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1. 따우탈린(Tawthalin)은 양력 9월에 해당하는 것으로 미얀마에서는 매월 첫날이 되면 새로운 달을 맞이하여 지난달의 죄를 씻고 새로운 마음으로 봉사와 희생을 다짐한다. 이 날을 New Moon day(월삭,月朔, 혹은 호데쉬)라고 한다.
2. 불교에서 말하는 바와나(bhāvanā)는 사유를 쫓아다니지 않고 정신집중에 의해 직관적 통찰을 얻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 즉 무상·고·무아의 삼법인을 철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불교수행법은 크게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정(定)인 삼매(samādhi)을 닦는 집중수행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혜(慧)인 통찰지혜(paññā)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청정도론」에서도 전자는 <정품>에서 40가지 명상주제를 통해서, 익힌 표상(uggaha-nimitta)과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을 일으키고 이것에 집중하여 본삼매(appana-samādhi)를 증득하는 삼매수행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후자는〈혜품〉에서 82법의 고유성질과 연기성을 각각 찰라(khaṇika)와 조건(paccaya)으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7청정을 닦아서 16가지(또는 10가지) 위빠사나의 지혜를 체득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하고 성자가 되는 통찰지수행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이 두 용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직역되었다.
(1) 사마타(samatha)
사마타(samatha)는 고요함, 맑음 등의 뜻이다. 모든 불선법(不善法)이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 지(止)로 옮겼고 영역은 concentration이다. 이 단어는 삼매(samadhi)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아비담마, 논장에서 사마타는 네 가지 색계선(色界禪)과 네 가지 무색계선(無色界禪)이라는 8가지 선정의 경지(等持 samapatti)에서 마음의 집중(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한끝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은 근본집중(appanā-samādhi)와 근접집중(upacārā-samādhi)와 같은 깊은 마음집중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는 사마타 수행을 위한 다양한 명상주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주석서에서는 38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청정도론」에서는 최종적으로 40가지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의 핵심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인데 대상에 집중을 해서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일으키고,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이 될 때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극복되고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근본집중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타수행만으로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란,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 진․ 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집중의 상태를 풀면 다시 이러한 탐․ 진․ 치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위빠사나의 강력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이 지혜의 힘으로 이들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고 꿰뚫어서 탐진치의 뿌리를 뽑아,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위빠사나(vipassanā)
위빠사나(vipassanā)란 분리해서 다르게 본다는 뜻이다.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in) 보는 것(sight)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는데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하여 내관(內觀)으로 옮기고 있으며 영역은 insight로 정착되었다. 위빠사나는 바로 지금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해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의 삼법인을 통찰, 혹은 꿰뚫는 것을 뜻한다. 오온(五蘊)의 삼법인을 철견함으로써 탐욕, 성냄, 어리석음, 사견, 자만, 의심등과 같은 열 가지 번뇌(kilesa)를 제거할 수 있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괴로움의 종식인 깨달음에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마음집중, 즉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 필요한데 이러한 찰나집중은 오온에 대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알아차림(sati)를 통해 얻어진다.
3.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불교 역사상 지금까지 총 6차례의 결집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6차 결집은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은 직후 불기 2500년을 기념하여 정부의 주도로 미얀마, 양곤에서 1954년 5월 17일에 개최된 결집이다. 이 결집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결집을 이끌어가는 질문자 역할을, 삼장법사인 민군 사야도는 질문에 답하는 역할을 담당하셨다.
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번역한 Evaṃ me sutaṃ에서 evaṃ은 부사로서‘ 이와 같이, 이처럼’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영어의 ‘thus’가 적합한 뜻이라 하겠다. 如是로 한역되고 있다. me는‘나’를 뜻하는 일인칭 대명사 asmad의 조격(助격 Instrumental) 단수형이다. ‘나에 의해서’란 의미다. sutaṃ은 ‘들어진’의 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원문은 수동태의 문장으로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었다’는 뜻인데 상좌부와 대승의 양 전통에 속하는 경전들은 모두 이 말로 시작된다.
