 내리면
살 속에 밴 짠 내만 아지랑이 피우는
아버지의 언덕 <아버지의 언덕> 부분
시의 첫 구인 ‘홀로 집을 지키는 자물쇠의 귀가 예민해진다’에서 독자는 시의매력에 젖어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비어있는 고향집은 시인에게 아버지의 흔적을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이 될 뿐만 아니라 돌담 밖 까치발 끝에 머문 간절한 그리움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이 갖는 의미를 자꾸만 희미해지고 있다. 바다 일을 툇돌에 벗어놓고 닳은 문고리를 당기면 아버지가 기댄 아랫목 언덕이 되었던 벽은 그대로이고, 바닷바람을 재우고 너울의 닻을 내리던 짠내 나는 어버지의 언덕이다,
조숙진의 기억의 소환은 내면의 감각을 일깨워 일상을 재발견하는 보는 발상전환을 위한 장치다.
늘 접하는 일상을 되돌아보고, 일상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생각도구이자, 생각을 다시 생각하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을 이끄는 중요한 생각도구인 패턴인식이다.
조숙진의 이러한 기억의 재생은 시편편마다 자리하고 있다.
깰 수 없는 단단한 어둠을 깨고 싶은 / 유년의 본능 몇 알 집어 들어 / 수면 위에 도드라진 파장을 향해 던진다<다리 및 어떤 편린>
상처를 안고 사는 것이 일상이 될 때쯤 / 너는 실바람에도 흔들리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 했어 <양은냄비>
바람의 섬에서 어언 십 년 / 가슴의 회오리 잠재우고 /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혜안으로 / 귀향길마다 님의 향기 어지러웠습니다 <추사를 읽다>
시간 틈으로 손을 들이밀어 / 가까스로 그녀를 끄집어냈다 <건조 주의보 내린 사이>
조숙진의 매력은 하나를 보이면서 둘을 숨기고, 둘을 보이면서 셋을 숨기는 은유의 힘에 기댄 에둘러 말하기다. 에둘러 말하기는 완곡어법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공감화법이다. 보기가 공개적 시선이라면 엿보기는 은밀하게 감추어진 비밀의 시선이다. 엿보기는 자신만의 사적인 시선으로 문학의 개성을 확보하게 되며 자신만의 은밀한 시선으로만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세계에 숨겨진 비밀을 하나 둘 헤쳐내어 보여주는 생각의 도구로써 시다.
생각을 먹는 시는 삶은 포장이 아니라 그 자체이고 세상을 향한 그리움이자 세상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하나 둘 챙겨가는 일이 시창작이라면 지나친 포장일까.
그래서 시 쓰기는 내가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한다.
굳이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을 구별하여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살아가면서 주위의 대상과 현상에서 받은 내적인 느낌, 감정, 직관을 어떤 외적인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언뜻
하나뿐인 그의 인생에서
숨기고 싶은 문신은 무얼까 묻고 싶었지
봄의 그림자에 덮인 채
웃음 뒤에 가려진 채
저 문신 밑에 가려진 상처는 어떤 것일까
잊혀지는 어두운 삶의 궤적이란 없는 거거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
계절에 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산야처럼
새롭게 새롭게 세월을 이어 가지
부러진 가지는 치료받고 긁힌 상처는 아물잖아
누군가의 삶에 박힌 불행의 문신은
맨발을 덮어버린 군화 자국으로
마음에 쏜 총 자국 그대로
옷자락에 가려지고 땅속에 묻혔어도
빛으로 한 발짝 나오고 싶은 간절함이 자라는 건 가봐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바뀌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대물림의 표식이야 -<문신>부분
문신은 감추고 싶은 내면을 포장하는 형광의 보호색이다. 문신은 숨기고 싶은 삶의 표징인 웃음 뒤에 가려진 상처고, 어둔 삶의 궤적이고 세월을 이어가는 상처고,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바뀌어도 지워지지 않은 불행이다. 누군가에게는 태어나면서 접하는 대물림의 아픈 역사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나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어느 날 들이닥친 삶의 왜곡과 아픈 기억의 편린이다.