중국에서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옮겼다. 영역도 ‘Thus have I heard'이다. 여기서 ‘이와 같이’는 ‘이 경에 설해진 그대로’라는 뜻이고 ‘나’는 아난(Ānanda)존자를 말한다. 남북 전통에서 모두, 일차 결집(結集)에서는 아난 존자가 경(經)을 외우고, 우빨리(Upāli) 존자가 율(律)을 먼저 외워서, 그 곳에 모인 오백 아라한들이 그것을 합송해서 부처님 말씀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경과 율로 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후대에 결집된 대승경전도 모두 이런 표현으로 시작해서 경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아난 존자가 직접 세존으로부터 들은 말씀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5. 아난다(Ānanda)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부처님의 후반부 25년 동안 시자로 있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듣고 배웠으며, 경의 결집에서 경을 암송하는 역할을 맡아서 불법의 체계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부처님 제자 중 다문(多聞)제일이라고 불렸다.
6. 마하까사빠(Mahākassapa)장로는 마가다의 마하띠타에서 바라문으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삐빨리였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이 만든 조각과 똑 같은 여자가 있다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요건을 만족시키는 바따 카삘라니라는 처녀를 싸갈라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 상대자라고 만인이 인정해야 한다.’는 편지를 주고받다가 들켜서 빼앗겼다. 양가의 부모는 마침내 그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다. 삐빨리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는 60여개의 호수를 소유하고 정원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근 40여개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쟁기질하는 논에 갔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직감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동시에 아내 바따도 까마귀들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후 까사빠는 벨루와나의 향실에서 부처님을 뵙고 먼저 제자가 되었고 바따는 나중에 빠자빠띠 고따미의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마하까사빠는 부처님의 반열반 후 교단을 이끌고 1차 결집을 주도한 분으로 두타(頭陀)제일이라고 불렸다.
7. 사슴동산(鹿野苑)이라 옮긴 원어는 Miigadāya이다.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MA.ii.188)는 “사슴들에게 두려움 없이 머무는 장소로 주어졌기 때문에 미가다야(Miigadāya)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신 유서 깊은 곳이다.
8. 이시빠따나(Isipatana)는 지금의 인도 사르나뜨로 바나라시에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세존께서 우루웰라에서 고행을 그만두시자 다섯 비구는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세존께서는 정등각을 성취하신 뒤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셔서 중도로 표방된 팔정도를 내용으로 하는 최초의 가르침을 펴셨다.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에서는 “예전에 벽지불들이 간다마다나 산에서 7일 동안 멸진정(滅盡定)에 들었다가 탁발을 하기 위해 허공을 날아오다가 이곳에 내려서 도시로 들어가서 걸식을 하여 공양을 마친 후 다시 이곳에서 허공으로 올라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현인(isi)들이 이곳에 내리고 이곳에서 올라갔다고 해서 이시빠따나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9. 와소(Wāso)란 비가 많이 내리는 3개월 동안 출가자들이 주거를 바꾸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정주하는 우안거(雨安居)를 말한다.
10. ‘불어서 꺼진’이라는 뜻이다. 경전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이 열반은 진정한 불자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복이자 최고선이다. 이 열반은 출세간이며 형성된 것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aupādisesa-nibbāna):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수명이 남아 있고,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②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
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入滅)을 하면 이러한 오온까지도 완전히 멸하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한다.
11. 벽지불(辟支佛)이라 번역한 빠쩨까붓다(pacceka-buddha)에서 빠쩨까는 ‘각각 분리해서’ ‘독립적으로’라는 뜻이다. 벽지불은 부처님의 교법이 사라진 시대에 태어나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깨달아서 법을 선포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분이다. 즉 깨달았다는 뜻에서는 부처님과 같지만 중생들에게 법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부처님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들과도 다르다. 이런 특이한 위치에 존재하는 깨달은 분이 벽지불로써, 중국에는 독각(獨覺), 또는 연각(緣覺)으로 번역되었다. 서양에서는 Slient buddha, Private buddha, Independently Enlightened One등으로 옮긴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들의 거주처는 히말라야의 간다마다나(Gandhamādana)산이라고 한다.
12. 보살(Bodhisatta)은 bodhi(覺, to enlighten)와 sattva (有情, to be)의 합성어이다. 본래 의미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覺有情)’이고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해서 붓다라고 불리기 이전의 상태를 보살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 원음 보디사뜨와를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음역한 것을 다시 보살로 줄여서 부른다. 그리고 이 개념은「본생경(本生經)」에서 금생만을 보살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모든 전생을 다 보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보살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겁(劫)동안 윤회를 반복하며 십바라밀(dasa-parami)을 닦아야 한다. 이 십바라밀에는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출리(出離 nekkhamma) ④ 지혜(智慧 paññā) ⑤ 정진(精進 viriya) ⑥ 인욕(忍辱 khanti) ⑦ 진실(眞實 sacca) ⑧ 결의(決意 adhiṭṭhāna) ⑨ 자애(慈愛 mettā) ⑩ 평온(平穩 upekkhā)이 있다.
13. 디빵까라 붓다(燃燈佛 Dīpaṅkara Buddha)는 4아승지(asaṅkheyya) 10만겁(kappa)전에 고따마 부처님의 전신인 수메다(Sumedha)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성불의 수기(受記)를 내려준 부처님이다.
14. 재생(再生)은 영어 rebirth를 번역한 낱말이다. 영어권에선 rebirth가 빨리어의 jāti(태어남)의 역어로 자리 잡고 있고, 또 상좌부 불교 전통에서도 12연기의 태어남(生)을 재생으로 확고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별무리가 없다. 그러나 rebirth를 우리말로 ‘재생’이라 옮길 경우엔 다소 문제가 따를 수 있다. 불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에서 이해하는 환생이나 재생의 관념과는 다른 불교의 특색을 나타내기에 미흡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서에서는 이 rebirth를 문맥에 따라 윤회(輪廻), 재생(再生), 태어남, 다시 태어남 등으로 옮겼다.
15. 천인(deva)에는 세 종류가 있다.
① 인습적인 천인(sommuti-devā): 왕과 왕비와 왕자들을 말한다.
② 태생적인 천인(upapatti-devā): 사대왕천을 비롯하여 그보다 높은 천인들이다.
③ 청정한 천인(visuddhi-devā): 번뇌가 다한 아라한들이다.
이 가운데서 태생적인 신들을 일반적으로 천인이라 한다. 즉 6가지 욕계천상과 16가지 색계천상과 4가지 무색계 천상에 거주하는 천인을 말한다.
16. 까삘라와뚜(Kapilavatthu)는 부처님의 고향이자 히말라야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까족의 수도이며 까삘라(Kapila) 현인의 충고로 옥까카 왕의 왕자들이 터를 닦은 도시이다. 그래서 까삘라와뚜라고 이름 지었다.(DA.i.259) 부처님 당시에는 숫도다나를 왕으로 한 공화국이었다.
17. 라훌라(Rāhula)는 고따마 부처님의 외아들이다. 아버지가 출가하던 날 태어났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숫도다나 왕의 초청으로 까삘라와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부처님에게 보내서 유산의 승계를 요청했다. 부처님은 침묵한 채 공양을 들고 궁을 떠났다. 라훌라가 쫒아 나서자 부처님은 사리뿌타를 시켜 라훌라를 승가에 입단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아이들의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부처님은 이에 동의했다. 어렸을 때 라훌라는 한줌의 모래를 집어 들고 ‘오늘 내가 이 모래알처럼 많은 가르침을 얻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 라훌라가 일곱 살이었을 때 거짓말을 잘 하는 아들에게 부처님은 교계라훌라암바약림경(敎誡羅糉羅菴婆藥林經 Ambalatthika-Rāhulovāda Sutta)」(M.61)을 설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라훌라가 열여덟 살 때에는, 교계라훌라대경(敎誡羅糉羅大經 Mahā-Rāhulovāda Sutta)(M.62)을 설해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지혜가 무르익었을 때 교계라훌라소경(敎誡羅糉羅小經 Cūla-Rāhulovāda Sutta)(M181)을 설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도록 하였다.