그 문신은 옷자락에 가려지고 땅속에 묻혀 틈만 나면 밝은 빛으로 한 발짝 나오고 싶은 간절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시를 쓰는 것은 삶의 결을 거스리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챙기는 갈증을 푸는 일이었고 새로운 기회를 갖는 용기가 되었다고, 그리고 감춤과 포장에서 벗어나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행복한 배설과 마음껏 누리는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신을 지우는 일은 끝내 스스로를 찾는 길이면서 뜻밖에도 세상의 다른 출구를 만나는 행운이었다고 고백한다.
남녘 바다로 웃자라
섬과 바다에 휘말린 뭍의 운명으로
겨우내 꽃을 단 옷깃 매만져도 웃지 못하는
동백, 얼어버린 우리의 피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연좌제에
정丁의 표적이 되어
댕강
댕강
발아래 붉디붉은 흔적을 남겼소
질긴 기억의 상처가 덧나는 순간이오
깨어나지 않는 우리의 꿈이여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약속이여
풀리리라 봄이 되면
단단히 조여 맸던 가슴 싸개 풀 듯
한 겹 또 한 겹 풀리리라
그렇게 또 봄이 가오 - <동백의 시선 5>
시 창작은 잃어버린 마음을 챙기고 기억해내는 일이다.
조숙진에게 또 하나의 기억은 1019여순사건이다. 지역에서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여순사건은 제쳐둘 수 없는 책무일 것이다. 기억의 여순1019사건은 미완의 역사로 아득한 기억의 거리에 있는 아픔이 아니라 아직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아픔으로 공존하고 있다.
‘그렇게 또 봄이 가오’
지금도 여순사건은 동백꽃으로 상징화 되어, 가슴에서 가슴으로 안겨 있어 해를 더할수록 ‘질긴 기억의 상처가 덧나는 깨어나지 않은 꿈, 지켜지지 않은 약속‘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도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은 봄이 되면 풀릴 것이라 믿음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도 흰색도 회색의 시대에 서 있었던 시민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흰색이 되고 검은색이 된 가슴 아픈 비극이 아닐 수 없다.<회색시대>
뜨겁게 녹여 뽑아내야 할 아버지의 굳은 옹이가 자꾸 낮아지는 처마 밑에 아직도 웅크리고 앉아 있고<기억의 처마>, 그날의 하나 된 아픔의 통각을 지금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학교운동장>
조숙진의 기억의 재생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을 중심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다양한 삶의 통로를 지나온 경험들과 일상의 서사가 스며들어 비로소 빛을 내는 세상읽기다.
몇 편의 시를 통해 조숙진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 언어의 한계를 확인할 뿐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그럼에도 조숙진의 인문과 자연의 통섭으로 서정을 확보해 가는 아르떼와, 일상을 재발견함으로써 서정의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공감법, 그리고 기억의 회로를 더듬어서 낯선 상상력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서정으로 안내하는 지혜로운 유추의 시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혜롭다는 것은 자유자재로 시간과 공간, 가치관을 가로질러 건너다니는 일이다.
자연의 객관성을 디딤돌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삶의 표징을 포학해내는 협업을 위한 여정으로서의 자연과 인간과 시간과 공간의 근거를 재발견하려는 통섭적 안목이다.
통섭은 삶과 자연,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하면서 소통하는 재발견의 길이자 보이지 않은 것을 엿보는 융합의 시쓰기다. 모든 지식의 경계를 가로질러 넘어, 기존의 틀을 깨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어 낯선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조숙진의 지적 상상력에 매료되는 즐거운 작업이었다.
“나도 자신을 찾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길가의 꽃이길 바랍니다.
향기가 있어 번지고 스며드는 꽃이면 좋겠습니다.”
그의 바람처럼 그의 시를 만나는 일은 더불어 사는 세상의 공감지수를 높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