18. 찬나(Channa)는 부처님이 출가할 때 마부였다. 그는 부처님께서 성도한 뒤에 까삘라와뚜를 방문하셨을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그는 부처님과 법에 대한 집착과 자만심이 너무나 강해서 출가의 이익을 체득할 수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입멸직전 유훈으로 찬나에게 최고의 처벌(brahmadaṇḍa)를 내리라고 말씀하셨다. 찬나는 이 처벌을 받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만심과 제멋대로 하던 성질을 버리고 홀로 한거하여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Vin.ii.292)
19. 간띠카라(Ghatīkāra)는 까사빠 부처님(Kasapa Buddha)시대에 살았던 옹기장이로 까사빠 부처님의 열렬한 신도였다. 눈먼 부모를 모시느라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불환과를 얻은 성인이었다. 친구인 젊은 바라문 죠띠빨라에게 까사빠 부처님의 설법을 듣도록 했다. 죠띠빨라는 그 법문에 감동해서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여 까사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죠띠빨라가 고따마 부처님의 전신이고 간띠까라는 죽은 뒤 범천이 되어 이렇게 싯다타 태자가 출가할 때와 성도한 뒤에 고따마 부처님을 찾아온다.(SN.i.60, M.ii,45)
20. 여덟 개의 세간의 선(lokiya-jhãna)이란 ➀ 초선(初禪) ➁ 이선(二禪) ➂ 삼선(三禪) ➃ 사선(四禪) ➄ 공무변처(空無邊處) ➅ 식무변처(識無邊處) ➆ 무소유처(無所有處) ➇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여덟 가지 선정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➀에서 ➃까지의 네 가지 선정이 색계선(色界禪)이고 ➄부터 ➇까지의 4처가 무색계선(無色界禪)이다. 원래 경장에서는 앞의 네 가지 선만을 선이라 불렀으나 뒤에 아비담마와 주석서에서는 확장하여 앞의 네 가지 선은 색계선(色界禪)이라 하고 뒤의 4처는 무색계선(無色界禪)이라고 칭한다.
색계사선(초선부터 제4선까지)과 무색계 사처(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로 이루어진 여덟 가지 세간의 선은 모두 사마타 수행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위빠사나만으로는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해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수행이라서 색계선과 무색계선과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삼매(samādhi)를 닦아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에 들면 그것이 색계 마음이고 이러한 선에 들어서 죽으면 그 선에 따라서 색계천(色界天)인 초선천(初禪天), 이선천(二禪天), 삼선천(三禪天), 사선천(四禪天)에 태어나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삼매(samādhi)를 닦아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들면 그것은 무색계(無色界)의 마음이요 이러한 선에 들어서 죽으면 그 선에 따라서 무색계(無色界)인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등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정은 비록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수행은 되지만, 생사윤회의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을 타파하는 통찰지혜가 없이는 삼계(三界)의 속박에서 벗어나 출세간의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세간의 선(lokiya-jhãna)이라 하는 것이다.
21.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Lalitavistra)은 산스크리트어(梵語)로 '부처님의 유희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전설적인 생애를 묘사한 후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이다. 이 작품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저작을 대승불교 전통에서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대사(大事 Mahāvastu)와 마찬가지로, 이방광대장엄경도 후대의 자료들과 더불어 상당히 오래된 부분도 다소 포함하고 있다.
문체 면에서뿐만 아니라 신성한 존재가 현세에서 활동하는 것을 '유희'나 '놀이'로 보고 있는 점에서도, 힌두교의 푸라나(Purāṇna) - 전설과 그 밖의 민간전승들을 집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적인 문헌류 - 문학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작품 도입부에서는 대승불교 경전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라, 신비한 광채에 둘러싸여 명상에 깊이 잠겨 있던 부처님이 1만 2,000명의 비구와 3만 2,000명의 보살들 앞에서 이 경전의 내용을 설하기 시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특히 부처님의 잉태와 탄생에 관련된 부분에 고대의 기적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들이 풍부하게 첨가되어 있다.
방광대장엄경은 대승불교 전통에서 매우 신성한 경전으로 존중되고 있으며, 불교예술의 여러 분야에 많은 영감을 제공해왔다.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에 있는 부조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308년 서진(西晋)에서 축법호(竺法護)에 의해 한역된 보요경(普曜經)은 이 작품의 한 이본(異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때인 683년에는 디바하라(地婆訶羅)에 의해 방광대장엄경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대희락경(大戱樂經)이라고도 불리며, 부처님의 생애를 기록해 전하는 불전(佛傳) 중에서 가장 상세하다고 하는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도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22. 영어로 holy life로 되어 있는 것을 출세간의 길이라고 번역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출세간이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 길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속적으로는 선정수행(禪定修行)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선정수행은 빨리어로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ā-cariyā)로 brahmā(梵) + cariyā(行 행위)의 합의어다. 이를 중국에서는 범행(梵行이라고 직역했고 다른 말로는 청정범행(淸淨梵行)이라고도 한다. 범천(brahmā)은 거친 욕망을 제거하여 성욕(性慾)이 없는 데서 나온 것으로 그 근본 의미는 성생활을 완전히 여읜 삶이다. 출가해서 독신으로 살면서 순결하게 사는 비구의 삶을 가리키지만, 경전에서는 간혹 8계를 서약하고 평생토록 모든 성관계를 완전히 끊는 재가수행자의 삶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브라흐마(brahmā)는 경전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1) 신을 나타낼 때는 대문자인 Brahmā로 표기하여 색계초선천(色界初禪天)의 세가지 범천(梵天), 즉 범중천(Brahma-pārisajjā)과 범보천(Brahma-purohitā)과 대범천(Mahā-brahmā)을 뜻한다.
(2) 보통명사로 쓰이면 브라마(brahmā)는‘신성함, 거룩함, 고귀함, 최상, 위대함’등의 뜻이 된다. 이 경우는 대부분 합성어로 쓰이는데 본문의 brahma-cariya, 최고의 처벌을 뜻하는 brahmā-daṇḍa,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으로 옮기는 brahmā-vihāra 등이 있다.
23.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사띠(sati)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억(念), 억념(憶念)이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하는 유익한 마음의 작용(心所)이다. 그래서 영역도 mindfulness로 정착되어 가는 추세이다. 이 사띠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미「청정도론」(Vis.IV.49)에서는 사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사띠는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 노력, 통찰지혜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집중[定]으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사띠는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사띠는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세존께서 설말씀하셨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사띠에 의지하고, 사띠는 보호로써 나타난다. 사띠 없이는 분발과 절제함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볼때 사띠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사띠는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사띠는 대상의 주위를 맴돌거나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대상에 바로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다.
(2) 사띠는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한다는 것이다. 대상을 움켜쥐거나 거머쥐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대상에 깊이 들어간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을 정확하게 거머쥐어서 그것을 파지하고 파악하는 심리현상이다.
이렇게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않으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수도 없고, 통찰지혜를 통해 그 대상을 무상. 고. 무아로 유도할 수도 없다.
(3) 사띠는 확립이다. 사띠는 첫째의 대상에 깊이 들어감과 둘째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것(철저하게 거머쥐는)을 근거로, 이제 대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4) 사띠는 마음을 보호한다. 대상에 알아차림이 확립되어 있으면 그 대상을 통해서 나쁜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보호라고 말한다. 마음에 대상을 챙기는 알아차림의 강한 힘에 의해서 마음은 나쁜 표상 등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사띠는 마음을 나쁜 표상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 외에 이 사띠(sati)와 함께 경전에 빈번히 등장하는
삼빠쟌나(sampaJñña)는 ‘충분하고 분명하게 앎’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정지(正知)로 옮겼고 서양에서는 clear comprehension, full awareness등으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이 사띠와 삼빠쟌나는 경전에서 결합된 형태로 자주 나오며 중국에서 정념정지(正念正知)로 옮겼다. 본서는 사띠(sati)를 ‘알아차림’으로 삼빠쟌나(sampaJñña)는 ‘분명한 앎’으로 옮겼다.
24. 겁(劫)이라 번역되는 깝빠(kappa)는 고대 인도에서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이다. 영역은 world cycle, aeon라고 한다. 이 겁에는 ➀ 중간겁(中間劫 antara-kappa) ➁ 아승지겁(阿僧祗劫 asaṅkheyya-kappa) ➂ 대겁(大劫 mahā-kappa)이 있다. 인간의 수명이 열 살에서 8만 4천 년으로 증가하였다가 다시 열 살로 감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중간겁(中間劫)이라 한다. 이 중간겁의 20배에 해당 하는 기간이 아승지겁(阿僧祗劫)이며 이 아승지겁이 넷이 모이면 대겁(大劫)이다. 한 대겁의 기간을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한 유순(由旬)이 되는 큰 바위를 백 년에 한 번씩 비단 옷자락으로 스치고 지나가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비유하셨다.(S15:5/ii.181-82)
25. 라자가하(王舍城 RaJgaha)는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의 라지기리이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는 16개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곳이 마가다와 꼬살라였다. 마가다의 수도가 바로 이 라자가하였으며 꼬살라의 수도는 사왓티였다. 16개 나라는 부처님 말년에 이 두 나라로 통일이 되었고 다시 부처님 열반 후에는 마가다가 인도를 통일하였다.
26. 고상식지경(考想息止經 Vitakka Sandhana Sutta)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쫓기 위한 명상의 방법에 대해 설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살이 의도적으로 마음으로 생각을 짓누르려는 것과 이 경을 빗댄 것이다.
27. 염처경(念處經 (Satipṭṭhāna Sutta)(M10)은 마찌마 니까야에 나오는 경이고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ṭṭhāna Sutta)(D21)은 디가 니까야에 나오는 경으로 미얀마본과 태국본에 의하면 이들 경전은 같은 것이다. 다만 스리랑카본을 저본으로 삼은 영국 PTS본만이 사성제의 설명에 관한 부분에 있어 조금 다를 뿐이다.
28.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번역한 사띠빠따나(satipaṭṭhāna)는 sati(알아차림)+paṭṭhāna(확립)의 합성어로 몸(身), 느낌(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사념처(四念處)라고 옮겼고 영역은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이다.「대념처경」과「청정도론」에는 이것을 모두 4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몸(身 kāya): 14가지
① 들숨날숨(出入息)
② 네 가지 자세
③ 네 가지 분명한 앎
④ 32가지 몸의 형태
⑤ 사대(四大)를 분석함
⑥-⑭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2) 느낌(受 vedanā): 9가지
① 즐거운 느낌 ② 괴로운 느낌 ③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④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⑤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⑥ 육체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⑦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⑧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⑨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3) 마음(心 citta): 16가지
① 탐욕이 있는 마음 ② 탐욕이 없는 마음 ③ 성냄이 있는 마음 ④ 성냄이 없는 마음 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⑥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⑦ 위축된 마음 ⑧ 산만한 마음 ⑨ 커진 마음 ⑩ 커지지 않은 마음 ⑪ 향상된 마음 ⑫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마음 ⑬ 집중된 마음 ⑭ 집중이 안 된 마음 ⑮ 해자유로워진 마음 ⑯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
(4) 마음의 대상(法 dhamma): 5가지
①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파악함
②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를 파악함
③ 감각장소(十二處)를 파악함
④ 깨달음의 7 가지 요소(七覺支)를 파악함
⑤ 사성제(四聖諦)를 파악함
29. 마라(Māra)는 초기경과 주석서들을 통해 크게 세 문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악함이 의인화 혹은 상징화된 존재로서의 마라이고, 하나는 천신으로서의 마라이며, 또 하나는 세속적인 모든 존재로서의 마라이다.
➀ 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는 그래서 빠삐만(波旬 Pāpiman)으로 불리는데 사악한 자, 악마(惡魔)라는 뜻이다. 또 나무찌(Namuci)라고도 불리는데 해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이다.
➁ 신으로서의 마라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이다. 타화자재천은 욕계(欲界)의 최고 높은 천상이다. 그래서 그는 중생들이 욕계를 못 벗어나도록 방해한다고 한다. 이런 마라는 범천(梵天)이나 인드라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졌고 군대를 가지고 있다.
➂ 그리고 경에 따라서는 세속적인 모든 존재 즉 열반이 아닌 모든 것은 마라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응부』에서는 오온(五蘊)을 마라라고도 하는 등 마라는 참으로 다양한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세속적인 모든 것은 마라의 영역에 속는 것으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수다원 이상의 성자가 되기 전에는 항상 마라의 감시영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런저런 것을 다 포함하여 다섯 가지로 마라를 분류하는데 그것은 ➀ 신으로서의 마라 ➁ 번뇌로서의 마라 ➂ 오온으로서의 마라 ④ 업으로서의 마라 ⑤ 죽음으로서의 마라이다.
30. 윤회(輪廻)의 원어는 삼사라(saṃsāra)로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보통 round of rebirth라고 한다. 주석서에서 5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이 윤회라고 정의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고,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沒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그래서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 설하는 윤회설과는 구분 지어야 한다. 힌두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아뜨만(自我)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전변하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 rebirth)이기 때문이다.
윤회는 쌍윳타 니까야(S15:13)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등 경전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은 법구경(Dhp.153-154)의 오도송에서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라고 윤회가 종식된 데에 대한 감회를 밝히고 계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고 그 중에서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vikā)’이라고 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시작과 끝을 알 수없는 생사윤회의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로 대별되는 모든 번뇌들을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인 갈애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인 열반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인 팔정도를 설하셨다.
31. 번뇌(煩惱)로 옮긴 낄레사(kilesa)는 그 자체가 더러워져 있으면서 그것과 관계된 마음요소들을 더럽히기 때문에 오염원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도 이러한 낄레사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 defilement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이 낄레사는 마음속의 더러운 것이 외부로 누출되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아사와(漏 āsava)라고도 한다. 낄레사에는 다음의 10가지가 있다.
➀ 탐욕(lobha) ➁ 성냄(dosa) ➂ 어리석음(moha) ④ 자만(māna) ⑤ 사견(diṭṭhi) ⑥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⑦ 해태(thīna) ⑧ 들뜸(uddhacca) ⑨ 양심없음(ahiri) ⑩ 수치심없음(anotta)
32. 여기서 혜안(慧眼)은 영어의 knowleage and vision인데 이를 직역하면 지혜와 눈을 말한다. 이때의 지혜는 일반적인 앎이나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불교의 지혜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술어다. 그리고 vision도 단순한 눈, 혹은 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바른 믿음, 확고한 견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빨리어 경전에서는 이 둘을 냐나-다싸나(ñāṇa-dassana)로 함께 나타나고 중국에서는 지견(智見)으로 옮겼다.
33.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옮긴 짜까와띠(cakka-vatti)는 고대 인도의 이상적 제왕으로 이 왕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하늘의 차륜(車輪)이 나타나고, 왕은 그 선도 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대주(四大洲)를 평정한다고 여기는 데서 이 이름이 생겼다. 불전에는 이 왕이 윤보(輪寶)·백상보(白象寶)·감마보(紺馬寶) 등의 칠보(七寶)를 가지고 있으며, 또 부처님과 같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갖추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34. 32상(三十二相)은 부처님과 전륜성왕만이 갖추고 있는 훌륭한 신체적 특성이다.『디가 니까야, 대전기경(大傳記經)(D14)과 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D30) 등에 나타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⑴ 비구들이여, 여기 대인은 발바닥이 편평하다. 비구들이여, 대인의 발바닥이 편평한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⑵ 다시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발바닥에 바퀴(輪)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 바퀴에는 천 개의 바퀴살과 테와 중심부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발바닥에 바퀴(輪)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 바퀴에 천 개의 바퀴살과 테와 중심부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춘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⑶ 속눈썹이 길다. …
⑷ 손가락이 길다. …
⑸ 손과 발이 부드럽고 섬세하다. …
⑹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마다 얇은 막이 있다. …
⑺ 발꿈치가 발의 가운데 있다. …
⑻ 장딴지가 사슴 장딴지와 같다. …
⑼ 꼿꼿이 서서 굽히지 않고도 두 손바닥으로 두 무릎을 만지고 문지를 수 있다. …
⑽ 음경이 감추어진 것이 마치 말과 같다. …
⑾ 몸이 황금색이어서 자마금(紫磨金)과 같다. …
⑿ 살과 피부가 부드러워서 더러운 것이 몸에 붙지 않는다. …
⒀ 각각의 털구멍마다 하나의 털만 나있다. …
⒁ 몸의 털이 위로 향해 있고 푸르고 검은 색이며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있다. …
⒂ 몸이 넓고 곧다. …
(16) 몸의 일곱 군데가 풍만하다. …
(17) 윗몸이 커서 마치 사자와 같다. …
(18) 어깨가 잘 뭉쳐져 있다. …
(19) 니그로다 나무처럼 몸 모양이 둥글게 균형이 잡혔는데, 신장과 두 팔을 벌린 길이가 같다.
(20) 등이 편평하고 곧다. …
(21) 섬세한 미각을 가졌다. …
(22) 턱이 사자와 같다. …
(23) 이가 40개다. …
(24) 이가 고르다. …
(25) 이가 성글지 않다. …
(26) 이가 아주 희다. …
(27) 혀가 아주 길다. …
(28) 범천의 목소리를 가져 가릉빈가 새 소리와 같다.
(29) 눈동자가 검푸르다. …
(30) 속눈썹이 소와 같다. …
(31) 두 눈썹 사이에 털이 나서, 희고 가느다란 솜을 닮았다.
(32) 다시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정수리에 육계가 솟았다. 비구들이여, 대인은 정수리에 육계가 솟았다는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이러한 32상(三十二相)은 디가 니까야, 삼십이상경에서 설명하듯이 부처님이 갖추신 지와 덕과 자비 등을 몸의 모습 32가지로 형상화하여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대인(大人)으로 번역한 마하싸따(Maha-satta)는 maha(大)와 satta(有情)의 합성어로 특히 대승불교 경전에서 보살의 미칭으로 자주 언급되는 술어이다. 중국에서는 마하살(摩訶薩), 대사(大士)라고도 번역되었고 영어로는 Great Being이다.
35. 출입식념(出入息念)이라 번역한 아나빠나사띠(anāpānasati)는 ana(들숨)+pana(날숨)+sati(알아차림)의 합성어로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해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수식관(數息觀), 안반념(安念般)이라고도 한다.
이 수행법은 위빠사나도 되고 사마타수행도 된다.
마하시 사야도에 의해 계발된 순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코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고,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풍대(風大)를 주 대상으로 삼아서 수행을 한다. 청정도론(Vis.VⅢ.145~244)에서는 마찌마 니까야의 출입식념경(M118)에 준해서 출입식념을 16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36. 네 가지 선을 경전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초선(初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의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선(二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이 가라앉고 희열(喜 pīty)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삼선(三禪)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樂 sukha)도 사라지고 평온(捨 upekkhā)이 완성된다. 물론 이 4 가지 대상에서 마음이 한곳에 집중된 상태(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 즉 집중(定 samādhi)은 다 있다. 이를 도표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